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떠나 道가 있겠는가 / 대정스님 (범어사 선덕)
2017. 11. 12. 18:4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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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사람을 잘 안 만나요. 내가 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나를 큰스님이라고 하면서 무작정 한번 만나겠다고 찾아오곤 합니다. 그래서는 공부에 아무 도움이 안돼요. 화두(話頭) 공부를 지극하게 하는 중에 꽉 막혀버린 분들이 와야 도움이 되지, 그렇지 않은 분은 와도 도움을 못 받아요. 그리고 만나더라도 선(禪)은 말이 아니니까 선의 참뜻만 가지면 내 모습을 보고 내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지. 그게 다예요. 여기에 선지(禪旨)가 다 숨어 있으니 그것 이상은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도(道)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떠나서 별도로 없습니다. 도나 화두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날 때부터 이때까지 눕고 앉고 자고 볼 일을 보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도와 함께 있었지 도를 여의고는 한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로서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 지었고 도로 인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교육 뭐 하나 빠진 것이 없는 종합적인 종교로서 인류의 정신문화를 창조시켜 왔거든요.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 도인데 그걸 모르고 사니 얼마나 안타까워요?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큰 지혜와 큰 자비 원력으로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니까 통달이 안 되고 스스로 확립이 안 되니까 막혀 버리고 이 부작용으로 탐, 진, 치 삼독에 현혹이 돼 가지고 각종 업을 짓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고 확립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복잡하지 않아요. 화두만 하면 됩니다. 화두가 바로 내 자신이니까 화두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화두는 선의 원동력이고 정수고 중추신경입니다. 화두가 없으면 선이 안 됩니다. 이처럼 화두만 하면 문제가 없는데 이것이 좀 어렵고 잘 되지 않으니까 문제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 점이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화두를 조금 해 보다가 잘 되지 않으면 금방 딴 거 찾아요.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화두를 익히려는 노력이 없단 말입니다. 화두가 내가 되고 내가 화두가 되는 것이 하룻밤 반짝 참선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도 법회 후에 잠시 참선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참선이라기보다는 명상에 가깝고 또 그 명상마저도 법회 때만 잠시 하고는 일주일이고 한달이고 일년이고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사는 경우가 많으니 참다운 화두가 될 리가 없지요. 나의 경우도 잠 잘 때도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 있기 시작한 것이 화두 공부를 시작한 후 5년이 지난 뒤부터입니다. 그 때가 스물 세살이었는데 9월경 모악산에 흙으로 얼기설기 3평정도 되는 토굴을 짓기 시작했는데 10월이 되니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가슴까지 차올라 결국엔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어요. 인적도 없는 산속에서 쌀, 보리쌀, 찹쌀을 갈아 만든 가루와 물, 그리고 솔잎가루 만을 먹으며 5개월 정도를 지내며 화두 공부를 했는데 그때부터 화두 공부에 힘을 얻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다리가 아파서 몸을 조복 받겠다는 생각으로 문 걸어 잠그고 밤새도록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견뎠더니 다리에 쥐가 나고 풀리고를 대여섯 차례 반복하더니 괜찮아지더군요.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아무리 오래 앉아있어도 끄덕 없어요. 그때는 한번 앉으면 소변을 보기 위해 일어날 때 말고는 일어날 일이 없고, 잠시 앉으면 해가 지고 또 잠시 앉으면 해가 뜨는데 화두는 역력했죠. 들쥐 한 마리가 내 변을 먹고 함께 살았고 새 한 마리도 늘 일정한 시간에 날아와 내가 주는 가루를 먹고 날아가곤 했을 뿐 인적이라곤 없었어요. 아침에 나가보면 한 줄로 난 호랑이 발자국이 토굴을 한바퀴 돌아보곤 간 흔적이 나 있곤 했어요. 눈이 녹기 시작하자 도반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토굴로 달려왔어요. 그런데 살아 있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요.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얼굴에 빛이 나고 몸에 살이 붙어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했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화두에는 부처가 되고 도가 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갖춰져 있습니다. 화두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도가 되고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화두입니다. 알기 쉽게 말을 하자면 철학의 원조 소크라테스가 했던 ‘너 자신을 알아라’ 했던 것이고 역대의 조사 스님들은 ‘너를 잊지 말아라’ ‘너를 지켜라’ 했습니다. 결코 복잡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복잡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너 자신을 깨쳐라’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근본은 뭐냐? 그 대답은 바로 우리 모두가 똑 같이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있으니 모든 것이 있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있으니까 부처님도 있고, 주님도 있고, 신도 있지 내가 없는 여기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성립이 된다는 간단하고 쉬운 자기에게 있는 가장 가까운 것을 모르니까 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는 내 자신을 아는 것이고 내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이 바로 나 자신이고 인간입니다. 그래서 계행을 근본으로 했지요. 사회에서도 윤리와 도덕 예의범절이 없으면 금수 같아요. 인간이 인간다울 때 도의 그 모습이 나타나지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면 도는 모습을 감춰버려요. 도는 인간성이고 인간의 근본이니까 이것이 바로 계행이 되는 것입니다. 계행으로 인해서 선정, 수행이 나옵니다. 화두 공부에 있어서도 계행은 아주 중요합니다. 살생을 하지 않아야 자비심이 충만하게 되고 도둑질을 안해야 복덕을 구족하게 되며, 삿된 음행을 안해야 청정심이 나오고, 남을 헐뜯지 않아야 진실하며, 술을 먹지 않아야 지혜가 나옵니다. 이게 안 되고서는 화두도 안돼요. 근본계인 오계를 잘 지키면 자신을 절로 알게 됩니다. 양심이 살아나니까 그렇습니다. 계행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 다음은 수행입니다. 수행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죠. 염불, 주력, 참선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화두는 좀 어렵지요. 여러 가지 방법을 계속 하다보면 마음의 안정이 옵니다. 마음의 안정이 바로 자신을 지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자신이 밝아집니다. 이게 바로 반야인데요, 입으로 반야, 반야 해봤자 반야가 안 됩니다. 직접 수행을 해서 내 마음이 밝아올 때 이것이 바로 지혜이고 이게 진짜 반야입니다. 이 반야로 인해서 견성성불은 저절로 됩니다. 견성성불이 뭐냐? 완벽한 인간, 손색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성을 갖춘 분이 바로 부처고 성인이고 참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참사람은 뭘까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알고 보면 참 쉬워요. 앞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해서 불자뿐 아니라 인류가 대오각성하면 인간이 인간다워 질 것이고 그렇게 될 때만이 세계 평화도 있고 행복도 있고, 또 안락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은 남을 이겨야 하겠다, 내가 앞으로 나서야 하겠다는 명예에 현혹돼 있어요. 이런 것들은 뜬구름 같고 허무한데 이것을 모르고 진실인 줄 착각을 하고 있어요. 착각의 원인은 내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짜고 헛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온통 허깨비 세상이 된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정화해서 부처님을 다 만들고 부처님 국토로 만들어 다시는 인간이 지어서 고통 받는 일이 없도록 해보자는 것이 부처님 자비이고 원력입니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때가옵니다. 우리는 세세상행보살도(世世常行菩薩道) 구경원성살바야(究竟圓成薩婆若)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婆羅蜜)이라는 발원을 많이 합니다. 세세상행보살도라는 것은 부처님 원력입니다. 보살행은 곧 자비행을 행하는 것이고, 그 자비행으로 인해 불법이 살아나고, 불법이 살아난다는 것은 우리 인간성이 살아난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자비의 내용이 뭐냐 하면 가장 쉬워요. 초등학교 책에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직 사랑과 이해와 양보, 인내, 용서하는 마음이 바로 자리이타의 대승보살심입니다. 크고 넓고 좋은 이 마음이 그대로 도심입니다. 보살의 정신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고 나는 안 될지언정 남을 승화시키는 이와 같은 마음이 그대로 사랑입니다. 말은 쉬운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사랑은 그만두고 절대 양보할 수가 없고 죽어도 용서 못한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고 보살도 정신입니다. 사부대중 즉, 승속남녀노소를 떠나서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수도(修道)와 전법(傳法)을 행하는 것이 구도자의 근본이며 우리 불자들이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것이 바로 보살도이고 묵묵히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정리=천미희 기자·사진=고영배 기자 대정(大定) 스님은 1931년 대구에서 태어나 1946년 백양사 운문암으로 출가, 3년 뒤 금산사에서 유재환 스님을 은사로 보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1959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모악산, 지리산 등지에 토굴을 짓고 생식하며 수행 정진해오다 1989년 이후 범어사 휴휴정사에 주석중인 스님은 ‘누가 나에게 도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한번 웃음으로 그 답을 대신하겠노라’는 게송처럼 공부의 길을 묻는 구도자들에게 한번의 웃음으로 그 길을 열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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