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람을 구속하는 도구

2016. 8. 13. 22: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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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사람을 구속하는 도구



"어록으로 익힌선은 대답이 편리하다,


가끔 언어는 사람을 속이는 도구이다"


                                    


육조사 현웅스님-간화선에 대한 이해<12>


-탁마마당(3)










용성이 묻는 말에 운봉의 答



용성스님이 도봉산 망월사조실로 있었고 운봉스님이 입승을 맡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차 대회에 있었던 진제스님의 말을 가져온다. 하루는 법회가 있는 날이다.






육조사 현웅스님




용성 조실스님께서 법상에 오르셔서 법문하시기를,


“나의 참모습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보지 못함이요, 대대로 내려오는 모든


도인 스님들도 보지 못함이니, 여기에 모인 모든 대중은 어느 곳에서 나를 보려는고?”


하고 멋진 법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답이 없는 가운데 운봉선사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답을 하였습니다.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


이렇게 멋진 답을 하니, 용성선사께서는 아무런 말없이 법상에서 내려와 조실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대목을 가지고 40여 년 전에 산승의 스승이자,


운봉선사의 법제자이신 香谷禪師께서 산승에게 물으시기를,


“ 만약 진제 네가 당시의 용성선사가 되었다면, 운봉선사가 ‘유리독 속에 몸을 감췄다’고


답할 때에 무엇이라 점검하고 법상에서 내려가겠는고?” 하시니 산승이 즉시 답하기를,



“사자가 멋진 답을 하셨습니다.” 하니, 향곡선사께서 매우 기뻐하셨으니,


전광석화와 같은 바른 안목을 갖춘다는 것은 천고에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에 대한 스승과 제자의 안목이 졸 탁 동시에 이루어질 때 점검과 인가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이 간화선 무차 대회에서 보여준 한 토막법문이다 .



다음은 옛 언어를 설명 된 언어로 바꿔 가져 온 것이다.


언어의 옷을 벗겨 내야 위 선문답 글에서 사람의 마음을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석가도 볼 수 없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 나에게 있다.


여러분 중에 나를 본 사람이 있느냐, 한마디 해봐라’



이 말 출처는 옛 조사 어록에 있는 말이다.


석가도 몰랐거든 가섭이 어찌 알 것인가! 가 그것이다.



도를 이해한 사람은 도의 이치를 안 사람이다


하지만 생활 속 경계를 만나 자유롭지 못하다


도를 증득한 사람은 생활속 지혜거 묻어나와


그 행이 자유롭고 그 폭이 넓다. 이것이 이치다


용성은 실상의 본질을 묻고 있다.


“ 실상의 본질“


사람이 알 수가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을 용성이 들고 나온 것이다.


예수교로 말하면 '神의 성질은 사람이 알 일이 아니다' 이다.



알려고 하면 알려고 하는 그것이 본질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어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분열이 없다.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는 자가 서있으면 이미 본질을 떠나 버린다. 실상엔 둘이 없기 때문이다.


아는 자와 알아야 할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묘한 법이다.


둘이 없는 곳은 아는 자와 알아지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신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신은 묘함의 다른 이름이다.



禪門에서는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을 알 때 실상은 뜻을 뒤 집어 쓰고 말로 나?쨈?


뜻을 얻는 이는 말을 듣고 말 아닌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뜻을 몰라도 식정으로 알아 버린 것을


알았다고 한 이들이 많다. 그리고 그걸 종교의 보배로 삼아 버린다.


그러나 실상을 본 사람은 있는데 알 수 없다고 안다.


이 사람은 말을 듣고 알지만 말을 놔두어져 있다. 이는 경험의 일이다.



분명히 있는데 알 수 없다는 경험의 언어가 선의 언어인 但 知 不 會가 곧 그것이다.


견성을 하면 이것을 경험한다.





佛은 佛을 못 본다. 不相見이 그것이다.


“물속에서 물을 갈라놓을 수 없는 것”



접근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석가도 모른다고 하는 말로 전하다.



보리달마 또한 말한다.


양무제는 달마에게 묻는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요?'



달마는 말한다. ‘不 識’ 모른다.


선의 성질 곧 진리의 실상을 보인 말이다.그러나 해석은 자유이다.





萬空의 묻는 말에 전강의 答



두 스님 간에 알 수 없는 실상을 보인 다른 예이다.


만공은 말한다.



석가가 새벽 별 보고 깨달았는데, 전강은 무엇을 보고 깨달았는가?


이 말의 출처 또한 작은 해설을 요한다. 새벽은 밝음이 오기 전의 시간이다.



참선 중에 무명의 어둠이 사라져 가면 본성이 들어나


중생 속에 있는 부처가 드러나면 어두움이 사라진다.


새벽은 그런 것이다 .


깨달음이오는 아침은 그런 것이다.



‘세존은 새벽별 보고 깨달았다. 너는 어떤 별을 보고 깨달았느냐?


석가모니 안이나 용성 안에 있는 것은 석가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것이다.



그런데 본 사람은 말해 보라. 하고 묻고 있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거다.


볼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는 것은 선의 경험을 가져와 봐라. 는 다른 말이다.


그것이 禪문답이다.





용성이 물었을 때 운봉스님이 대답하길 ‘맑은 유리 독 속에 있습니다. 라고 한다.


만공은 묻는다.


‘석가는 새벽 별 보고 깨달았는데 너는 무슨 별을 보고 깨달았느냐’ 하니



전강은 곧 일어나 땅에서 뭔가 찾는 시늉을 한다.


禪의 눈이 죽어가고 있는 곳인가! 살아가고 있는 곳인가! 를 보여주는 갈림길이다.



눈이 있는 자는 본다.


찾는 시늉을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알 수 없을 때 살아난다.


그것을 活 句 ! 살아 있는 선이라 한다.


유리 박스 안에 있다는 말은 가려진 것이 없으니 훤히 보인다는 말이다.


이해하고 나온 禪이다.





이해하는 것은 그 처음은 산 곳에서 나온다, 그러나 본질의 물속으로 젖어 들지 못한다.


멀어져 간다. 궁구 속에는 대하는 것마다 살아 나오지만 유리 박스 안에 있다, 고


아는 것은 처음은 살고 나중은 그 힘이 약해져 간다.



왜냐하면 이해하는 쪽에 서있기 때문이다.


死구와 活구가 잘 드러나는 갈림길의 좋은 예이다.


물속에서 물을 경험 한 자는 물이 묻어 나온다.





그러나 물 밖에서 물을 보는 자는 물에 젖어 있지 않아도 물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禪의 理致를 이해한 종류에 속한다.


운봉의 답은 너 불성이나 내 불성 사이에 가린 것이 없는 ?痼?본다는 말이다.


도를 證得한 智와 아는 知는 다르다.



증득의 智는 지 아래에 밝음이 있다. 아는 知는 밝음이 없다.


도를 이해한 사람은 도의 이치를 안 사람으로 생활 속에 경계를 만나 자유가 적다.



말로 구별 하기는 어렵다.


도를 증득한 사람은 생활 속에 그 지혜가 묻어 나와 그 행이 자유롭고 그 폭이 넓다.



물은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 물이 가지고 있는 성의 이치다.


그 이치는 맞지만 터득한 사람은 물은 아래를 향하기도 하지만 가끔 위로도 오른다.


불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어 위로 올라간다.



물은 정해진 이치가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를 따라가는 이치가 끊어지면 


 생각이 그친다. 그치는 곳에 일어나는 일은 아직 모른다. 


 말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있는 가능성은 있다.



물의 성질을 이해한 사람과 그 성질을 증득한 사람의 차이이다.




실상은 이치에 머물지 않는다. 천명에 닿아 있는 눈은 그렇다. 천명 곧 성품에서


온 지혜는 아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알아야할 것을 알아낸다.


마치 거울과 같다. 8정도가 나오는 곳이다. 정견이 갖추어진 곳이다.



그러나 이치만 아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 아는 것이 제한을 받는다. 행하는 폭이 좁다.




어느 날 법안은 말한다. 그의 제자 원오가 견성하자.


이제야 원오가 참선 할 줄 안다.


견성해야 공부가 시작되는 곳이다.


아는 사람은 다시 자기를 돌아봐 공부를 시작한다.


용성은 운봉의 答에 말없이 나가 버린다.


그러나 뒷사람은 그걸 두고 알았다 말하고 또 서로 인정한다.


그들은 어디에 서 있는 사람들인가!



전강스님이 찾는 시늉을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증득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유리 독에 있다고 보는 것은 이해의 영역에서 온 눈이다.



이해하는 선과 증득한 선은 이렇게 다르다.




아는 것 속에는 여우가 들랑거리고 알 수는 없지만 아는 곳엔 사자가 앉아있다.



벽암록을 보고 익힌 선은 대답하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쪽에 서 있다.


삶은 현실이다.



선의 지혜는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번득인다. 살아 있는 선이다.


가끔 언어는 사람을 속이는 도구이다.



쓰는 사람에 따라 지하수에서 나오는 샘물이 되고


비온 뒤에만 나오는 건수가 되기도 한다.


건수는 쉬이 마르고 깊은 샘물에서 온 물은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시원하다.


참구는 알지만 모르는 곳에서 온다.


결정을 짓지 않는다. 그러나 볼 줄 안다.


금강경은 이것을 정한 바가 없다고 보여주고 있다.




- 현웅스님 





사랑으로 요리하는 내일

 

 

사랑은,
단번에 승부를 내는 복권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차근차근 쌓아가는
적금입니다.

고운 정에다 미운 정까지
이자로 덧붙여 온답니다.
세상이 하도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까
느긋하게 뭔가를 기다리는게
참 바보같이 느껴집니다.


 

식당에 앉아 밥을 주문하고
5분을 채 기다리지 못합니다.
2분도 안되는 간격으로 오는 지하철도
언제나 답답하게만 느껴지고,


월급 차근차근 모아서
결혼하고 집을 사는 사람이
희귀종으로 취급되는 세상...


 


 

 

적금을 붓기보다는 복권에 승부를 걸고,
그나마도 일주일간의 기다림을 참지 못해
또 다시 즉석 복권을 긁어대는 사람들...

 

아무리 바쁜 세상이라지만
사랑은 복권이나 증권처럼
단번에 승부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실증나면 금방 돌아 설 수 있는
그런 사랑 말고,

 

오래오래 계속 될 사랑을 원한다면
차근차근 적금 붓듯이 사랑을 쌓아 가세요.
고운 정은 물론 미운 정까지
이자로 덧붙여 준답니다.

 

- 사랑으로 요리하는 내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