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⑵⑥업과 연기|******@불교의생명관@

2017. 7. 23. 17:31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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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業과 緣起

佛敎와 自然科學 / 朴淳達·吳亨根·曺勇吉·金成九 共著 集文堂 1992. 8. 30

인간적인 존재는 과거 현재에 있어서의 업의 복합체라는 것으로 되었음을 간파할 수 있겠다.
더구나 이 복합체는 난잡한 요소의 집합이 아니고, 질서를 갖는 복합체이다.
질서란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이고, 연기란 상의 상대성(相依相對性)이다.
업과 윤회에 작자가 없으며, 주체도 없다는 것은 복합체를 형성하는 제 요소(六根)에 실질적 존재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제 요소는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질적이고 독존적인 존재라면, 남에 의지한다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남에 의지한다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독존적인 존재성을 박탈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아성의 근거를 연기성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인용해서 밝혀보면,
「비구들이여! 이 신체는 너희들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비구들이여! 이것들은 조작되고, 사념되고, 감수(感受)된 구업(口業)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상윳따-니끼야)
이 신체(我)는 자연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감각대상으로서 추상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신체는 물질과 정신의 결합체이나, 물질은 자연법칙에 의하고, 정신은 찰나마다 상속(相續)하는 마음에 의하여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나타난 가상이다.
거기에 상속의 원리 혹은 자연법칙을 쓸어 없앨 초자연적인 실체(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연기설(緣起說)이 대답을 해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생기므로 이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저것이 사라지므로 이것이 사라진다.」
이 말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성, 즉 추상된 원리성만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연기설의 전모는 아니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원리성은 사물 상호간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판단하고, 또 추리한 것뿐이어서 그것은 일반법칙에도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존재 이외의 제 존재에도 적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연기설은 인간적인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으로써 설해진 이론이어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앞의 문장과 같이 사물 상호간의 관계성만을 지적하는 것은, 현재 및 미래에 대한 인간적 행위의 가능성을 촉진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제시한 추상적인 원리는 인간적인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차원에까지 파고들어서 구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 문장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행(行)이 있고, 행으로 인하여 식(識)이 있고 (名色, 六塵,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가 있고), 이와 같이 이 모든 고온(苦蘊)의 집(集, 원인)이 있다.
그러나 무명을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행의 멸이 있고, 행의 멸로부터 식의 멸이 있고, 또는 이와 같이 모든 고온의 멸이 있다.
이미 일찍부터 불교에서는 인간 의식의 주요 목표를 자연의 인식에 두었던 것이 아니므로, 상의상관성 원리의 보편화는 자연 속에서가 아니고, 인간 속에서만 특수화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인 법칙성인 상의상관성이 인간의 문제, 즉 업으로서 특수화될 때 업의 정신현상에 관한 심리적인 고찰이 일어난다는 것도 당연했던 것이다.
업론의 전개는 내적 경험의 중요성을 보였던 것이다.
무명(無明: 진리에 대한 무지)을 시원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인간에 대한 내적 경험의 분석이었다.
그것은 업의 구조를 경험적으로 해명해서 보인 것이다.
다시 여기에 주목해야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업이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이다.
즉 업은 단순한 의식현상으로서가 아니고, 심리적 '작용'으로서 중요한 과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적인 자가용으로 전개하고 있는 연기는 십이지(十二支, 무명에서 노사)로 이루어졌다.
우선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있고"라고 한 것처럼 행(業)으로서의 생존은 무명(四제 와 緣起의 道理를 모르는 것), 즉 도리에 대한 무지를 근본 원인으로 한다.
무명으로부터 신업, 구업, 의업인 행위의 세계가 전개된다.
행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고 의지를 수반하기 때문에 행위이다.
따라서 행위는 외면적으로 소멸해도 내면적인 성격이 갖고 있는 힘은 남아 있다.
식(識-----안. 이. 비. 설. 신. 의)은 이 업(行)에 의해서 나타난다.
식은 대상을 의식하는 것에 의해서 식이라고 하기 때문에, 식과 대상은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과의 관계이고, 거기에 대상으로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六境]이 제시된다.
식과 6경을 주관과 객관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도 가능하나, 그 경우 주관인식이 객관의 육경을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고, 식과 육경의 본연의 상태를 상호관계로서 파악한 것이다.
다음에 눈에서 마음까지인 감각기관[六根], 즉 감각과 지각의 능력이 나타난다.
6근, 6경, 6식이 성립한다면 인식(認識)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 계위를 촉(觸)이라 한다.
인식의 성립은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서 끝나지 않으며, 거기에서 감정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것이 수(受, 고.낙. 불고불락), 애(愛, 과격한 애욕), 취(取, 집착)라는 계위다.
이것에 의해서 일체의 현상적인 존재가 나타난다.
즉 현상계의 일체 구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일체의 존재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존재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악의 업인과 그 과보에 의해서 경험하고 있는 현존재다.
현존재는 집착(取)의 남은 힘에 의해서 다음 계위로 들어간다. 
그그그것은 생(生)이라고 하나, 경험적인 현존재에서 새로운 생활형태로 태어나기도 하고, 다른 생존형태를 받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의 고뇌가 생긴다.
이 경우에 일체 고뇌는 노사(老死)라는 연기지(緣起支)에 의해서 대표된다.
요약하면, 인간 생존은 무명(無明)을 근원으로 한 행(業)의 세계(無明-行)이나, 그 업에 의해서 감정적이고 지각적인 세계(愛-取)가 전개돼 있고, 그것은 곧 새로운 생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고(生), 여기서 고뇌의 인생(老死)이 나타난다.
무명을 시원(始原)으로 한 업의 세계는 번뇌이기 때문에, 자아라는 주체자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면, 고뇌를 자재력에 의해서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시 불교에서의 인생관의 논리, 즉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논리적인 추론과 상통한다.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상(常)을 바라는 인간으로서는 고(苦: 불안=Dukkha)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가 되고' 또한 고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도피하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이기 때문에 무아(無我)다."라고 추론해 가는 논리에 부합하고 있다.
연기에 의한 고의 생성적인 서술은 자아가 없다(無我)에 관한 심리적인 서술이었다고 해야 한다.
불교에서 업(業:karma)은 타자(他者)인 자재천(自在天: 천신)이나 혹은 어떤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창조하고, 자신이 그 책임을 지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자(自)란 자재천 등과 같이 밖에 있는 '타(他)'에 대한 세속적인 언표(Vohara)다.
'자'는 존재론적으로 제 요소의 복합체이고, 마찬가지로 '타'도 또한 같은 복합체이다.
그런 점에서 '자'도 '타'도 특별한 것이지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륜적인 사회는 이와 같이 '자'와 '타'가 뒤섞인 존재에 의한 질서이기 때문에, 윤리적이고 세속적 차원으로의 책임은 '자'와 '타'가 취해야 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자'도 '타'도 고락을 경험하는 심적 복합체이기도 하다.
고락의 생기(生起)는 '자'에 있어서도 '타'에 있어서도 같은 무명(無明)을 근본으로 한다.
그것은 '자'도 '타'도 초월해서 통하는 공통의 원리이다.
고락은 연기생(緣起生)이다. 연기론에 입각하면 자·타, 비자·비타등의 구별도 없다.
"사리불이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은 업론자로서 고락은 자작(自作, sayamkaram)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문과 바라문은 업론자로서 고락은 타작(他作, aparamkaram)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고락은 자타작이다.
또는 고락은 자타작이 아니고 우연생(偶然生, adhiccasam uppannam)이라고 주장한다.(중략) 세존은 고락을 연기생(緣起生, paticcasamuppnam)이고, 촉에 연유한다고 설했다.(상윳따-니까야)
행위자의 실질적인 존재성을 대상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도리어 그것을 분해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방법론을 불교가 받아들였다. 심리적인 분석에 의한 아의 부정이며 연기론이었다.

  병에 물을 담으면 "물병" 꽃을 담으면 "꽃병" 꿀을 담으면"꿀병"이 됩니다. 통에 물을 담으면 "물통"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도 똑 같아서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좋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고,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 마음 속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 대접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만, 시기, 불평, 등 좋지않은 것들을 담아두면 욕심쟁이, 심술꾸러기가 되어 남에게 대접을 못받고 감사, 사랑, 겸손, 배려 등 좋은 것을 담아둔다면 남들로부터 대접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움님들 마음에 무엇을 담으시겠습니까? 겸손, 감사, 사랑, 배려를 내 마음 항아리에 가득담아 나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과 기쁨을 전파 할수있는 해피바이러스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