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이 전생 기억 못하는 이유|…… 강병균 교수

2016. 8. 7. 12: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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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이 전생 기억 못하는 이유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일인동시다신다심환생(一人同時多身多心還生)





- 전통적인 윤회·환생이론에 의하면, 삶이란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끝없는 쳇바퀴돌리기이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단 일회적인 삶이라면 삶은 놀라운 축복이다. 결코 되풀이 할 수 없는 신비롭고 찬란한 경험이다.

- 제가 다음 생에 쥐로 태어나면 어떻게 하지요? 걱정마라, 쥐로 태어날 정도로 나쁜 업을 지은 놈은 전생을 기억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주는 진실로 평등하다!

- 왜, 어떤 영향력 있는 종교도 대놓고 과학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거의 없을까? “이거 우리 생각보다 낫군! 우주는 우리 예언자가 말한 것보다 더 웅대하고, 더 오묘하고, 더 우아하단 말이야”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 우주에는 거의 아무 정보도 들어있지 않다. 우리 인간이 지각하는 많은 정보 내용은 우리의 주관적 관점에서 나온 결과이다 <맥스 테그마크>

- 광인은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광인이라는 것을 안다 <살바도르 달리>


한반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유아론(有我論)이라는 유령이.

 

  
▲ 살바도르 달리

I. 분업 환생

보살은 환생해도 과거의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은 자기가 환생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자가 (처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환생이론으로 교육을 받으면 비슷한 전생을 기억해낸다.)

어떤 사람이 뛰어난 철학과 사상을 창조하여 사회에 퍼뜨리면, 사회가 그 철학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런 철학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난다.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난다. 이 사람들은 개조(開祖 創始者)의 환생이라 볼 수 있다. 충실히 개조(開祖)의 철학과 사상을 실천하고 퍼뜨리는 역할을 하니 환생신(還生身)이라 해도 좋다.

한 사람이 세트로 또는 팩키지(package)로 환생을 하는 것보다는, 즉 하나의 생명체로 환생을 하는 것보다는, 부분 부분으로 환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소위 분업의 효용이다. 분업을 하면, 한 사람이 핀을 하나 만드는 시간에 수백 개나 만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분업환생(分業還生)이 더 효과적일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유전자의 기능이다. 문화유전자(meme 밈)가 특히 그러하다. 생체유전자는 둘(男女)이 분업을 하지만, 문화유전자는 수백만, 수천만, 수억, 수십억이 분업을 한다.

우리는 과거의 수작업(手作業)적인 윤회이론을 버릴 때가 되었다. 한 사람이 단 하나의 환생신을 만든다는 비효율적인, ‘환생신 생산이론’을 버릴 때가 되었다.

이제는 분업에 의한 대량환생제도(MRSBP mass reincarnation system by part)를 인정하고 도입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의 진화와 발전은 가속도를 받을 것이다. 질병극복과 수명연장이 가능해질 것이며,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대한 이해가 비약적으로 증진될 것이다. 한 인간이 하나의 정체성 안에서,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모든 요소를 발전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분해하여 요소별로 나누어 발전시키는 것이 인류에 더 이익일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동차부품처럼 각 장기를 교체할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향상될 것인가! 이렇게 못하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의학이 그 정도로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부분적으로는 가능하여, 심장, 콩팥, 간 등 신체장기 이식수술을 한다. 줄기세포연구와 일부 생물학 실험 등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나, 사랑하는 이와 자신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도덕이나 윤리는 고통 해결책을 거부할 힘이 없다. 

마음도 부분 부분 이식수술을 할 수 있다면 혁명적인 성취이리라. 사람들은 마음이나 의식을 ‘신비로운 또는 분석이 불가능한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은 단지 여러 기능의 모임일 뿐이며, 이것들을 떠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부분적으로 망가지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기억력, 추리력, 연산력, 미술, 색깔인식, 원근감, 음악, 얼굴인식, 목소리인식 등의 기능은 선별적으로 고장나고 사라질 수 있다. (뇌의 특정부분에 손상을 입어 안면실인증(顔面失認症)에 걸리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가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거울에 비친 자기모습도 알아보지 못한다. 놀랍게도 목소리 식별 등 다른 기능들은 정상이지만, 족집게로 집어낸 듯 안면인식 기능만 사라진다.)

아마 먼 훗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지금 장기이식을 하듯이 이런 기능 이식수술이 가능하리라. 지금 미국에는 ‘미래 의학’의 혜택을 보고자 스스로 냉동인간이 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뇌만 냉동저장하기도 한다. 이쪽이 훨씬 더 싸다. 전신은 7만 불이고 뇌만은 4만 불이다.) 미래에 생물학의 발달로 영생이 가능해지면 이들은 비로소 동면에서 깨어나 영생을 얻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두뇌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뇌 속에 음악을 저장하고 원할 때 재생하는 것이나, 스마트폰에 저장하고 듣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전화번호 등의 정보를 뇌 속에 기억하고 기억해내 사용하는 것이나, 스마트폰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이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를 바가 없다. 단지 기억기관이 ‘우리 몸 안에 있느냐’ 아니면 ‘우리 몸 밖에 있느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전 수행자들이 부처님 등 그리운 이나 사모하는 이의 모습을 보려면, 수년간 강도 높은 관상명상(觀想冥想)을 해야 했지만, 요즘 속인들은 그냥 사진을 스마트폰에 저장했다 꺼내보면 된다. 화질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목소리가 동반된 동영상까지 가능하다! 스마트폰에 앱(app)을 까는 것은, 우리 뇌에 주산, 암산, 언어, 수학, 운전 등의 기능을 까는 것과 동일하다. 지금은 이런 기능들을 지루하고 힘든 오랜 학습을 통해 습득하지만, 미래에는 돈만 내면 ‘스마트폰에 앱을 구입해 깔 듯이’ 순식간에 뇌 속에 설치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부유한 국가에서는 국민복지차원에서 일부 생체앱(bio-app)은 모든 신생아들에게 기본으로 제공할 수 있다. 자기공명(磁氣共鳴)기술로 주입할 수도 있고, 크기가 극적으로 작아진다면 간단한 내시경수술이나 주사기로 주입할 수도 있다.

옛날 종교인들은 우주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정보를 모아놓은 원초적인 정보저장소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명상, 기도, 계시, 접신 등의 신비스러운 방법을 통해서) 그곳에 접속하면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상상했다. 너무 지나치게 나간 자들은 심지어 자기가 그곳에 다녀왔노라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망상의 외모는 종종 참을 수 없게 매력적인지라, 우매한 민중은 그렇지 않아도 뭐라도 믿고 싶은 터에 그냥 홀려 넘어갔다. (망상은, 사랑에 빠지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 꽃뱀이다.)

이들의 사기성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들이 그런 신비적인 방법으로, 아직 아무도 모르는, 실용적인 지식을 얻어와 인류에게 제공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치산(治山), 치수(治水), 인체이해, 질병치료, 과학기술, 의학기술, 농업기술, 축산기술, 야금기술, 건축기술, 항해기술, 섬유제조기술, 교통통신기술, 에너지생산기술, 정치·경제·사회제도의 개발·개선에 조금도 지식을 제공한 적이 없다! 단 한 건도!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과거에 이미 봤노라고 후행적(後行的)인 선언만 하지, 미래의 일을 지금 미리 밝히지는 못한다. 설사 그런 우주적인 일체정보저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 접속하는 방법은 과학적인 연구뿐이다. 이 점은 인류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런 명백한 사실에 눈을 감고, 지식을 얻기 위해서, 무당, 도사, 점쟁이, 역술인, 기공사, 성직자, 사이비 교주에게 찾아가는 것은 불가사의한 인간의 광기이다.

미래에는 인간의 지식을 모두 모아서 거대한 클라우드(cloud)를 만들고, 인간의 의식을 뇌에 삽입된 칩(chip)을 통해 그 클라우드(cloud)에 접속시켜 즉각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이때 뇌 속에서의 정보의 출현은, 책이나 인터넷 등의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 내면(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우리 것으로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역시 (우리 생각보다) 더 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그 자체로 모순이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기 몸에 달린 멀쩡한 팔을 자기 게 아니라고 거추장스럽게 여겨 스스로 칼이나 톱으로 잘라내고 후련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팔을 잘라달라고 외과의사를 찾아다니지만, 어느 의사가 그런 미친 짓을 도와줄 것인가. 결국 자기 손을 쓰는 수밖에 없다. 소위 몸·통합·정체성이상(BIID body integrity identity disorder)환자들이다. 팔을 자기 거라 생각해야 자기 거이듯이, 생각도 자기 거라 생각해야 자기 거가 된다.

경험이 아닌 지식은, 이입(移入) 시, 우리 마음속의 기존의 다른 지식들의 검열을 거쳐야한다. 그래야 진실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제공되는 지식이 순도가 높다면 그런 검열과정은 처음부터 불필요하다. 미래에는 순도 높은 지식을 (cloud를 통해서 사람들의 뇌에 직접) 제공함으로써 그리고 그 지식이 무선수신자(wireless receiver)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함으로써, 이식(移植)된 지식에 대한 이물감과 거부감을 제거할 것이다.  
 
II. 일인일신일심 환생: 일대일(一對一) 환생

인간이 ‘수작업적 일인(一人) 일신(一身) 환생이론’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루어지지 못한 욕망충족에 대한 욕구와 미련 때문이다. 직접 ‘일인칭’으로서 욕망충족을 ‘경험’하고 ‘목격’하고 ‘의식’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인 일신 환생이론’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한 사람이 (모로코의 이스마엘 황제처럼 여러 파트너의 유전자를 받아) 각양각색의 유전자를 지닌 자식을 근 천명까지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환생도 그게 가능하다고 봐야한다. 소위 유전자의 확산이다. 생체유전자와 문화유전자의 확산이다. 한 아버지로부터 생체유전자를 물려받은, 천여 명의 자식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의식’을 공유하지 않듯이, 현생이건 내생이건 내 문화유전자(meme)를 ‘일부분 물려받은’ 혹은 ‘일부분 공유하는’ 자들이 나와 같은 정체성이나 의식을 ‘통째로’ 공유할 이유가 없다.

만약 하나의 의식만 고집한다면, 인류는 ‘하나의 정체성’과 ‘하나의 의식’만 지닌 ‘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므로, '일인(一人) 일신(一身) 일심(一心) 환생이론'은 더 정밀하고 엄격한 사유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우주를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 또는 “모든 생물은 윤회한다” 등 종교적 명제는, (추종자들에게 있어서)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선언이자 무조건적인 믿음의 대상인지라, 이에 대한 치밀한 사유가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인일신일심 환생’ 이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인일신일심 환생이론은 정해진 수의 영혼이 같은 수의 육체에 재배치된다는 이론이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순열(permutation)이라는 말이다. 불교적 영혼론자들에 의하면 영혼의 수는 고정불변이다. 영혼은 새로 태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즉 불생불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정해진 수가, 즉 우주에 있는 영혼의 개수가, 반드시 유한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정해진 수가, 즉 우주에 있는 영혼의 개수가, 반드시 유한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무한에도 aleph0<aleph1<aleph2< ... <aleph n< ... 등으로 크기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aleph0은 자연수의 개수이고, aleph1은 실수의 개수이다. ‘무한개의 영혼과 무한개의 육체’ 개념의 이점은, 예를 들어, 만약 영혼과 육체의 개수가 aleph0개라면 육체의 수자를 반으로 줄이더라고 여전히 aleph0개여서 모든 영혼에게 육체를 하나씩 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1/2 aleph0=aleph0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육체(행성)의 개수가 무한개라면, 우주에 있는 육체(행성)의 반이 사라지더라도 영혼이 들어갈 육체(행성)는 단 하나도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윤회론인 일인일신일심 윤회론은 사실일 수는 있으나, 다른 초월적인 종교적인 선언·주장과 마찬가지로, 그 가능성이 너무 낮기에 과학문명이 발달한 지금도 전통적인 윤회론에 기반해서 윤리를 세우는 것은 몹시 위태롭다.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초입의 고대인들이 만든 종교적인 주장들은 속속 거짓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종교인들의 처절한 저항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진리에 대한 수호인지 아니면 상권수호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차라리 후자라면 이해해줄 만도 있다. 어차피 모든 평범한 중생의 지상명령은 ‘생존’이니 말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생존하라’는 명령 말이다. 중생은 반드시 다른 중생을 (잡아)먹고 살아야 하므로, 부처가 되기 전에는 아주 나쁜 일이라고 하기도 힘들 것이다. 예수의 논리를 빌리자면 “너희들 중에 다른 중생을 안 잡아먹은 자가 잡아먹는 자를 비난하라”이다. 여기서 ‘잡아먹는다’는 말은 ‘다른 중생에게 해를 끼친다’는 광의의 뜻이다.

미래에는 생물학의 발달로 인위적으로 고기를 합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보다 더 맛있고, 더 영양가 있으며, 더 먹음직스러운 인조고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기나긴 35억 년 진화과정에서 축적한 질기고 질긴 살육본능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힘으로 '살육이라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천연물질과 천연제품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먹는 쌀·밀·사과·배·감 등은 자연상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인간의 머리(뇌)로 종자개량을 한 것이다. 기차·자동차·의약품·수술도구·화학제품 등도 자연상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항생제나 내시경이나 치과용 드릴은 지극히 인위적인 물건들이다. 필자는 아직도, 비행기가 하늘을 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특히 수백 명 승객을 태운 보잉747기가 이륙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 하고 고개를 젓는다.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혹시 저게 환영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현재 지구인의 과학은 일견 비(非)자연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과학문명이 발달한 외계인의 눈에는 무척 자연적인 과학으로 비칠 수 있다.

원숭이와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해 견과류를 깨 먹는다. 누구나, 이게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자연스러운 도구는 바로 과학기술이다. 단지 인간이 동물보다 비약적으로 발달했기에,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인 과학기술이 부자연스럽게 비칠 뿐이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먹는 물질적인 음식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음식까지도 개선한다. 즉 생명과 우주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환망공상'이라는 '정신적 독극물'을 멀리하게 만들어 그 섭취를 방지하는 선(善)기능을 한다.)

III. 일인다신다심 환생: 일대다(一對多) 환생

만약 지구상에 당신 혼자만 존재한다면 그리고 1,000년이나 살 수 있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원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인간복제능력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들 리는 만무하다. 그러면 지겨울 것이다. 오히려 변화와 변형을 주어 제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만들 것이다. 그래야 사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고, 또 사는 게 재미날 것이다. 이는 자신의 물질적·정신적 특성들을 다양하게 조합하여 자신을 여럿으로 나누는 것과 뭐가 얼마나 다를까? 즉 일인다신다심(一人多身多心) 환생과 어떻게 다를까?

힌두교 전통에서도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몸으로 환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불교인들 중에도 이 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다.) 업(業)을 빨리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아비가 진 20년 징역형을 아들 넷이 동시에 분담하여 5년 만에 해결하는 것이다. 힌두교 등의 동양종교 전통에 따르면 이 세상은 고통의 세상이므로 되도록 빨리 탈출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한 번에 여러 몸으로 환생하는 경우에, 한 몸이 동시에 나머지 다른 몸들의 희로애락우비고뇌(喜怒哀樂憂悲苦惱)를 경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마, 당신이 이유 없이 우울하거나 또는 자살충동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그즈음 당신의 다른 몸들에게 닥친 불행 때문일까?)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렇다면 진실은, 일인일신일심(一人一身一心) 환생이 참이 아니라 일인다신다심(一人多身多心) 환생이론이 참일 수 있다. 그러면 ‘의식과 몸을 공유하지 않는 여러 몸과 여러 마음으로 동시에 환생’하는 환생이론이 가능해진다.

IV. 다인동시다신다심 환생(多人同時多身多心還生): 다대다(多對多) 환생

힌두교 같은 몇몇 종교에서는 ‘하나의 의식’ 즉 ‘우주의식’을 말하지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의식은 천차만별이다. 생물은 단세포동물로부터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영장류, 인간까지 각양각색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불교 등 몇몇 종교에서는 우주의 영혼의 수는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고정된 수의 영혼이 몸을 바꿔가며 윤회한다는 설이다.

이 설의 문제점은 지구상에 지금까지 신생(新生)하고 멸종한 종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다. 즉 현상적인 의식이 무수히 신생하고 멸종했다는 사실이다. 즉 현상적인 의식의 수에 ‘증감(增減)’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상적인 의식의 개수는 고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식이 여러 개의 현상적인 의식들로 분할되고, 역으로 여러 개의 현상적인 의식들이 하나의 의식으로 합쳐져도 무방할 것이다. 의식이 파동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의식이 합쳐지고 분할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봐도 그렇다. 뇌파는 결국 생체전기흐름이기 때문이다. 이사무애·사사무애(理事無碍 事事無碍)이다. 

일인일신일심(一人一身一心) 환생이론이 생긴 이유는, 단지 절대다수 고대 수행자들의 안목이 짧아서, 아니면 당시에 아직 의식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실상(實相)을 온전히 못 본 것일 수 있다. 심지어 진화론이, 즉 생물의 진화가 그들의 의식에 그런 식으로, 즉 ‘일인일신일심 환생’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 수조차 있다. ‘보는 것’과 ‘본 것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 수억 생의 전생을, 아니 수없는 전생을 기억한다고 자랑하는 수행자들이,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진리를 발견했다는 수행자들이, 진화론에 무지한 것은 이들의 주장이 망상이거나 이들의 지식과 지혜가 불완전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예를 들어 현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진화론을 부인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이고 개, 소, 말은 처음부터 개, 소, 말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나무도 처음부터 그 모양이었다고 주장한다. 스님에게 그 많은 동식물들의 화석들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도대체 왜, 봐도 모르는 것일까?

종교경전의 생명체관(生命體觀)은 고대인의 미개하고 원시적인 과학수준의 반영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전을 움켜쥐고 문자 그대로 믿느라 앞선 세상을 좇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머물러있기에 현대로부터 괴리(乖離)되어 시간이 갈수록 그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진다. 

V. 지혜는 감각에 후행한다

통상, ‘본 것을 옳게 바로 해석하는 지혜’는 감각에 후행(後行)한다. 즉 비량(比量)은 현량(現量)에 후행하며, 심지어 격세후행(隔世後行)할 수도 있다! 동물들이 좋은 예이며, 과거 인간들도 탁월한 예이다.

동물들이나 과거 인간들은 밤하늘의 빛을 봐도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종종, 밤하늘에 빛나는 하나의 별은 실은 1,000억 개 별을 거느린 은하이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 별빛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별에서 나온 빛들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시조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는 둥근 천장이 있고 그 천장에 뚫린 창문을 통해 신(神)의 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별빛’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지식인들의 사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수천 년을 격세하여 이제서야, 밤하늘의 빛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무지개도 좋은 예이다. 인간은 짧게는 수십 만 년 동안 길게는 35억년 동안이나 무지개를 보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다 겨우 300년 전에,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은 서로 다른 파장을 지닌 여러 빛들의 모임이라는 것과, 또 무지개는 태양빛이 물방울을 프리즘으로 삼아 여러 파장의 빛으로 분해되면서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비밀이 풀렸다.

가장 극적인 비량후행어현량(比量後行於現量) 현상은 부처님의 무아(無我)사상이다. 인간은 자그마치 35억년 동안이나 현량(現量 안이비설신의를 통한 직접지각)을 능숙하게 구사했지만, 부처님의 비량(比量, 추리·논리 등을 통한 간접지각)으로 인해서 35억년 만에 비로소 ‘현량의 주인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비량의 주인 역시 없음’을 발견했다. 즉 연기무아(緣起無我)를 깨달았다. 시중에 떠도는, 현량과 비량의 주인으로서의 참나(진아 眞我)는 무아론이 아니라, 고대 힌두교 유아론(有我論)의 유령이다.

명상 중 의식에 나타나는 ‘모종의 나’인 참나(眞我 true atman)는 ‘의식이라는 비물질적 감각기관’이 느끼는 현량이다. 이처럼 현량에 속아 참나를 주장한 것이 힌두교 수행자들의 유아론이며, 이를 바로잡은 것이 부처님의 비량이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수없는 비유와 논리를 통해서 ‘왜 무아(無我)인지’를 설명하신다.  

VI. 공시공(共時空) 환생

사실은 우리가 고루(固陋)한 윤회·환생이론에서 벗어나면, 이 이론이, 즉 ‘일인동시다신다심환생(一人同時多身多心還生)’ 과 ‘다인동시다신다심환생(多人同時多身多心還生)’ 이론이 이미 시행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로 생과 생을 통한 유전자의 확산이다. 생체유전자와 문화유전자(meme 밈)의 확산이다. 이는 꼭 내생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며, 바로 지금 현생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확장된 의미의) 윤회나 환생이라 볼 수 있으며, 이는 통세환생(通世還生)이 아닌 공세환생(共世還生)이론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시공환생(共時空還生 spacetime-synchronic reincarnation)이론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여러 명의 아이를 낳는 것은 유전자의 측면에서 볼 때, ‘다인동시다신다심환생(多人同時多身多心還生)’에 해당한다. 여러 사상·종교·이념·예술·제도가 합쳐지고 가지를 치는 것은 문화유전자적인 ‘다인동시다신다심환생(多人同時多身多心還生)’에 해당한다. 이것은, 환생을 위해서 반드시 먼저 한 개체가 죽을 필요가 없고 송신자(送信者)와 수신자(受信者)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시공환생(共時空還生)이다.

알고 보면 인간이란 생각외로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 집단이란, 다양한 생체유전자와 문화유전자가 마구 섞이는 용광로 같은 기관이다. 마구 섞이다보면, 비빔밥처럼 개체에는 없는 새로운 맛이 생겨나는, 돌연변이가 생기면서 집단을 발전시킨다. 유전자(생체유전자와 문화유전자)의 확산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평균적으로 향상시킨다. (여기서 도출되는 몹시 놀라운 사실은 ‘우수한 타인의 출현은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이익’이라는 점이다! 당신은 집단의 평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중이 김연아, 황영조 같은 스타와 영웅의 출현에 감동하는 이유이다. 일종의 무임승차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집단은 끝없는 유전자교환·확산을 통한 정보교환·확산이 끝없이 일어나는 유기생물체이다. 교환은, 생체유전자의 교환이건 문화유전자의 교환이건, 물질적인 교환이건 정신적인 교환이건, 교환 당사자들의 생산성과 전문성을 향상시키고 교환상대에 대한 존중을 키우고 또 좋은 기술·지식·성품·사상을 확산시켜 인류의 삶을 풍요롭고 평화롭게 만든다.

이 ‘유전자의 교환과 확산’을 통한 ‘정보의 교환과 확산’이 바로 윤회와 환생이다!

관건은, '그 모든 것을 ‘반드시’ ‘내’가 '경험'하고 '목격'하고 '의식'해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 집착이 모든 유아론(唯我論)의 기원이다. 당신이, 무아론자로서 진실한 선행을 하면, 그 선행의 결과를 반드시 당신 눈으로 목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판자촌에 방한용 연탄을 기증하고 나서, 직접 그 판자촌에 가서 연탄이 쓰이는 것을 보겠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 마음의 활동은 대부분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활동이므로, 그 모든 것을 ‘내가 경험하고 목격하고 의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윤회도 내가 반드시 경험하고 목격하고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살아있을 때도 그러한데 하물며 죽은 다음이랴!

VII.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것은 정의하기 나름이다. 무엇을 ‘나’라고 하느냐는 당신 생각에 달려있다. 과거에 ‘나’라고 생각한 것은 현재에 ‘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 ‘나’라는 생각은 인간 의식의 진화에 따라 변한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어른 시절의 ‘나’는 다르다. 당신은 종교수행을 통해서 특정한 ‘나’가 되는 것을 꿈꾸지만, 정작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 찾아오는 ‘나’는 그와 완전히 다를 수가 있다(부처님은 ‘여래의 사후 존재여부’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으셨다. 설사 당신이 어린 마음에 꿈꾸던 사람이 되어도 그 사람은 어린 시절에 꿈꾸던 사람이 아니다. 홍길동은 신선의 신통력이 멋있어 보여서 도를 닦기 시작했지만, 막상 신선이 되고 보니 신선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즉, 지금 현재 나라고 간주되는 ‘나’는 미래의 ‘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점은 동물들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없지만, 더 진화한 인간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있음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즉 ’나‘라는 것의 존재와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의식하는 방식에 달려있다. 그런데 그 의식이 진화를 한다!

지금의 ’나‘라는 것이 앞으로의 ’나‘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다. 천재는 정신병자와 정상인 사이의 경계인이며 이들이 인간의 발전을 선도(先導)한다. 정상인은 정신병자의 정신세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시라. 강바닥에 있는 두 사람은 같은 결과가 아니다. 한 사람은 익사했고 다른 사람은 잠수했다.) 인간 의식의 발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의식의 진화란 끝없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여행이다. 인간이 구태의연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 살바도르 달리

VIII. 옛 환생이론이 무너지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는가?

사람들은, ‘일인일신일심 환생’이 참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하며 살아도 그만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마음의 구조)는 그리 살게 되어있지 않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동시에 그런 식으로 산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은 잔인하게 남들을 공격하며 서로 싸움을 일삼다가 곧 망해 소멸하고 말리라.

아직 세상이 안 망하고 오히려 번영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종교가 없던 원시시대부터 자기욕심만을 차리며 사악하게 산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을 (자의건 타의건) 존중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군집생물의 개체는 구성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존한다. 그러므로 군집생물은 집단이 작아지면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개체는 타 개체들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개체들은 구성원들의 배척을 받아 멸종되어 사라지고, 또 그런 개체들이 많은 군집은 그렇지 않은 다른 군집에게 패해 사라진다.)

이 습성이 우리 유전자에 깊이 새겨지고 각인(刻印 imprint)되어 있는 것이다. (유전자를 우습게 보지 말라. 우리 모습과 행동은 거의 다, 생체유전자이건 문화유전자이건, 유전자의 발현이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은, 35억년 동안 제 맘대로 돌연히 맘을 바꿔가며 전횡을 일삼아 온, 이 유전자의 전제적인 힘에 저항하는 구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함부로 살 수 없으며, 그리 살려하면 (소수의 정신병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내적·외적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되어있다. 반대로 당신이 선하게 살면, 전 우주의 유전자들이 환호하며 당신을 칭송한다. (무장을 안 한 나라는 모든 나라가 좋아하는 법이다. 선함은 일종의 자발적인 무장해제이다. 즉 일종의 비폭력주의인 아힘사이다.) 따라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정신적인 행복의 첩경이다.

이 점은 칠불통계(七佛通戒)에 잘 나타나 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義 是諸佛敎)’이다: “모든 악은 행하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함으로써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법의 깊은 뜻을 반추(反芻)하노라면 “사두! 사두!”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자
    
                               사람들은 무수한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 인연속에 고운 사람도 엮어가지만
                                      미움도 엮어가는 게 있다.
                                  고운 인연도 있지만
                                      피하고 싶은 악연도 있다.

                                       우린 사람을 만날 때

반가운 사람일 때 행복함이 충족해 온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도 있다,

나는 과연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있는가?

과연 나는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주었는가?
한번 만나면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이.......

진솔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분명 좋은 사람으로 인정 받을 것이다.
언제 만나고 헤어져도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 좋은 글 중에서 -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10계명

 

1. 반갑게 만나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환영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환한 미소, 밝은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하라.

2.관심을 보여라.
다른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여라.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죄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고 말했다.

3.경청하라.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눈을 바라보고,

적절하게 고개를 끄덕여 이해를 표시하고,

추임새를 통해 반응을 나타내라.

4.따뜻한 말을 하라.
가장 좋은 말은 칭찬이다.

칭찬은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먼저 연습해서

버릇을 들여야 한다.

5.호의를 제공하라.
다른 사람을 만나면 호의를 베풀어라.

호의는 돈, 물질, 선물, 식사대접, 음료제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밥값은 내가 계산하라.

식사 후에는 커피를 타 줘라.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상대방을 먼저 타고 먼저 내리게 하라.

6.기분 좋은 만남을 만들어라.
다른 사람을 만나면 함께 했던 시간이

유쾌하고 편안한 만남이 되도록 노력하라.

나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불쾌하고 불편하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진다.

인간관계에서는 쇼맨십도 중요한데

쇼맨십은 관중을 즐겁게 해 주려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7.각인시켜라.
인간관계가 유지되려면 첫 단계에서 각인과정이 필요하다.

자기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거나

특이한 별명을 말하거나 특색 있는 자기소개를 하라.

노래, 성대모사, 악기연주, 춤 등 개인기가 있으면 보여줘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다른 경험을 한 일이 있으면

그 이야기를 들려줘라.

8. 기대감을 형성하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만남과 인연이 이어진다.
자기소개를 하거나 대화를 할 때는

나에 대한 기대감을 형성시켜라.

기대감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형성된다.

9. 아쉽게 헤어져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 헤어질 때는

상대방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한 기쁨,

앞으로 소중한 인연이 이어지길 바라는 기대감,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 수 있기를 바라는

아쉬움과 감사의 인사말을 표현하라.

10. 겸손하라.
지금까지 말한 아홉 가지 사항이 실천되려면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나보다 잘났거나 도움이 될 사람을 만나면

시키지 않아도 반갑고, 관심과 칭찬을 넘어 아부까지 건네지만

나보다 못났거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무관심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사람의 간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