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⑵④업과 열반|******@불교의생명관@

2017. 7. 8. 20:05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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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業과 涅槃

佛敎와 自然科學 / 朴淳達·吳亨根·曺勇吉·金成九 共著 集文堂 1992. 8. 30

업(行爲)은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어져 있다.
몸과 입을 통해서 나타난 업은 육체적인 업이어서 신업(身業), 구업(口業)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마음(意)으로,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정신적인 업은 의업(意業)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신. 구. 의 3업(三業)은 의(마음)에 따라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의를 제외한 몸과 입인 육체만의 행위는 업이라 하지 않는다.
업의 본질은 사(思, cetana)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는 심(心), 의(意), 식(識)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나, 사는 활동 그 자체를 드러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의 원어 cetana는 행위를 표현하는 동명사이다.
어쨌든 만약 육체적인 동작(身. 口)이 정신(思)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운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업이라 하지 않는다.
윤회 사상은 외면적으로 인간을 업이란 주문(呪文)으로 속박한 것이지만, 생명의 무한성의 상징으로서 마음에 의해 파악되었다.
외면적인 속박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마음에 의해서 속박을 전회(轉廻)시키는 것이다.
육체가 윤회한다고 생각한다면 영생(永生)은 생각되지 않는다.
육체는 순간적이고 멸망해서 흔적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육체는 사후에 분해돼서 물리적으로 흙, 물, 불, 공기, 바람인 다섯 요소가 된다는 것이 고대인도 이래로 불교에 계승된 사상이다.
영혼은 어떠한 것일까? 영혼은 육체와 함께 멸망하는 것일까?
그러나 육체의 멸망이 동시에 영혼의 멸망이라는 것을 입증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즉 육체적인 죽음과 영혼의 소멸은 왜 동시에 일어나면 안 되는가?
오히려 우리에게 의식된 경험은 육체와 영혼 또는 마음의 분리가 아닌가?
예를 들면 육체의 죽음은 물체의 소멸과 같은 물리적인 원소로 분해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의 죽음에 슬퍼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왜 단순한 고깃덩이의 멸망에 지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비탄과 공포를 갖는가?
이미 여기에는 육체의 멸망을 인식하는 마음의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육체와 마음의 분리가 있다.
더구나 생명의 무한을 원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고 마음이다.
육체에는 영생에 대한 바람이 없다.
생명의 무한성에 대한 바람은 단순한 마음만의 일은 아닌가?
또는 그것은 실증할 수 없는 단순한 추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원이라는 것은 원하는 것이 실재하지 않을 때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그곳에 소원이 있다.
소원이 있을 때 이미 그곳에 원하는 것도 있다.
소원과 원하는 것이 서로 상통할 때 비로소 인간은 생명의 무한을 자각할 것이다.
앞에서 육체의 사라짐을 지. 수. 화. 풍. 공의 다섯 요소로 분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육체가 분해했다고 할 뿐 엄밀하게 말하면 소멸한 것은 아니다.
이 이론은 자연과학에서 이미 실증됐다.
형상이 없어진 것만으로 육체의 멸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아서 생명의 무한성에 대한 소원은, 우리가 그것을 나누어주고 있는 장소 에너지의 근원적인 충동력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자각과 확신에서야말로 열반이 있다.
이런 철학적 종교적인 체험이 원시 불교에서 현생열반(現生涅槃)이라고 말하는 상태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백홍 이사빈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함께 하고픈 사랑이 있다. 눈물을 흘릴 땐 마음으로 아파하고 비를 맞을 땐 말없이 같이 맞아주는 흙내음만큼 진한 향기가 나는 사랑 그 사랑과 따뜻한 차를 마시며 비가 그칠 때까지 함께 하고 싶다. 그 시간이 한 시간이여도 좋고 하루 종일 이여도 좋고 다음날까지 이어진다 해도 좋다. 잔잔한 음악이 있으면 좋고 그 사랑이 불러주는 노래라면 더욱 좋고 함께 부를 노래가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아무도 모르게 이런 사랑을 꿈꾸어본다.

빗속의 연가 .. 김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