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 위의 붓다|…… 혜천스님설교

2018. 3. 24. 20: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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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 위의 붓다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3월 3주차: 불기2554년 3월 21일


 

 

날씨가 아직 쌀쌀합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저울위의 붓다입니다.

부처님께서 선우(善友: 좋은 친구)는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우리에게 묻죠. 누가 너의 선우냐고? 그리고 우리 또한 부처님께 질문합니다. 누가 저의 선우입니까?라고.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모아 놓은 자타카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전생의 붓다가 수행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비둘기가 부처님의 어께쭉지에 날아와 피신합니다. '제가 매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요'라고 하면서 말이죠. 전생의 붓다가 비둘기를 가슴에 안자 매가 날아들더니, 비둘기를 넘겨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전생의 붓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나는 이 비둘기를 내어 줄 수 없다. 그러자 매가 반문합니다. "그대가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서 비둘기를 내어 줄 수 없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즉 매는 비둘기의 생명은 소중하고, 나의 생명은 소중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놓입니다. 비둘기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도덕률로 봐서는 당연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매의 생명은? 매는 반드시 살아있잇는 걸 뜯어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즉 매는 신선한 고기를 먹는데, 죽은 짐승은 먹지 않습니다.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뜯어 먹는데 반해, 매는 살아 있는 생명을 뜯어 먹습니다. 그래서 전생의 붓다가 비둘기를 내어주지 않는 것은 매의 입장에서 보면, 굶어 죽으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매의 입장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음식입니다. 매의 입장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냐 아니냐는 2차적인 문제입니다. 만약 붓다가 비둘기를 살린다면 매는 죽습니다.

 

백수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사자도 늙고 병들면, 주변에서 놀림을 받다가 죽습니다. 사자는 사냥할 때 사자이며, 독수리 또한 사냥할 때 독수리입니다. 매는 적기에 먹지 못하면, 사냥할 수가 없습니다. 매는 사냥할 때 순간 속도가 엄청 빠릅니다. 시속 110KM인가 하지요. 짧은 구간만 그렇게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속도는 몸에 충분한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충분한 힘이 있어야 빨리 날고,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매가 굶어서 힘이 빠지면, 오히려 사냥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매가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도덕률에 따른다면 비둘기를 선택해야 맞겠죠. 그런데 현실에서도 과연 비둘기를 선택할까요?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둘기보다는 매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아무리 도덕을 공부하고 강조해도, 현실에서 비둘기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이니까요.

 

내가 요즘 한 동안 라디오 뉴스듣는 것이 아주 불편했습니다. 얼마 전 우리 주변에서 좋은 두 사람의 선우가 먼저 갔습니다. 한 명은 법정 스님이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부산 덕포동의 소녀입니다. 왜 뉴스 듣기가 불편했느냐 하면, 뉴스가 1번, 2번의 순으로 법정스님 소식과 소녀 살해이야기를 계속 반복합니다. 고막도 때를 맞추어서 그랬든지, 2가지 뉴스가 전체 뉴스를 삼킵니다. 그 동안 논란이 되었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뉴스 앵커는 법정 스님에 대해서는 무소유 정신을 찬양하면서, 책을 인용해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기를  일갈합니다. 비로 그 멘트가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인간은 존재하는 한 무소유할 수 없습니다. 언론에서는 김길태가 소녀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김길태는 도마위의 칼입니다. 그러면 그 칼을 누가 썼느냐? 소녀가 가지고 있는 조건, 더 분명히 말하면 그 소녀의 부모가 가지고 있는 조건이 그 칼을 쓰게 한 것입니다. 그 소녀의 부모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재개발이 예정되어 빈집이 즐비한 동네에 머물러 있었겠습니까? 권력을 가진자나 돈이 많은 부자의 딸이었더라도, 경찰이 그렇게 뒷 북을 쳤을까요? 우리는 사람이 냉정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소녀를 죽인 건 김길태가 아니라 이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소녀를 죽인 것은 이 정부이며, 부산시이며, 재개발조합입니다. 그 소녀를 죽인 것은 우리들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앵커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찬양하며, 우리에게 무소유할 것을 요구합니다. 무소유를 강조하는 사회는 강박한 사회입니다. 즉 무소유를 강조하는 사회는 나쁜 사회입니다. 그것은 무소유를 강조할 수 밖에 없는 불평등 사회라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는 국민 대다수가 누릴 수 없는 해외여행도맘대로 다녔는데, 그가 무소유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라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 찬양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무소유에 대한 찬양은 세상을 속인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법정스님이 찬양받고 존경받는 것은 그가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무소유) 때문이 아니라, 그가 누릴 수 있었음에도 누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법정스님은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는 누릴려고 하면 누릴 수 있었습니다. 권력, 여자를 얻고자 했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것도 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절제할 줄 알았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았고, 자기의 이름을 팔아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법정스님이 존경받고, 칭찬받는 이유라고 봅니다.

 

과연 지금의 대통령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감명깊게 읽었다고 하는데, 그것을 인용하며 국민을 훈계할 일인가? 존재하려면 소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릴 것 다누리는 그가 무소유를 말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안됩니다. 법정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는 소욕지족(小欲之足)입니다.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실제로 그의 무소유라는 책을 읽어봐도 이렇게 말합니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텅 빈 동네인데도 어린 딸과 함께사는 이들에게 무소유하라는 것은 안됩니다. 그래서 내가 불편했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그런 걸 보면 아직도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강론은 법정스님과 그 소녀를 위한 추모의 강론이기도 합니다.

 

매가 말합니다. "그럼 나는?"이라고.  과연 우리는, 이 사회는 비둘기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비둘기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전생의 붓다는 매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너의 말이 옳다. 내가 비둘기의 양만큼 나의 신선한 고기를 주겠노라" 고 하면서 자신의 넙적다리를 베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매가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신선한 고기입니다. 그래서 비둘기보다 1g이 많아도, 1g이 적어도 안됩니다. 딱 비둘기의 양만큼만 주십시요" 그러면서 저울에 달 것을 요구합니다. 가운데 추를 두고 한쪽에는 비둘기를 않히고, 반대 편에 넓적다리를 베어 올립니다. 그런데 웬 일이지 넙적다리를 계속 잘라 올려도 비둘기 쪽이 무거워 저울이 균형을 이루지 않습니다.  둔부를 잘라 올려도, 계속 잘라 올려도 비둘기가 무거워 저울대가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전생의 붓다가 저울에 올라갑니다. 그래서 비둘기의 무게와 대칭을 맞춥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인 자타카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전생이야기인가 보다. 그렇게 선행을 많이 쌓았구나. 그래서 이 생에 붓다로 태어났구나. 뭐 이렇게 이해합니다. 심지어 스님들도 그렇게 이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전생에서 수 많은 선행을 쌓아 부처님이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겉에 드러난 것만 보면 안됩니다. 불전에 자타카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붓다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부처님이 지금 이 땅에 온다면 무슨 메시지를 주실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가 아니라 어떤 액션을 취할까여야 합니다. 즉 우리의 관심은 부처님이 무엇을 할 것인가여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건희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좀 더 정직했으면..." 어찌 성인의 말씀 아닙니까? 전두환이 권력을 찬탈해 7년을 누린 후 국가변란 혐의로 2년을 복역하였습니다. 김영삼 정권 때 사면을 받고 나오는데, 기자들이 묻습니다. 교도소, 즉 감방 생활이 어땠습니까? 노태우씨는 묵묵부답 으로 지나가는데, 전두환씨가 한 마디 합니다. 이 말이 공자님 보다 더 위대한 말씀입니다.  "가자여러분들은 거길 가지 마시요. 있을 데가 못됩디다" 이건희 선생이 대한민국을 좀 더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양상군자도 자식을 앉혀놓고 가훈을 설명합니다. "성실하게 땀흘려 일하자." 양상군자도 자식에게 도둑질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또라이도 있겠죠. 도둑조차 자식은 성실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말은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부터 지금 말이 좋잖습니까? 버릴 말이 어디 있나? 성현의 말 아닙니까? 이 땅에 부처님이 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면 부처님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붓다는 내게 일장 연설을 하지 않습니다. 도덕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붓다의 그 상황이 되면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매를 앉히고 도덕 강론을 합니다. 즉 살생을 하지 말것을 강론합니다. 한국 불교 또한 그러합니다. 사찰에 가면 스님들께서 흔히 탐욕을 버리라, 욕심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이 좋습니다. 그런데 개 뿔 버릴게 있어야 버리지. 재개발이 되어 다들 떠나갔는데, 갈 곳이 없어 머물러 있는 내게 자꾸 버리라니 도대체 뭘 버리라는 건가? 대한민국에서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딱 두사람 뿐입니다. 돈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건희씨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어 좌지우지하는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소유하는게 왜 문제인가? 소유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께서 소유와 무소유에 대해 다니아와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땀흘려 일하지 않는 자가 소유할까봐 걱정해서 그런 것입니다. 비구들에게도 소유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땀 흘려 일하는 자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은 땀흘려 일하는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가난한 자 천국이 있나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걸로 사기를 칩니다. 원래의 의미는 예언자의 말인 토라를 공부하느라(공부만 하다보면 경제활동을 못하게 되므로)가난해 질지라도, 그런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나물죽 세 그릇도 못먹고 쩔쩔매는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만약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면, 왜 저들은 왜 옷을 기워입지 않는 것이며, 싸구려 중고 자동차를 타지 않는 것입니까? 무소유를 말하는 자들이 비싼 옷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닙니다. 무소유를 말하면서 어찌 상아와 호박으로 된 염주를 굴리는가? 그것은 소유가 아니던가? 어떤 목사는 일주일에 딱 네번만 설교하는데 왜 수천만을 받습니까? 거지가 될 수록 천국과 극락이 가까워 질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울 위에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적어도 무소유를 말하려면 비둘기 대신 저울에 올라가 대칭점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외의 사람이 무소유를 말하면 거짓이자 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입니다. 부자가 그런 고통을 받습ㄴ;까? 하기야 있긴 합니다. 평상시에 쌩쌩하게 골프를 치다가도, 검찰이 부르면 건강검진을 받고 아프다고 누워버리고 휠체어를 탑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농부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아난 존자에게 일러 밥을 먹이고 휴식을 취하게 합니다. 그러자 아난존자는 가르침을 주기 전에 농부에게 음식을 주고 휴식을 취하게 하는 이유를 부처님께 묻는데, 부처님께서는 농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음식과 휴식이지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먼길을 왔으므로 가르침보다 휴식과 음식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3일을 굶고 온 농부에게 가르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농부는 그저 뜨끈한 팥죽 한 그릇만 먹었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농부는 배고파 죽겠는데, 무소유를 찬양하며, 단식이 몸에 얼마나 좋은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냉정한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냉정한 눈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이런 문제에 당합니다. 우리는 매냐 비둘기냐의 선택을 요청받았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그 때야 깨닫게 됩니다. 내가 나눔을 얘기하는 것도 우리가 아무 것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울에 올라갈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저울에 올라갈 열정조차 없는지도 모릅니다. 오직 매가 죽거나 비둘기가 죽고 나면 그제서야  한 마디 합니다. "그 때 내가 알았더라면 매와 비둘기에게 적절한 해답을 주었을 것을" 그렇지만 정작 그 때는 아무 말을 못합니다.   

 

부처님은 관념의 유희에 떨어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관념의 유희에 떨어집니다. 왜 그럴까? 우리가 저울 위에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회피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설명해야 하는가? 남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이 없다면, 비둘기가 죽는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가 왜 저울에 올라가지 않았는지, 명분과 이유가 필요해 집니다. 비둘기가 나쁘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았다는 등의 같은 핑계말입니다. 어떤 분, 그것도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이가 "가난한 것은 그가 게으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비둘기를 도와주지 않는 이유는 비둘기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즉 비둘기가 나를 곤경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비둘기가 나에게 날아와 선택을 강요하는가 말입니다. 비둘기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비둘기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에 대한 답이 필요해서 입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 조차도, 심지어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조차 가지지 못하는 노예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진짜 문제인 것입니다.  

 

좋은 친구는 너의 전부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묻습니다. 누가 나의 선우입니까? 나를 대신해서 저울 위에 올라 갈 수 있는 사람. 이것이 이 답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저 립 서비스입니다. 예전에 권영길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 유행시킨 말이 있죠.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행복해지셨습니까?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진 속의 스포츠카로는 타고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림 속의 말이 천리마라해도, 옆 동네조차 타고 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나를 위해서 저울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그 분이 나를 위해 저울 위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나야말로 너희들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느니, 내 마음 속의 부처라느니 하는 말을 나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 부처는 필요없습니다. 내가 필요한 부처는 내 대신 저울 위에 올라가는 붓다입니이다. 내 마음 속에 부처가 있느냐 없느냐는 상관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부처가 있다고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내 마음 속에 부처가 있다고 행복해지셨습니까? 내가 필요한 붓다는 저울 위에 올라가 있는 붓다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부처가 있다면 왜 삶이 팍팍합니까? 우리 마음 속의 부처는 잠만 자고 있는 건가요? 부산의 그 소녀가 절망과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그녀의 마음 속에 있다는 붓다는 도대체 뭘 했습니까?  신이 있다면 신이 뭘 했는가? 과학문명의 발달은 예기치 않은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세에 페스트가 만연하여, 당시 유럽인의 2/3가 죽었습니다. 교회의 기도에도 효과가 었습니다.  신에게 기도해도 넘쳐나는 시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데 눈뜨게 되는데, 그것이 과학문명의 발달의 계기가 됩니다. 교회는 추락한 권위를 만회하기 위해 마녀의 짓으로 몰아, 수 많은 죄없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내 대신 저울 위에 올라갈 수 없다면 그것은 립 서비스입니다. 즉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부처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그 분이 내 대신 저울 위에 올라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이 기도이고,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이 참회이고,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이 수행이고,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이 경전 읽기이고,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요새 주변에 깨달음을 말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관념일 뿐입니다. 깨달음을 말하려면, 저울 위에 올라갈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그런 열정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사실은 이런 강론을 해서 이익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너는 저울 위에 올라갈 수 있느냐 라고 되묻기 때문입니다. 저는 용기가 없어 저울에 못 올라갑니다. 만약 용기가 잇다면 여러분은 나를 못 보게 됩니다. 저울 위에 올라 가면 올라갈 뿐 이렇게 시지부리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성도하고 나서 침묵합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비둘기 대신 저울에 올라가 보여주면 됩니다.

 

나도 저울 위에 올라가고는 싶습니다. 오늘 다함께 저울에 올라갈 볼까요? 오늘 강론은 꽃샘 추위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꽃봉오리를 떨어뜨린 그 소녀에게 바칩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커피 한잔과 혼자 듣는 클래식 12곡 모음

01.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1번 04:27

02.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4번 02:39

03.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6번 05:10

04.베토벤 /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2악장 06:24

05.비발디 / 바이올린협주곡 '라 스트라바간차' Op.4 No.10 1악장 03:06

06.쇼팽 / 야상곡(Noctum in E Flat. Op.9 No.2) 05:20

07.차이코프스키 / 야상곡 Op.19 No.4 01:17

08.모차르트 / 피아노협주곡 제21번 2악장, 안단테 06:43


09.Rossini /"별빛비치는 그대 창가"의 G선상의 변주곡 - Martin Merker(Cello) 07:09

10.하이든/교향곡 제6번 D장조 H 1 No.6 '아침'(Le Matin) 3악장(Menuetto & Trio) 04:32

11.토셀리 / 세레나데<바이올린> 연주 03:40

12.멘델스존 / '노래의 날개위에'(Auf Fluegeln des Gesanges,Op.34-2) 관현악연주03:04


 

연속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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