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아서 / 껠렌시아

2017. 4. 22. 18: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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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아서 / 껠렌시아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른다.

피난처,안식처라는 뜻이다.



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산양이나 순록이 두려움없이 풀을 뜯는 비밀의 장소, 독수리가 마음놓고 둥지를

트는 거처, 곤충이 비를 피하는 나뭇잎 뒷면, 땅두더지가 숨는 굴이 모두 그곳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작은 영역, 명상에서는 이 께렌시아를 ‘인간 내면에

 있는 성소’에 비유한다. 명상 역시 자기 안에서 께렌시아를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전에 공동체 생활을 할 때, 날마다 열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왔다.

지방에서 온 이들은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 살아온 환경과 개성이 다른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다행히 집 뒤쪽,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된 작은 방이

내게 중요한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그 곳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

나의 퀘렌시아였다. 한 두시간 그 방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다시 만날 기운이 생겼다.

그 비밀의 방이 없었다면 심신이 고갈되고 사람들에게 치였을 것이다.


내가 만난 영적 스승들이나 명상 교사들도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수행자들을

만나지만 수시로 자신만의 장소에 머물며 새로운 기운을 얻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의 샘이 바닥난다.


내 삶에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피해 호흡을 고르지 않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부정적인 감정들로 피폐해해질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여행은 나만의 퀘렌시아였다.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문제들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 자신이 되었으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고 나면 얼마 후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다시 삶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퀘렌시아를 안다.

뱀과 개구리는 체온으로 동면의 시기를 정확히 알며, 제주 왕나비와 두루미도

매년 이동할 때가 되면 어디로 날아가 휴식할지를 안다.

그것은 존재계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한 본능적인 부름이다.

그 휴식이 없으면 생명활동의 원천이 바닥난다. 인간 역시 언제 일을 내려놓고

쉬어야하는지 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몸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퀘렌시아가 필요한 순간임을. 나 자신으로 통하는 본연의, 세상과 힘을 얻을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장소만이 아니다. 결 좋은 목재를 구해다 책상이나 책꽂이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번뇌가 사라지고 새 기운이 솟는다.

그 자체로 자기 정화의 시간이다. 좋아하는 공간, 가슴뛰는 일을 하는 시간,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 이 모두가 우리 삶에 께렌시아의 역할을 한다.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의 명상과 피정, 기도와 묵상의 시간, 하루일과를

마치고 평화로운 음악이나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밤, 내면세계의

안식처를 발견하는 그 시간들이 모두 께렌시아이다.

막힌 숨을 트이게 하는 그런 순간들이 없으면 생의 에너지가 메마르고 거칠어진다.

----중략 ----

 

당신에게 퀘렌시아의 시간은 언제인가? 일요일마다 하는 산행, 바닷가에서

감상하는 일몰, 낯선 장소로의 여행,새로운 풍경과 사람과의 만남. 혹은

음악이든 그림이든 책 한권의 여유든 주기적으로 나를 쉬게 하고 기쁘게 하고,

삶의 의지와 꿈을 되찾게 하는 일들 모두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

좋은 시와 글을 종이에 베껴 적거나 소리내어 읽는 것 같은 소소한 일도

그런 역할을 한다.


긴 여행이 불가능할 때 나는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제주도의 오름을 오르거나

사려니 숲길을 걷는다. 그곳에서 흙과 햇빛과 바람, 성스러운 기운들과

일체가 된다. 그때 발걸음이 곧 날개가 된다.

자연과 연결되는 장소, 대지와 하나되는 시간만큼 우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없다.

그때 우리는 인도의 오래된 경전 ‘아슈타바크라 기타’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삶의 파도들이 일어나고 가라앉게 두라. 너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너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주위 세계가 무채색으로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 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퀘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곳에서 누구로부터도 어떤 계산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자유 영혼의 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이다.


나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 가장 나 자신답고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곳은?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나의 퀘렌시아를 갖는 일이 곧 나를 지키고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류시화 지음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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