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공포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 왜, 우리는 잠에 들 때 ‘혹시 자는 사이에 죽는 거 아니야’ 하고 두려워하지 않을까? - 왜, 우리는 잠에 들 때 ‘혹시 영원히 못 깨어나지는 않겠지’ 하고 두려워하지 않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실상 ‘죽음에 대한 생각’에 대한 공포이다. 실제로 죽음이 찾아오면, 죽으면 그만이다. 죽은 뒤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지만, 그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미리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공포가 몰려온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사납게 몰려온다. 우리는 잠이 몰려오면 그냥 자지, 혹시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느라 잠을 못자는 일은 절대 없다.
죽음도 수면처럼 찾아온다면 어떨까? 죽을 때가 찾아오면, 몹시 졸리는 것처럼, 몹시 ‘줄리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줄리다’는 죽음이 찾아올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노곤한 기분과 의식의 희미해짐이 같이 찾아오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이르는, 필자가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왜 이런 식으로 죽으면 안 될까? 만약 아침에 다시 깨어날 것을 믿기에 잠에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윤회론자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불교신자들은 다시 환생할 것을 믿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다가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아침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어머니, 아버지가 안 깨어나네요. 돌아가셨나 봐요.” 그럼 사람들은 졸릴 때마다 “혹시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아, 뭔지 기분이 이상하다. 이 졸림은 수상해, 혹시 잠에 들면 죽는 게 아닐까?”
잠에 들면 의식이 사라지면서도, 왜 우리는 잠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죽으면 의식이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죽음은 두려워하면서도, 왜 우리는 (표면)의식이 사라지는 (깊은)잠은 두려워하지 않는가?
답은, 잠자다 죽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다른 식으로 찾아온다. 많은 경우에, 죽기 전에 병으로 죽도록 고생하다 죽는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생로병사(生老病死) 중 병사(病死)이다. 갑자기 평화롭게 죽는 게 아니라, 암, 관절염, 심장병, 요실금, 골다공증, 면역력 약화, 습관성 골절, 전립선비대증, 치매 등 노인성 질병에 걸려 오래도록 죽도록 고생하다 죽는다. (유명한 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젊을 때 치던 큰소리는 다 어디로 가고, 치매 등으로 의식을 잃고 헤매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들 쉬쉬해서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을 뿐이다. 도인들까지 이런 험한 꼴을 당해야 하다니, 참으로 인생은 고이다!) 아마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리라.
다르게 상상을 해보자. ‘사람이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순식간에 죽는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끝없이 공포에 시달릴 수는 없기 때문에, 또 그리하면 짧은 생조차 누릴 수 없기 때문에, ‘공포 느끼기’를 포기할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 무감각해질 것이다. 전쟁터의 군인이 그렇다. 신병은 공포심에 오그라들지만 고참은 그렇지 않다. 그냥 열심히 싸우다가 죽을 때 죽으면 그만이다. 신병이 누리는 지나친 공포는 사치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균적인 또는 집단적인) 생존확률을 낮추는 비효율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즉 ‘자다 죽는 법’은, 즉 ‘누구에게나 죽음은 자는 중에 찾아와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운행할 수 없다. 운행 중에 운전사가 깜빡(예를 들어 1초 정도) 졸다 갑자기 죽으면 대재앙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수술도 힘들 것이다. 집도의사가 1초 정도만 깜빡 졸아도 갑자기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대비해서 운전사나 의사가 복수(複數)로 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인간은 ‘갑자기’가 아니라 병으로 서서히 죽어야한다. 병으로 죽도록 고생하는 것은 문명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그리고 천천히 죽음으로써 발생하는, 죽음의 공포 역시 문명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내세에 천국에 가거나 다른 몸을 받아 다시 살아난다면,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문화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원시적인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부시맨들이 좋은 예이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다. 그냥 죽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문명이 가져온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다. 정신적인 질병이다. 문명은 정신병도 가져오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가져온다.
인간은 의식과 지능이 발전하면서 죽음에 대한 엄청난 양의 환망공상(幻想·妄想·空想·想像)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많은 환망공상들이 만들어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만큼 많은 양의 치료법을 제시했다. 그런데 그 치료법이란 것들이 거의 다 사이비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질병을 만들지 않았으면 약도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들은 서로 다른 사후세계와 구원을 제시하므로 많아야 하나만 진짜 약이고 나머지는 다 사이비 약이다. 아마 모두 사이비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성직자들이 거의 (아마 모두) 돌팔이의사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죽기 전에 미리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죽음의 공포가 찾아올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게 열심히 바삐 사는 것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즉,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물론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해서, 적진 깊숙이 즉 죽음 속으로 파고들어가 죽음을 해체하는 방법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럴 시간도 능력도 없다.
실재론이 아닌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에 의하면, 죽음이란 낱말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꿈속이나 환상속의 대상이 낱말(이름)로만 존재하지 실재하지는 않듯이, 죽음도 실재하지 않는 환상(illusion)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힌두교의 불이론(不二論)적 범아일여론(梵我一如論)의 입장이다.
불교 무아론에 의하더라도 죽음의 실체는 없다: 죽음의 주체가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덛덛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두려움도 낱말(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보면 일체가 무아(無我)이므로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생로병사와 공포는 (연기적 緣起的) 현상으로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이에 대한 우리의 극복도 (연기적) 현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익(無益)한 공리공론으로 흐를 뿐이다. 세상(물질세계와 물질적·정신적 제현상)과 몸과 마음이 연기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불교의 수행법이 수승한 이유이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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