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의 실천/혜거스님

2016. 8. 13. 22: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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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의 실천


정녕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인 각(覺)과 아는 것인 지(知)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명확합니다.
알고는 있으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알 지(知)'요,


아는 것이 실천으로 바로 이어지면 '깨달을 각(覺)'입니다.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라야 아는 것이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아 향상하고, 멋진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는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는가?
이것을 연구해 들어가야 한차원 높아지는 공부가 되고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연구해 들어가지 않으면 불교를 백년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경전에는 아는것과 깨달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유심불행동무심(有心不行同無心) 
유심유행동제불(有心有行同諸佛)

마음이 있지만 행하지 못하면 마음이 없는 것과 같고


마음이 있고 행도 있으면 모든 부처님과 같도다.
마음은 있고 행이 없으면 마음을 먹지않은 무지한 이와 다를 바가 없으며,


 마음이 있고 실천행도 뒤따르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연구하고 실천할 것인가


 


 


나는 불자들에게 세가지 사항을 많이 강조 합니다.

첫째, 1인 1경(經)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을 잘 실천해야 합니다.
한사람이 한 경전을 꾸준히 지니고 읽는것을 의무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한 경전을 꾸준히 읽으면 자연히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고 행복해집니다.
그럼 어떤 경전부터 읽을 것인가?
만약 망설임이 있다면 금강경부터 읽으십시오. 
금강경은 반야(般若), 곧 올바른 소견과 지혜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일도 금강경 한구절 아는것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강경은 중생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제일' 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고통이 무엇이며 왜 생기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불만이 있으니 고통이요,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으니 고통이요, 


미운사람의 그림자만 봐도 기분이 나빠지니 이 또한 고통입니다. 
이세상 어느곳 할것없이 고통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근원을 살펴보면 집착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끊어야 합니다.
성문, 연각,보살은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같이 듣지만 해석은


달리 합니다.
듣고 배우는 사람인 성문(聲聞)은,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구나.


고통을 가지고 살지말자.
집착을 끊어버리고 벗어나자' 하고는 현실의 모든것에 대해 '버리고 떠나고 끊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버리고 끊게 되면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고통이 파생 됩니다.
인연을 잘 비추어보는 연각(緣覺)은, '고통은 집착으로 부터 나온다'는


말을 듣고, '집착도 영원하지가 않다.


오늘은 꽃에 집착하고 내일은 나무에 집착하고,


오늘은 명예를 좇고 내일은 돈을 좇고 있으니...'라면서


성문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무엇이 안된다고 하여 몸부림치지 않게 되므로,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수 있습니다.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보살(菩薩)은, 근본자리를 깨달아서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고통자체가 없습니다.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성문, 연각, 보살은 이와 같이 차이가 납니다.
실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없애야 하는데, 집착을 없애는 방법이 바로


반야(般若)입니다.


그럼 반야를 성취하는 방법을 제시한 경전은 무엇인가?
바로 금강경입니다. 
반야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설한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을 꾸준히 수지독송 하다보면 보살의 무집착(無執着)을 저절로


체득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경전을 읽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금강경부터 공부하고 매일 수지독송 하되, 궁금한 것이 있거나 더 향상하고자


할때는 얼마든지 다른 경전을 공부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둘째, 1일 1선(善)의 실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베풉시다.
이는 하루에 착한일 한가지씩을 꼭 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조그마한 선행일지라도 하루에 한가지는 꼭하는 버릇을 들이십시오.


눈에 띄고 마음이 흐뭇할 정도의 선행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남을 칭찬해주는 말 한마디, 기어 다니는 벌레를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좋은 선행입니다.


 


셋째, 날마다 자기 반조(返照)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은 밖으로만 향하여 사물에 끄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끄달림 속에서 갖가지 번뇌망상을 일으켜 미혹되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반조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연 번뇌가 잦아들게 되고 '나'는 '참된나'로 있게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매일 한 경전을 꼭 수지독송하고, 한가지 선행을 쉬지않고 실천하면서,


날마다 자신을 반조하게 되면 크게 향상할수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머릿속에 딱 지니고 살면,


우리의 업은 억 겁의 업이라 할지라도 얼음 녹듯이 녹아 없어지고,


어떠한 길을 걸어가든 조금도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혜거스님



흐르는 물은 항상 새롭다


중국 선종사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마조 선사가 출가 후 고향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것도 많은 제자들과 함께 그 당시의 명성으로 보아 몇 해 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틱닛한 스님 못지않게 고향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대단했을 터이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고 있는데

마조 선사의 이웃집에 살았던 한 노파가 다가와서는

“나는 대단한 양반이 온 줄 알았는데 청소부 마씨의 아들이 왔구먼!”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마조 선사의 속성이 마씨(馬氏)였는데 그 노파는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마조스님께서는 고향에서 수천리 떨어진 곳에서 교화를 하셨다.

 

★★★★★★

 보통의 사람들은 타인을 보고 평가할때

대부분이 과거 어느시점의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서 말한다.

그 사람의 새롭게 변화된 장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전 유가의 글에도

사람을 3일간 보지 못했으면 3일전의 사람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중생심의 속성이 자기의 허물은 감추고 타인의 허물은 신이나서 얘기를 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공허해 지는 것을 모른다.

항상 새롭게 변하는 것이 세상이고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매일같이 체취를 느낄정도로 가깝고 빠르게 소통하는 이 시대에

더러는 마음에 용기와 희망을 또는 상처와 분노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일정한 지점의 계곡에 흘러가는 물은 모습은 똑같지만 항상 새로운 물이 흐르고 있음이다.

세상만사 그냥 마음에 담지 말고 흐르는 물처럼 흘러보내고 놓아버려야 비로소 편해진다.

편하고 편치 않음은 마음에 담아 두느냐 마음을 비우느냐에 있음이니

언제 어느때든 편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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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 / 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참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닳아 없어질 때에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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