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⑶생명의 실상|******@불교의생명관@

2017. 12. 25. 12:51일반/생물·과학과생각

728x90

4.3 生命의 實相

佛敎와 自然科學 / 朴淳達·吳亨根·曺勇吉·金成九 共著 集文堂 1992. 8. 30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 순간에 사체(死體)와 사체 아닌 것으로 나뉘어진다.
이것이 사후(死後)의 인간이다.
사후의 인간은 생자(生者)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몸을 갖고 있다.
그것을 세신(細身)이라고 한다.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미세한 몸(요컨대 極微의 粒子로 된 靈體?)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도 장애를 받지 않고 통과한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한 불교의 구사론(俱舍論)을 통해서 요약하여 알아보자.
이러한 세신은 몸만이 아니다.
사후의 인간은 눈. 귀. 코. 혀 그리고 완전한 육체감각을 갖고 있다.
다만 몸이 '세신(細身)'이며 보이지 않으므로 눈. 귀. 코 등도 형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후의 인간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식사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먹는 것은 냄새뿐이다.
여기에도 구별은 있다.
생전(生前) 선행에 노력한 사자(死者)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악행(惡行)에 빠져 있던 사자는 악취밖에 맡을 수 없다.
공간에 뜨거나 비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비행하는 경우 아무리 멀리 떨어진 장소라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그와 같이 비행하거나 떠돌면서 공간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사후의 인간은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몸 내부에 다시 한 번 태어나려고 하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意志)대로 좋은 때 좋은 장소에 태어나지 못한다. 그 사자(死者)가 생전에 어떠한 행위(業)을 했는가에 따라 태어날 곳이 정해진다.
어떤 사자도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자신의 행위(業)에 마땅한 곳밖에는 태어나지 못한다.
이 '곳'이란 생명(生命)이 태어나는 장소, 그 밖에 일체의 조건을 가리킨다.
어떤 남녀가 결합하여 여성이 수태(受胎)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사자(死者)에게 적합한 결합이라면, 그 사자는 순식간에 거기까지 날아가서 수태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생명체(生命體) ― 그 사자의 생전(生前)의 행위(業)에 적합한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생전(生前)에 악한 행위를 쌓은 사자(死者)는 거기에 알맞은 생명밖에는 될 수 없다.
이것은 죽기 전까지 이미 결정되어 버리므로 사후(死後)에도 이 법칙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사후에야 이 법칙을 깨닫고 좋은 곳에 태어나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사자(死者)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태어난다.
어떤 사자(死者)는 매우 오랜 시간 공간을 방황하며 거의 영원히 태어날 수 없다.
무주고혼이다.
그러나 이 시간도 그 사자가 생전에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것이다. … 사람은
정자+난자+死後의 生命=갓난아이로 탄생된다.
정자와 난자와의 결합만이 인간이라는 생명의 근원인 줄 아는 세계에, 불교의 구사론에는 저 비밀스런 책이라고 불리는 티베트의 사자의 서(死者의 書)와 같은 내용과 흡사한 내용들이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인 정자+난자=아기가 아니라 사후의 인연 있는 생명이 잉태되어 온다는 이 사실은 아직껏 과학적인 실증은 없다하더라도 심증은 가기 시작하고 있다.
이미 2천 수 백년 전에 불교경전은 현대의 상식에 도전하듯이 사후의 생명이 더해지지 않으면 새 생명은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문처럼 속삭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사후의 생명=우주생명의 일부→생명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우주생명인 생명자(불교용어로 識, 鐘子, 아뢰야식)는 물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뇌 속에도 들어 있고 갓난아기의 뇌에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그 아기의 생명자(生命子)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의문은 당연히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불교경전의 내용을 '사후의 생명이 그 업에 따라 날아와서 정자. 난자에 더해진다'라는 견해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생전(生前)의 행위(業)에 적합한 생명체로밖에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제 8의 실재인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라는 사상이다.
물론 앞에서도 약간은 언급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좀더 살펴보자.
불교경전(唯識學, 구사학)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모두 일곱 개의 식(識)을 가지고 있다.
식(識)이란 감각과 의식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넘버 1에서 넘버 5까지의 식은 5식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감각,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즉 5감(五感)이다.
넘버6의 식은 오감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의식(意識)이다.
우리가 잠들어 버리면, 이 1에서 6까지의 식은 거의 끊어진다.
아니면 휴지(休止)의 상태가 된다.
그 대신 평소에는 거의 의식하고 있지 않는 넘버7의 식이 표면화하게 된다.
그러한 것이 꿈이다.
1에서 6까지의 식에 억압되어 있는 본심(本心)에서의 원망(怨望), 공포, 우울, 갈증 등이 잠재의식의 심연 속에서 떠올라 꿈이 되어 우리를 희노애락(喜怒哀樂)케 하여 웃고 울고 하는 것이다.
보통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항상 표면의식(表面意識)아래에 있다.
강철같은 의지의 사나이가 실은 이중인격의 소유자에 겁먹은 겁쟁이며, 정숙한 여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에로틱한 욕구가 용솟음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이 넘버 7의 식(識)이다.
그것은 매우 뿌리가 깊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이식을 제7말나식(末那識 Manas, 迷妄識. 망상식. 잠재의식. 무의식이라고도 칭함)이라고 한다.
죽음이 다가오면 1에서 6까지의 식은 수면상태와 같이 되지만 악몽(惡夢)과 본심(本心)은 오히려 강해진다.
특히 '죽기싫다' '살아야 한다'는 잠재욕구가 최후의 순간까지 따라다닌다.
특히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무서운 집착력(執着力)이다.
그러나 이윽고 그것도 사라진다.
그것은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죽어서 감각과 의식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불교경전은 1에서 7까지의 식이 모두 사라진 순간에 더 깊은 심연 속에 숨겨져 있던 넘버8의 식이 나온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이 뜻은 '근원의' '숨겨진'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죽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는 종자식(種子識)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식의 성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식인 이상 인식력(認識力), 판단력(判斷力), 사고력(思考力)을 모두 갖는다고 불교경전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표면의식인 6의식, 잠재(潛在)하고 있는 7의식, 그 전체를 포함한 능력과 성질이 함장된 것이 제8의식인 셈이다.
수면보다 더 차원이 깊은 상태인 죽음이 제8의식의 상태이며 그때 이미 육체는 소멸하고 없다.
그래서 제8의식은 독자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미 육체와는 상관없이 활동하는 것이다.
즉 이미 소멸된 육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운동 에너지를 가지며 그것도 1에서 9까지의 능력을 모두 한꺼번에 가지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생명의 한 형태이다.
육체의 한계를 초월했으므로 생전의 생명보다 더욱 높은 차원의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간에 허공에 잠복되어 있는 생명이므로 다시 육체를 가진 생명체로 태어나려는 강한 경향인 업력(業力)의 덩어리이다.
이것이 새 생명에로의 끊임없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실상(實相)이다.
어떠한 형태로서 어떤곳에 태어나는가는 그 넘버 8에 섞여 있는 1에서 7, 즉 안식으로부터 제 7말나식의 업(業力)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이것은 곧 그 인간의 감각과 정신이 전생의 육체에 있었을 때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느냐에 따라 다음에 태어날 조건과 장소가 달라지는 것이다.
넘버8은 본래 가지고 있는 초능력으로 자기에게 알맞은 장소를 찾아가 그 새로운 생명체 안에 들어간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 넘버8인 제8아뢰야식은 우선 먼저 잠재해 있던 제7말나식을 활동시킨다.
그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 '살아 있고 싶다'는 넘버7의 생전의 욕구가 여기서도 이어져 '태어나고 싶다'라는 무의식(無意識)의 욕구가 갓난아기 안에 나타나게 된다.
다음에 넘버 6의식인 갓난아기의 뇌에 활동을 일으키고 5,4,3,2,1(身識, 舌識, 鼻識, 耳識, 眼識)의 순서로 갓난아기는 엄마의 젖맛을 알고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빛과 어둠을 분간하게 된다.
일곱 가지 의식이 그렇게 부활하고 넘버 8인 제8아뢰야식은 다시 넘버 7의 아래 깊은 심연으로 숨어 버리고 만다.
또 언젠가는 1에서 7이 이것과 반대의 순서로 소멸될 때까지, 이것이 생명의 영원한 순환(循環), 즉 윤회(輪廻)이다.
불교적 인간과 생명은 이렇게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끊어지고 다시 이어져 가는 것이다.
이 제8아뢰야식은 공간에 충만해 있는 것으로 우주생명(宇宙生命) →생명자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이것은 사후생명의 부유(浮遊), 비행(飛行), 인식력 등등이 모두 이 제8아뢰야식이 증명한다.
그러나 사후의 생명들이 어떻게 개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난문제도 이 제8식으로 쉽게 해결된다.
넘버 8은 넘버 1에서 7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에서 7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 고유의 감각. 감정. 의식이다.
그러므로 제 8아뢰야식은 그런 것들을 내부에 가지고 있으므로 개성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넘버 8 자체는 무의식의 심연 깊이 숨어 있다.
그것은 C.G. 융이 말한 '심층무의식(深層無意識) → 집합무의식(集合無意識)'과 유사하다.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그것이 숨어 있으며 그것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마음이 공유(共有)하는 욕구나 원망(怨望, 즉 생존, 생명유지 욕구, 명예적인 나타나고자 하는 욕구)이라고 융은 말하고 있다.
나니 너니 우리의 구별 없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는 마음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움직임이 아닌가.
넘버 8도 이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즉 넘버 8도 지대한 생명의 일부로서 잠재적인 면과 개별화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으로서의 양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성질을 갖지만, 그러나 1에서 7에 의해 태어나는 장소와 조건이 제약된다는 견해는 이해가 된다.
이것은 각자의 업장(業障)에 따른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사회에 태어나고 싶어하는 욕구는 인류 공통의 것이지만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는가, 어떻게 사는가 라는 구체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감정과 의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높은 불법(佛法)을 여기서 '9식(識)'으로 설하고 있다. 
9식이란 아마라식(阿摩羅識, amala-vijnna 즉 無垢識)이라고 불리며 넘버 8보다 깊고 강한 실재라고 한다.
이것은 우주의 참된 근원이며 인간생명의 참된 근원이다.
이 제 9아마라식이 마음 깊은 곳에 실재하고 있음을 감득(感得)할 수 있다면 인간은 소자아에서 벗어나 우주 생명과 일체가 된 참된 생명관, 두려워하거나 집착할 것이 없는 자유와 환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육체의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후 생명의 행방에 관한 해답이다.
그것은 '다시 태어난다'라는 윤회(輪廻)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것에 대한 증거는 전생 기억이나 전생을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증거 하거나 현생열반(現生涅槃)이라는 해탈(解脫)로서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에 참된 정진(精進)의 수행(修行)이 요구되는 것이다.


너무 가난해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세 딸이 있었다.

딱한 소식을 들은 그는 밤중에 

 황금을 담은 자루 세 개를 몰래 던져놓고 돌아갔다.

그 금이 벽난로에 걸어둔 양말 속으로 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4세기 초 소아시아에서 활동했던

그의 이름은 성 니쿨라우스, 라틴어로는

 상투스 니쿨라우스라고 했다.

이 이름이 네덜란드어 사테 클라스로 바뀌었다가

 영어식으로 산타클로스가 됐다. 


 


이 산타클로스가 찾아온다는 크리스마스 이브 부터 성탄절은 시작된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하루를 전날의 일몰로부터

다음날 일몰까지로 쳤기 때문에 이브를 중시했다.

물론 크리스마스의 시작은 12월25일 0시다.

그런데 왜 이날일까. 예수가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약성서에도 기록이 없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1월1일이나 1월6일, 3월27일 등에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를 12월25일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축하하게 된것은 4세기 때인 교황 율리우스

1세 시절이었다.

학자들은 로마의 동지 축일을 이용해

예수 탄생을 기념한 것으로 보고 있다.

3세기까지만 해도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크리스마스를 정하는 건 이교적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예수 탄생일을 확인할 수 없고

 로마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던 이교의 축제일인 데다 1~2세기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날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파(프레즈비티리언)는

 지금까지 1월1일 기념을 고집한다.

율리우스력을 교회력으로 쓰는 러시아정교회는

1월7일 을 성탄절로 삼고있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의미다.

 프라스에서는 로엘, 스페인에서는 나비다드,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 이라고 한다 .

우리나라에서는 기독탄신일, 성탄절로 부른다.

대부분의 국가에선 공휴일이지만

기독교인구가 적은 일본에서는 공휴일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도

이날을 기념하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는 제헌절 공휴일이다.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