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와 뇌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무아는 통합된 불변의 자아가 아니라 콘서트이다 데이비드 와이즈먼(David Weisman), 잡지 시드(Seed)에서.
시드 편집자: 불교의 많은 핵심교리는 현대 신경의학과 신경과학적 발견들과 상당히 겹친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떻게 해서 뇌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지난 수세기에 걸쳐서 많은 불교도들과 상당히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불교와 신경과학을 검토한 결과, 두 그룹이 서로 겹치는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부정적이다. 어느 종교에나 이런 유(類)의 소식이 있으며, 좀 더 자세히 조사하면 무너질 것이다. 과학적 발견이 어떤 종교의 가르침을 지지한다면, 그 종교 신도들이 세상을 향해서 ‘자신들의 믿음은 실재에 굳건하게 발을 딛고 있다’고 말할 것이며 그들이 엄격한 경험주의자들이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종교 신도들은 과학적 자료들이 자신들의 기존의 종교적 믿음과 어긋날 때, 과학적 데이터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틀리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은 선입관을 배려하지 않는다. 과학은, 최소한 좋은 과학은, 세상을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 때로는 과학적 발견이 종교와 일치하지만, 통상 그렇지 않다.
내 의심에도 불구하고 신경학과 신경과학은 불교사상과 크게 모순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신경과학은 우리가 통합된 것으로 여기는 자아가 환영(幻影)이라고 말한다. 우리 마음은 통합되지 않았으며 ‘존재한다’고조차도 거의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일체감과 제어감은, 사후(事後)조작이며, 쉽게 여러 독립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 소위 마음·자아·영혼은 너무 바뀌고 불확실하기에, 전(前)과학적인 용어로는 마음·자아·영혼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다.
불교도들도 매우 유사한 얘기를 한다. 그들은 자아는 변하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상(無常 impermanence)하고 환영이라고 믿는다. 지각과 믿음 사이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아를 가리키기 위해 아나타(anatta)라는 말을 쓰는데 보통 ‘무아(無我)’라고 번역된다. 사람들은 ‘자아(自我)’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지만, 그 ‘무아’라는 용어는 교묘하게도 자아에게 그런 것은 없다고 상기시킨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명상을 하는 불교도들을 보면, 종교적 가르침과 지각 사이의 단절에 즉각적으로 놀라게 된다. 불교도들이 절에서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자아는 환영이다. 하지만 쇼핑을 하는 불교도들은 우리 모두처럼, ‘통일되어 있고 제어되어 있으며 이 순간과 저 순간 사이에 변하지 않는’ 자아를 느낀다. 사물이 느껴지는 방식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로고쉬(Logosh) 씨의 경우처럼 신경학자들이 일상생활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다.
로고쉬 씨는 37살 때 풍을 맞았다. 무릎수술을 받은 지 한 달 만이었으며, 대수롭지 않은 높은 코레스트롤 수치와 흡연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때로 의학은 그와 같다: 별 이유 없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나는 응급실에 실려 온 그에게서 실어증을 발견했다. 그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지만 한 단어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른쪽 얼굴·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역자주: 좌측 뇌가 망가지면 우측 몸을 쓰지 못한다. 우측 몸이 좌측 뇌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좌측 뇌에는 언어영역인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 있다. 전자는 말을 하는 기능을 후자는 말을 이해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브로카 영역은 파괴되었지만 베르니케 영역이 온전하면, 로고쉬 씨처럼 말은 못하지만 남의 말은 이해하는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다.)
유일한 풍 치료법인 플라즈미노겐 조직활성제를 투여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차도가 없이 중환자실로 갔다. CT 스캔으로 피로 가득 찬 죽은 뇌 조직이 드러났다. 몸이 괴사한 뇌 조직을 흡수함에 따라 CT 스캔 상에 뇌좌반구에 자리잡은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실망스러웠지만 나는 상층부에 있는 코텍스로 위안을 삼았다. 이곳은 피해가 최소였으며 신경세포가 많이 살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실망하고 있었다. 여든 노인이 여생을 실어증이라는 마비증과 함께 보내는 건 비극이지만, 젊은이가 앞으로 수십 년을 벙어리로 사는 건 더 큰 비극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의 경우에는 손상을 입더라도 초기에는 결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낙관주의에 사로잡혀있었으며 결국 그를 치료했다.
다음날 로고쉬 씨는 잠에서 깨어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이 하지 못했으며 겨우 ‘예’ ‘아니오‘ 정도였다. 그러더니 ’물‘ ’고맙습니다‘ ’물론‘ ’나‘라고 말했다. 우리는 결국, 말을 이해는 하지만 거의 말을 못하는 그를 재활센터로 보냈다.
일 년 후 그는 내 사무실로 돌아와 이상한 요청을 했다. 운전면허를 따는데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한 내 추천서가 필요했다. 그는 다리를 약간 절었다. 오른쪽 발이 약간 불안정했다. 그의 목소리는, 단어를 신중히 택하느라 그런 듯, 좀 멈칫거렸다.
우리 언어는 분할할 수 없는 단일체로 보인다. 우리는 단어를 하나 들으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대답하는 데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힘이 들지 않는다. 둘 다 같은 통합된 언어영역의 부분처럼 보인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속는가? 로고쉬 씨는 통합된 언어는 환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겉보기에 통합된 것처럼 보이는 언어는, 사실은 두뇌의 다른 여러 부위들의 작용이다. 그리고 이 부위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고 하는 일을 바꾸고, 받아들이는 부분과 표현하는 부위로 나누어진다.
불교도들이 로고쉬 씨에게 벌어진 일을 얼마나 쉽게 받아들이는지 보라. 무아는 통합된 불변의 자아가 아니다. 그건 콘서트라 해야 더 옳다. 끝없이 감성과 지각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콘서트. 우리 마음은 조각나 있으며 무상하다. 사람들은, 밴드에 변화가 일어나면 밴드의 음악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불교와 신경과학은 모두 같은 견해로 수렴한다: 우리가 느끼는 대로 자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배후에 영원히 상주하는 영혼은 없다. 우리자신에 대한 우리의 언어조차도 믿으면 안 된다. (우리 언어는 무아(無我)를 부정(否定)하라고 요구하나, 무아를 부정하는 것은 고문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불교와 신경과학은 의견의 일치를 본다.
어떻게 해서 불교는 그렇게나 많이 옳을 수 있었을까? 나는 외부자로서(역자주: 비불교도로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불교는 약간이나마 경험주의로 출발한 것 같다. 아마 불교 창시자들은 전(前)과학적이었지만 경험적 데이터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계에 주목했다: 해는 지고, 바람은 들판으로 불고, 벌레는 다른 벌레를 잡아먹는다. 끝없는 변화가 있고, 부품은 교체되고, 무상(無常)이 있다. 그들은 이걸 아니카(anicca)라고 불렸으며 불교의 중심교리에 속한다.
이는 자연계에 관한 한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도들은 이 무상이라는 개념을 수학적 진리나 도덕적 확실성에 적용하지는 않으나, 때로는 영리하게도 자기들 교리에 적용한다. 불교는 천년 동안 일견 모순(역자주: 아(我)와 무아(無我)의 외견상의 모순)으로 보이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로지 비(非)입문자들만이 그 모순을 이상하게 여긴다. 또는, 적어도, 이 모순이 ‘신이 숨을 불어넣어 첫 번째 인간을 만들었다고 문자 그대로 믿는 것’보다 더 이상하다고 여긴다.
초기부터 불교는 세계의 변화하는 속성을 파악하고 부분으로 나누어, 인간의 마음에 적용하였다. 핵심과정은, 자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세상과 인간 사이의 연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계의 일부이며, 자연계의 과정은 동일하게 바위 나무 벌레 그리고 인간에게 적용된다: 아마 이런 유산 위에 세워진 초기불교는, 그냥, 인간을 예외로 칠 여유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불교도들이 단지 우연히 이런 사실을 발견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런 일은 그럴듯하지 않다. 왜 우연한 일이 그들에게 그런 반(反)직관적인 일을 가져다줄까? 또한, 주관적인 종교적 황홀경이 가져오는 진리는 매우 의심스럽다. 먼저, 종교적 황홀경에 들어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걸 보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로, 만약 자아가 환영이라면 명상으로부터 얻는 주관적인 통찰 역시 환영이 아닐까?
나는 불교와 신경과학이 갈라지는 지점을/에 대해서 묵살하거나 얼버무리고 넘어가자는 뜻이 아니다. 어떤 불교 교리들은 우리가 뇌에 대해서 아는 것과 다른 길로 간다. 불교는 뇌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아 환생을 하는 비물질적인 존재를 상정한다. 사람이 사망한 후에 의식은 환생을 한다. 만약 당신이 ‘항상 변하는’ 비물질적인 영혼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비입문자들에게 보이듯이, 그렇게 교활(tricky)하거나 정신 나간 짓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생전의 의식은 정신상태가 바뀜에 따라 같이 바뀐다. 그래서 매 순간은 전 순간의 환생으로 볼 수 있다. 찰랑거리는 물결은 모래의 위치를 바꾼다. 당신들이 선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당신 앞의) 물결은 더 좋은 해변에서 혹은 더 높은 존재의 차원에서 찰랑거릴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물결이 곤충이나 벌레나 기어 다니는 생물들의 기본적인 의식을 제공해야 한다.
문제는 죽은 후 환생하는 비물질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은 심지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반대증거가 있다. 윤회는 심지어 소위 아나타(anatta 무아)라고 불리는 모호하고 무상한 존재가 뇌기능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뇌기능은 일체의 정신적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무리 작은 의식·지각·감정일지라도 뇌기능은 모든 정신적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 당신의 자아 또는 비자아인 모든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뒤에 남는 것이(역자주: 영혼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윤회는 대부분의 불교종파에 있어서 하찮은 교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달라이라마 추종자들은 달라이라마가 긴 계보 상의 스승들의 환생신이라고 믿고 그를 달라이라마로 선택했다.
왜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전통은 ‘영원한 독립적인 영혼’이라는 잘못된 사상을 채택했을까? 변화에 주목하는 것은 불교만의 전통이 아니다. 같은 종류의 사상이 서양사상사에도 나타난다. 전(前)소크라테스 시기의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하기를 “그 어느 것도 버티지 못하고 변화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관찰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그 사상은 일신교적인 종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핵심적인 자연스러운 진리로 추앙받지도 못했다. 대신에 순수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승리했다. 아마도 그게 더 신성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사상은 전혀 단조롭거나 단순하지 않지만, 유일신교는 자연주의를 자신들과 자기들의 영혼의 개념에 적용하지 않는 단순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 뛰어난 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되풀이해서 인간 종(種)을 예외적이고 다른 세상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고, 인간 영혼을 자연보다 위에 존재하는 또는 자연을 초월하는 것으로 격상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우리는 오늘날 그 후유증을 본다. 유대그리스도 전통이 과학과 상충할 때, 사람들은 과학이 인류에게 부여된 창조에 있어서의 중심적인, 하지만 짐작에 지나지 않는, 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 인간이 우주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위치를 점한 듯이 보이는, 은하수의 가장자리에 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 종(種)은 원숭이 같은 조상들로부터 왔다. 이 조상들 중 많은 이들이, 십중팔구, 가장 소중한 “인간적인” 정서와 (성격상의) 특성을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뇌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뇌는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마음은 영혼이 아니다. 인간이 예외라는 생각은 점점 더 헛된 공상(空想 fantasy)으로 보인다. 불교는 그 헛된 공상을 부드럽게 부인함으로써 (인간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실수와 원죄를 덜 저지르며, 이것은 불교의 자랑이다.
종교가 신경과학이 주는 교훈을 얼마나 잘 영혼에 적용할 수 있을까? 로고쉬 씨는, 뇌의 영역이 마음을 바꾸는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종교에 도전한다. ‘비물질적인 영혼’이라는 개념으로는 실어증에 관련된 뇌졸증조차 해명하지 못한다. 유일신교가 데이터에 맞추어 자기들 사상을 바꿀까. 시도나 할까. 아마 그렇지 않으리라. 인간은 예외라는 경직된 사상이 교리 속에 단단하게 틀어박혀 있다.
불교도들이 신경과학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윤회사상을 한물간 것으로 폐기하도록 허용할까? 이것은 달라이라마와 그 추종자들이 ‘달라이라마는 옛 스승들의 상징적인 환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정하는 것과 유사한 일이다. 이런 일 역시 일어날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불교의 첫걸음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신경과학과 신경학과 관련이 없이, 1969년에 달라이라마는 “달라이라마라는 자리는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리이며, 곧 쓸모가 없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무상과 교체되는 부품이라는 사상은 끝없는 변화를 내포하며 그래서 달라이라마의 ‘자기가 죽기 전에 손수 다음 달라이라마를 지정할지도 모른다’는 근자(近者)의 발언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불교의 성공은 세상의 무상을 인간과 인간의 영혼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 종교를 고대의 낡음으로부터 현대의 새로움으로 인도했다. 인상적인 먼 거리이다. 무상(無常) 또는 상변(常變)이라는 사상에 대한 공포심이 없이, 그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역자주: <반야심경>이 가르치듯이 반야반라밀다에 즉 반야지혜에 의지하면 공포심이 없어진다.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원본은 2011.3.9일에 발표되었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그리움님들~~ 살짝 미치면 인생이 즐겁다죠? 오늘은 용기를 내어 님에게 살짝 미친 모습을 보여 드립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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