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공부야말로 불도의 정문이다 / 청화 스님

2017. 3. 11. 21: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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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공부야말로 불도의 정문이다 / 청화 스님 우리가 가령 수영을 할 때는 물에 들어가서 실제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참선공부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닦아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실참실수(實參實修)라, 정말로 우리 몸으로 부딪쳐서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대강 이치로 체계가 서야 흐트러짐이 없고, 또 능률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덮어놓고 공부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 모두가 다 어느 분야에서나 세밀하게 밝혀 놓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들을 충분히 참고해서 우리의 부질없는 분별시비는 끊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많이 해보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지만, 사실 맨 처음부터 쑥쑥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의 가장 큰 두 가지 원수가 있는데, 이를 불교 전문술어로 하면 도거(掉擧)와 혼침(昏沈)입니다. 도거(掉擧)란, 이것저것 따지고 분별하는 것이고, 혼침(昏沈)이란, 앉으면 꾸벅꾸벅 조는 것을 말합니다. 조는 시간은 죽은 시간과 똑같아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그야말로 참 맑고 청정해 본래면목 자리만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참선을 좀 했다 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는 분별시비가 나온단 말입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생활을 할 때는 안 나오다가도 정작 참선이라 해서 들어앉으면 과거에 섭섭했던 일, 미워했던 일, 좋은 일들이 자꾸만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머리나 몸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익힐 습(習)자 참을 인(忍)자 ‘습인(習忍)'이라, 오랫동안 공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몸에 배어 습관이 됩니다. 처음에 참선공부 할 때 좀 안 된다 해서 그냥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 즉 본래 부처이고, 부처란 것은 무한공덕이라, 무한공덕이 들어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향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근기나 선근에 따라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보통 차원에서는 이른바 ‘경안심(輕安心)'이라, 경안이라는 것은 불교 전문술어인데 여러분들께서는 외워 두십시오.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경안이라는 것은 몸도 마음도 가뿐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할 때는 다른 헛된 생각이 안 일어납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경안이 서야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내 몸을 어느 정도 조복(調伏) 받는 것입니다. 보통 참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겠습니다마는 한 10년쯤 선방에서 고생고생 해야 경안이 좀 나오는 것 같아요. 빠르고 느린 차이는 물론 있습니다. 몇 십 년 된 사람도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역시 참선에 들어가면 몇 십 분도 못 되어 끄덕끄덕 좁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경안이 못 나온 것이지요. 우리 스님네들은 경험도 많고 해서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처음 참선을 배우는 재가불자님들은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참선공부, 이것은 불도의 정문(頂門)이라, 부처님 가르침이 정문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다른 가르침은 방편설도 많이 있고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는 법문도 많지마는 참선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바로 내 마음이 부처요, 마음 떠나서 부처를 구하면 이것은 사도(邪道)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직통으로 들어가는 직설법문이기 때문에 참선이야말로 불도의 정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공부하든지 간에 종당에는 우리가 참선을 해서 깨달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자라면 다 해야 되는 것이고,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선을 해야 됩니다. - 참선은 불교인만 닦는 정문이 아니다 가령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바깥에다 설정하지 않고 하느님이 바로 내 마음의 본체이고, 우주의 본체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데가 없다, 이렇게 법신불(法身佛) 차원에서 하느님을 보면서 참선을 해야 되겠지요. ‘불교인만 닦는 정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서 다른 종교의 우수한 점이라든가 발전적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또 수용해야 합니다. 저쪽 기독교 인구도 지금 17~18억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대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일통법문으로 인도해 가면서 같이 공부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또 그네들이 나가는 공부도 역시 참선공부로 유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하느님을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본뜻도 하느님이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 할지어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수 있을 것이요"라고 한 대목을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본다면, 부처님 경전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고 특히《법화경》과 유사한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어느 분야이든 다른 공부도 그렇겠지만 특히 참선공부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법계연기 또는 진여연기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으로부터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양을 달리했단 말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항상 의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하나일망정 현상만 볼 때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고 나와 네가 분명 다르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이 현상만 보니까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 본 성품자리, 본질을 본다면 혼연일체란 말입니다.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의 현상이요, 마음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현상적으로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달리했을 뿐, 진여불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상(像)만 보고 물질만 보니까 다르다고 하지만 본 성품을 본다면,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크고 작더라도 큰 파도나 작은 파도나 똑같은 물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너나 나나 모두가 같은 몸이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거기에서 참다운 자비가 나오고 참다운 도덕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을에 어울리는 가요 모음

 


01. 고귀한 선물 - 장은아
02. 고엽 - 오준영  
03. 그리운 사람끼리 - 뚜아 에 무아 
04. 그리움만 쌓이네 - 여진
05. 그저 바라 볼 수만 있어도 - 유익종 
06. 기다리게 해놓고 - 방주연
07. 꽃반지 끼고 - 이은희 

08. 꿈꾸는 카사비앙카 - 적우 
09. 낙서 - 한동일 
10. 날이 갈수록 - 김정호
11. 내 사랑 영아 - 휘버스
12. 노을 - 한규철 

13. 눈물 한 방울로 사랑은 시작되고 - 이유진
14. 님을 위한 노래 - 오정선
15. 달구지 - 정종숙
16. 당신은 나의 꿈이죠 - 선우혜경 
17. 당신은 몰라 - 최헌과 불나비

18. 당신은 안개였나요 - 이미배
19. 마로니에 추억 - 박건 
20. 모래탑 - 김훈
21. 목마른 소녀 - 정윤희
22. 무정 부르스 - 강승모

23. 물레 - 유한그루 
24. 바람에 실려 - 하남석 
25. 백지로 보낸 편지 - 김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