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마음 |…… 혜천스님설교

2018. 2. 11. 17:1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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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4년 4월 11일   


 

 

이번 주 강론 주제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시인 이상화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봄은 봄인데, 봄이 오지 않고, 남의 땅도 또한 아닌데 봄이 오지 않은 듯합니다. 이번 봄은 우울하고, 바다에 형제들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저온 때문인지 예전이면 이 맘 때 피어야할 꽃도 아직 피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력1장, 마력 1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장이 10자이니 3M 30cm 정도입니다. 이 말은 불력, 즉 부처님의 힘이 1장이면, 마력, 즉 마라의 힘도 1장이라는 뜻입니다. 붓다의 힘이 나에게 1장 미치면, 마라의 힘도 내게 1장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나의 앞길에 매화향기 가득한 꽃길을 열어주면, 마라는 그 길에 가시나무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즉 매화향기 가득한 꽃길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라의 가시밭길 또한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력은 어떻게 하면 나에게 미치게 할까요?  마력은 어떻게 해서 나에게 미치는 것일까요? 불력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옵니까? 불력은 감사하는 마음, 마력은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전에 어떤 거사님이 나를 찾아와 이혼상담을 했습니다. 아내가 당신을 너무 이해 못한다. 그래서 아내하고 이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무어라 얘기해야 할까요? '좋은 결심하셨습니다'라고 아니면 '이혼은 절대 안됩니다'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그 대답을 하기 전에 그 분께 다시 물었습니다. "이혼을 하고 싶다, 내 아내가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아내에게 빚은 다 갚았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빚은 금전적 채무가 아닙니다. 아내가 처녀시절 연애하고, 결혼할 때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채무는 그 약속의 채무입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결혼 이후 아내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분골쇄신 했습니까? 찰라 찰라에 그 행복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으며, 얼마나 잠을 설쳐 보았습니까? 그 행복을 채우기 위해 가슴 속의 눈물을 흘려보셨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셨다면,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혼은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빚을 갚아야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갚아야 합니다. 그 채무를 거사님이 갚으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와 같죠. 스스로의 채무를 잊어버리죠.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많은 채무를 지고 삽니다. 아내에게는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채무가 있죠.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갚아야할 채무가 있습니다. 자식에게도 채무가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채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채무자입니다. 상대에게 받아야 할 채권은 적고, 우리가 갚아야할 채무는 많습니다.

 

첫 번째로 남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님께 채무를 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의 행복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나는 고생을 했지만 나의 자식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죠. 그래서 내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노력에 얼마나 갚으려했습니까? 부모님의 은혜에 얼마나 갚으려 노력했습니까?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또는 나는 단지 놀겠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은혜에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채무를 지고 있습니다. 하루 6시간 잘 것을 5시간 자면서, 또는 1시간 놀 것을 30분을 놀면서 부응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 아내, 남편에게 채무를 갚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의 부모가 되었으면,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남의 자식 노릇도, 남의 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면서 늘 내 탓이 아니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환경이 좋지 않아서, 또는 아내가 이해를 못해서, 또는 남편이 제대로 못해서, 또는 자식이 나를 따라주지 않아서라고 탓합니다. 이 세상에 '누구 때문'은 없습니다. 부모가 가난한 것은 부모 탓이 아닙니다. 자식이 공부 못하는 것은 자식 탓이 아닙니다. 아내가 살림을 못하는 것은  아내 탓이 아닙니다.  남편이 돈을 팍팍 벌어다주지 못하는 것 역시 남편 탓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책하지는 마십시요.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나의 탓도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몰랐을 뿐입니다. 우리의 채무가 태어난 순간 발생한다는 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매화향기 가득한 꽃길과 함께 가시밭길도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미안하지만, 도망쳐야할 가시밭길은 없습니다. 도망쳐야할 가시밭길은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가시밭길을 인정하면 됩니다. 매화향기 가득한 길을 걸으려 하면서, 가시밭길을 거부합니까? 가시밭길이 있어서 매화길이 빛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가득 매화밭이라면, 매화향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매화향기를 고마워할 수 없습니다. 매화향기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 매화향기 가득한 길은 가시밭길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길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갚아야할 채무가 있어서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불력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마력은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정령 마력과 가시밭길이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밥상을 맞이할 때 우리는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까? 쌀, 콩나물, 시금치에 감사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를 존재하게 하는 산소, 비, 바람, 구름, 태양, 달, 별, 물, 풀, 바위, 땅에 감사한 적이 있으십니까?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불력을 만듭니다. 마라는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력은 자기 자신에게 존재합니다. 부처님의 마라에 관한 말을 보면, '마라, 마라 하는데, 도대체 마라란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네 몸과 마음이 마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마라라는 것입니다. 악마라는 것이 꼭 뿔이나 꼬리가 달릴 필요가 있을까요? 마라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는 내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아내를 원망합니까? 그렇다면 아내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우리 속담에,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가 이유 없이 잔소리를 할까요?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자체는 다 상대적이죠. 이 세상에는 일방적으로 착한 사람도 없고, 또한 일방적으로 착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아내를 원망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행복이란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가 행복을 느낄 뿐, 또는 불행을 느낄 뿐 행복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전에는 하루 삼시 세끼 먹기도 어려웠습니다. 시래기 나물죽이라도 하루 세끼만 먹을 수 있다면, 감사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삼시 세끼 먹는다는 것은 자식을 굶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기의 치적으로 OECD가입을 꼽습니다. OECD에 가입하면 자동적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됩니까? OECD국가 중 도박, 사행성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도박, 로또 복권 이런 것들이 OECD국가들 중 대한민국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그마만큼 나물죽은 면했어도, 아직도 우리는 배고프다는 얘기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헐벗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언론보도를 통해서 다 아는 얘기가 있습니다. '10억이 그저 생긴다면, 교도소에 가는 것도 감수하겠느냐?"는 물음에 우리나라  중고등학생 70%가 '예'라는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은 10~20%에 불과한데, 우리는 왜 그렇게 높은 수치의 청소년들이 10억의 돈을 위해서는 감옥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우리 사회가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 사회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회입니다. 오직 원망만 있습니다. 나의 불행은 나의 부모 때문입니다. 나의 불행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때문이며, 나의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며, 나의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사법, 행정, 외무의 3고시를 동시에 패스해야 하는데 공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공부를 못해도 내 아이가 건강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 부모, 내 아내, 내 남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몰라서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집니다. 어떤 분은 화가 나면 그저 먹어댑니다. 먹어서 배가 터질 지경이 되었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먹는 걸 멈추지 않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부족한 아이들의 특징도 먹어도 먹어도 또 먹는 것입니다. 먹고 돌아서면 헛헛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먹어도 먹어도 허기집니다. 행복하지 않다고 오직 세상 탓을 합니다. 남을 탓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뭔가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나를 이뤄주는 것은 감사한 마음입니다. 나를 망쳐 주는 것이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아내가 살림을 못하고 남에게 퍼주기만 한다고 고민하십니까? 이것은 그 아내가 이 세상에 처음 왔기 때문에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태국에는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천당과 지옥은 조건이 같다는 얘기입니다. 천당과 지옥 모두 먹을 것이 넘쳐흐르지만, 숟가락 길이가 너무 길게 되어 있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천당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마주 앉아 너 한입, 나 한입 하면서 사이좋게 떠먹여 줍니다. 지옥은 그 긴 숟가락으로 자기 혼자 먹으려 발버둥치다 식사 끝이 되는 것입니다. 천당의 사람들은 서로 떠먹여주어 누구나 배불리 먹지만, 지옥의 사람들은 서로 먹으려다 모두 굶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천당과 지옥은 환경과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환경과 조건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같은 것입니다.

 

경쟁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쟁하지 않는 사회가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과연 경쟁한다고 불행한 것일까요? 싫든 좋든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존재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존재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 경쟁입니다. 경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경쟁을 없애면 됩니다.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면 됩니다. 무조건 경쟁이 죄악이고 경쟁하지 않는 것이 선이라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그 경쟁을 편법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경쟁은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로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경쟁하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다만 불공정한 것을 막으면 됩니다.

 

대한민국이 불공정하게 경쟁하고, 공정경쟁을 무력화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노동자나 힘없는 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어떠한 예외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삼성의 이건희는 어떤 잘못을 해도, 모두 이해하고 받아 들여 집니다. 어떤 인간도 법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법치국가란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않는 것입니다. 삼성의 이건희는 법 위에 군림합니다. 혹자들은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할 것처럼 말합니다. 이건희, 이명박, 재벌이 없어도 대한민국은 존재합니다. 노무현이 없어도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없으면 대한민국이 망할 것 같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나의 경험을 말합니다. 79년 10.26사태가 일어났을 때, 나는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박정희만이 김일성을 막고,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10.26이 일어났을 때 혼란과 충격에 빠졌습니다. 박정희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가 죽고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죽어도 아침 해와 저녁 달이 뜨고, 밥을 먹고 똥을 싸는구나! 삼성 이건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1%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 그가 말한 1%가 없어도 대한민국은 존재합니다. 사실 이 1%때문에 대한민국이 혼란스럽습니다. 이 1% 때문에 대한민국이 불행합니다.

 

천안함 침몰로 희생된 병사들과 하사관들의 이야기를 보면, 왜들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는지, 또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장관이나 국회의원의 아들들이 있습니까? 지하벙커에 열린 안보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한 한 사람은 목이 아파서,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많아서 군대를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다수 젊은 장병들은 어쩌면 그렇게 모조리 때가되면 부리나케 징집하면서도, 어떻게 그들만은 총들 힘이 없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가 병역을 면제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누구 탓을 하고,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공정한 경쟁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법위에 군림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불공정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특권층이 모든 것을 면제받는 사회, 즉 공정한 경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경쟁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가 강국입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이 인구가 많아서, 땅이 커서 강국이 되었습니까?  스페인은 좀 크긴 크군요. 그렇지만 세계 강국이라는 것이 땅 크기와 인구 규모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사람들이 먹어도 먹어도 허기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예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지배하든 그는 지배자일 뿐입니다. 한국이 지배하든 일본이 지배하든, 백인이 지배하든 흑인이 지배하든 노예의 입장에서 지배자는 지배자일 뿐입니다. 특별히 좋은 주인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노예는 가축처럼 취급되어 사람이 아닌데, 어찌 좋은 주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탓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구요? 내가 그렇게 되는 것에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없으면 대한민국이 망할까봐, 이건희가 없으면 대한민국이 망할까봐 우리가 그걸 용인하고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용인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감사하는 마음은 자연의 질서를 깨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업(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업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이런 자식을 낳고 미역국을 먹었을까?'하는 이런 것이 업일까요? 절에 가면 스님들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는 업이 도대체 뭡니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업입니까? 업이란 자연의 질서입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고운 단풍이 들고,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져 휴식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업입니다. 업은 자연의 질서를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거 자연의 얘기지 인간은 달라." 이건 전두환의 버전입니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은 '대상'이고 인간은 '나'입니다. 대념처경을 강의할 때도 말하고, 또 여러 번 말했지만,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만이 존재합니다. 대상과 나. 나와 대상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는 대상 속에 있고, 대상도 내가 존재해야 존재하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와 대상'을 넓히면, '그것이 '인간과 자연'입니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모든 걸 자연에서 얻습니다. 호흡을 위해 자연에서 산소를 필요로 하고, 존재하기 위해 자연에서 식물필요로 하고, 단백질을 위해 동물이나 콩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어기지 않는 것이 업입니다. 자연의 질서를 어기지 않는 것이 인간의 질서입니다. 업이란 <전설따라 삼천리>의 2512번째 이야기, 뭐 이런 것이 아닙니다. 업은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존재합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 이것이 질서입니다. 이것이 자연의질서, 인간의 질서입니다. 공정한 경쟁은 자연의 질서, 인간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의 질서, 인간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것은 원망하지 않는 것,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흐름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즉 흐르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는 것입니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모든 물질은 고정되어 있거나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물질은 흐른다, 움직인다고 하는 뜻입니다. 아내가 변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안 변하면 이상한 것 아닙니까? 연애할 때 남녀관계란 만나기만 해도 행복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환경과 조건이 변합니다. 여기 흥천사도 아카시아 나무가 있어 그 꽃이 필 때면 한 때나마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옆 집 노인이 그늘진다고 베어버려 황량해졌습니다. 불과 1년 만에 변해 버렸습니다. 30년이나 지난 아내가 안변하면 이상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의 남편, 지금의 아내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49제를 지내던 할머니가 서럽게 웁니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몸져눕게 되면서 농삿일을 못하게 되자, 그 이후로 할머니 혼자 농사를 짓고 자식을 키우게 되자 살아 생전의 남편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이 있어 내가 과부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고, 그 사람이 있어 아이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있어 저녁 늦게 일하고 들어가도 집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저녁에 들어가도 불이 켜져 있지도 않고, 나는 과부회 회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우는 것은 왜 젊은 시절에는 그것을 몰랐을까? 지금에서야 알게 되어 미안해서 우는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 미안해서, 이제 고맙다고 얘기해 주고 싶은데, 고맙다고 얘기해 줄 수 없어서 운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이 순간이 귀합니다. 이 순간 내 곁에 함께하는 사람에게 감사하십시요. 이 순간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자연과 모든 존재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물, 공기, 태양, 빛 등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순간 나의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것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은 마력을 불력으로 바꿉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가시밭길을 매화 길로 바꿉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력이 마력이 되고, 매화길이 가시밭길이 됩니다. 부처님은 ‘바로 네가 마라이다. 바로 네가 성인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불력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내 행복의 열쇠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듭니다.

 

한 때 우리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려 나간 책이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처세술은 어떻게 하면 불공정하게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한 책입니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법정 스님과 그 말씀은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찌질이입니다. 남들은 권력을 누리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기를 쓰는데 강원도 오두막에서 찌질하게 사느냐 이겁니다. 더 큰 권력, 차, 집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보면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런 분들이 보면, 참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송광사 불일암에서 쫒겨난 얘기도 그러합니다. 법정 스님은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그 집단과 다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점이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강원도 오두막에 살게 된 것은 원래 그가 원하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원래 오대산에서 출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출가를 위해 길을 딴던 중에 선학원 효봉스님을 만나 출가했으니, 오대산 자락의 오두막으로 간 것은 그가 원래 가고자 했던 곳으로 간 셈입니다. 법정 스님이 참지 못했던 것은 질서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불일암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법정스님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법정스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찾습니다. 핑계거리를 말입니다. 누군가를 탓하려고 무언가를 찾습니다. 원망하지 마십시요, 미워하지 마십시요. 그래도 그가 나와 함께 있어 이 땅에서 호흡하는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가장 훌륭한 스승입니다. 미워하면 안 됩니다. 내가 그걸 보고 그와 같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요. 감사하는 마음이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 것입니다. 인생난득(人生難得)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다는 말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행복하고, 감사해 하기도 바쁜데, 미워하고 원망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왜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딱 한번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번 뿐입니다. 다음 기회를 만드는 것도 나 자신이며, 단 한번 뿐인 이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한 번 뿐인 기회를 살리느냐 죽이느냐는 것은 내 자신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은 원행을 떠납니다. <봄날은 간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봄바람에 연분홍 치마를 한번 휘날려 보십시다. 연분홍 치마를 입고 매화향기 가득한 매화 길을 걷듯 행복하고 복된 삶을 누리십시요. 그리고 정과 사랑이 넘치는 나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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