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읽는 복음] 빛과 소금

2016. 9. 25. 18:31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기독경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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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읽는 복음]  빛과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복음, 5:13~16]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지 않느냐?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또 말씀하셨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너희가 남에게 달아 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가복음, 4:21~25]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마가복음, 9:50]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누가복음, 8:16~18]


 


소금의 소금됨은 그 짠맛에 있습니다.


소금이 그 짠맛을 잃는다면 소금은 자신의 정체성, 소금됨을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참된 정체성은 내가 나임[I am that I am]에 있습니다.


내가 나임, 나됨을 잃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나 아닌 것을 나로 삼는 어리석음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참된 나의 정체성, 나의 나임, 나됨은 나-아님, 나-없음입니다.


나-아님, 나-없음이 진정한 나임, 나됨입니다.


소금에서 짠맛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로부터 나임,


나됨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나, 나임, 나됨은


이제까지 나라고 여겨왔던 것이 나가 아님, 나라고 할 만한 것 없음입니다.


이 역설을 잘 살펴보십시오.

(잠시 묵상)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따 먹은 선악과(善惡果)의 다른 이름은


곧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입니다.


지식은 곧 분별이고 근본적 지식, 분별은 바로 우리가 다른 개체적인 ‘나’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육체적 정신적 개체라는 생각입니다.


즉 ‘내가 다른 것들과 별개로 있다’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원죄(原罪), 근본 무명입니다.

내가 따로 있게 되는 순간 우리는 나 아닌 것들과의 대립, 차별, 갈등, 불화,


전쟁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낙원 추방, 실낙원의 신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어리석음, 무지 탓입니다.


진정한 ‘나’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할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소금에서 짠맛이 분리될 수 없듯이, ‘나’로부터 ‘나임’, ‘나됨’이 떨어질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가 알고 있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란 말입니다.


무엇보다 ‘나’가 ‘나’를 안다는 말부터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결코 둘이 아닙니다. 주관과 객관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나’는 ‘나’라고 할 것이 없음, ‘나’가 아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나’, 똑같은 ‘나임’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임[the oneness]입니다.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무엇’이라 할 것이 없고, ‘무엇’이 아니지만 분명 존재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는 하고 있지만, ‘어떤’ 존재는 아닙니다. 그저 존재하고 있음[being]입니다.


 존재는 앎의 대상이 아닙니다. 존재가 그대로 앎 자체입니다.


그대로 생명 자체입니다. ‘나’는 존재-앎-생명입니다.

(잠시 묵상)

동시에 ‘나’는 빛입니다. 제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두루 밝히고 있는


 빛입니다. 드러나 있기에 마치 감추어져 있는 것 같고, 감추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미 훤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모습에 눈이 멀어 자기로부터 방사되는 빛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

우리 내면과 외면의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의 빛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과 별개로 떨어져 있는 사물을 하나만이라도 지적할 수


있다면 제 목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와 별개로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는 순간, 그것과 나는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와 모든 대상들은 본래 하나임입니다.

오직 분리 없는 하나의 빛이 모든 것으로 드러나 있을 뿐입니다.


하나인 빛의 존재를 다시 비춰 줄 다른 빛은 없습니다.


둘이 아니지만 하나조차 아닌 이 빛, 이 나, 이 존재, 이 앎, 이 생명, 이 영(靈),


이것을 이미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지만, 이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잠시 묵상)

선의 공안(公案) 가운데 ‘너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주장자를 줄 것이고,


너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주장자를 빼앗겠다’라는 공안이 있습니다.


주려야 줄 수 없고, 빼앗으려야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있는 사람에게는 주고, 없는 사람에게는 빼앗는다는 말의 낙처(落處),


귀결점을 알 것입니다.


‘나’가 있다면 ‘나’가 없는 것이고, ‘나’가 없다면 ‘나’가 있는 것입니다.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잠시 침묵)

그러나 이미 드러난 것을 어찌 다시 감출 수 있겠습니까?


 


- 몽지님

- 죽음도 미리 배워둬야 한다 / 법정스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며 삶의 신비이기도 하다.


만약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죽음이 삶을 받쳐주기 때문에 그 삶이 빛날 수 있다.




얼마 전 한 친지로부터 들은 말이다.


부친의 죽음 앞에 신앙이 무엇인지, 종교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게 되더라고 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이


인생의 중요한 문제풀이처럼 여겨지더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어렵지만 죽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순조롭게 살다가 명이 다해 고통 없이 가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본인은 물론 가족들이 함께 시달리게 되면


잘 죽는 일이 잘 사는 일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죽음복도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나옴직하다.


살 만큼 살다가 명이 다해 가게 되면 병원에 실려 가지 않고


평소 살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이미 사그러드는 잿불 같은 목숨인데 약물을 주사하거나 산소호흡기를 들이대어


연명의술에 의존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한평생 험난한 길을 헤쳐 오면서 지칠 대로 지쳐 이제는 푹 쉬고 싶을 때,


흔들어 깨워 이물질을 주입하면서 쉴 수 없도록 한다면 그것은 결코 효가 아닐 것이다.


현대의술로도 소생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조용히 한 생애의 막을 내리도록


거들고 지켜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될 수 있으면 평소 낯익은 생활공간에서 친지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삶을 마감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병원에서는 존엄한 한 인간의 죽음도 한낱 업무로 처리되어 버린다.


마지막 가는 길을 낯선 병실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맞이한다면 결코 마음 편히 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듯이 죽음도 그 사람다운 죽음을


택할 수 있도록 이웃들은 거들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찍부터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미리 배워 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이 맞이해야 할 엄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임제 선사의 행적과 법문을 실은 [임제록]의 매력 중 하나는


보화 스님에 대한 이야기에 있다. 임제와 보화의 관계는 서로 밀접해서


어느 한쪽이 없다면 싱거울 것이다.


보화 스님의 죽음은 거리낌이 없는 생사 해탈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보화 스님이 자신의 갈 때를 알고 사람들에게 옷을 한 벌 지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바지와 저고리를 주었지만 그는 받지 않고 요령을 흔들면서 지나가 버렸다.


이때 임제 스님이 관을 하나 전했다.


 


보화 스님은 그 관을 메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내가 내일 동문 밖에서 죽으리라.” 고을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동문 밖으로 나오자


보화는 “오늘은 일진이 맞지 않아 내일 남문 밖에서 죽으리라”고 했다.


사람들이 또 몰려들자 “내일 서문 밖에서 죽으리라”고 했다.


사람들은 속은 줄 알고 차츰 줄어들었다.


 


 넷째 날, 이제는 아무도 따라오지 않은 것을 보고 북문 밖에서 스스로


관을 열고 들어가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관 뚜껑에 못을 박아 달라고 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몰려나와 관을 열어 보았다.


시신은 보이지 않고 허공 중에서 요령 소리만 은은히 들려왔다.


 




 

 행복에는 커트라인이 없다

낮은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흘러가는 물처럼
행복은 호화로운 저택에도 들어가지만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간다.

행복에는 커트라인(조건)이 없다.

어떠한 수준에 도달하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커트라인이 정해져 있지 않다.

행복은 아무나 그것도 아무 때나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느끼는 횟수에도
제한이 가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가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 놓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불행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명백한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놓고 있다.

 

내 집을 장만해야만,
멋진 자가용을 사야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얻어야만,
자식이 일류 대학에 진학해야만
하는 등의 명백하고도,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스스로가 인정해 버린다.
그러니 어떻게 행복이 찾아들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어떠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 놓지 말아야 한다.

이미 정해져 있다면 철회시켜야 한다.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 놓는 것은
행복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쫓는 것이 된다.

행복의 커트라인이 정해지는 순간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행복은
느껴 보기도 전에 달아나 버리고 만다.


- 송천호 "나는 내가 바꾼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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