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心에 處하라 |…… 혜천스님설교

2017. 11. 25. 22: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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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心에 處하라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3월 2주차: 불기2554년 3월 14일) 

 

이번 주 강론 주제는 '진심에 처하라'입니다. 진심에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법정스님의 입적 뉴스가 매일 나옵니다. 그 분이 꽃을 좋아했는데, 고향인 해남의 매화와 동백이 한참 필 때 돌아가셨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실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매화와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동네를 뛰어놀던 어린시절일까요? 74년 그가 쓴 책 <무소유>처럼, 마지막 소유물인 몸조차 놓게 되었구나하고 기쁘게 생각했을까요?

 

오늘 강론의 주제는 '진심에 처하라'입니다.

 

어느 주부가 가족을 위해 어물전에 고등어를 사러 갔습니다. 고등어 아래 국내산, 중국산, 북한산이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주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국내산은 믿음은 가는데 비싸고, 중국산은 싸긴 한데 믿음이 안가고, 북한산이 싸면서도 조금 끌립니다.그래서 주부는 그 중 어느 것을 살지 한참을 망설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 기꺼이 국내산을 선택합니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한 것같죠? 이럴 땐 박수를 쳐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냉정하게 한 번 봅시다. 고등어가 어디서 잡혔을까요? 사실 같은 장소에서 잡힌 것입니다. 중국배, 한국배, 북한배가 잡았기 때문에 각각 중국산, 국산, 북한산이라고 이름 붙은 것입니다. 같은 배,같은 수역에서 잡혔는데도 배의 국적에 따라 생산지 표시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 주부는 절반값에 살 수 있는 것을 바가지를 쓴 것입니다.

 

왜 그러면 주부는 그 고등어를 샀을까요? 중국산은 좋지 않다, 국내산은 믿을 수 있다, 북한산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국산을 산 것입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엘렌 랑거의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새벽 2시경에 누군가가 문을 힘차게 두드립니다. 한번에 보아도 그가 차고 있는 비싸보이는 시계와 다이반지, 그리고 부티나는 옷매무새를 보면 한번에 그가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제가 이혼한 전처와 내기를 했는데, 가로90cm 세로210cm의 판자를 먼저 가지고 가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판자를 제게 주신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10,00$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제안합니다.  처음 새벽 초인종 소리에화가 나 있었지만, 거액의 조건에 현혹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판자를 구할 수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목재소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아는 목재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시간에 열어 놓을리도 없습니다. 그는 아쉽지만, 자신은 그런 판자를 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8시쯤 출근길에 신축건물 현장에서 새로 달려고 세워둔 문짝을 발견합니다. 마치 그는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합니다. 그것은 새벽에 주기만 하면 10,000$를 벌수 있었던 바로  가로90cm 세로210cm의 판자이자, 문짝이었습니다. 왜 내가 손에 쥐고 있던 문쩍을 떼어 줄 생각을 못했을까?

 

그 남자는 왜 문짝을 떼어줄 생각을 못했으며, 그리고 그 주부는 왜 국내산 비싼 값의 고등어를 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죠. 그렇다면 경험이란 무엇인가? 입력된 정보죠. 문은 문으로 밖에 입력되어 있지 않아서 문은 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90*2100의 문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문판자인 줄 모릅니다. 문에서 떨어져야 비로소 판자인 줄 압니다. 고등어의 경우도 국내산은 좋고, 중국산은 안 좋다고 안다. 같은 배, 같은 곳에서 잡아도 중국산이라면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습(習)이라고도 할 수 있고, 다른 표현으로는 생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이나 정보를 벗어나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텅비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이 내 생각, 내 사고, 내 주관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밟아온 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밟라온 길만큼만 볼 수 잇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발아온 길은 내가 학습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된 책도 있습니다. 인간은 습된 나입니다. 즉 학습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내 생각이라고 하는 것, 내가 안다는 것은 모두 이 범주 안에 있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마음을 보고, 몸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메트릭스>란 영화를 본 적이 있으신지요. 감독 자신이 이 영화를 불교적 세계관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메트릭스는 한정된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 공간은 진실이 감추어지고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영화를 보면 실제 그렇습니다. 그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은 그 프로그램에 따라 보고, 느끼고, 압니다. 그 사람은 메트릭스 속 가상공간에 있으며, 그 속에서 음식을 먹고 맛을 느낍니다. 그러난 먹는 것도 맛을 느끼는 것도 실제가 아닌 프로그램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상공간입니다. 내가 왜 이 영화를 말하는가? 우리는 메트릭스라는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처럼 살죠.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일까요? 서산대사는 임종전 그의 초상화에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전거시아 팔십년후아시거)라고 썼다고 합니다. 줄여서 渠是我 我是渠 (거시아 아시거) 라고도 하는데, 80년전의 그사람이 나이더니, 80년후 내가 그 사람이더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있지 얺아 입적했습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같은가요? 아니면 다른가요?  

 

저번 주 강론에서 어떤 수행자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외출을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그 이유는 5살 때 어머니가 매달리는 자기를 버리고 뛰쳐나갔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어머니와 아내는 별개의 사람입니다. 그러난 그 노신사에게는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서 아내의 외출은 자신을 버리는 행위로 받아들여 집니다. 잠재의식이란 말 대신 불교에서는 심층의식이라는 말을 합니다.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같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의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있는데, 다만 내가 느끼지 못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심층 아래 자리잡고 있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판단의식은 이 심층의식과 관련됩니다. 우리는 이걸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의식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즉 거기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양들의 침묵>이라는 영화는 현대의 심리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디 포스터가 맡은 FBI의 견습요원을 최고의 정신과 의사이며, 범죄분석인 동시에 또한 엽기적인 살인마인 레터 박사가 만납니다. 상원의원의 딸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박사는 아주 정확한 사람입니다. 이번 부산에서 일어난 여중생 납치, 살해사전에 대해 언론에서 연일 경찰을 질타합니다. 경찰이 무능해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식의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아이를 납치해서 살해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사초기 가출로 단정지어 버립니다. 게다가 그 나이에 납치되면,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할 수도 있는데, 그런 흔적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납치되었는데도, 범죄심리학에서는 납치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찰은 예측할 수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입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유사한 사건에 이미 예전에 있었더라면, 추론이 가능하겠지만, 없었기 때문에 추론할 수 없습니다. 백지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레터 박사는 그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조디 포스터의 유년기를 딱 짚어 얘기합니다. 어렸을 때 그녀는 먼 친척집에서 양육됩니다. 그런네 밤마다 우리의 양들이 웁니다. 갇혀 있어서 운다고 생각한 그녀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어느 날 밤 양들을 모두 풀어줍니다.  그녀에게는 우리에 갇힌 불쌍한 양들이지만, 친척집 아줌마에겐 생계의 수단입니다. 이 생계의 수단이 한마리도 남김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당장 사는 것이 걱정인 문제에 봉착합니다.

 

사람은 이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유년기가 그 사람의 전 일생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를 자주합니다. "부모님은 훌륭한데, 자식은 왜 저 모양일까? "부모님이 훌륭한데 과연 자식이 저 모양일까요.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삶은 유년기에 결정됩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순간에 결정됩니다. 수정되는 순간, 그 사람의 지능, 건강 등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요새는 남의 자식 노릇도 못하는데, 남의 부모 노릇을 하려니 너무 힘듭니다. 에둘러 말하니 어렵습니까? 무면허 부모가 많다는 뜻입니다. 자동차 뿐 아니라 국가가 부모 면허도 관장하여 부모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면허를 발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정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데, 헬렐레 술먹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물론 이게 다는 아니어서, 태어나서의 성장기 환경도 중요합니다. 수정순간은 원인, 즉 인因이되고, 태어나서 어떤 양육을 받는가는 연緣이 됩니다.  인연因緣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인因( 태어나는 것) + 연緣(성장, 환경). 그런데 연이 더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정신과의 스트레스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환경이 스트레스를 줍니다. 선천적으로 아픈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아프다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할 때 생긴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환경(=조건)입니다. 환경이 그 사람의 일생을 지배합니다. 절대 유년기의 내 경험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경험 중 특히 상처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신의학 용어로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우리의 수행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가 전원을 끄야 합니다. 무슨 전원을? 우리는 프로그램된 것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입니다. 실질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입력된 정보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느날 갑자기 고행을 그만둡니다. 고행을 그만 둔 고타마 싯타르타는 네란자라 강에 목욕을 하고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먹고 보리수나무 아래 앉죠. 우리는 이 고타마의 행동의 동선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왜 고타마가 어느날 갑자기 고행을 관뒀을까요? 그 일로 존경과 찬탄을 받기도 하지만, 고타마 싯타르타가 타락했다는 주위의 비난도 동시에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앉습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붓다가 고행을 했다는 것을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깨 세알만 먹고, 초인적으로 고행과 단식을 거듭했다느니 얼마나 열심히 정진했는지 머리에 새가 집을 짓고 새끼를 쳤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고행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래 고행자는 인도 최고의 성전인 리그베다에 등장합니다. 인도의 고행자란 명상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발을 굶고 하는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수행자들은 수행을 할 때 소마를 한잔 마시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인도의 소마제는 소마를 마시고 신에 대해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소마가 무엇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광대버섯의 추출물이라는 것이 유력한 견해입니다. 아리난족의 후예인 인도인들이 원래 거주하던 러시아 코카서스 지방에 광대버섯이 많다고 합니다. 이 버섯을 많이 먹으면 죽습니다. 그라나 적당히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렇다고 따러 가지는 마십시요. 그러다 죽으면 본인에게는 최고의 죽음일지 몰라도, 가족에겐 좀 그렇겠지요. 최고의 죽음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최고의 죽음은 고스톱을 치다가 광팔고 죽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죽음은 3일 정도 입원했다가 유언을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3일이 지나면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우리 어머니의 임종 시 나는 세번을 불려갔었습니다. 차수가 거듭될수록 강도가 떨어집니다. 마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말입니다.  그저 약 몇 첩 쓰고 가는 게 최고입니다. 소마(광대버섯)를 먹 지 않고도, 명상을 하면 좋다는데 먹고하는 명상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행을 왜 그만 두었을까?  이 동선을 따라가 보면 붓다가 전원을 껐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그 기계장치의 전원을 껐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의사가 유년기 기억을 끄집어내어 보여 줍니다. 정신치료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범죄심리학에서 범죄자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도 그 사람의 의식 세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동물이 항상 자기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사냥 잘하는 사은 그 길을 잘아는 사람이고,거기에 올무를 놓으면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산에 가면 그 짐승들가는 길이 훤히 보인다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심층의식에 따라 움직입니다. 심층의식이란 어려서부터 학습된 의식입니다. 바로 붓다는 그걸 끊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진심眞心을 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대해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정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학습된 프로그램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걸 내가 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게 수행입니다. 또한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반드시 내 의식을 되벏아가야 합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되밟아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서산대사의 시중에 야설이라고 있습니다. (아난주: 사실 야설(野雪)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서산대사가 아닌 이양연의 시라고 한다)

 

눈 길 뚫고 들길 가도  (눈밟고 들 길 걸어가노니)/모름지기 어지러이 가지 못하네/오늘 아침 내 발자국이/마침내 뒷 사람의 길이 될 것이니( 穿雪野中去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 爲後人程 )

 

러나 시에서 처럼 뒷 사람은 둘째 치고, 내 발자국이 어지러우면 내가 되밟아가기도 어렵습니다. 반듯하게 걸으면 되밟아가기 쉽습니다. 어지럽게 걸으면 되밟아가기도 어렵습니다.

 

한옥집을 해체할 때는, 부제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겼다가 나중에 다시 맞춥니다. 부제가 바뀌면, 맞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옛날 <마당>이라는 잡지에서 본 글에 대한 기억입니다. 성이 고씨인 사람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는데, 우리나라에서 날고 긴다는 전문가들이 남대문을 뜯어 놓고 나서 맞추지 못해 자기를 찾아와서 맞춰주었다는 얘깁니다. 어떻게 맞추었을 까요? 그 분은 부제에 번호를 메길 필요도 없이, 척 보는 안다는 것입니다. 설계도면 같은 것도 필요없습니다. 그가 도면이라는 것입니다. 집을 보면 그 집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사람을 무식하다고 여깁니다. 학위나 논문같은 것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유식한 사람들은 집은 뜯어 놓고도 맞추지 못합니다. 우리가 되 밟아 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집을 뜯어 놓고 다시 맞추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그냥 , 보통 사람은 부제에 번호를 메겨야 맞출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되밟아가 그 근원을 보고 끊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과거의 내가 심층의식 속에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지금의 판단은 과거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심에 처하라. 이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 밟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취를 쓸고 닦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프로그램에 따라 밟아온 길은 내 의지로 밟아 온 길이 아닙니다. 메인 프로그램을 없애야 합니다. 수행은 이것입니다. 수행이 보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개구리가 더 잘합니다. 개구리는 움직이지도 않고 벌통앞에서 벌을 잡아 먹습니다. 개구리 얘기 나왔으니 말인데 개구리가 왜 벌을 잡아먹는지 아십니까? (일동 머~엉). 톡 쏘는 맛에 잡아 먹는 답니다. (일동 어리둥절, 다음 웃음) 총각이 처녀를 따라 다니는 이치와 똑같은 거죠. 톡쏘는 맛. 앉아서 뭐 하는 것은 두꺼비가 사람보다 낫습니다. 수행과 기도는 왜 하는가?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행복하려면 내 과거의 발자취의 전원을 끄야 합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같은가? 또는 다른가? 같다면 참으로 이 삶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같아서는 안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 물론 이것은 인간이 규정한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라는 단어가 없는 민족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어가 없으므로 그런 관념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지금 현재 존재하는 것은 나인데, 지금 현재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심층의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는 겁니다. 

 

지난 주 강론에서 두부장사의 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딸이 할머니가 되어도 두부만 보면 언제나 5학년의 그 때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 의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혀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의식은 그 시절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에게는 아픔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을 거부합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자기 등 뒤에서 죽은 동생에 대한 배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거부합니다. 그 분이 이걸 의식하고 있지 못합니다. 심층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왜 고행을 그만두고 보리수좌에 앉았는지를 생각하면 그 답이 나옵니다. 제가 많은 강론에서 이 얘기, 저 얘기 합니다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안(正眼). 그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다른 것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리가 아프게 들숨 날숨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즉 과거 자체를 쓸어버리면, 끝나 버립니다. 대념처경에서도 부처님의 여러 얘기가 나옵니다. 수행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도 나옵니다. 그 자체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를 넘어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하드 웨어를 붙잡고 검색이 안된다고 마우스를 붙잡고 흔들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프트 웨어를 장악해야 합니다.

 

 

황벽 희운, 즉 황벽선사가 그의 설법을 들으려 몰려다니는 대중들에게 '술찌게미에나 취한 것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다음은 벽암록 11칙 황벽선사의 술찌게미에 나오는 얘기이다.

(하루는 황벽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우두법융스님이 자유자재하게 이리저리 말하지만 아직도 향상(向上)의 핵심을 모르고 있다" 당시에 석두, 마조스님의 제자들이 너저분하게 선을 말하고 도를 말하였는데, 그는 무엇때문에 이처럼 말하였을까? 그러므로 대중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가 술찌꺼끼나 먹고 만족하는 놈들이다. 이처럼 행각하였다가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이나 당할 것이다. 다만 팔백명 또는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만을 보고서 (그곳에 유명한 선사가 있는 줄 알고) 모여 있으니, 시끌법석대는 곳을 도모해서는 안된다. 만일 모두가 그대들처럼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면 어느 세월에 깨칠 날이 있겠는가?")

당나라 시대에는 사람을 꾸짖을 때 '술지게미나 먹고 만족하는 놈'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사람들은 흔히들 황벽스님이 사람을 꾸짖었다고 말하지만 안목을 갖춘자는 그 핵심을 스스로 볼 것이다. 분명한 의도는 낚시를 드리워 대중들의 질문을 낚으려는 것이다.

대중 가운데에 목숨을 돌보지 않는 선객이 있어, 이처럼 대중 가운데서 나와 그에게 질문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황벽선사의 "너희들은 술찌게미나 먹고 술에 취해 건들 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술을 먹고 취해도 좀 그런데(봐줄까 말까 한데), 술찌게미나 먹고 취해 술취한 모습을 보인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전에는 아이들이 술찌게미를 밥 대신 먹고 학교에 가서 건들거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술찌게미나 먹고 취해서 건들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심을 돌이켜서, 진심으로 돌아가서, 진심에 처한다. 이것이 기도이자, 수행이자, 염불이자, 경전을 읽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길을 되밟아 가야 합니다. 그래야먄 그 근원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오직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그 외의 것은 미안한지만 가공될 정보일 뿐입다. 때에 따라서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조차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안正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눈으로 나를 보고 부처의 눈으로 나를 봅니다.

 

항상 건강 하시고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길 기도 합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男子의 人生
나훈아 작사/ 작곡

1. 어둑어둑 해질 무렵 집으로 가는 길에
 빌딩사이 지는 노을 가슴을 짜-안하게 하네
 광화문 사거리서 봉천동까지 전철 두 번 갈아타고
 지친 하루 눈은 감고 귀는 반 뜨고 졸면서 집에 간다
 아버지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男子의 人生

2. 그냥저냥 사는 것이 똑같은 하루하루
 출근하고 퇴근하고 그리고 캔 맥주 한잔
 홍대에서 버스타고 쌍문동까지 서른아홉 정거장
 운 좋으면 앉아가고 아니면 서고 지쳐서 집에 간다
 남편이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男子의 人生
그 이름은 男子의 人生

몰라
 나훈아 작사/ 작곡

1. 객기는 부리지마
 오기도 부리지마
 사랑은 그렇게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달콤한 사랑의 약속 그 약속 믿은 너는 바보
 가장 큰 약속 그것은 사랑 웃기는 약속도 사랑
 사랑엔 조건은 없어 사랑엔 이유도 없어
 사랑은 아무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2. 원망은 하지도 마
 누구도 탓 하지 마
 이별은 사랑 뒤에 숨어있는 불청객 같은 거지
 이 사람 이제는 내꺼야 그 착각하는 너는 바보
 가장 큰 행복 그것은 사랑 눈물을 주는 것도 사랑
 사랑은 둘이서하고 이별은 혼자가 되고
 사랑은 누구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당신아
 나훈아 작사/ 작곡

1. 아- 당신아 아- 당신아 사랑했던 당신아
 가슴에 묻고 살았지 한 번도 잊은 적은 없어
 잊은 척 했을 뿐이지 한순간도 지워 본 적은 없어
 아~ 당신아 아~ 당신아
 미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을 꺼다 당신아
 왜 떠났니 원망하지도 않을 꺼다 당신아

2. 아- 당신아 아- 당신아 보고 싶다 당신아
 아닌척하고 살았지 미련이 없는 것은 아냐
 모른 척 했을 뿐이지 밤마다 너를 안고 울었어
 아~ 당신아 아~ 당신아
 못 다한 사랑 아쉬워하지 않을 꺼다 당신아
 왜 그랬니 물어 보지도 않을 꺼다 당신아
 아~~~
잊을 꺼다 당신아

아이라예 (아닙니다)
나훈아 작사/ 작곡

1. 니 내를 사랑하나 아이라예
 거라먼 싫어하나 아이라예
 아이라예 아이라예 수줍어하던
 그 사람이 생각이 난다
 손목 한번 잡는 것도 눈치 보였고
 언불생심 키스까지 천만의 말씀
 몰라예 아이라예 부끄러버예
 보고 싶다 부산 아가씨

2. 내 니를 우째하꼬 모릅니더
 거라먼 누가 아노 모릅니더
 모릅니더 모릅니더 얼굴 붉히던
 첫사랑이 그리워진다
 철철 끓는 타는 가슴 콩닥거렸고
 보다덤고 싶었지만 천만의 말씀
 몰라예 아이라예 부끄러버예
 보고 싶다 부산 아가씨
 몰라예 아이라예 부끄러버예
 보고 싶다 부산 아가씨

죽는 시늉
 나훈아 작사/ 작곡

1.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만한 사람은 없어
 아무리 찾아봐도 당신만큼 예쁜 사람은 없어
 내 눈엔 당신입니다
 오로지 당신입니다
 자꾸만 생각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 맘 알까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께요

2. 아무리 살펴봐도 당신 밖에 보이질 않아
 아무리 따져봐도 당신만큼 좋은 사람은 없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만 보였습니다
 수많은 인연 중에서 당신은 사랑의 인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신이 너무 좋은데
 어떻게 하면 내속 알까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께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께요

모래시계
 나훈아 작사/ 작곡

1. 채깍채깍 자동시계는 어김없이 가지만
 내깔겨둔 모래시계는 세월 멈추고 있나
 세월아 가는 저 세월아 사정없이 가는 세월아
 뚜벅뚜벅 나는 걷는데 뛰어 가네 세월은
 힘도 좋아 세월은

2. 반짝반짝 눈부신 아침 저녁으로 가는데
 내팽겨둔 모래시계는 세월 붙들고 있네
 청춘아 가는 내 청춘아 싸가지도 없는 청춘아
 꾸벅꾸벅 나는 조는데 잠도 없네 세월은
 힘도 좋아 세월은

3. 짜잔짜잔 길을 비켜라 잘난 세월 가신다
 너는 가라 모래시계는 대꾸조차도 없네
 인생아 아픈 내 인생아 돌아갈 수 없는 인생아
 꼬불꼬불 힘든 인생길 잘도가네 세월은
 힘도 좋아 세월은

내 靑春
나훈아 작사/ 작곡

1. 강물이 흘러서 간다
 끝없이 흘러서 간다 저 넓은 바다로
 저 깊은 바다를 채울 때까지 흘러 간다
 세월이 흘러서 간다
 덧없이 흘러서 간다
 어디로 가는 건지 저 혼자 가면되지
 나까지 등 떠밀고 간다

2. 아까운 건 없는데
 아쉬운 것 딱 하나 못 다한 내 젊음
 아~ 내 靑春
자꾸만 눈물이 난다 울만한 일도 없는데
 서산에 지다 말고 숨 고르는 노을이
 눈물을 자꾸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