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9. 17:48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기독경 재해석
[선으로 읽는 복음]
아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21~22]
이 일의 신비, 이 일의 역설은 이른바 세속적인 입장에서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일수록 이 일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아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 일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는 순수한 사람들은 이미 드러나 있는
이 일을 어렵지 않게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란 과거의 것, 죽은 것, 수단과 방편입니다.
이 일, 이 생명, 이 진실, 하나님과 그 나라는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살아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롭고 어디서나 신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살아있는 진실이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박제가 되고 맙니다.
진리는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 소유할 수 없지만 분명 살아있는
것입니다.
(잠시 묵상)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지만,
스스로를 채우고 높이려는 사람들에게는 모습을 감추고 숨은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모든 것이
그것이지만, 복잡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어떤 것도 그것이 아닙니다.
믿고 맡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을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고, 쓰지만,
생각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을 목말라 하고 그리워 할
뿐입니다.
‘아는 것’에 가로막혀 ‘아는 것’보다 훨씬 광대한
것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아는 것’의 배경에는 그것을 감싸 안고,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르는 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이 ‘모르는 것’에 비하면 우주 가운데의 먼지 티끌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 ‘모르는 것’ 앞에서 ‘아는 것’이 사라져야 합니다.
이 ‘모르는 것’ 속으로 ‘아는 것’들이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모를 때, 완전히 알게 됩니다.
알고 모름이란 상대적 분별을 넘어서게 됩니다.
(잠시 묵상)
법화경
방편품에 이르기를,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법의 실상을 다 아신다(唯佛與佛 乃能究盡 諸法實相)’
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깨달음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그 아버지만이 알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그 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를 실현한 자만이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을 넘어서서
‘모르는 것’과 하나가 된 사람만이 상대적 분별 너머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고 싶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나’는 무엇입니까?
‘나’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는 것’의 바탕, 그것들을 아는 ‘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 내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습니까?
내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나’를 들을 수 있습니까?
내 몸을 통해서 느끼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습니까?
내 생각을 통해서 알고 있는 ‘나’를 알 수 있습니까?
이 ‘나’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이 ‘나’가 무엇입니까?
(잠시 묵상)
‘나’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죽은 것, 과거의 것, 박제일 뿐입니다. 그것을 아는 ‘나’는 다시 무엇입니까?
알고 싶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고, 모르고 싶어도 도대체 모를 수도 없습니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침묵)
- 몽지님
Who I am today what I represent,
It's all because of my mother
오늘의 '나'됨은 어머니 때문이다
반백의 아들 울려버린 8旬 노모
나의 벤쿠버 초창기 이민 동기요, 친구요, 혈육의 형님과 같은
분으로
캐나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경찰서 형사로 근무하신
분으로
중국에직접 부억용품(kitchen needs) China
Dish 수입
Chinese Community 에서 더 잘 알려진
사업가 이십니다
언젠가 한번은 사전에 예고도 없이 지나는 길에 .
다운타운 그 분의 매장사무실에 제가 들어서는 순간
그 분은 화들짝 놀라 무언가를 책상 밑으로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업자료인가 싶어 “뭐기에 감추냐”고 캐묻자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손사래치는
그 분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습니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그분못해 꺼내놓은 것은
여든을 훌쩍 넘긴 노모의 편지였습니다.
그는 “오전 6시쯤 출근 준비를 하는데
안방 문틈에 작은 메모지가 끼어 있어 펼쳐보니
어머니의 편지였다”고 했습니다.
새벽 같이 출근해 밤 늦게야 귀가하는
아들의 얼굴조차 보기 어렵자 어머니
김영애(86)씨가 평소 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글로 적어 ‘출근 길목’에 놓아둔 것이었습니다.
‘아들,내 말 좀 들어보소’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비뚤비뚤한 글씨에 여기저기 맞춤법이 틀려 있었지만
5살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듯 간절한 염려와
사랑이 구절구절 담겨 있었습니다.
반백의 아들 울려버린 8旬 노모
환갑을
바라보는 아들이 외출할 때
“차 조심해라”고 하는 한국 어머니들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글이었다.
아들은 “편지를 들고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현관 앞까지 따라나와
‘다른 사람 눈치도 봐야겠지만
건강도 챙겨라’라고 하셨다”며
“감정이 복받쳐서 ‘이제 일찍 들어오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출근 후 사무실에서 다시 편지를 꺼내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다 마침 방에 들어선 나와 마주친 것이었습니다.
그는“지난 35 년 간 China Dish 를 시작한 뒤 어머니와
대면한 것은 밤 늦게 귀가해 어머니 방 문을 열고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성경을 보는 어머니께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며
“60을 넘긴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인 아들도
어머니에겐 철부지로만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남편을 여의고
농사를 지으며 8남매를 홀로 키웠다고 합니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손 형사가 대학에 입학하자
서울로 이사해 식당일 등을 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고 합니다.
눈이
어둡고 거동도 불편해 거의 외출을 못하게 된
7년 전부터는 집에서
성경을 베껴쓰며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어머니의 편지를 저의 전도용 맬로 쓰겠다고
다시 찾아간 저의 요청을 한사코 거절하다
마지못해 품에 넣고 다니던 편지를 꺼냈주는 것입니다
그는 “추석날에도 출근해야 하는데
그 날 만큼은 일찍 들어가
어머니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May your
father and mother be glade;
May she who
gave you birth rejoice !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전도서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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