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무엇이고 법성은 무엇인가?

2016. 6. 25. 20:3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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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무엇이고 법성은 무엇인가?


 


1. 오늘부터는 의상조사 ‘법성게’, ‘화엄일승법계도’ 라고 하는, 의상조사 ‘법성게’에 대해서 말씀드릴까합니다. 이 ‘법성게’는 ‘화엄경’의 사상을 함축시켜놓은 210자로 신라시대 의상스님이 이렇게 함축시켜놓은 경전인데요, ‘화엄경’이라고 하면, 보통 어떻게, 이제 우리가 보통 ‘오십여판’ 같은 데서는 중국에서 만든 그곳에서는 경전을 정리하면서 어떻게 정리를 했었냐 하면은, 처음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자마자, 얻자마자, 그 깨달음에 그 온전한 깨달음의 가르침,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설을 했


 


다고 그럽니다. 그야말로 깨달음의 경지 자체를 그대로 설한 거죠. 그렇다보니까 중생들이 알아듣지를 못했다고 그럽니다. 그 이해를 못했다. 그래가지고 이제 안되겠구나 해서 다시 쉬운 것부터 방편설법으로 아주 쉬운 가르침부터 ‘아함경니까야’ 같은 아주 쉬운 가르침부터 하나, 하나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합니다. 그 깨달음을 얻자마자 바로 법을 설했던 그 깨달음의 세계, 잔해증해의 세계라 그러는데, 스스로 어떤 내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법을 설한, 가감 없이, 방편 없


 


이 그대로 그냥 설했던 그 가르침을 ‘화엄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화엄경’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설파해놓았다라고 할 정도의 아주, 그 뭐랄까, 대승불교경전의 어떤 최고봉에 있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 마지막에 다시금 이제 화엄의 사상을 근기가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다시 설하게 됐다, 이렇게 설하는데요, 그 정도로 이제 ‘화엄경’은 대승불교경전에서도 가장 그야말로 꽃 중에 꽃이고, 아주 그야말로 꽃으로 장엄되어있는 아주 그 아름다운


 


그런 경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인 의식으로는 어찌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우리들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써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각오를 하고 들어야 되요. 내가, 아! 이 ‘법성게’를 한 번 내가 머리로 잘 이해를 해봐야 되겠다, 뭐 어느 정도는 머리로 이해는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길잡이가 되어있는, 뭐 그런 법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저 또한 뭐 어느 정도 그렇게 할 것인데, 그것이 다 라고 생각하면 이제 그것은 오산이


 


단 말이에요. 그니까 듣기는 듣되, 듣기는 듣되 머리로 알음알이로 헤아려서, 내가 지금 ‘법성게’에 대해서, 화엄사상에 대해서 듣는 이 가르침이 ‘화엄경’의 전부구나! 부처님가르침의 핵심이구나! 야! 나도 이 정도는 이해하고 있구나! 이렇게 하면 벌써 팔만사천에 어긋난다. 이건 전혀 부처님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하면 이 진리라는 것은, 이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머릿속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들을, 이제 우리는 ‘식’이라 그럽니다. ‘식’, ‘인식되어지는 것’, ‘알음알이’, ‘분별심’ 이렇게 얘기하는데, 알음알이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법은, 진리는 헤아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헤아림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2. 나중에 이제 차차 그 말씀은 조금 더 드리기로 하고요. 그래서 화엄경의 법성게 가르침을 공부는 하지만, 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러면 왜 가르치느냐?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을 왜 가르치느냐? 법을 있는 그대로 설하게 되었을 때, 꽉 막히고 모른단 말이죠. 꽉 막히고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해나갈 수 있는 길은 수많은 선승들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법은 이미 드러나 있다. 완전히 드러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 있다. 말을 하고, 밥을 먹고, 길을 걷고,


 


눈을 뜨고 세상의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귀로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처를 보고 있고, 부처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처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알음알이, 분별심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 생각으로 이해할려고하는, 부처님법을 생각으로 이해할려고하는 그 모든 의도들, 그 시도들, 그런 알음알이 분별심이 법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들을 때도 온전히 그 법문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기존에 배우고 익혀왔


 


던 이 가치관, 고정관념들을 견고히 하는 작업만을 주로는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해서, 들어서 이해되겠다 싶은 것은 쏙 받아들이고, 이건 맞구나 받아들이고, 내가 이해 안 되는 것들은 이건 아니야 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옛날 10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되짚어보면 그 때는 그 글이 있는지도 몰랐던 내용들이 뒤늦게 발견되지 않습니까? 내가 의식이 올라가면 전혀 다른 것들이 귀에 들리고 눈으로 보여지고 하는 것처럼 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알음알이 분별심으로 헤아리려


 


고 해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법을 탁! 듣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모르는, ‘오직 모를 뿐인’, 숭산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모를 뿐인’ 그리고 ‘이 법을 깨닫는 방법도 없다’ 그런단 말이죠. 이 중국선사, 선사스님들에 의하면 법은 언제나 드러나 있는데,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100% 이렇게 드러나 있는 건데 거기에 무슨 방법이 있나? 방법이 있으려면 내가 가야될 길이 있고, 가는 방법이 있을 때 그 방법이 필요한 것인데 저 깨달음이라는 뭔가가 있고 내가 그곳을 향해 달려가


 


면 이 방법이 필요하죠. 자동차로도 갈 수 있고, 버스로도 갈 수 있고 하는, 빠른 길도 있고, 천천히 가는 길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이라는, 진리라는 것은 대상이 아니란 말이죠. 바깥에 있는 어떤 특정한 대상이라서 우리가 달려가서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그런 대상이, 진리가 아니고 언제나 드러나 있고 언제나 우리가 진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대상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의 알음알이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따로 가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럽니다. 그러면 방법이 필요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이 법을 깨닫습니까?


3. 그 옛날에 스님들이 육조스님도, 혜능스님도 그랬고, 마조스님도 그랬고, 이 선사스님들 전부가 했던 얘기가, 수행해서 깨닫는다? 이건 둘로 나누는 법이다! 이법일 뿐이다! 조금 있으면 나오는데 그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 이 둘로 나눠지는 마음가지고는, 알음알이를 가지고는 알음알이를 헤아릴 수 있을 뿐이지 진리를 헤아릴 수는 없다. 방법이 없는데 그럼 무엇이 방법이냐? 그야말로 마음속에 간절한, 내가 이 진리를 공부해봐야 되겠다, 이 진리를 깨달아봐야 되겠다, 이 공부가 뭔지는 모르겠


 


지만 내가 이 공부를 반드시 해야되겠다하는 간절한 발심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이 간절한 발심만 있으면, 우리 공부든, 무엇이든 나를 끌고 갑니다. 그 간절한 발심이. 여러분 생각에는 돈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 같고, 주변상황이 나를 어떻게 좋게 만들어 줄 것 같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결코 그런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생각해왔던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절대적인 무언가는 없습니다. 내가 누구한테 잘 보이면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좀 잘 봐주겠지. 그런 건


 


없단 말이죠. 이 세상에 그건 다 허망한 분별심일 뿐이지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이 세상은, 삶이라는 것은 마음이 드러나는 작용일 뿐이지 바깥에 독자적인 뭔가가 있지 않다. 그래서 마음에, 무엇을 마음에 담고 있는가에 따라서 마음이 나를 끌고 가는 겁니다. 언제든, 무엇이든. 부자가 되게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거고, 돈을 벌게 하는 것도 마음이하는 거고, 깨닫게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 거지 마음 이외의 다른 것이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그 스님들의 표현에 의하면 ‘수행이 나를 깨닫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럽니다. 근데 그러면 수행 열심히 하는 사람은 빨리 깨닫지 않습니까? 그건 수행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열심히 수행을 하기 때문에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겠어요. 간절하니까 절도하고, 참선도하고 뭔가 열심히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간절함의 하나의 방편입니다. 하나의 표현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그 반드시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반드시 특정한 수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절을 해야만 한다거나 좌선만이 올바른 것이라거


 


나 염불만이 훌륭한 수행이라거나 그렇지 않다. 우리 조계종이 왜 조계종이에요? 육조혜능스님이 법을 편 곳이 조계라는 마을입니다. 육조혜능스님이 조계종의 가장, 그야말로 그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그 육조혜능스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이 말이. 수행이라는 건 필요가 없다! 간절한 발심을 통해서 우린 법에 가까이 갈 수가 있다. 수행해서 깨닫는다는 망상을 버려라. 그 전까지 수행해서만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다 비판을 했단 말이죠. 그 조사선이라고 얘기했단 말이죠. 이런 얘기를


 


또 차차 하기로 하고. 그래서 간절한 발심을 가지게 되는데, 즉 법을 보고 진리를 깨닫고 싶은 마음을 가졌어요. 근데 이제 앞으로 법성게 공부를 하다가보면 모릅니다. 머리로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는데 이해가 다가 아니란 말이죠. 확연해지지가 않는단 말이죠.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요. 그럼 모르다보면 모르는 얘기를 자꾸 하는데 나는 계속 모른단 말이죠. 근데 안다, 안다. 야! 재밌구나! 야! 이 법성게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이렇게 알기시작하면 사실은 작은 공부입니다.


 


그것도 뭐 공부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것이 인연의 씨앗을 심어서 그것이 나중에는 결국에는 꽉 막히는 그 공부가 되니까. 그러나 그 공부가 전부가 아니고, 여러분들이 이제 안심을 시키는 거예요. 이게 너무 어려워도, 이해가 안 되어도, 그것에 막혀가지고 답답해서 난 도저히 모르니까 법문 못 듣겠다 하지 말고, 꽉 막혀서 아무것도 모를 때, 그 때가 공부가 잘되고 있는 때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알겠구나 할 때는 모를 때란 말이죠. 진짜 알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꽉 막히고 모르겠다 할 때라도 그 때가 공부 잘 되는 때구나 하는 것을 알고, 이제 이 공부를 시작해보겠는데요.


4. 의상스님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상스님이 원효스님과 함께 중국으로 공부를, 불교공부를 하러가죠. 가다가 의상스님은 넘어가시고 원효스님은 다시 해골물을 드시고 되돌아오시지 않습니까? 그러고 의상스님이 중국에 가서 중국 화엄종의 화엄경을 중심으로 법을 펴는 종단인 화엄종의 이조인 지엄스님 문하에서 화엄경을 공부를 했습니다. 8~10년 정도 이렇게 공부를 했는데, 공부를 하는데 아주 뛰어난 제자였다 그래요. 공부를 하고 그야말로 아주, 그 많은 공부를 했는데, 이 꿈에


 


서, 꿈속에서 신인이 나타나서 깨달은 바를 저술해서 남에게 알려라하는 어떤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승께 고했더니, 스승께서, ‘그럼 너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글로 한번 남겨봐라.’ 그래서 스님이 좍 풀어서 쓴 거죠. 쓴 것이 처음에는 요렇게 요약된 것이 아니었다고 해요. 대승장 10권으로 편집했다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조금 방대했겠죠. 그랬더니 나중에 스승님이 이것을 보고는 번잡한 것을 없애고 다시 좀 추려보자 해서 다시 만든 것이 ‘입의승현’이라는 그런 제목으로 또 다시 편집을 했


 


는데, 그것을 다시 가지고 갔더니, 지엄스님, 스승님과 의상스님 두 분이서 부처님 전에 가서 부처님 전에 기도를 드리고 이 글을 올리면서, 불을 태우면서 이것을 태울테니 여기서 쭉정이가 될 만한 번거로운 어떤 글들은 전부 다 타버려도 좋고, 여기서 타지 않고 남아있는 글을 요지로 삼겠다하고 부처님께 기도하고 태웠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이 210자가 타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210자를 가지고 의상스님께서 다시 조합해서 게송으로, 그야말로 만든 것이 바로 이 ‘법성게’라는


 


게송이 만들어진 의미인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뭐 제가 그때 태어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라는 것은 그만큼 방대한 화엄경을 이 열권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을 또 좀 추리고 추려서 다시 만들고, 거기서 또 추리고 추려서 그야말로 핵심 중에 핵심만을, 가장 아주 액기스만을 뽑아낸, 아주 팔만대장경의 어떤 핵심이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 210자를 가지고 의상조사법성게 화엄일승법계도를 만들었더니 이 스승님이 경탄을 하면서 나는


32개의 해인을 그렸는데 그대는 한 개의 해인으로 다하였구나. 그대의 해인은 총체가 되고 내가 만든


 


해인은 별개가 된다라고 아주 찬탄을 하셨다 그럽니다. 그래서 이렇게 210자의 게송으로 화엄경을, 그야말로 핵심만을 설해놓은 법성게가 이제 나왔습니다. 요정도로 줄이고 법성게 본문으로 들어가겠는데요, 아! 여러분들 법요집 있으시죠? 법요집에 의상조사법성게가 나와 있습니다. 참고를 해주시면 되겠고, 참고 안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하루에 많은 양을 나갈 게 아니기 때문에, 탁! 들으면 그냥 아십니다.


5. ‘법성원융무이상’ 이것이 그 첫 번째 게송인데요, 이 부분을 많은 스님들은 그 현시증분이라고 해서 그야말로 깨달음의 증득한 부분을 그대로 현시해놓은, 그야말로 드러내놓은 부분이다라고 합니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까지인데요, 우선 ‘법성원융무이상’부터 보면, 우선 ‘법성’, ‘법성’은 원융해서 ‘무이상’, ‘두 개의 상이 아니다,’ 이 얘긴데요, 이 ‘법성’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되는데요, 이 ‘법성’이 뭔지 알려면 ‘법’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불교


 


에서는 ‘법’이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주로는 씁니다. 첫 번째는 ‘법’이라면 ‘존재’라는 의미로 쓰여요. ‘제법무아’ 이러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있지 않다’ 이렇게 해석이 되죠. ‘삼법인’ 이러면 ‘세 가지 진리의 도장’, 이렇게 쓰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이라는 것은 존재라는 의미로 첫 번째로 쓰이고, 두 번째는 ‘진리’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두두만물 일체만유가 다 법이란 말이죠. 너도 법이고, 나도 법이고, 생물도, 살아있는 존재도 법이고, 눈에 드러나 있는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법이다라


 


고 우린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 뭐 우리말로 하면은 ‘어떤 것’,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거죠. 그래서 이 모든 존재를 법이라고 하고. 또 한 가지 의미는 진리를 법이라고 하는데 이 두 가지는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은 또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드러난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존재입니다. 이 진리가 모든 존재의 모습으로써 그대로 드러나 있단 말이죠. 진리가 죽비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고, 뜰 앞에 잣나무로 드러나 있고, 나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모습으로, 바람의 모습으로,


 


구름의 모습으로, 모든 모습으로, 진리가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불교에서는 ‘세계다’라고 하지 않고 ‘법계다’ 이렇게 부릅니다. 모든 존재의 세계는 그대로 진리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존재는 곧 진리입니다.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이다. ‘모든 법은, 모든 존재는 그것 자체로 실상이다. 그것 자체로 진리의 참모습이다’, 이렇게 설했고, 선에서는 ‘입처개진’이다, ‘내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참된 진리가 드러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우리라는 존재자체가 그대로 진리인줄 알아야한다. 그런데 이 법성은, 다시 말해서 ‘법성’하면 진리의 성품내지는, ‘법성’하면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성품을 얘기합니다. 여러분의 본래적인 근원, 성품, 성품이 뭐냐? 이 삼라만상에 제법에 본래성품이 무엇인가? 너와 나의 근원적인 본래성품이 무엇인가? 참성품이 뭐냐? 진짜가 뭐냐? 이 몸으로 드러난 것은 껍데기이지 않습니까? 인연따라 잠깐 백년도 안되는 세월, 잠깐 우리가 빌려 쓰고 갖다 주는 것밖엔 없지 않습니까? 정신도, 마음도, 느낌도,


 


감정도, 오온이 전부 다 개공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아상법상이 아공법공아라 했단 말이에요. 나도 공하고, 세상도, 이 우주법계도, 전부 다 공하다고 했단 말이죠. 실체가 아니다! 비었다! 그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렇게 이렇게 비었다면 도대체 그 다 비었다면 그 참성품은 뭐냐? 진짜 나의 본 모습은 뭐냐? 이렇게 이제 우리가 질문을 할 때부터 성품이 뭐냐 이렇게 묻고, 그것을 법성이라고 부릅니다. 법성, 이 법성은 뭐 다르게 말한다면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본래면목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뭐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참 나라고도 할 수 있고, 뭐 본지풍광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뭐라고 해도 상관없단 말이죠. 근데 이 선사스님들은 ‘뜰 앞의 잣나무’ 이렇게도 표현을 했어요. 뜰 앞의 잣나무는 하나의 사물이지 않습니까? 나무 하나이니까 사물이지 않습니까? 왜 그 사물을 가지고 진리라고 했느냐? 법성이라고 했느냐? 본질이라고 했느냐? ‘죽비다!’ 이렇게도 표현을 했단 말이죠. ‘바람이부니 시원하구나!’ 이렇게도 얘기했단 말이죠.


6.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뭔가가 아니다. 뭔가 사물로 표현했지만, 사물로 표현한 그 사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의 법성에 내재되어있는 어떤 참성품을 얘기했단 말이죠.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게 그 법성을 얘기했는데, 그러면 그 법성이라는 뭔가가 있구나! 우리가 깨달을 것은 법성이구나! 진리구나! 법이구나!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이걸 선불교에서는 ‘마음이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마음을 깨닫는다. 도를 깨닫는다. 본래면목을 깨닫는다. 이렇게 표현을 했단 말이


 


죠. 그걸 이제 법성이라고 하는데 법성은 우리가 법성을 깨닫는다 이렇게 하니까 성품을 봤느냐? 이런단 말이에요. ‘견성했다’ 이것은 ‘성품을 보았다’. ‘법성을 보았다’ 이 소리입니다. 아! 이렇게 얘기하니까 이제 그야말로, 초기불교에만 그야말로 올인하는, 초기불교주의자라고 제가 부르는데, 초기불교에 너무 사로잡혀있는 사람들 일부는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선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아트만이라는 어떤 실체는 없다고 했는데, 나라는 자아, 실체적인 자아는 없


 


다고 했는데, 참나라는 것은 없다고 했는데, 무아라고 했는데, 어떻게 초기불교에서는 참나가 있다라고 하고 본래면목이 있다고 하느냐? 그래가지고 선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고 까지 얘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 선불교, 그야말로 스님들이 써놓은, 선사들이 써놓은 책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스님들이 다 얘기해놨으니까. 법성이라고 얘기하고, 본래면목이라고 얘기하고, 성품을 보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깨달아야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100%가 전부 다 법성이라고 하면 거기 뭘 하나 붙잡아놓고 이것만이 법성이다라고 할 뭔가가 있겠습니까? 깨닫고 보면 법의 성품을 딱! 얻은 것이 아니고 얻을 바가 없다고 금강경에도 나오잖아요? 본래 얻을 바가 없다! 법은, 한 법도 얻을 바가 없다! 선사스님들도 ‘본래무일물’이랬단 말이에요. 본래 한 물건도 없다. 뭔가가 있어가지고 그것을 내가 붙잡아야 되는 뭐라면 그건 대상일 뿐이죠. 경계일 뿐입니다. 그건 알음알이로 인식되고,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뭔가라면 그것은 참


 


된 진리라고 할 수가 없다. 그건 법성게라는 뭔가가 방편으로 법성이니, 본래면목이니, 참나니 하고 얘긴 했지만, 그 무언가가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체가 있다고 이해하면 그건 그냥 알음알이 분별망상일 뿐입니다. 깨닫고 보면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 우리는 생각을 하면 생각에 끄달려가지 않습니까? 사물을 보면, 대상을 보면 대상에 끄달려 가잖아요? 좋으면 좋다고 해서


 


사로잡히고, 집착하고, 싫으면 싫다고 해서 거부하고 싶고, 밀쳐내고 싶고, 미워하고 이렇게 대상에 끄달려 가지만 탁! 법의 성품을 참성품을 보게되 면, 법을 분명히 알지만 필요할 때 생각을 써먹지만 그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는단 말이죠. 탁! 보면 보는 사람을 본단 말이죠. 좋은지 나쁜지 물어보면, 좋다, 나쁘다 말도 한단 말이죠.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법의 성품은 법의 성품이라고 했지만 이건 우리 알음알이 분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 대상이 아니니까.


7. 그래서 여긴 뭐라고 했냐하면 법성은 원융해서 무이상이다. 원융해서 원융하고, 아주 둥글고 원만해서 아주 융합 융통자재해서 ‘두 가지 상으로 나눌 수가 없다’ 이렇게 했습니다. ‘원’, ‘둥글다’, ‘융’은 ‘화합하다’ 이러는데, 자기속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걸림 없이 아주 통합되고, 둥글고, 융합하고 이런다는 어떤 표현인데요. ‘원’ 하면 ‘가득하고, 크고, 원만하다, 모나지 않고 평등하고 모순이 없다’ 그런 뜻이라고 하고, ‘융’은 ‘융합하다, 화합하다, 통하다, 걸림 없고, 장애 없이 화합하여 통한다’ 이런


 


의미라고 그래요. 원융하다, 융통자재하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단 말이에요. 어디 하나 모난 데 없고,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고, 융섭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원융한 모습이 어떤 것이냐 하면 무이상이다. 두 가지 상이 아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 법성게를 보고도 선사스님들이 그렇게 하셨어요. 의상스님이 이렇게 210자로 탁! 액기스만을 뽑아놓았지만, 이것도 번잡하다. 그냥 법성원융무이상하면 딱! 끝나는데 뭐 이렇게까지 풀어놓아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할 정도로, 이


 


한 마디에 모든 진리가 딱! 함축되어있다고 얘기합니다. 왜 그런가? 법의 성품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아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중생과 깨달은 자가, 부처가 나뉘는 길목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중생들은 세상을 보면 대상을 보고서 언제나 이상으로 봅니다. 두 가지 상으로 본단 말이죠. 근데 깨닫고 나면 두 가지 상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요. 원융하게 본단 말이죠. 이게 이제 이법이라 그래요. 둘로 나누는 법이다, 이랬단 말이죠. 우리 중생들은 두 가지로 봅니다. 긴 게 있으면 그걸 인연으로 해서


 


짧은 게 있단 말이에요. 이걸 딱!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걸 길다! 혹은 짧다! 아니면 죽비다! 뭐 얘길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봐도 우린 그걸 딱! 보고 뭔지 딱! 대번에 알잖아요. 대번에 안다는 말, 마음 자체가 이상입니다. 둘로 나누는 상이란 말이에요. 이것이 깁니까? 짧습니까? 하고 물으면 깁니다라고 대답한단 말이죠. 이것은 길다라는 말자체는 벌써 이법 이예요. 왜냐하면 짧은 거가 있어야 긴 게 있지 않습니까? 전봇대 옆에 가면 짧고 이쑤시개 옆에 가면 긴데, 이걸 가지고 길다라고도 할 수


 


없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데 우린 길다라고 했다라는 그 자체가 벌써 둘로 나뉘는 판단 분별 망상에 속아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 뿐이라는 말이죠. 절에 오니까 좋고, 교회 가니까 좀 그렇다. 그것도 둘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뭔가 개념 지어졌다 하면은 둘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둘로, 셋으로, 넷으로, 다 쪼개진단 말이죠. 이걸 보고 컵이다! 이 안에 물이 담겼다! 그렇게 하면 여기 물이 담겼다라고 알려면 알음알이, 분별심, 인식으로, 의식으로 알려면 물과 물 아닌 것을 보고 분별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잖


 


아요. 분별이라는 게 뭡니까? 나눌 ‘분’자, ‘나누어서 구별한다’ 이게 분별 아니겠어요? 둘로 나누는 마음, 이렇게 둘로 나누는 마음이 바로 분별심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어요. 옳고 그런 게 있고, 선악이 있고, 대소가 있고, 길고 짧은 게 있고, 잘난 게 있고, 못난 게 있고, 모든 대상을 볼 때, 모든 대상을 볼 때,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대상을 본단 말이요. 해석해서 본단 말입니다. 둘로 나누어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막는 유일한 하나다. 유일한 분별망상이다.


8. 이 분별망상만 없으면 우린 그 자리에서 부처를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뭘 보든 그것을 부처로 보고, 무슨 소릴 듣던 그 소리에서 부처를 들을 수 있고, 언제나 부처를 볼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오랜 세월, 오랜 억겁을 이어오면서 가져왔던 그 둘로 나누는 마음, 분별심 때문입니다. 그러니 둘로 나누기만하면 벌써 진리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 둘로 나눴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둘로 나누면 좋다, 나쁘다가 있다. 그러면 좋다, 나쁘다가 있으니까 좋은 것에 집착하고, 내껄로


 


만들려고 하고, 싫은 것은 미워하고 밀쳐내려고 하고, 거부할려고 하고, 싫은 것이 자꾸 가까이 오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탐심을 일으키고 좋아하는 것을 내껄로 더 가질려고 탐심을 일으키고,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려고 진심을 일으킨단 말이죠. 근데 이렇게 좋다, 나쁘다라는 둘로 나누는, 쪼개는 마음 자체가 벌써 치심이라는 말이예요. 어리석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망상분별이란 말이죠. 이게 탐진치, 삼독입니다. 그니까 탐심은 치심에서, 둘로 나누는 치심에서 좋은 걸 집착


 


할려고. 탐심! 싫은 걸 밀쳐낼려고하는 데서 진심이 나온다. 그 이거 하나가 뭐이겠습니다? 둘로 나누는 이 하나에서 탐진치, 삼독이 나온단 말이에요. 부처님께서는 초기불교에서 열반이 뭐냐? 해탈이 뭐냐? 탐진치, 삼독이 소멸된 상태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죠. 이 탐진치, 삼독이 나온 것이 바로 둘로 나누는 이법으로 나누는, 이분법으로 나누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좋은 걸로, 나쁜 걸로 나누니까 좋은 것에 집착해서 더 가지려고 집착하고, 더 가지려고 집착하는데 더 가져지지 않으니까 괴롭고, 내


 


껄로 만들고 싶은데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내껄로 만들고 싶고 내사람으로 만들고 싶은데, 내께 되지 않으니까 괴롭고 화가 나고 고통이 생긴단 말이죠. 괴로움이 생긴다. 싫은 거랑 함께 있기 싫은데 자꾸 그 싫은 것과 함께해야 되고, 싫은 사람과 함께 있어야 되고, 싫은 게 밀쳐내지지가 않고 자꾸 내 인생에 온단 말이에요. 병도 오고, 괴로운 일도 생기고, 나한테 욕하는 사람도 생기고, 자식들도 말도 안듣고, 성적도 안좋은 성적 가져오고, 남편도 뭐 별로 돈도 안벌어다 주고, 나한테 잘 해주


 


지도 않고, 그런 좋아하지 않는 일이 자꾸 나에게 온단 말이에요. 거부하고 싶은데 자꾸 온단 말이죠. 그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이 둘로 나누는 마음이고 둘로 나누는 데서 오는, 좋은데 더 잡고 싶은데 잡지 못하는 마음, 밀쳐내고 싶은데 밀쳐내지지 않으니까 괴로운 마음, 이 두 가지가 괴로움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더 붙잡고 더 애착하고 더 가지려고, 가지려고, 가지려고 하는 마음, 이것이 실체면 가져도 되는데 실체가 아닌데도 이 실체인줄 착각하고 가지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9. 그러면 이제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 둘로 나누지 마라는 여기에 벌써 법이 다 나와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둘로 나누는 마음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잖아요. 그러니까 별로 맘에 안드는 사람이 와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면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고 좀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와서 얘기하면 더 귀담아 듣고, 그런단 말이죠. 꼬마아이가 하는 말도 그 안에 진리가 담길 수 있는데 귀담아 듣지 않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언제나 들어있는 진리를 우리식대로 해석해


 


서 듣기 때문에 진리를 언제나 보지 못하는 겁니다. 내안에 있는 해석 속에만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머릿속에 생각 속에 이 삶을 사는 거지 진짜 생생한 이 눈앞에 드러나 있는 이 생생한 삶을 살지 않는단 말이죠. 생각 속을 살아 왔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그러니까 A라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내 생각으로 해석해서 분별한 그 사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에요. 법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람의 법성


 


은 그 어떤 둘로도 나뉘어질 수가 없어요. 좋다라고도 할 수 없고, 싫다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어떤 일도, 내가 사업이 부도가 났든 뭔 일이 생겼든,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서울대를 못 갔든, 좋은 대학을 못 갔든, 내가 심지어는 교통사고가 났든, 그것은 진리인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근데 우린 둘로 나누니깐 이건 좋은 일이다, 싫은 일이다라고 해석하니깐 괴로움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초기


 


암진단을 받았어요.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말기가 아니고 초기 때 딱! 봤으니까 하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재수가 없을려니까 하필이면 왜 암이 나에게 왔느냐 괴로워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니까 암이라는 그 자체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우린 모릅니다. 예전에 보면은 2기 암을 발견했던 분이 그 치료하고 나서, 한 십년 전에 2기암을 치료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는데, 더 먹는 것 조심하고 술, 담배 안하고, 더 아주 행복


 


하게 사신단 말이죠. 그니까 술 먹는 재미가 없으니까 이 분이 할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맘공부에 재미를 들이신거예요. 뭘 해도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니까 뭔가 재밌는 게 없나? 술 먹는 것 말고. 재밌는 거 없나 하다가 찾은 게 맘공부 하는 걸 찾은 거죠. 그러니까 암 걸렸다는 사실 그 자체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제법실상으로 왔다. 입처개진으로 왔다. 그것 자체가 진리의 모습으로써 우리에게 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별망상이 억울하다, 괴롭다, 왜 나


 


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게 진리로써 온 건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는데도 우린 마땅히 분별한단 말이에요. 나쁘다하고. 그러니까 괴로운 거죠. 괴롭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나중에 가면 진실이 드러날텐데. 그것 때문에 나는 더 건강하게 오래살 수도 있는데. 더 지혜로운 부처님법을 공부하게 될 수도 있는데.


10. 불교로 들어온 많은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들이 불교에 잘 안 옵니다. 뭐 이렇게 얘기하면 좀, 좀 어패가 있는데, 쉽게 말해서 처음에 불교를 딱 접한 사람은 둘 중에 하납니다. 공부인연이 있는 사람들, 전생에 좀 닦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 그야말로 지혜의 씨앗들이 있는 분들은, 그런 여러분들은 20대, 10대 밖에 안 된 애들 중에 불교에 폭 빠져있는 친구들이 있어요. 폭 빠져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제가 진짜 웃기지도 않는데, 대학 1학년 때 일기장을 펼쳐봤더니, 진짜 유치해서 못봐주겠더라


 


구요. 지금 봐도 제가 야! 뭔 정신으로 이렇게 썼나 싶은데, 거기에 보면 제가 거의 성철스님 이상입니다. 제 일기장에 내 인생에 오직 수행밖에 없다. 이 수행 아니면 나는 안 된다. 오직 수행만이 이랬고, 그날 하루 기도를 빼먹고 수행을 못하잖아요? 그럼 그날 막 자책하는 글이 써 있고. 그 오토바이를 타고 제가 다녔었는데, 한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제가 가서 기도하는 절이 있었습니다. 그 추운 날, 막 벌, 벌, 벌 떨면서 가서 기도하고. 그러면서 진짜 이게 재미난 얘기하다 어쩌다 그런 얘기 한


 


번 쓸 수 있잖아요? 근데 일기장 처음부터 끝까지 내 그런 얘깁니다. 그걸 보고서 제가 야! 진짜 지가 뭘 안다고, 그 조그만 애가 뭘 안다고. 이런! 진짜! 어찌보면, 그 때, 지금 이 글을 보면서 뭔 생각이 드냐면, 완전히, 누가 남들이 나를, 그 때의 나를 봤으면 완전히 정말 꽉 막힌 놈으로 봤겠구나! 제가 봐도 융통성이 없는 겁니다. 그냥 꽉 막혀있는 거라. 이것만이, 이렇게 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꽉 막혀있었다. 그렇게, 그런데 사실은 20대에, 10대인 친구들도, 탁! 부처님 법문을 듣고 솔깃한


 


친구들이 있단 말이에요. 야! 이게 바로 진리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불법을 공부하구요, 또 한 가지는 역경이나, 괴로움이나 정말 비참한 괴로움을 당했을 때,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제 절에 오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주로 수능시험보기 직전에 많이 절에 오십니다.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49제 하려고도 오고. 그래가지고 인연맺는 분들도 많고. 또는 망했거나, 쫄딱 망했거나. 이래가지고 정말, 막 죽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 혹은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


 


워서 찾아오시는 분들. 그런 분들도 계신단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괴로워서 오셨던 분들이 시간이 지나고나서 불법을 공부하고 나서, 탁! 털어내버렸어요. 그 분들이 대부분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 때 그 괴로운 일이 없었다면 나는 이 좋은 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참된 진리로써 나에게 온 건데, 부처님께서 아무리 힌트를 줬단 말이에요. 힌트를 줬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젊은 친구들한테도, 군에 있는 장병들이 법당에 한 번씩 초코파이 먹으로 왔다가 법문들을 기회를 줬는데, 그걸 보


 


고 솔깃해야 되는데 솔깃 안했단 말이죠. 어디 저 산에 산행을 갔는데 거기 절이 있었고, 마침 스님 법문하는 걸 들었는데, 그걸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획! 지나갔단 말이죠. 친구들이랑 절에 한 번 가볼까 했는데, 안갔단 말이에요.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진리는 계속해서 힌트를 던져주고 있는데 본인이 무시하고 살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어떻게든 이 친구를 돕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든 불법을 가르쳐주고 싶은 거죠. 근데 그냥 고스란히 불법을 전해주니까 안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안되겠구나!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이 친구를 도와야겠다 해서 1기암을 보내주거나, 부도를 보내주거나, 안좋은 일을 보내줄 수도 있단 말이죠. 이를테면. 그걸 계기로 딱! 내가 공부해야 되겠구나! 이런 맘을 내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 같은 경우, 그래서 그런 인연이 됐을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그게 좋은 건지 안좋은 건지 어떻게 우리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언제나 우릴 돕기 위한 진리의 목적으로 온 것인데 내가 그렇지않다라고 알음알이 분별심으로 나쁘게 해석했을 뿐인 것이지 그냥 진리로 왔단 말이죠.


11. 그러면 무이상, 둘로 나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실은 고행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벌써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아니라고 패기처분한 거예요. 근데 지금까지 고행을 통해서 깨달을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스님은 무조건 열 시간, 스무 시간, 하루, 이틀씩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있어야지만 깨닫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세요. 야! 고작 한 두 시간 앉아가지고 되겠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


 


니다. 삼천 배, 만 배를 해야지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치열하게 뭔가 수행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탁! 호궤합장으로 금강경을 7독을 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아야지만 된다. 이래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죠. 2500년 전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벌써 그건 아니다. 고행주의는 아니다. 참된 법이 아니다. 이미 벌써 끝난 얘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씀을 여러분들은 이제 ‘중생수기득이익’ 할 겁니다. 자신들의 그릇대로 받아 간단 말이에요. 하늘에선 법비가 내리고 있는데, ‘우보익생만허공’,


 


이 허공에 법비가 내리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감량만큼만 받아갑니다. 내가 마음을 연만큼만 받아갑니다. 내가 부처님가르침에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느냐, 아니면 내 알음알이로 아직까지도 분별하고 있느냐, 내 알음알이로 분별하는 사람은 내가 이해한만큼만 소화됩니다. 이해한만큼만 가져가요. 여러분! 제가 주구장창 계속 지속적으로 작년부터 계속하는 얘긴데, 그 얘기를 여러분들이, 아! 또 그 얘기를 시작했구나! 하고 귀를 딱! 막아요. 맨날 똑같은 얘기 또 시작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건


 


뭐냐 하면 알음알이 분별심으로, 이해로 지금 하고자하는 이 말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건 내가 알음알이로 이해할 뿐입니다. 알음알이로만 이해가 되요. 그러니까 그것은 참된 이해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말은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비법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비법이라고 말해서 뭐 그렇긴 한데, 즉 이것은 바로 수행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마음상태가 탁! 변하는. 여러분! 성품 보는 게 뭐예요? 수많은 스님들이 깨달은 때, 뭡니까? 부처님도 새벽별 반짝하는 걸 보고, 탁! 깨달았고, ‘누


 


구냐?’ 하고 이름 부를 때, ‘예!’ 하다가 탁! 깨닫고, 벽돌을 닦다가 깨닫고, ‘뜰 앞에 잣나무다’ 했는데 깨닫고, 누가 수행하다 깨달았다는 사람 봤습니까? 자살하고 있다가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12. 어떤 경계, 경계에서, 딱! 깨닫는단 말이죠.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은요, 의식이 갑자기 그 순간, 탁! 뒤바뀌는 거예요. 알음알이가, 딱! 멈춰지면서. 알음알이로 해석하면서 들으면 안 된단 말이죠. 즉 내가 이 얘기를, 아! 그 얘기? 나, 아는 거야! 이렇게 들으면 벌써 그 공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숭산스님께서는 ‘오직 모를 뿐’ 하고 들으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다 아는 얘긴데, 제가 또 해야 되는데, 이걸 오늘은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보란 말이죠. 아까


 


말씀드렸어요. 이상으로 나눈단 말입니다. 법성원융무이상인데도 불구하고, 둘로 나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둘로 나눈단 말이에요. 좋은 것 싫은 것 나눈단 말이에요. 좋은 건 더 집착해서 내껄로 만들려고 하니까 괴로움이 생겨요. 싫은 건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은데 안 밀쳐지니까 화가 난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간단합니다. 무이상을, 둘로 나누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둘로 나누지 않음을 실천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실천되겠어요?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해석


 


하고 분별하지 않고, 좋은 거라고 해서 더 집착해서 사로잡히지 않고, 빠져있지 않고, 그걸 붙잡으려 애쓰지 않고, 애착하고 집착해서 내껄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으면 되지않습니까? 싫은 것이 왔더라도 그것이 싫은지 안 싫은지 우린 알 수가 없잖아요. 모를 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진짜 나를 도우려고 왔는지 안도우려고 왔는지 우린 알 수 없단 말이죠. 그 ‘모른다’ 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교만하게 내가 다 알아. 나는 법을 알아, 나는 삶을 알아. 안다는 생각을 가지는 건 교만한 겁니


 


다. ‘모른다’ 라는 마음으로 싫은 경계가 왔더라도 싫다고 해석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밀쳐내려고 하지 않고, 버리려고 하지 않고, 화내지 않는단 말이죠. 그건 뭐겠습니까?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처음에 일어나는 마음, 둘로 나누는 마음, 좋다고 집착하려고 하는 마음, 싫다고 거부하려고하는 마음, 이 두 가지를 탁! 멈춰버리는 겁니다. 둘로 나누는 애초의 그 싹을 딱!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 나쁘다 분별자체를 하지 않고 보는 겁니다. 그건 뭐겠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얘깁


 


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얘깁니다. 수용한다는 얘기예요.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허용한다라는 말은 해석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 말은요. 제가 그래서 요즘에 수용해라 받아들여라하니까 어떤 분들이, 아! 이걸 내가 이렇게 받아들여야 되겠구나. 보통 받아들일 때는 뭐 이렇게 막 손을 내밀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행동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허용하는 건 어때요? 허용하는 거는? 허용하는 건 뭐 손을 내밀어서 받는 게 아니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그냥 가만있으면 그


 


게 허용입니다. 이 허용을 얘기합니다. 허용을. 수용이라는 건. 수용하라니까 막 허용하려고 막 애쓴단 말이에요. 수용하려고 애쓴단 말이에요. 애쓰는 건 공부가 아닙니다. 이공부가 아니에요. 공부는 애써서 하는 건 공부가 아닙니다. 무위법이라 그러잖아요. 진리는 무위법이다. 물론 애쓰는 방편도 필요합니다. 처음에 공부할 때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애쓰는 방편도 필요한데, 진짜 공부는 애쓰는 게 아니다. 여러분! 좋다고 생각해서 좋은 것 붙잡으려는 것은 애쓰는 거죠. 유위법입니


 


다. 작의적인 거예요. 싫다고 해서 싫다고 해석하고 밀쳐내려고 하는 마음도 애쓰는 겁니다. 힘이 들어요. 힘 드는 일입니다. 근데 이 무위법은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은 좋다고 할 것도 없고 싫다고 해석할 것도 없어요. 일단 해석 안 해도 되니까 좋습니다. 여러분! 제 법문을 들을 때 한마디도 놓치지 말아야지 귀를 쫑긋해서 막 온 신경을 기울여들으면 오히려 잘 안 들려요. 그냥 생각하고, 해석하지 않고 그냥 탁! 놓고 듣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법을 들을 때 자동적


 


으로 머릿속으로 해석하는 게 작동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 그 얘기가 그 얘기구나! 아 그 얘기가 화엄경에 나오는 무슨 얘기겠구나! 아! 그 얘기가 지분에 나오는 무슨 얘기겠구나! 이렇게 해석을 한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석을 하면은 그 얘기가 그 얘기로밖에 안들립니다. 근데 그 얘기는 그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 이해는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13. 예를 들어, 양자물리학이나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요 공이라는 것을 세포를 쪼개고 쪼개면 여기 안에 더 이상 어떤 알갱이라는 건 없다. 그런식으로만 딱!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하냐면, 아! 그것이 공이구나. 아하! 실제 알갱이가 없는 그것이 공이구나. 이렇게 이해를 제한한단 말이에요. 공이란 이해는 그것에 한정된 게 아닙니다. 굳이 이해를 시키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방편도 쓴 거지 그게 공의 진짜이름이라고, 진짜해석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단 말이죠. 그


 


게 진짜 공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해로써 아! 이건 이것이구나 해석하면은 그걸 뛰어넘는 이해를 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걸 내 알음알이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래서 어떤 경계가 왔을 때 이걸 해보는 겁니다. 여러분이 수행자라면, 수행자이려고한다면,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이 불법은 둘로 나누지 않는 법입니다. 무분별. 분별, 차별하지마라. 분별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어요? 왜 분별하지 맙니까? 공이니까, 텅 빈 허공, 공한 거니까, 분별할 게 없으니까 이무소득고다.


 


본래 얻을 바가 없으니까. 한 법도 얻을 바가 없는데 거기서 뭘 붙잡으려고 둘로 나누겠습니까? 붙잡겠다하면 붙잡는 내가 있고 붙잡은 대상이 있잖아요? 대상이 있고 내가 있으니까 둘로 나누는 겁니다. 내가 뭘 봤다. 이래도 보는 내가 있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구나! 둘로 나누는 겁니다. 생각을 움직였다하면 둘로 나누는 거예요. 과거를 떠올린다! 이것 둘로 나누는 겁니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다는 것, 둘로 나누는 거잖습니까? 과거는 없습니다. 생각 속에서만 과거가 있어요. 생각 속에서만 시간


 


이라는 것이 있을 뿐이지 본래 시간은 없습니다. 망상을 일으켰을 때만 허망한 시간을 우리가 창조해내는 것 일뿐이지. 그냥 지금 이 자리밖에 없어요. 지금 이 자리 이것밖에 없단 말이죠. 현각스님같은 분은 그냥 오직 이 하나밖에 없다. 이 한 개의 법밖에 없다, 이랬단 말이죠. 이 하나밖에 없다. 불성, 법성, 자성불, 본래면목, 이러니까 거기에 뭔가가 있나보다 하고 그걸 잡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표현을 안하고, ‘이거다!’ 이랬단 말이에요. 이거다! 이 하나밖에 없다, 이랬단 말이에요.


 


이 한 법밖에 없다. 이 하나의 마음밖에 없다, 이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원효스님은 ‘일심’이라고 해서 ‘한 마음이다’ 이렇게도 했고, 저 한마음선원에서는 또 ‘한 마음이다’ 이렇게 하던데, 그냥 ‘한마음이다’ 이러면 아! 마음에 뭔가가 아! 이 안에 하나의 마음이 있구나! 또 이렇게 생각하니까 제일 좋은 게,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좋은 게 선사스님들이 했던 방편입니다. 그냥 ‘이거다’ 하는 거예요. 이거다! 이 하나다! 온 우주가 그야말로 둘이 아닌 하나란 말이에요. 꿈속에서 보면은 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나, 먹는 거나, 말하는 거나, 다 다른 겁니까? 다 똑같은 꿈이지. 똑같은 꿈이지. 꿈속에서 말한들, 듣는들, 먹는들, 바깥에 나무가 있든, 비행기를 타고 어딜 가든, 그 둘입니까? 그냥 내 꿈속에서 일어난 하나이지. 한 마음, 일심이지. 그 하나밖에 없는 거지 둘로 나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다 똑같은 하나지. 그러니까 불교에서도 보는 것도 이거고, 듣는 것도 이거고, 말하는 것도 이거고, 뭐든지 이것밖에 없다. 이 법밖에 없다. 이 진리밖에 없다. 우리는 둘로 쪼갤래야 쪼갤 수가 없다. 그렇게 표현을 했단


 


말이죠. 둘로 나눈 마음은 벌써 다 이것은 우리가 중생을 연습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속에 중생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수행은 치열한, 뭐 수행, 참선 뭐 이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한다는 자체는 내가 벌써 그 법을 향해 마음을, 간절히 마음을 내고 있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 거니까. 좌선하고 마음을 관찰할 때 어떻게 하면 이게 공부가 되느냐. 마음을 관찰할 때 어떻게 하면 되느냐? 분별하지 않고 어떤 것도 붙잡지 않고, 무념이라 그랬단 말이죠. 무념. 무주,


 


무상 이랬단 말이에요. 생각을 일으키지도 않고, 무주,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야아! 불성을 찾아야 되니까 불성만 찾으면 되겠다하고 마음내면 벌써 그건 불성에 머무는 겁니다. 무주, 어디에도 머물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무상, 어떤 상도 일으킬게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아무런 상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비춰보는, 그렇게 했을 때 공부가된단말이죠.


14. 근데 그것만이 공부다 생각하면 그건 벌써 둘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그것만이 공부가 아닙니다. 삶 속에서 언제나 참선입니다. 삶 그자체가 참선입니다. 누가 나한테 욕했어요. 그 순간이 참선하는 순간입니다. 이 욕한 것을 저놈이 나를 무시했구나, 욕했구나. 니가 나이가 몇인데 나한테 욕을 했지? 쟤가 나를 뭘로 봤기에 저러지? 이건 벌써 둘로 셋으로 나누는 마음들을 계속 조작하는 겁니다. 그냥 소리가 났을 뿐인데 거기에 내가 화를 내도 되고 안내도 되고 그건 중립적인 하나의 상황인데


 


거기다대고 내가 해석하고 분별함으로써 내가 끄달려 가서 괴로워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누가 나한테 욕하는 그 순간, 공부의 순간이란 말이에요. 그냥 허용하는 겁니다.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냥. 그건 그 사람 사정이지. 이 세상에 있는 60억 인구가운데 한 명이 나를 욕한다는 게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면 안됩니까? 그래도 되죠. 상대방이 나를 욕하고 판단하는 건 그 사람 맘이지 내 맘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것까지 우리가 통제를 합니까? 내 맘도 내가 통제를 못하는데. 그


 


사람 맘을 어떻게 내가 통제를 하겠어요? 내 입도 내가 통제 못 하잖아요? 그래서 할 말, 안 할 말, 다 하지 않습니까? 할 생각, 안 할 생각, 다하고. 좌선하려고 생각을 통제 하려고 딱! 앉아있어도 안되잖아요. 그럼 남들이 나를 욕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통제를 하겠습니까? 거기에 시비 거는 내 마음을 문제 삼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시비 거는 내 마음이 문제인거지 나한테 시비 거는 그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이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없단 말이에요. 거기에 내가 반응하


 


는 내가 문제죠. 내가. 내가 반응을 하는 건 왜 반응하겠어요? 저 새파랗게, 머리 새까만 놈이 나한테 덤비는 구나! 이렇게 반응한단 말이에요. 분별한단 말이에요. 나이가 많다, 적다. 너다, 나다. 이게 욕이다, 칭찬이다. 이렇게 다 둘로 나누는 이상으로 나누는 맘입니다. 이 이상이라는 건 곧 천차만별로 나뉘는 세 개,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로 끊임없이 쪼개지는 맘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욕을 듣고 나서 분별하는 그 맘속에서는 벌써 얼마나 많은 게 쪼개집니까? 너다, 나다 나뉘고, 욕이다, 칭찬


 


이다라는 분별에서부터 너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적으니에서 부터 시작해서 온갖 둘로 쪼개는 마음들이 망상으로 나를 비집고 들어온단 말이죠. 그니까 나를 아주 꼼짝달싹 못하게 한단 말이에요. 그 어떤 경우엔 그 욕하나 얻어먹고선 몇 날 몇 일을 괴로워합니다. 몇 박 몇 일을 괴로워합니다. 괴로워하다가 몇 박 몇 일 후에 한 생각 딱! 돌이켜보니까 쯧! 야아! 걔가 뭔데 그 말 한 마디에 내가 몇 날 몇 일을 괴로워했나하고 놓여난단 말이죠. 누군가가 나한테 욕했을 때 거기에 반응한다라는 것은,


 


뭘 의미하냐면, 상대방에게 내가 힘을 실어준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 너는 힘 있는 사람이야! 너는 나를 휘두를 만큼! 너는 나를 휘정거리게 할 만큼 힘 있는 사람이야 하고 딱 힘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반응해서 괴로워하잖아요. 근데 그 사람이 힘없는 사람이면 우리 반응합니까? 어디 바보천치나 뭐 꼬마애들이 하는 얘기에 우린 그리 반응 안 한단 말이에요. 저 사람은 원래가 그냥 맨날 하는 게 욕인 바보들이 있어요. 정신 반쯤 나가서 아무나보면 막 욕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


 


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나한테 욕했다고 해서 우린 화내지 않습니다. TV에서 욕이 나왔다고 해서 그 욕 듣고 TV에 있는 그 사람한테 가서 막 때리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욕 그 자체에 우린 반응하지 않습니다. 반응할 수도 있고 반응안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반응한 게 문제지. 반응함으로써 그 상대방에게 내 힘의 기득권을, 내 힘을 그 사람에게 줘버린 게, 그건 내가 준거예요. 그 사람이 원래 힘을 가졌던 게 아니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에 대한 주도권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을 순 없습니


 


다. 내가 그 힘을 그 주도권을 그 사람에게 줬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의 말에 휘둘릴 뿐이지. 그럼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욕을 듣고 그 어떤 비난을 받고 하더라도, 음식을 차려놨는데 그걸 안 받으면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안 받을 뿐이다. 안 받으면 내 것이 아니다. 안 받는다는 것이 그게 바로 분별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겁니다. 내가 반응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둘로 나눠서 좋다 나쁘다 반응하고, 어느 것 선택하고 그러지 않겠다는 것.


15. 이와 같이 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허용하기만하면, 해석하고 분별하지 않고 허용하기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허용하기만하면 아침부터 허용하는 순간동안은 계속해서 내가 고요해집니다. 고요해집니다. 원융자재해집니다. 누구와도 싸우고 시비 붙으려고 하지 않아요. 누구랑 싸우고 시비 붙으려하고 하겠습니까? 원융해서 둘로 나누지 않는 마음이고 ‘제법부동본래적’ 이라 했단 말이죠. 제법, 일체 모든 법은 부동, 움직인 적이 없어요. 본래부터 적적하고 고요했단 말입니


 


다. 본래부터 적적하고 고요했어요, 제법은 본래가. 남들이 나한테 욕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언제나 고요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욕했지만, 그건 그 사람이 욕한 걸 내가 반응하니까 망상으로 반응하니까 망상으로 괴로울 뿐인 겁니다. 환상으로 반응하고 환상으로 괴로울 뿐입니다. 환상으로 괴로움이라고 해석하고 환상으로 괴로움 속에 빠져서 환상으로 괴로워하는 것뿐입니다. 내 망념, 내 분별심속에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속에 스스로 빠진거죠. 한데 제법은 본래 부동합니다. 움직인 바가 없어


 


요. 본래부터 적적하고 고요합니다. 상대가 나한테 욕을 했어도 사실은 욕한 게 아닙니다. 고요합니다. 내가 욕에 반응했을 뿐이지. 그건 그 사람이 욕한 게 아니에요. 내가 욕에 반응해서 본래 적적한데 내가 거기에 반응하니까 그게 문제가 되었던 것일 뿐이지. 우리가 둘로 나누는 마음만 없으면 언제나 그 자리가 부동해서 본래적입니다. 움직이는 바도 없고 그 자리가 이미 적적한, 고요한, 단 한 번도 고요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마음을 고요히 거기


 


에 반응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것을 대응할 수 있다면,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면, 의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뜻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분별심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 다 하면서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요, 그게 바로 고요한 명상입니다. 이걸 한 번 허용해보세요. 내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모든 걸 허용해보겠다. 일어나는 걸 허용해보는 거예요. 그럼 우린 한 시간 동안, 우린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허용의 힘이 커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냐면, 다 족족 허용하는 겁니다. 그냥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하는 겁니다. 완전히 가슴이 확 열리게 되요. 어느 것 하나 닫아놓지 않으니까. 닫아놓지 않으니까. 진리는 언제나 노크하고 있는데, 노크하는데 내가 선택분별해가지고 요것만 받아들이고 저 건 밀쳐내는 습관을 계속가지고 있었는데, 허용하는 순간 이 모든 게 다 들어오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해석하지 않고 다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순간 갑자기 닫혔던 문이 확 열리면서 진리 그 자


 


체가 그냥 확! 확인이 될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건 이 허용하는 순간 일어나는 일이지 뭐 가부좌 틀고 앉아가지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란 말이죠. 내가 이 습관적인 분별심을 어느 순간 탁! 놓아서 온전히 허용이 되느냐? 허용한다는 말은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했어요. 분별하지 않는 그 의식에 딱! 일치가 되느냐? 거기에 따라 순간이 드러나는 거지 다른 것이 아니다.


16. 그래서 이번 주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에서 우리가 공부해야 될 것은, 제법은 본래 원융해서 둘로 나눌 게 없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자꾸 쪼개니까, 쪼개는 걸 하지마라. 너다, 나다해서 ‘이 만큼은 내편, 이 사람은 내편 아니야’ 이것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한테 도움 되는 사람, 도움 안 되는 사람, 이것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꾸 둘로 나누는 마음만 탁! 내려놓으면 본래 제법은 부동해서 본래 적이라는 본래 고요했음이 드러나서, 아! 밥을 먹


 


어도 고요하고 풀 한 포기 속에 지극한 고요와 평화가 있구나! 노을을 한 번 바라볼 때 깊은 고요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풀 한 포기가 일상적이지 않게 느껴진단 말이에요.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커피가 이렇게 올라가는, 그 향 올라가는 그 연기 하나가 아주 깊은 본래적이라는 게 이것이구나. 분별하지 않고 봤을 때, 묘한 어떤 깊은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제가 어느 날 문득 도시에서 누굴 만나기로해서 커피숍에 앉아서 커피를 한잔 시켜놨어요. 창문햇살이 좍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너무 늦게 오는 거라. 너무 늦게 오겠다고 전화가 왔어요. 한참 기다려야 되는 거라.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앉아가지고 커피 잔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 밖에 이렇게 무심하게 밖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 순간, 그 순간, 그 순간 그냥 갑자기 걷고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하나하나가, 그렇게 뭐랄까? 뭔가 모르게 이렇게 달라요. 이 커피에서 올라오는 향, 연기 하나조차 아주 성스럽게 느껴지고, 그것이 뭔가? 아! 선이, 선이 피어오르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 앉아서 좌선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 지


 


금 이 자리가 선이구나! 지금 이 자리가 고요한 자리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이렇게 확연하게 보이고 들리고 다 하지만 거기에 아무런 분별이 없는 그냥 보기만 하는 이 자리가, 바로 이 자리가, 바로 그 고요한 그 자리구나! 히말라야서나 지리산에서 그냥 단풍이 막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바람이 확 불어서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정말 순간! 그냥 그 순간! 그 산중에 아무도 없는, 그 혼자 길을 걷고 있는데, 그 순간 낙엽이 떨어지지만 쨍하는 뭔가가 그 순간 그냥 번쩍하는... 이런 말에 속


 


으면 안됩니다. 이게 그렇다고 해서 저는 쨍 안하던데요 하고 이렇게 얘기할 필요는 없단 말이죠. 이건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 겁니다. 그니까 망상을 피우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냥 보게 됐을 때, 수행할 때, 뭔가가 이렇게 탁! 알아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냥 언제나. 왜냐하면 언제나 진리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는 깨달음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단 말이죠, 언제나. 망상만 피우지 않으면, 둘로 나누지만 않으면. 그래서 무심하게 뭔가를 바라볼 때, 무심하게 산길을 걸을 때, 무


 


심하게 뭔가 노을을 바라볼 때, 너무나도 아름다운 겁니다. 여러분! 평소에는 퇴근길에 평소에 이렇게 노을을 바라봐도 별로 안 아름답잖아요? 일반 일 때는 더 안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행 갔을 때는 어때요? 여행지에 갔을 때, 강원도 속초나 히말라야 여행지에 갔을 때, 떠오르는 해나,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 정말 숨막히게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지에서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일상에서 하는 수많은 망상들이 많이 걷혀져요. 그러고 그 자리에서는 여행자의 목적이 뭡니까? 보


 


는 것 아니에요. 여행자가 왜 여행자예요? 여행지에 있는 새로운 걸 보는 게 여행자잖아요. 여행자의 목적은 그냥 보는 거거든요. 그리고 여행지는 언제나 새롭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새로운 걸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행자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게 선명하고 더욱더 몇 백배 더 아름다운 겁니다. 어렵게, 어렵게 차를 타고 속초에 가서 해 뜨는 걸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속초에 살 때요, 새벽예불을 하면 새벽예불 때 항상 거기에 바닷가에서 해가 뜨는 거예요. 그 자


 


리에. 항상 속초 바닷가에 해가 뜨는 겁니다. 그러니까 별로 한 동안 있다 보니까 뭐 어쩌다 한번 왔을 때에 비해서 뭐 감흥이 별로 적죠. 근데 마음이 고요해질 때는 또 그게 언제나 또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단 말이죠. 그래서 한 생각 탁!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이 선의 자리이고 그 자리가 부동 본래적인 자리가 드러나서 뭘 보더라도 거기서 선을 볼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에서도 놀라운 고요를 만날 수 있고 언제나 여행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언제나 선을 하는, 실천하는 자가


 


될 수가 있고, 언제나 휴가가 될 수가 있고, 하루하루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휴가고 여행지가 될 수가 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