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⑵③업의 실천|******@불교의생명관@

2017. 7. 2. 15:35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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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業과 實踐

佛敎와 自然科學 / 朴淳達·吳亨根·曺勇吉·金成九 共著 集文堂 1992. 8. 30

실천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나타난 불교적인 행위를 그 과정에 대하여 분석한다면, 다음 단계를 거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일어나고, 그것이 행동이 되고, 최후에 그 결과가 나타난다.
의지에서 행동의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말하면 원인에서 결과, 인과관계를 원리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위에서 시작해서 자연계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인과의 원리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이와 같이 인간계나 자연계에도 인과의 연쇄에 관계없는 우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비록 한때 우연처럼 보이거나 혹은 우연이라고 해도, 사실은 우리가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뿐이지 원인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불특정 다수의 원인이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연(緣)이라고 한다.
연이란 다수(多數)의 원인이고 모든 조건(條件)을 의미한다.
어쨌든 이러한 인과의 원리는 인간의 어떠한 실천적인 행동에서든지 그 원인이 된다.
업에 대해서 말한다면, 업인업과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업도 또한 반드시 인과의 원리 속에서 작용한다.
이 인과의 원리에 의하면, 원인이라고 정해져버린 소인(素因)은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도 또한 원인과 반드시 결부된다.
여기에 원인과 결과의 연결의 필연성이 있게 된다.
이것이 과학에서 말하는 인과관계의 필연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위에서는 과학적인 인과의 필연성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불교에서는 어떤 하나의 행위에서 하나의 결과가 생기(生起)하기 위해서는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근거로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인이란, 과학에서 말하는 하나의 인에 한정되지 않고 많은 인이 있다.
즉 인과관계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일인일과(一因一果)는 아니고 다인다과(多因多果)로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적 행위의 결과는 일인일과라고 하는 단일한 관계로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여러 인도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선업이 과거에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선과가 하나의 결과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선업인 인이 낙과(樂果)를 생기(生起=발생)하는 과정에서 다른 여러 종류의 인이 여기에 작용하므로 반드시 결과도 낙이라고 하지 않는다.
업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작용이기는 해도 낙과를 생기(生起)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끌어내다(引, aksepa)'라는 것과 '생기다(生, janana)'라고 하는 것이 구별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은 -----인간적 행위도 포함해서--- 결코 무에서 유가 생기하는 것처럼 완전히 새롭게 생기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해 있던 것이 하나의 결과로 '끌어내어져서' 응집되어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에서 유가 '발생한다'는 것은 없다.
업의 힘만이 절대는 아니고, 업은 오직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업은 결과의 출현에 대한 그 조연(助緣)일 뿐이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에 대한 고찰방법이며 만물의 발생 생성 또한 이 범주 내에 있다.
이와 같이 인과관계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하나는 일인일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다인다과의 관계이다.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일인일과의 관계라고 한다면, 불교적인 인과관계는 다인다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