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대한 오해 / 마성스님

2016. 7. 16. 21: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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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에 대한 오해

 


 

 

분개하여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분노(忿怒․憤怒)’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성냄’이라고 한다. 불교도들은 분노라는 말보다 ‘진에(瞋恚)’라는 단어에 더 익숙해져 있다. 진에는 열반을 증득하는데 장애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三毒] 가운데 하나이다. 삼독은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를 말한다. 줄여서 탐(貪)․진(瞋)․치(癡)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수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남아있다면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뜻에 어그러짐에 대하여 성내는 일’이 진에의 참뜻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노여움은 수행에 장애가 됨은 분명하다. 이러한 내면의 노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고 견뎌야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욕(忍辱)’이라고 한다. 인욕이란 자기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에 대하여 노여워하지 않고 참고 견딤. 모욕을 참고 노여움을 일으키지 않음. 참고 견디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 마음을 안정시키고 성내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분노는 내적인가 외적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분노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여 불교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매우 좁은 소견[短見]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이익[私益]이 아닌 공공의 이익[公益]을 위한 분노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공적인 분노는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사실 재가자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하여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바른생활을 통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재가자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한다면, 불교도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불교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파괴하는 불의(不義)가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자행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올바른 불자라면 반드시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것이다.


불의는 모든 사회악(社會惡)의 근원이다. 사회악은 공공의 적일뿐만 아니라 불교의 적이기도 하다.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부처님의 나라, 즉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지구상에는 온갖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도 없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는 기본적인 권리[人權]는 그냥 얻게 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불의에 대한 분노로 인해 진화해 왔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다. 비록 자신의 상관이나 스승이라 할지라도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만일 이들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면,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체 하라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사회의 잘못된 제도나 관행은 계속적으로 고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고위 공무원이 민중을 개나 돼지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신분제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의 발언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국민이 아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과 같은 국토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국가의 체제에 순종하도록 길들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반기를 들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한국불교는 정상이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불교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불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현재의 한국불교는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 답을 찾기 어렵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다. 한국불교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출가자일지라도 수행을 잠시 멈추더라도 불교계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려고 분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권력을 가진 집단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제거하려고 한다. 일부 승려들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한다고 ‘해종언론’이라는 낙인을 찍어 불교언론을 탄압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행위를 보고도 분노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교도라고 말할 수 없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그래도 계속 무임승차할 것인가. 불의에 분노하라


 

마성스님 - 철학박사 팔리문헌연구소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했다. 현재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된 관심 분야는 불교사회사상이다. 현실을 떠난 가르침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쁜 일이 있을때 술을 마신다.
 
축하할 일이 있을때 술을 마신다.
 
친해지기 위해 술을 마신다.
 
고백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리운 사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속이 상할때 술을 마신다.
누군가 보고플 때 술을 마신다.
 
마음이 울적 할 때 술을 마신다.
 
비가 올때면 술을 마신다.
 
피로에 지첬을때 술을 마신다.
 
단합을 위해 술을 마신다.
 
호기심에 술을 마신다. 
 
외로우면 술을 마신다.

마음이 아플때 술을 마신다.
 
화가 날때 술을 마신다.
  
이별의 아픔을 잊기위해 술을 마신다.  
 
반가운이를 만나면 술을 마신다.
  
스트레스 받으면 술을 마신다.
 
 
울고 웃기위해 술을 마신다.



리플 안달고 퍼가기민해서  술을 마신다.

 

술 마시기 위한 이유도 여러가지 웃고 갑시다
ㅋㅋㅋ

전라도의 거시기

 

사랑해! : 거시기혀!

좀 맘에 들지 않어! : 시방 쪼깨 거시기헌디!

죽을래? : 거시기헐래?

밥먹었니? : 거시기혔냐?

안자니? : 거시기안허냐?

널 죽도록 미워해 : 오메(존나) 거시기혀!!!

널 죽도록 사랑해 : 오메(존나) 거시기혀.....

  안녕하세요 : 거시기허신겨라?

안녕히 주무세요 : 거시기허쇼잉

가장심한 욕 : 거시기를 거시기 혀벌랑께!!!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 거시기 혀야 한다!!!

 

 


      제비와 꽃뱀이 모텔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이 제비를 심문했다. "당신 직업이 뭐요?" 제비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직업이요? 상업입니다." "상업? 구체적으로 얘기해" . . . . . "예~~ 고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 경찰은 째려 보면서, "지랄하고 있네~" . . . . 다음은 꽃뱀한테 물었다. "이봐! 아가씨는 직업이 뭐야?" 꽃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저~~~그게?? "그게 뭐?? 말해봐요" "저도 장사하는데요~~" "뭐? 당신도?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꽃뱀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 . . . . . . "작은 구멍가게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