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삼매(一行三昧)

2016. 12. 18. 22: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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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삼매(一行三昧)


육조혜능스님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합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것은
모든 것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거나 간에
항상 하나의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 말하기를
‘직심이 곧 도량이고[直心是道場]
직심이 곧 정토다[直心是淨土]’라고 한 말씀과 같다.
다만 직심을 행할 뿐
어떤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

모든 순간에
하나의 직심을 행하는 것을 곧 일행삼매라고
육조스님은 설하고 계십니다.

직심(直心)이란,
당장 그 마음, 곧장 이 마음이라는 뜻으로
매 순간순간 행주좌와어묵동정 간에
분별심에 걸러서 세상을 해석하면서 바라보지 않고
나와 세상을 둘로 나누어 바라보지 않고
다만 분별망상 없이
지금 이렇게 있는 이대로의
당장 이 마음을 뜻합니다.

당장, 곧장,
즉 에둘러 가지 말라는 것이고요,
생각으로 헤아려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장, 곧장에는
너와나, 즉 주객이
둘로 분리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둘로 분리되기 이전의 마음이죠.
이를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면서
나와 세상을 둘로 나누어 놓죠.
그래 놓고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분별하고
내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고
또 그럼으로써 가지려고 하고
밀쳐 내려고도 하죠.

이처럼
좋거나 나쁘다고 해석해서 바라보는 마음은
직심이 아니라 분별심입니다.
좋아서 집착하거나
싫어서 거부하려는 마음 또한
직심이 아니라 분별심이죠.
나와 세상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마음 또한
직심이 아닌 둘로 나누는 분별심입니다.

그래서 「유마경(維摩經)」에서도
‘직심이 곧 도량이고 정토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육조스님은
다만 직심을 행할 뿐
어떤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죠.
다만 직심만을 행하게 된다면
그 어떤 분별심이 없으니
머물러 집착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이렇게 설하십니다.
“나의 법문은 본래부터
무념(無念)을 으뜸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바탕으로 삼으며
무주(無住)를 뿌리로 삼는다.
무상은 모습 속에서 보습을 벗어나는 것이고
무념은 생각 속에서 생각이 없는 것이며
무주는 사람의 본성이다.”


육조스님께서 설하신 무념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다 하면서도 생각이 없는 것이죠.
즉 깨달음을 얻으면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다 하면서도
그 한 생각에
한 치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있지만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직심을 행하기 때문이죠.
분별심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면서도 분별에 휘둘리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직심입니다.

또한 온갖 모습을 다 보면서도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무상인데요,
상이 없다는 것, 상을 타파하라는 것은
내 앞에 보이는 모습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보고도 본체만체 한다는 것이 아니죠.
아버지에게는 부모님의 예를 갖추고
스승님에게는 스승의 예를 갖춥니다.
그러나 전혀 걸림이 없죠.
모습을 다 보면서도
그 모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세간을 살지만
세간 속에서 세간을 벗어나 있죠.
그렇게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본래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주인 것이죠.
다만 헛된 망상을 좇아가기 때문에
머물러 집착하는 허망한 괴로움이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무주, 무상, 무념이라는 가르침은
분별심으로 바라보지 않고
직심으로 바라보기에 가능해 집니다.

분별로서 바라보지 않고
곧장 그 마음을 바로 보게 되면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고
모양이나 생각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생각도 다 쓰고
모양에도 걸리지 않게 되죠.
다 하면서도
하는 바 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조스님의 일행삼매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

    옛날 중국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 대신에 변방에 사는 늙은이란 뜻의
    새옹이라 볼렀다.
    그 새옹은 아들과 함께 말을 기르는 게
    생활이요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그가 기르던 말 가운데 제일 용맹스러운
    말 한 필이 고삐를 끊고 어딘 가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아들은 날 마다 그 준마를 생각하며 한숨으로 지냈다.
    그러자 하루는 새옹이 아들에게 이렇게 위로하는 것이었다.
    "아들아, 크게 슬퍼 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화복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빙빙 돌아다니는 법이니라.
    지금 말을 잃은 불행이 나중에 오히려 행운이 될지
    누가 알겠느냐 ?
    반대로 지금 네가 행운을 맞이하여 크게 기뻐한다고 해서
    그 행운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겠느냐 ? 그게 도리어
    재앙이 될 수도 있단다.
    그러니 순리에 따르며 살아가자꾸나,,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준마가 수십 필의 야생마를 끌고
    새옹의 집으로 돌아왔다.
    새웅과 아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말이 돌아 왔을 뿐 아니라 다른
    말을 수십필 얻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 그르든 어느 날
    아들은 준마가 데리고 온 야생마를 길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만 야생마에서 떨어져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걱정을 하자 새옹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 할 것 없습니다. 말에서 떨어져 죽지 않은 것만도
    천만 다행 지요. 그게 오히려 큰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
    모든 건 하늘 뜻에 맡기는 수 밖에요.
    그로부터 몇 달 뒤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마을
    젊은이들을 모두 끌고 갔다.
    그런데 말에서 떨어져 한쪽의 다리를 못쓰게 된 새옹의
    아들은 끌려가지 않았다.

    塞翁之馬(새옹지마) 변방의 늙은이란 뜻으로
    풀이하면 된다.
    앞에 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재앙이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 셈이다.
    이렇게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은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흉화복이 무상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