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 법문

2016. 10. 30. 18: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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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호 스님은 “인간의 본래 마음은 크고 밝고 충만한 관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일상에서 관찰자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여러분이 일상에서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현대인들대부분이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을 하는데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라는 존재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생각 때문입니다. 생로병사 모든 고통의 중심에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생각 속의 나, 가짜 나(假我)가 있다 보니 그 幻想 때문에 고통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간단한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가짜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가짜 나를 버린다는 것은 단순하게 죽으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짜 나라는 생각, 환상은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가짜 내가 없어지는 마음공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수행을 하는 근본 이유인 것입니다. 

늘 고통스럽다 말하지만, 그 고통 원인에 대해선 몰라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면 모르는 사이 고통 사라져

원숭이가 먹을 것 집착해 결국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인간도 집착과 탐욕을 놓을 줄 몰라 고통스런 삶 이어가는 것

행복은 福을 닦고 道를 닦아 나와 남을 변화시킬 때 가능
복닦기 도닦기를 일상에서 실천해 행복하길


살아있으되 가짜 나를 버리는 수행이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일상생활 속에서 가짜 나에 대해 4가지 방법으로 가짜 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즉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 대해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고, 생각의 대상에 대해 생각의 대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4가지 로 4가지를 관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4가지를 어떻게 관찰(觀察)하느냐? 거울을 보듯, 영화를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그 관찰하는 놈에게 닉네임(별명)을 붙여보는 것입니다. 별명은 여러분 마음대로 붙여도 관계없습니다. 가령 ‘짱구’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먼저 호흡을 관찰할 때, 숨을 들이 쉬면 ‘아! 짱구가 숨을 들이 쉬는 구나’라고 관찰하고, 내쉴 때도 ‘아! 짱구가 내쉬는 구나’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걸을 때도, 머무를 때도, 앉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늙어 가면 늙어가는 대로, 병이 들면 병이 들어가는 대로 가짜 나가 아닌 짱구가 하는 것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마음연습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가짜 나가 없어지게 됩니다. 고통의 주인공이 가짜 나가 아닌 짱구가 되는 것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도 처음에는 여러 방법을 다 해봤습니다. 고행도 해봤고, 쾌락에도 빠져봤고, 선정도 닦아봤습니다. 그래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체득한 것이 바로 이 4가지 관찰법(觀察法이었습니다. 생로병사라고 할 때,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누가 하는 겁니까. 내가 하는 것입니까. 그 가짜 나가...




무아법(無我라는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붙인 닉네임이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관찰하면 저절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집니다. 화가 날 때는 ‘짱구가 화를 내는 구나’라고 관찰하면 화를 냈던 마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같은 관찰은 단순히 화를 참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흔히 화를 참으면 병이 되고, 터뜨리면 業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화를 관찰하면 화는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관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서 분리됩니다. 관찰은 현상에 끌려가지 않고 그런 현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공부를 해야 하고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관찰입니다. 관찰이라는 것이 뭡니까. 무엇을 자세하게 본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다스리려면 일단 마음을 봐야 하겠지요. 마음을 보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또 마음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데 第一 重要한 것은 마음을 관찰(觀察)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 느낌,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하는 마음을 올바로 관찰하는 게 결국 마음의 주인이 되어 마음을 다스리는 길입니다. 

생겨난 이 세상 모든 존재,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모두는 無常한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변화(變化)합니다. 인간의 몸은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변화하고,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변화하고,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변화하고, 물질이나 사물은 생성소멸(生成消滅)하면서 변화합니다. 이렇게 우주 자체가 변화하는데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변화(變化)야말로 불변(不變)의 眞理입니다. 생겨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러나 생겨난 이 세상 모든 것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무시무종으로 상주불멸 불생불멸의 존재로 


여여부동(如如不動)합니다. 이 관찰자, 즉 인간의 본래마음은 크고, 밝고, 온 우주와 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충만해 있기에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본래 관찰자의 마음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본래마음을 망각하면서 작고, 어둡고, 헐떡거리면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관찰자, 본래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 일상생활 속에서 관찰자, 인간 본래마음을 어떻게 노력해야 되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주 쉽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내게 닥친 이 세상 모든 것의 모습은 모두 나의 분별하는 마음의 작품이고,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 분별하는 마음의 작품”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행복과 불행이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우리는 늘 구걸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이 모두 다 내 분별하는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불행이 닥쳐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죠. 인도네시아에 가면 원숭이를 아주 쉽게 잡습니다. 원숭이가 잘 다니는 길목에 원숭이의 팔 길이 정도만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을 파놓고, 그 안에 먹을 것을 놓습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숭이가 구멍에 손을 넣고, 먹을 것을 쥐고는 그 먹이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을 위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쥐고 있는 먹이를 절대 놓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숭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길일까요? 신에게 기도를 할까요? 운명이라고 여기고 저절로 빠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까요? 아니면 극단적으로 자기 손목을 자를까요?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일상생활 속에서의 인간들도 원숭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면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인간들은 욕심과 집착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절대 놓지 못합니다. 원숭이처럼 그것을 꽉잡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허공을 잡으려고 허공 속에 주먹을 꼭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는 인과(因果 ; 원인과 결과)를 중시합니다. 이 세상으로 생겨난 모든 현상에 대해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닥쳤을 때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왜 어려움이 닥쳤을까, 원인을 찾아 분석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면 어려움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괴로움, 어려움의 원인을 분석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신에게 기도하거나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러니 해결이 될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인간의 본래마음은 크고 밝고 온 우주와 삼라만상만물에 항상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본래마음이 작아지고 어두워져서, 방황하고 헐떡거리는 삶


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마음을 본래 마음자리로 돌리려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남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남들을 먼저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마음을 갖어야 합니다. 남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구걸하는 마음입니다. 구걸하는 마음이 연습되면 거지나 종이 되고,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면 부자나 주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절이나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해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불전함에 시주를 하면서도 ‘온 우주, 이 세상 모든 부처님들께 용돈을 드렸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분이 좋겠습니까? 조건 없이 베푸는 마음을 연습해야 합니다.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을 보면 보현보살의 10가지 서원(誓願)이 나옵니다. 그 서원을 살펴보면 어떤 것도 ‘해달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겠습니다’ 뿐입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겠습니다.” “여래를 공경하겠습니다.” “중생을 수순하겠습니다.” 등등. 모두 다 ‘하겠습니다’ 입니다. 여러분도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서 ‘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세워보세요. ‘베풀겠습니다’라는 마음을 발원해보세요. 그렇게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부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처럼 웃고,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면 우리는 곧 부처의 행을 하면서 부처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리심(지혜, 깨달음)과 더불어 대자대비심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대자대비심이 무엇입니까? 크게 사랑하고 크게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짜 나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이나 주변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대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남편을 볼 때 이런 마음을 내보세요. “우리 남편, 참으로 고생이 많다. 나보다 더 부유하고 멋진 사람을 만났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 고생이 많으니 마음이 아련하다. 이게 크게 가엾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대자대비의 마음을 내면 남편을 대하는 마음이 어떨까요? 행여 미워했던 마음이 있었더라도 눈 녹듯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자식에게, 주변 이웃들에게도 이런 대자대비의 마음을 내면 가족이 화목해지고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대비심은 나를 바꾸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고 살면 되지, 굳이 주변까지 살필 이유가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아주 어리석은 의식수준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결코 나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파동하는 에너지정보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리 이렇기 때문에 나 혼자만 잘 산다고 결코 행복해 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행복해지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福닦기’요, 또 하나는 ‘道닦기’입니다. 복을 닦는 것의 근본은 나눔과 베품에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는 게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꼭 금전적 도움이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보시고,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아주 큰 보시, 즉 나눔과 베품입니다. 道를 닦는 것은 결국 있지도 않은 시비 분별하는 허망한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면관찰법을 통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늘 관찰자의 마음, 인간의 본래 마음자리에서 몸, 느낌 감정, 생각 망상 번뇌 잡념 상상 이미지 분별심, 생각의 대상 이 4가지를 활짝 깨어잇는 의식으로 관찰한다면 모든 고통을 거뜬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복닦기’와 ‘도닦기’를 실천해 나간다면 여러분들은 실체가 없는 분별하는 마음 생각이 지어낸 허망한 고통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늘 행복한 하루하루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행불(行佛)하세요.

정리=문영배 광주지사장


 


 


 


 


 


 


 


 


 


 


 


 


 


 


 


 


 


 


 


 




이 내용은 광주 신광사와 광주광역시교육청이 2016년 10월8일 학부모와 불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좌에서 초청 법사 월호 스님의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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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覺山中生一樹 開花天地未分前  (원각산중생일수 개화천지미분전)
非靑非白亦非黑 不在春風不在天  (비청비백역비흑 부재춘풍부재천)

 

깨달음의 산중에 나무 한 그루 있어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피었네
푸르고 흰 것도 또한 검은 것도 아니어서
하늘에도 없거늘 봄바람엔들 있으랴 / 유당譯

 


 

 

태초의 아침 / 윤동주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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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천지 이전부터 이미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는 온 우주에 충만해 있어 자유자재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귀한 진리의 화신이요 부처님의 파편입니다

 

 

 

*客醉池邊酌(객취지변작)하고 僧鼓月下門(승고월하문)이라
손님은 연못가에서 잔을 기울고 스님은 달아래서 북을 두드리네

(마치 靜中動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당나라 시인 賈島(가도)의 작품과 닮았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새는 연못가의 나뭇가지에 잠이들고
스님은 달아래서 북을 두드린다

*花笑聲未聽(화소성미청)이요 鳥啼漏難看(조제루난간)이라  

꽃은 웃어도 소리는 들을 수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은 보기 어렵네 
( 신동 매월당 김시습의 다섯살 때의 작품)

 

- 오언추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