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18. 20:1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향상심向上心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3월 1주차: 불기2554년 3월 7일
어제가 얼음 아래 있던 개구리도 그 깨지는 소리에 놀라 깬다는 경칩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아직 개구리가 아직 안나온 것 같네요. 오늘은 귀하신 분이 새롭게 오셨는데, 환영합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향상심(向上心)입니다. 향상심은 많이 쓰이는 용어는 아닙니다. 오늘은 향상심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꿉니다, 여기서 꿈이란 잠자면서 꾸는 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항상 꿈꿉니다. 행복한 삶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란 단어만큼 추상적인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제는 그 일로 행복하지만, 내가 오늘은 그 일로 눈물짓습니다. 내가 어저께 똑 같은 일로 울었는데, 오늘은 그 똑같은 일에도 웃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감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즘에는 행복지수가 계량화되어, 감성지수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행복은 감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은 매 순간마다, 즉 그 때 그 때마다 행복하기도 행복하지 않기도 한 것입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릉도원을 꿈꾸었습니다. 중국 동진의 도연명의 글입니다. 어떤 나무꾼이 길을 잃고 헤메다가 동굴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럴 때 꼭 동굴이 나타납니다. 나무꾼이 길을 잃고 헤매일 때, 계곡물에 복숭아가 떠내려 오는 것을 먹게 되고, 이 복숭아 떠내려 온 곳을 따라가면 사람들이 살겠다 싶어 계곡을 따라가 보니 도원(桃源)이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원은 복숭아뜰이라는 뜻입니다. 동양에서 가장 화려한 꽃이 복숭아꽃입니다. 실제 여기서 말하는 복숭아인 들의 개복숭아꽃이 피어있는 걸 보면 화려합니다. 그래서 바람기를 일컬어 도화살(桃花殺)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가 그 마을에 들어가 보니 남녀노소 태평스럽게 밭을 갈고 행복하게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처자식을 데리고 그 마을에 살려고 찾아가 봤더니, 그 마을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상이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얘기의 줄거리입니다.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이 꿈에서 무릉도원을 갔다 왔는데, 이 이야기를 화공 안견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입니다. 그런데 안견의 이 그림이 이상한 것은 그림에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복숭아꽃은 만발한데 사람은 보지 못한 꿈 내용을 그대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평대군이 꿈꾼 도원에서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의미심장한 실마리가 있습니다. 당시의 안견의 처지와 관련해 심리학적 연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동양이 이상향으로 무릉도원을 꿈꾼다면 서양은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앞서 무릉도원 이야기에서 '그 곳에서 태평스럽게 밭 갈고 일했다'고 무릉도원을 묘사했습니다.
행복은 평화롭고 안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단순히 어떤 하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3일을 굶으면 편안하고 안락할 수 있겠습니까? 굶는 것과 스스로 택하는 단식은 다릅니다. 단식을 하게 되면 처음 3일 동안은 아주 배고픕니다. 그래서 미운 놈이 있으면, 단식하는 옆에서 찰떡을 구워 먹으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 단식 중에 허겁지겁 찰떡을 먹다 죽은 사례가 있습니다. 3재8란(三災八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3재가 모두 8난에 들어있는데, 그 8난 중 하나가 기(飢), 즉 굶주림입니다. 8난 중에 배고픔과 목마름을 뜻하는 기갈(飢渴)이 있습니다. 그래서 삼재팔란이란 아주 어려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단식을 할 때 처음 3일 정도는 괴롭지만 한 일주일 지나면 아주 편안해집니다. 그러나 양식이 없어 굶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 60년간 두부를 전혀 먹어 본 적이 없다는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처지에서 살림하는 사람이 두부를 사지도, 요리하지도, 먹지도 않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그 할머니의 국민 학교 5학년 정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넉넉찮은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머니는 두부 장사였습니다. 그년 아래로 어린 아기가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엎은 채 두부를 팔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과 다름없이 그녀의 어머니가 밤새 두부를 만들고 장사를 나서려는데, 어린 아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에게 아이를 돌보게 하고 장사를 나갔습니다. 학교에도 가고 싶고, 놀고도 싶고 하지만 아기를 돌봐야 했으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놀고 싶은 마음에 아이를 잠깐 눞혀 놓았는데, 점심 먹으러 온 아버지가 야단을 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아이를 엎고 어머니를 기다립니다. 두부를 다 팔아야 돌아오는 어머니는 그날따라 두부가 잘 안 팔리는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아이를 엎은 채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잠이 듭니다. 요즘 시간으로 치면 저녁 8시 정도나 되었을까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어머니가 그 애기를 않는 순간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녀가 잠든 순간 애기인 어린 동생이 죽었지만, 누나는 그 동생이 죽은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이가 죽자 아버지가 집을 나서더니 이웃에 사는 삼촌을 불러 죽은 아이를 멍석에 말아 산으로 가는 걸 보게 됩니다. 그 할머니는 자기는 그 이후로 자기 손으로 두부를 만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70이 넘었는데도, 두부를 보면 죽은 동생을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행복, 즉 안락하고 평화롭다는 것은 아주 포괄적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절에 가면, 스님들이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네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라고. 과연 마음이 편치 않아서일까요? 앞서 이야기한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동생이 죽은 할머니 자신의 문제일가요? 할머니가 그런 일을 겪은 것은 당시 그 가정의 현실이지, 할머니 자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향상심은 안락하고,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향상심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짊어지고 삽니다. 무슨 얘기냐면 과거 유년기의 상처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띠 수행 시 유년기를 보게 됩니다. 어떤 수행자가 사띠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네댓 살의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엄마와 아빠는 부부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집을 나갑니다. 아이는 자신도 데려가라고 매달립니다. 부부싸움 끝이라 화가 난 엄마는 아이를 떼어낸 채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버립니다. 그러자 아이가 엄마를 쫒아 달려 나갑니다. 그러나 곧 엄마는 보이지 않고 아이는 어두컴컴한 낯선 곳을 헤멥니다. 그러다 그 곳에서 잠이 듭니다. 그 때 그 수행자의 눈에서 눈물이 납니다. 그 아이가 누굴까요?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 수행자는 아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수시로 싸웠습니다. 그 수행자 자신은 그 동안 아내와 산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애타게 불렀는데도 집을 나가버린 엄마와 산 것입니다. 물론 엄마가 그 뒤에 집으로 돌아왔었겠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 순간 엄마가 아이를 버린 것입니다. 엄마는 찾을 수 없었고, 아이는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밖에 나가는 것이 누구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내가 아닌 엄마와 산 것입니다. 엄마와 아내는 그의 잠재의식 속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향상심을 못 지닐까? 왜? 우리의 마음속에 기름끼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살이 찌고, 둔하고, 무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하지도, 안락하지도, 행복하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기름지다'라는 표현을 처음 들어보신 분은 생소할 것입니다. 다른 분의 그를 인용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소자인 환제 박규수는 완당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평에서 " 완옹(阮翁,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을 따르고 이북해(李北海, 唐의 李邕)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박규수전집』,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 고 하였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지나치게 기름지고 획이 두터운 게 흠이었는데, 제주도 귀양 이후로는 기름기가 빠지고 골기가 있게 되었다는 평입니다. 여기서 골기란 금석기를 말하는 것으로, 전서를 머금고 예서의 풍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한시대 비석이나 명문에 남이 있는 글씨 예서는 그 이전 시대의 글인 전서의 영향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고졸(古拙 )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향 가던 길에 쓴 전라도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이라는 편액 글씨는 획이 기름지고 두텁습니다. 유배 이후 1846년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각'이라는 편액 역시 추사의 글씨입니다. 그의 증조부 김한신이 중건한 화암사는 김정희 가문의 원찰이기도 합니다. 귀향 후 중수하면서 쓴 김정희의 편액 글씨는 기름지지도 두텁지도 않습니다. 마치 중국의 전설적 미인 조비연을 보고 있는 듯 하다고나 할까요? 조비연은 얼마나 날씬한지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통통한 미인 양귀비와 비교되는 미인이지요. 옛날 글에는 허풍과 과장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특히 비문을 읽으면서 그 분이 그와 같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상해집니다. 그 시대의 허풍과 과장 정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이 기름지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아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즉 담지 않아야 할 것을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겁고 굼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락하지도, 평화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아직도 아이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그 아이는 백골이 되어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말입니다. 누가 옳으냐 혹은 그르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할머니의 몫입니다. 누가 그른가 또는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른가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상담할 때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댁이 뭔 걱정이 있어? 남편 돈 잘 벌어다주지, 애들 공부 잘하지. 지금 여기 와서 날 약 올리는 겨?"그러나 그 분 입장에서는 그 조건 자체가 불행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역사적인 사실인지에 관해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58세라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가 초고속출세를 하더니 몇 년 안에 정승벼슬을 하고, 남이의 영수에 오른 미수 허목에 관한 일화입니다. 내가 예전에 어떤 노스님에게서 들은 일이니 역사적 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필자 주: 실제 조사해보니 허목의 아내는 오리 이원익의 손녀로 허목은 이원익의 사위가 아니라 손주사위 입니다) 아마 뻥과 과장이 좀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영의정이던 오리 이원익은 (관)상학의 대가이기도 했답니다. 그의 슬하에 있는 아들은 젊어서는 좋으나, 늙어서 별로였지만, 딸은 젊어서는 별로이지만, 늙어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정경부인이 될 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사위를 찾아 나섰는데, 경기도 파주에서 머리도 부시시하고 떡거머리닌 총각을 보고 쓸만 하다 여겨 그 집을 찾아가 용건을 말합니다. 그랬더니 그 홀어미니는 자신이 데리고 살 것도 아니라면서 아이에게 물어보라는데, 당사자는 장가갈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3일을 빌고 빌어 사위가 되기로 승낙을 받고 서울로 데려 옵니다. 이 당시에는 혼인을 하면 처가살이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장가를 든다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결혼하여 신혼 때 본가로 들어가면 쌍것 취급을 받던 때였습니다. 처가 집에서 아이가 어느 정도 커야 처자를 데리고 친가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데려와 혼례를 올리려는데 때 빼고, 광내고 하지 않고 그대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부인과 딸아이에게 자랑하는 게 무색하게도, 아내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딸에게 의견을 구하자 당자자인 딸은 힐끗 보고 좋다고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허목은 처갓집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 취급을 받게 됩니다. 주인이 그런 취급을 하니 종들 역시 그렇게 대접합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그저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콧구멍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허목의 친가로 돌아가 본격적인 결혼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내에게 먹을 갈라고 시키더니 발가락에 붓을 끼우고 치마폭을 펴라고 이르고는 거기에 글씨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보기에 이 글씨는 웬만한 명필들이 손으로 쓰는 글씨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 글씨를 보고나니 아버지가 왜 이 사람을 선택했는지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친정에서 종을 보내, 서울로 데려오려 하여도, "나 보리밥도 맛있어, 행복해" 하면서 어머니께 걱정 말고 잘 있다 전하라 합니다. 그 남편이 나중에 우의정이 되어 당시의 당쟁에서 상대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좌지우지하는 허목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춥고, 배고프고, 헐벗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내 남편이 언젠가는 출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선비의 가 공부하는 목적은 권력을 쥐고 뜻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숙종 때 우의정의 벼슬을 제수 받은 윤증이 그것을 거절한 것은 벼슬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할까봐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임금의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상태에서 우의정을 제수 받았는데, 그가 조건을 내겁니다. 1)인현왕후의 삼촌 민정중 등을 비롯한 외척의 사직 2)숙종의 전처인 광산김씨 일족인 김만중, 김익훈의 사직 2)송시열의 은퇴 등. 그러나 이런 조건을 들어 줄 수 없었습니다. 왕이 필요한 건 송시열을 견제하는 윤증이이어서, 송시열을 제거하면 다른 사람 역시 견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증이 벼슬을 나가지 않는 것은 그 조건이 수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선비가 권력을 잡는 이유는 자신의 뜻을 펴려는 이유입니다. 퇴계 이황 역시 대제학, 좌찬성의 벼슬을 하면서도 끝까지 관직에 남은 이유는 뜻을 펴려면 권력을 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수 허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허목의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장래에 권력을 잡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현실이 처한 좋지 않은 조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의 얘기에서 '네가 무슨 걱정이냐? 남편 돈 잘 벌어다주지, 애들 공부 잘하지."는 남의 입장입니다. 행복의 조건처럼 보이는 남편의 출세, 아이의 공부 잘함은 본인에게 불행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향상심은 기름기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기란 과거의 기억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잠재적으로 우리를 지배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은 오직 생각이라는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운전자일 뿐입니다. 그 도로가 생각입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이란 어디서 오는가?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축적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벗어나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지금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내 경험과 기억이 지금 이상황에서 판단하게 하는 힘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매 순간 선택하는 동물입니다. 지금의 선택은 과거의 것이 규정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지금 선택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기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둑에서 '장고 끝에 패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띨띨할수록 머리가 뽀개져라 생각합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바로 판단합니다. 미국 CEO들의 성공사례에 관한 통계를 보면, 유능한 CEO일수록 결재가 올라왔을 때'살펴보겠으니 놓고 가게' 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와 그 아래서 딸랑딸랑 하는 자와의 차이입니다. 그 자리에서 기획안을 읽고 추진하는 것이 최고 CEO들입니다. 처음의 판단이 가장 옳은 것입니다. 오래 붙들고 있으면 과거의 정보들 끼리 충돌합니다. 생각을 서핑 하는데 풍랑이 일어 꼬꾸라집니다. 고기를 잡으면 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머뭇거리면 태풍을 만납니다. 이 때 바로 돌아오면 내 기억의 정보와 다른 정보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학습한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60년 전 부부싸움 끝에 어머니가 나갔다던 수행자는 현재의 수행자라기보다는 5살 시절의 아이입니다. 마음의 감정, 육체적 현상이 수행자이지만 5세 때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 흔히들 뭘 봤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긴 뭘 봅니까? 그가 봤다는 건 과거에 입력된 정보입니다. 즉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본 것은 없습니다. 왜? 그건 나의 눈, 나의 귀, 나의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에 따라 내가 움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지금의 선택도 알고 보면 과거의 선택이며, 지금의 선택은 바로 미리 선택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안락하고 행복한 향상심으로 선택하느냐 기름지고 둔중한 향하심으로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딱 2가지만 존재합니다. 나와 대상. 그 외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은 대상입니다. 나와 대상?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현제 세계 인구가 60억이던가요? 그러나 인 인구를 좁히면 두 사람만이 존재합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일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향상심을 얘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안락하고 평화로와야 선택이 분명해집니다. 우리의 선태, 즉 지배할까 받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합니다. 돈, 이쁜 각시?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돈을 벌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지배할까 또는 지배받을까? 그것만 선택하면 나머지는 모두 해결됩니다.
흔히 학교 선생님은 인생의 목표를 새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목표가 아니라 목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세우는데, 왜 그것을 목적하는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목적을 이루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지배하는 자, 지배 받는 자에 대한 선택도 목적이 있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적만 있으면 됩니다. 초등학생에게 목표를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을 합니다. 목적이 있는 자는 자기가 그걸 왜 그것을 목적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목적입니다. 이유를 몰라서 목표입니다. 매 순간의 선택은 목적인가 목표인가입니다. 즉 지배하는가 지배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가 선택한 나입니다. 지금의 나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선택한 나입니다. 지금의 나가 과거의 나가 선택한 나이듯이,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선택한 나입니다. 이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되려면 향상심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기름끼가 잔뜩 끼어 있으면, 둔중하고 무거워 향상심이 없어지고,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단식을 일주일 해보면, 생각이 맑아집니다. 처음에는 배고프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 냄새가 역겹기도 합니다. 평화롭고 안락해야 실수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기름끼가 많이 끼면 계산기 두드리기 바쁩니다. 이 세상의 두 가지는 나와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나만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도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한다면 내가 두드리는 대로 세상이 돌아갈 것입니다. 그들도 똑 같은 시간에 똑같은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 다른 이들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1을 누를 때 대상도 1을 누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택이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0을 누를 때, 그들이 1을 누르면 관계없습니다. 내가 1을 누를 때 대상이 1을 누르면 그 확률 아래 수없는 확률이 있습니다. 내가 1을 누를 때 대상이 1을 누르면 똑 같은 정답, 똑 같은 확률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의 모든 국가가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택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향상심, 즉 안락하고 평화로운 마음(원어 upekkhā-sati-pārisuddhi)이 있어야 합니다. 사띠가 현전해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오류도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향상심입니다. 항상 향상심을 가지십시요.
오늘 처음 오신 불자님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불자님들에게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저 봄날의 벗꽃이 활짝 피듯, 모든 일들이 활짝 피길 기도합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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