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천당과 지옥

2016. 8. 20. 17: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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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천당과 지옥

유후(留後) 이단원(李端愿)이 달관(達觀) 선사에게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은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달관 선사가 말했다.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이유후가 대답하였다.
“삶이라면 제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달관 선사가 말했다.
“삶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유후가 머뭇거리자 달관 선사가 그의 가슴을 찌르면서 말했다.
“다만 여기에 있을 뿐이거늘 생각으로 무엇을 헤아리는가?”
이유후가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그저 길 가는 것만 탐할 줄 알았지 길을 잘못 든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달관 선사가 말했다.
“인생 백년이 한낱 꿈일 뿐이다.”




이유후가 다시 물었다.
“지옥은 정말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달관 선사가 대답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없음 가운데서 있음을 말씀하셨으니


눈에 허공 꽃이 보이는 것이요,


그대는 있음 가운데 나아가 없음을 찾고 있으니


손으로 물에 비친 달을 건지는 것이다.


우습다! 눈앞에 보이는 지옥을 피하지 않고서


마음 밖에 보이는 천당에 나고자 하는구나.


즐거움과 두려움이 마음에 달려 있고,


선과 악이 경계를 이루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태위(太尉)여, 다만 자기 마음을 깨달으면 저절로 의혹이 없을 것이다.”




이유후가 나아가 말했다.
“마음을 어떻게 깨닫습니까?”
달관 선사가 대답했다.
“선과 악을 모두 생각하지 말라.”
이유후가 다시 물었다.
“생각하지 않은 후에 마음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달관 선사가 말했다.
“태위여, 집으로 돌아가게!”

- 임간록



 
 
 끔찍스럽고 놀라운 것 / 유안진


세종로 퇴계로 을지로 충무로를 지나다니며
세종임금 퇴계선생 을지문덕 충무공......만 길인 줄 알았다가

눈으路
입으路
손으路
발路
귀路코路
내 몸 오대삭신이 다 길이라는 것

사랑으路 미움으路
눈물路 웃음으路
믿음으路 의심으路
길 아닌 것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큰길 골목길 갓길 샛길 굽은 길 곧은 길
길 아닌 길...... 가리지 않고
서로들 서로에게 길이었다는 것.
 
 
 
 
오색 비단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彩雲影裏神仙現) .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手把紅羅扇遮面)
누구나 급히 신선 얼굴을 볼 것이요 (急須著眼看仙人)
신선의 부채는 보지 말아라 (莫看仙人手中扇)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였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가린 부채만 보고 신선봤다고 할것입니까?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 (庭前柏樹子) 니
“마삼근”(麻三斤) 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字)니 하는 것은 다 부채입니다.

부채 !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신선을 보려면 부채에 가려진 그 얼굴을 봐야지,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 성철스님 법문중에서
 





이 도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허상인지,


어떤 것이 생각 아닌 것이고 어떤 것이 생각인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이유후와 같이 사람이 죽으면 운운 하는 질문이


그저 허상, 단지 허망한 생각에 불과할 뿐이란 사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실을, 생각이 아닌 것을 맛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일으키는 생각,


그 허망한 관념을 사실이라 굳게 집착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은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달관 선사는


 ‘삶도 아직 모르거늘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공자의 말로 대답합니다.


아는 것이 병,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란 말과 개념을 배우기 이전에는 삶도 몰랐고 죽음도 몰랐습니다.


삶도 모르고 죽음도 모르기 때문에 삶도 따로 없었고 죽음도 따로 없었습니다.


‘삶도 아직 모르거늘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란 말은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말의 표면적인 뜻만 따라가서 자신은 삶을 안다고 말합니다.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을 떠나서, 별개로 존재하는 삶이란 객관적 실체가


있는 듯 여깁니다. 그래서 그 삶이란 물건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삶 자체인데 이것이 어찌 다른 어느 곳에서 올 수 있겠습니까?


달관 선사는 묻는 이의 가슴을 찔러 보임으로써


삶과 죽음의 출처를 직접 가리켜 보였습니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곧장 가르쳐 주었으나 이유후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다시 지옥이 정말 있느냐 운운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삶과 죽음, 천당과 지옥, 부처와 중생, 너와 나, 선과 악 등등


모든 것이 나온 출처가 바로 가슴을 찌르는 그 자리, 찌를 때마다 감각이 출몰하는


그 텅 빈 곳에 있는 줄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한 분별,


마음 위에 그려진 허상과 생각일 뿐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달관 선사는 선과 악을 모두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도 없고 저런 생각도 없지만,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텅 빈 무엇이 바로 마음입니다. 이것은 생각에 가려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새롭게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유후는


칠통 같은 생각에 푹 빠져서 도무지 빠져나올 줄을 모릅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마음은 어디로 돌아간다니요?


그것이 바로 생각인 줄을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생각 아닌 것이 있기에 생각이 출몰하고, 진실이 있기에 허상이 생멸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타나는 그 자리, 허상이 등장하는 그 자리가 생각 아닌 진실의 자리입니다.


바로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이 자리입니다.

쯧쯧쯧, 또 생각하는군요!




- 몽지님 (몽지와릴라 밴드)에서

세계의 아름다운 호수들








플리트비스 호수 크로아티아






페이토 호수 캐나다





아티틀란 호수 과테말라








로크 로만드 스코틀란드









◈ 가르다 호수 이태리








크레이터 호수 미국 오레곤






마테손 호수 뉴질랜드








블레드 호수 슬로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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