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부처 / 성철스님

2017. 1. 30. 20:1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중생과 부처 
                                         / 성철 스님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부처냐”하고 물으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으나,
실제로 어떤 것이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 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또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무심(無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선은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十地), 등각(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대강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사천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며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 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이야기 했듯이 곤충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지,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 보살 까지는 의식 속에서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지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그러면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자체를 불성(佛性)이나 본래면옥(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 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이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춘다 이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단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嚴)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치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만약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室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입니다.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明鏡)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만물을 다 비칩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의 작용을 완전하게 못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확 닦아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에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천 가지 만 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 같습니다.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내사랑 커피향 /이응윤

잠 들기 전
일어 날 때에도
커피 잔을 드는 남자
그래도 아쉬워
하루에 몇 번씩 마시지만
질리지 않는 중독자


보이지 않는
잔 속, 그녀 얼굴에
웃음 주며
세월 가도
풍만한 그 가슴 마시며

커피향 내음 넘어
그녀 체향 취할 때면
서로 사랑 채우다
손 깍지 걸면
또 다시 꿈길에서 만나는 연인

이십 이년 세월 서로 접어
여느, 사랑이 넘 보지 못 할
애틋한 하늘이어,

잠깨면
빈 잔 들고 다가서는
내 사랑
그 커피 향




 




허공만 싣고 돌아오도다 - 야보도천(冶父道川)


길고 긴 낚싯줄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막 일어남에 일만 물결이 따라 일어나도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니

달은 밝은데 배에 가득히 허공만 싣고 돌아오도다.


千尺絲綸直下垂 一派纔動萬波隨

천척사륜직하수 일파재동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야정수한어불식 만선공재월명귀



첨부이미지


이 글은 『금강경오가해』의 야보도천 선사의 게송이다.

야보도천은 당나라 때 스님이나 생몰년대 미상이다.

글이 워낙 명문이며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사찰에서 아침종성을 할 때 반드시 읊조린다.

『금강경』에서

온갖 견해란 실은 견해가 아니고 그 이름이 견해일 뿐이다.

법이라는 생각도 내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야보 스님은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잠이 오면 눈을 감는다.”라 하면서 

이 게송으로 부연하였다.

모든 것이 저절로 그러하고 완전무결한데

굳이 법이라는 생각을 내지 말라.

 
중생을 제도한다고는 하지만

조용한 연못에 낚싯줄을 드리워 물결만 일으킨 격이다.

그러므로 법이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물이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는다고는 하나 

고기가 물지 않는다는 말은 배가 부르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들이 그대로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돌아오는 그 마음은 텅 빈 배에 허공만 가득 싣고

달 밝은 밤에 돌아오는 것과 같은 절묘한 아름다움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시집-『수평선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