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 바로 뜨면 세상이 부처님 품안 / 서암스님

2017. 10. 14. 21:3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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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바로 뜨면 세상이 부처님 품안 / 서암스님 

생각이 흐르지 않는 본래의 자기 자리, 전광석화처럼 빛나는
그 자리가 바로 부처, 여래, 본성, 마음이라고 이름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절대 평등해서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든 상념을 초탈해서 본래 여여하게 있는 자리입니다.
삼도육계(三道 六界)와 우주 만물이 창출된 뿌리입니다.
이 마음 밖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심외무물(心外無物)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그 마음자리는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 없다 하여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이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이 아까 잠깐동안 목탁 치고 조용히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마치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깊은 바다와도 같은 근원적인 존재입니다.
그 자리는 영원해서 무한한 시간을 통해서 그 자리가 없는 때가 없고
무한한 공간을 통해서 역시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주 전체가 바로 그 자리요, 그 자리가 모든 시공을 초월해서 있습니다.
이런 태평스런 근본을 우리가 지니고 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사느니 죽느니 괴로우니 말을 붙일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주인공은 자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는 우주와 통하는 내가 둘이 아니요
전 생명이 하나인 자리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투쟁이 끊어집니다.
상대가 끊어진 절대적인 이 자리를 알 때
세계는 그대로 평화로워집니다.

형단(形段)이 없는 그 자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그야말로 생사시비(生死是非)를 초월한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언제부터 병이 들었는지
그것을 망각하고 이상스런 습관이 들었습니다.
어지러움은 전부 무명에서 일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착각에서 모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고 죽는 것도 착각에서 일어나니 전부 잘못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무명에서 십이연기가 벌어집니다.

조사 스님들이 죽음 앞에서 태연했던 것도
실로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서산스님이나 사명스님이 적진에 들어가 두려움 없이
행동하신 것도 다 이 생사의 도리를 깨달으신 까닭입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환상을 일으켜 고생하는 것입니다.
‘환병(幻病)에 환약(幻藥)’이라,
 없는 병을 보고 없는 약을 쓰는 것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약입니다.
없는 환병이 중생의 팔만사천 병이니까요.
모든 중생이 병이 없으면 부처님의 말씀도 한 마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마음의 힘을 계발하지 못하고,
몇푼어치 안되는 현대문명에 현혹되고 몸과 마음이 약해져
온갖 병 속에서 쩔쩔 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용히 앉아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를 보지 못하고,
위대한 인간의 힘을 등지고 점점 옹졸하게
 조그마한 마음을 쓰며 사는 것이 요즘의 우리들입니다.
 
불교는 한 마디로 자기를 알라,
자기를 아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불교입니다.
경전을 읽는다, 염불을 한다, 주력을 한다 하는 것이
 다 그 자기자리를 찾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밖의 힘에 의존하고 쩔쩔 매는데 부처님은
절대 그런 것은 없다고 딱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만약 내 제자 중에 비록 진리라고 말해지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그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면 그건 내 제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의 어떤 사람이 밀어내도 밀리지 않는
확고한 이념체계와 신앙이 있고
그게 믿음이 되어야 내 제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참선이란 그런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모든 것은 부처가 근본입니다. ‘부처는 바로 마음(佛則心)’입니다.
이 마음의 근본을 모르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이 안됩니다. 
자기의 근본 생명력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어느 위대한 힘을 가정하고,
거기에 노예가 되어 따라가고 구원을 청하는 흐리멍덩한 생활이
오늘날 사회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생명은 각자가 조물주요, 창조주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늘 위에도 내 인생을 간섭할 존재가 따로 없고 땅 밑에도
내 인생을 간섭할 어느 위대한 신이나 그런 힘은 없습니다.
만약 자기를 여의고 그런 힘을 찾는다면
영원히 사도를 헤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희유한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지요. 
불교는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한계도 없는 이 마음을 한 번 쓸 때는 모든 원수도 포용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 절대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광겁다생(廣劫多生)에 사는 사람들은 다 불쌍해요.
그리고 내 동포 형제 아닌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한 끼 굶고 앉아 있어도
기쁘게 사는 인생이 있는데, 이런 탄탄대로를 등지고
옹졸하게 가시밭 속으로 들어가 사는 게 중생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에 흘러가는 그 진리에 순응하며 살라고 했지요.
그 진리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하는
생명의 진리이고 불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꿈을 꾸면서도 그 속에서 좋기도 하고 언짢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밤새 온갖 꿈을 꾼다 하여도 깨고 나면
한바탕의 그림자임이 분명하지요.
 이렇게 꿈 속의 모습이 모두 그림자인 줄 알고
좋고 나쁘던 경계는 사라졌지만 꿈을 꾸던 그 주인공은
내내 근원이 되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 물건은 물 한 방울도 없앨 수 없는 것이 만법의 이치입니다.
오늘날에는 철학이나 과학도 ‘물질불변론(질량 불변의 법칙)’이라 하여
물질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돌이 먼지보다 작은 가루로 부수어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되었다 해도 없어진 것이 아니고, 모양과 위치만 바꾸어
우주 공간에 떠 있다가 언젠가는 또 인연따라 모이고
또다시 흩어졌다가 모여집니다.
 
하찮은 이런 물질도 없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소소(昭昭)하게 울고 웃고
온갖 것을 판단하는 이 역력한 주인공이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귀신이라도 되어 헤매고,
자기 업에 따라 새나 짐승이 되기도 하고,
지옥 천당의 육도 중생에 들락날락 할지언정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영원히 생멸하는 법칙을 우리가 잘 알아야지,
그렇지 않고는 허깨비일 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반성하고
그 마음의 위대한 힘을 찾아내는 것이 한 마디로 선입니다.
우리가 바른 이치를 깨우쳐 꿈을 깰 때 시방삼세의 모든 우주가 나요,
내 몸과 둘이 아닌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알면 자타(自他)가 없고 피아(彼我)가 없고,
선악의 시비가 일어나는 갈등이 없어집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우주 전체가 똑같은 부처임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면 전부 부처님의 품안에 살고,
마음의 눈을 감으면 부처님이 앞에 서 있어도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미련하고 고약한 사람은 아직 철이 덜 난 것이라
 동정하고 그를 위해 바로 이끌어 줄지언정,
철이 덜든 그런 중생을 상대로 원수를 삼거나 해치지는 말아요.

누가 내 얼굴에 똥을 칠해도 씩 웃고 용서하는 마음,
그것이 공부이고 참선이며 염불이자 기도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묘한 이치가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전부 하나로 통합니다.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모르고 보면 말이 다 다르지만
알고 보면 똑같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과법, 윤회법, 인연법인 불교를 공부하는 이는 모든 것을
자기가 해소하고 책임질 줄 아는 인생관을 갖게 되고
 일거수 일투족마다 세월을 허송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불교 공부가 결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생에 익힌 나쁜 습을 뿌리 뽑는 그것이 공부입니다.
나쁜 습만 제거하면 저절로 빛나는 자기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자기를 보게 되면 참으로 편하고 좋습니다.
참선을 한 시간 하는 것이 백년 사는 것보다 좋다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찾아 분명히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욕심에 끄달리지 말고 해야 할 일, 안해야 할 일을 잘 살펴
항상 자기 중심, 자기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은 뭘 하든지 자기 인격이 수양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기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빛나는 정신세계가 펼쳐집니다. 
언젠가는 성불하겠다는 일념으로 한 시간 익히고 두 시간 익히고
자꾸 익히면 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흐뭇한 자기 인생관이 경험됩니다. 오뉴월 한더위에
 땀을 흘리며 앉아서 정진할 때도 희열을 느낄 수 있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자기가 훤히 보입니다.
 
노력한 시간만큼 자기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지요. 
어떤 어려움의 파도가 밀려와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지혜가 생겨 삶이 여유로와집니다.
공부를 처음 할 때는 어렵지만 자꾸 정진을 하면 그런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한 번 공부를 해보면 계속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제는 과학도 부처님 법 문턱에 다다른 것 같지만,
아직 부처님처럼 자기 생명에 몰입해서
둘이 아닌 세계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이론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닌데 칼을 들고
목을 자르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근본 진리를 알려고 하면 잠을 자든 일어나든
자기를 응시하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빛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기 빛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게 되면
자기가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아도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말 말이 행동 행동이 남을 도와주는 행동밖에 할 것이 없게 됩니다.
 
오늘 법문하는 이곳 선학원은 경허, 만공, 만해, 용성 스님 등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처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유서깊은 곳입니다. 
일제하 당시 미나미 지로 총독이 한국불교를 속화시켜
도인(道人)의 출현을 막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31본산회의를 열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그때 회의석상에서 마곡사 대표로 나온 만공스님이
총독의 의도를 미리 알고 벽력같이 할을 했습니다.
 그러자 총독은 만공스님의 일갈에 혼비백산해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어 만공스님은 “전직 테라우찌 총독이 한국의 스님들을 괴롭혀
아귀지옥에서 무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니 먼저 그를 구출하시오”라며 일본의 음모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유마거사와 같은 참 도인의 사자후는 천지를 진동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혼돈도 이 어른들의 정신을 본받아
다시 등불을 밝힌다면 일거에 물리칠 수 있고
새로운 불교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불교운동은 마음의 평정을 구하는 각성의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이 국토에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웃에는 정신이 빠진 사람들이 헤매고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누가 구해 줄 것입니까.
불교의 자비사상이 아니고는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불교가 성할 때는 나라가 성하고, 불교가 쇠하면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오늘날도 불자들이 앞장서 온 국민이 정신을 차린다면
하루아침에 평화로운 정토를 건설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논두렁 밑에 잠시 앉아서 한 생각을 내면
그 사람이 스님이고 그곳이 절이며 그것이 불교입니다.
천백억 부처님의 화신으로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가르친
단군 조상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유마거사가 중생의 병을 대신 앓듯이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정진한다면
불국정토가 바로 이 땅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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