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읽는 복음] 걱정 말아요, 그대

2016. 10. 2. 19:59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기독경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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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읽는 복음]  걱정 말아요, 그대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마태복음, 6:25~34]




불가(佛家)에서는 인간사의 괴로움을 번뇌(煩惱)라고 부릅니다.


번(煩)이란 글자는 머리란 뜻을 가진 글자 혈(頁)에 불 화(火)가 결합하여 만들어졌고,


뇌(惱)자는 마음을 나타내는 심방변(忄)에 정수리 신(囟)자와 내 천(巛)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즉 번거로움이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이고, 괴로움이란 생각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게 흘러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의 걱정을 하며 사는 것이 중생의 번뇌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자체는 문득 인연 따라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 출처를 알 수 없고 그 귀결처를 알 수 없습니다.


생각은 독자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연, 조건들의 결합으로


마치 있는 것처럼 지각되는 것일 뿐입니다. 생각에 지나친 믿음과 에너지를 부여할 때,


즉 특정 생각에 집착하거나, 저항할 때 그것이 번뇌가 됩니다.


번뇌의 뿌리에는 대상이 되는 인연과 짝을 이루는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삶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느끼고, 내가 안다고 믿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살다가, 내가 병들고, 내가 죽는다고 믿습니다.


고정불변하는 내가 세계와 떨어져서 따로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독립되어 있는 개체로서의 내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타자들과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예측 불가능한 여러 경우의 수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걱정을 떠안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 진실일까요?

(잠시 묵상)

지금 당신은 숨쉬고 있습니까? (침묵)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숨쉬고 있는지 살펴보기 이전에, 자신의 호흡에 대해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는 순간에도 호흡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어젯밤 당신의 분별력이 완전히 사라진 깊은 잠 속에서도 호흡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모발이 자라고, 장이 움직여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심장을 펌프질하여 혈액을 순환하게 하는 것을 모두 당신 하고 있었습니까?

(잠시 묵상)

어쩌면 당신 자신이라는 주체감 또한 알 수 없는 무엇, 이 영원한 생명의 흐름 가운데


나타나는 물거품과 같은 생각이나 느낌이 아닐까요?


제 스스로는 텅 비어 결코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다른 대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공간과 같은 무대 위에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어릿광대와 같은 것이


‘나’ 아닐까요? 바로 지금 의식되고 있는 몸과 마음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렇게 몸과 마음을 의식하고 있는 ‘무엇’이 참나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지만 제 스스로는 의식되지 않는 무엇!


바로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무엇! 바로 지금 자신의 호흡을 지켜보고 있는 무엇!


신체 감각의 변화와 바깥 상황의 변화를 자동적으로 지각하는 무엇!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내용의 의식을 수용할 수 있는 순수한 의식 자체!


모든 변화의 작용 가운데 결코 변화하지 않는 자기 동일성의 근원!


나와 세계의 존재로서 드러나고 있는 존재 자체! 모든 것들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생명 자체!

바로 이것!

(침묵)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 부를 만한 무엇이 나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온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형의 존재 자체가 온갖 유형의 존재들로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원이 매순간의 무상함으로 창조와 파괴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존재가 꾸는 거대한 환영,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깨고 나면 흔적 없는 존재의 꿈!

도덕경에 이르기를,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저절로 그러함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저절로 그러함이 도입니다.


하려고 함 없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온갖 만물을 살아움직이게 하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온전한 생명에 의해 살아가듯, 삼라만상이 분리 없는 하나의


존재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아갑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간 어제를 다시 살지 말고, 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살지 마십시오.


그저 오늘, 영원한 현재를 사십시오. 모든 것은 오로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마시고, 오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일만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늘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금, 언제나 모든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 여기, 멈출 수 없는


이 순간, 머물 수 없는 이 자리! 모든 일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곳이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유일한 현장, 하나님의 의(義)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침묵)




- 몽지 심성일님(몽지와릴라 밴드에서)



♤ 스스로 자기를 아프게 하지 마라

스스로 자기를 아프게 하지 말라 모두가 지난 일이지요.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려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나혼자 만이 겪는 고통은 아닌 것이지요.

주위를 돌아보면 나보다 더 더한 고통도 있는 거지요. 하지만 모두가 극복하려 했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스스로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자꾸 앞으로가야 할 삶의 길에도 슬픔의 시련은 있을 테니 지금의 고통으로 스스로를 성숙하고 강하게 하는 계기로 삼아요. 걸어왔던 슬픔의 길로 되돌아가려하지 말아요.

힘들고 아픈 이야기만을 쓰려하지 말아요. 복잡한 생각은 파고들수록 다른 비극을 꾸며내니까요. 향을 피우고 고요한 음악을 벗 삼아 생각을 정리해요.
세상사모두가 꿈일 뿐이지요. 꿈속의주인공 역시 나인 것인데 무엇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아프게 하나요.

지금은 당장 힘들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지요. 자기를 위해 밝은 햇살로 고개를 돌려요. 꿈에서 깨어나면 또 다른 내일이 맑게 개어있을 테니까요. - 글/원성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