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선병(禪病)

2016. 9. 3. 17:3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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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선병(禪病)

청원(淸遠) 스님이 말했다.
“선을 배우는 데에는 다만 두 가지 병이 있다.

첫째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것이요,


둘째는 나귀를 탄 다음 내리지 않는 것이다.
나귀를 타고서 다시 나귀를 찾는 것이 참으로 큰 병이다.


산승(山僧)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찾지 말라! 영리한 사람은 당장 알아듣고서 찾는 병을 없애서 미친 마음을 마침내 쉴 것이다.
이미 나귀를 알았지만 타고서 내리려 하지 않으니, 이 병이 가장 고치기 어렵다.


산승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타지 말라! 너희가 바로 그 나귀이고, 온 세상이 바로 그 나귀이니,


너희가 어떻게 나귀를 타겠느냐? 너희가 만약 탄다면 절대로 병을 없앨 수 없다.


만약 타지 않는다면 시방세계가 확 트여 걸림이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 병이 일시에 사라지면 마음속에 아무 일이 없어


도인(道人)이라 이름 하나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일찍이 만공(滿空) 스님이 후학들에게 남긴 훈계의 말씀 가운데,


“깨닫기 이전이나 깨달은 이후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을 공부하는 데 있어 깨닫기 전에도 한 고비, 하나의 병통이 있고,


깨달은 후에도 다시 한 고비, 또 하나의 병통이 있습니다.


진실로 이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두 고비, 두 가지 병통을


겪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깨닫기 이전의 고비, 병통은 깨달음을 달리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바깥을 향해 돌아다니며 구하는 것이 병입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 말이나,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찾는다는 말,


경회루에 앉아서 서울 가는 길을 묻는다는 말들이 모두


이러한 병통을 지적하는 것들입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한 깨달음이 자기 바깥에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병입니다.

망상하지 말라, 찾지 말라, 구하지 말라, 공부하지 말라,


눈앞을 떠나지 말라,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저런 가르침을 주지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말들일 뿐입니다.


바깥을 향해 미친 듯이 찾아 구하는 그 마음이 완전히 쉬어졌을 때, 이미 있었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이른바 깨달음입니다.


다만 망상 분별이 쉬어졌을 뿐 특별한 능력이나 경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한 것, 본래의 자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선(禪)이요,


도(道)란 사실을 납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뭔가 그럴 듯하고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고 그려내는 자아의식의 환상에 속고 있는 한


이미 나귀를 타고 있으면서도 타고 있는 줄 모를 뿐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아 자기만 괴로울 뿐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 무명(無明)이요, 무언가에 홀려 방황하는 미혹(迷惑)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衆生)의 업보입니다.

그러나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반드시 어떤 인연에 본래 있었던 자기, 언제나 눈앞을 떠나지 않는 한 물건을 깨닫는


일이 벌어집니다. 문득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 기가 막힌 역설,


거대한 코미디에 헛웃음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하다니!


단 한 순간도 이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거늘 어째서 그렇게 찾아 헤매었던고?


커다란 안심과 희열을 만끽하지만 아직 한 고비가 더 남았습니다.

어렵게 돌고 돌아 제 집으로 돌아왔고, 바깥으로 찾아 구하는 마음을 쉬고


이미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거기에 머무르려 하거나 그것을 소유하려는 순간


다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깨닫기 이전에 바깥의 경계에 집착하던


옛날 버릇이 깨달았다고 해서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발견한 ‘무엇’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약도 없는 중병 가운데 중병입니다.


우리의 분별심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을 그림과 시로 표현한 십우도에 보면


소를 찾아 헤매던 목동이 소를 발견하고, 소를 붙잡고, 소를 길들이고,


소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는 문득 소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깨달음의 초기에는 자칫 마음이니, 도니 할 만한 ‘무엇’, 어떤 경계가


미세하게나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법에 대한 집착, 법집(法執)이니, 깨달았다는 견해, 각견(覺見)이니,


 혹은 법신 가장자리의 일, 법신변사(法身邊事)라 합니다.


한 마디로 깨달음이란 망상입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는 깨닫지 못했다는 망상을 한 것이요,


깨달은 뒤에는 깨달았다는 또 다른 망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나귀는 없었습니다. 본래 소는 없었습니다.


본래 마음이니, 도, 진리, 깨달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일체가 망상이었습니다.


나아가 나귀를 타고 있는 사람, 소를 기르는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마저도


없었습니다. 미세한 알음알이, 관념까지 그 정체가 환히 드러나


견해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아무 모양도 없고[無相], 아무 생각할 것도 없고[無念],


어디에도 집착하여 머물 데가 없습니다[無住].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고[無所得],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無所有], 아무 맛도 없습니다[沒滋味].


나도 비었고 법도 비었습니다[我空法空]. 둘이 아니지만[不二] 하나 역시 아닙니다[非一].


하나의 마음[一心]일 뿐이므로 따로 마음이 없습니다[無心].


억지로 말하자만 날마다 쓰는 일[日用事], 평소의 마음[平常心]일 뿐입니다.

언제나 본래의 그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 몽지 심성일님(몽지릴라 밴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