2016. 6. 25. 20:11ㆍ일반/생물·과학과생각
<44>空과 0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미부여-
-인도서 나와 세계적으로 발전-
소승불교가 자신만의 대각을 강조하는데 비해 대승불교에서는 나보다 남을 먼저 구제하겠다는 이타행(利他行)을 내세운 보살사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 맨 먼저 ‘모두 공이다(一切皆空)’가 반야경에 등장한다. 이때 공(空)의 생각이 철학화된다. 그것을 대성한 사람은 용수(龍樹)보살이며 그의 저서 <중론(中論)>이 잘 알려져 있다.
‘연기’를 공의 입장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공(空)사상이 불교를 인도종교에서 세계종교로 비약시켰다. 그것은 마치 수학에 있어서의 ‘영(0)’의 개념이 인도에서 발견되어 아라비아를 통해 서구에 전해짐으로써 수학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온 것과 같다. 고대 수학은 문명이 있는 곳에서 발달되었다.
중국에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 … 百, 千, 万이라는 숫자가 있는 것처럼 바빌로니아, 이집트, 희랍, 인도… 각 문명권마다 고유의 숫자가 있었다. 이것이 영(0)이 발견됨으로써 1, 2, 3…8, 9, 0 열 개의 숫자로 통일되어 수학은 저마다의 문명권을 벗어나 세계수학으로 비약하고 오늘날 과학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같은 인도에서 나온 철학으로써 공(空)의 사상과 수학의 영(零)이 함께 세계로 비약한 것이다.
공과 영의 공통점은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데 있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 즉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는 철학적인 신념이 있어야 할 것이다. 1, 2, 3…과 같은 것은 한 개의 돌멩이, 두 개의 사과, 세 사람과 같은 구체적인 갯수로 생각되는 개념이다. 몇 개로 구성된 물체의 모임에서 수를 추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명권에 따라서 발음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지닌 수의 개념이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뜻에서 1, 2, 3…과 같이 물건의 갯수를 나타내는 숫자를 자연수라고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수로서 받아 들인 데는 ‘없는 것이 있다’는 의지적인 순수사유를 통해야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후 수의 세계는 자연수의 틀을 벗어나 크게 발전해 갔다. 1과 2사이에도 수가 있다.
즉 ½, ⅓…과 같은 분수가 나오고 복잡한 원주를 π와 같은 수도 나온 것이다. 0이 있음으로써 1, 2, 3…에 대해서 반대되는 -1, -2, -3…과 같은 음수도 나오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필요한 수를 만들어 냈다. 지금까지 설명한 수는 실수로써 모두가 수직선상에 나열되어 있다.
불교는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는다. 동시에 보이지 않지만 현실생활을 지배하는 마음 세계를 중시한다.
일단 공(空)의 철학은 중심에 두게 되면 그것에서 파생하는 물질과 마음의 세계를 하나의 눈으로 보는 관점에 서게 된다. 유식론(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 마음의 세계, 인식의 방법을 정밀하게 파헤친 불교철학이 나온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수학에서도 0의 발견은 그후 보이지 않는 수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곧 복소수 세계의 등장이다. 복소수는 √-1을 단위로 하며 제곱을 하면 -1이 되는 수이다. 즉 (√-1)²=-1, 이때 √-1=ⅰ로 표시한다. 이것은 실수선상에 있지 않는 수이다. 그래서 √-1을 단위로 하는 또 하나의 수를 나타내는 선이 필요해졌다.
수직선과 0에서 수직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수를 나타내는 선과 합해서 생긴 평면을 좌표평면이라고 한다.
i는 보통 수와는 달리 크기가 없다. 따라서 i를 곱해서 만든 수를 허수(虛數)라고 한다. 실수에 대한 가짜의 수라는 뜻을 품고 있다.
상식적으로 2i와 3i를 보면 3i가 큰 것 같은데 허수 세계에서는 비교한다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그러면서 대단한 의미를 지니며 요즘 수학에서는 핵심적인 기능 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마음세계의 일이 물리적인 양과는 달리 비교할 수 없으나 마음가짐이 현실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과도 같다.
백의관음(白衣觀音)은 말없이
말씀하시고
남순동자(南巡童子)는
듣지 않고 들었네.
병 위 푸른
버들가지는 언제나 여름이고
바위 앞
푸른 대나무는 어디서나 봄일세.
- 관음찬
백의관음무설설(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
병상녹양삼제하(甁上綠楊三際夏)
암전취죽시방춘(巖前翠竹十方春)
하늘에 떠가는 구름은 석가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 소식이요,
아침 이슬에 젖은 바위는 유마가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소식입니다.
화단 가득 피어있는 꽃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덕산의 방망이이며,
그것들이 토해내는 향기는 귀청이 떨어지는 임제의 고함
소리입니다.
악!(大喝一聲)
보지 않아도 보는 것이요, 듣지 않아도 듣는 것이며,
느끼지 못해도 느끼고 있는 것이요, 알지 못해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보려 하고, 들으려 하고, 느끼려 하고, 알려 하기 때문에
이미 갖추어져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가만히 비춰 보십시오.
과거·현재·미래가 다만 눈앞의 이 일(주먹을 들어 보임)이요,
시방(十方)이 그저 눈앞의 이것(손바닥을 펴 보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다른 일이 없습니다. 본래 무심하고 청정한 이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늘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언제나 푸르른 여름이요, 어디서나 신선한 봄입니다.
- 몽지님
삶이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뱀이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듯이
사람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영혼의 성장을 위해
마음의 껍질을 벗어야만 합니다.
지나간 일을 이제 던져 버리십시오.
비록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을 초대한 삶에 충실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의 삶 말입니다.
덧없이 늙지 않고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 한스 크루파 《마음의 여행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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