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5. 20:1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믿음의 등불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4년 7월 4일
오늘의 강론 주제는 '믿음의 등불'입니다.
코살라라고 하는 여인이 부처님이 계시는 베르바나에서 그 처소에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남의 집에 문전걸식를 하고 사는 처지라 등불을 켤 수 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했고, 그래서 남의 집에 구걸을 하면서 살아가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부처님이 계시는 그 곳에 등불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습니다. '오늘은 음식을 구걸하지 말고 돈을 구걸해야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돈을 구걸했습니다. 음식을 주면 사양하고,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하냐면, 음식을 주기는 쉬운데, 돈을 주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 식은 밥 한 끼 달라면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금을 달라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녀가 돈을 달라고 하자 사람들의 얼굴 색깔이 변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이 필요하면, 가급적 현금보다는 물건, 즉 현물을 빌려달라는게 쉽습니다. 말하자면 돈보다는 금반지ㅎ로 말이죠.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어렵게 돈을 조금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뜩찮지만 그녀에게 돈을 조금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돈으로 기름가게에 달려가 기름을 달라고 했습니다. 기름가게 주인이 기름을 어디에 쓸려고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돈으로는 기름을 아주 적게 줄 수밖에 없어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베르나바에 계신 부처님께 등불을 밝혀 어둠을 쫓고, 이 대지를 밝게 빛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이 돈으로는 아주 적은 분량, 1홉 정도의 기름밖에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베르나바에 있는 부처님의 처소에 불을 밝혀, 이 세상을 대낮같이 밝히다고 하니, 돈과 관계없이 오늘 등불을 켤 수 있는 기름을 주겠습니다." 그녀는 그가 걸식하는 밥먹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베르나바로 갑니다. 그 곳에는 화려한 그릇에 수미산 같은 심지에 붙인 등불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쪼그라지고 초라한 등불을 한 쪽 구석에 놓습니다. 그리고는 '이 등불이 부처님의 처소를 밝혀, 이 세상을 밝게 했으면'하고 속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저녁이 지나 새벽이 되었습니다. 개의 시간, 늑대의 시간이 지나간 거죠. 날이 밝자 부처님의 시자였던 아난다 존자가 타고 있던 등불을 끕니다. 구석에 있는 찌그르진 그릇 위의 등불을 아난다 존자가 보고, 끄려고 합니다. 그런데 손으로 그 등불을 끄려 하자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입으로 하려했는데, 그래도 꺼지지 않습니다. 가사자락으로 끄려 해도 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채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부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 부채라고 하지만 사실 비구들이 태양을 가리기 위해 들고 다니는 도구입니다. 지금도 미안마 등에 가면 스님들이 이걸 사용합니다. 비구는 모자를 쓰면 비법입니다. 정확하게는 불법입니다. 비구는 머리를 가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걸로도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이 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난다여! 설사 바닷물을 기울여 그 등불을 끄려해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난타의 마음의 등불이다"라고합니다.
밤새 비추고도 꺼지지 않는 그 등불은 그녀의 마음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 불자님들도 말은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무렵이면, 지겹게 들었을 것입니다. 빈자일등(貧者一燈) 이라고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여인의 등불 같은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는 가난한 여인의 등불이 소중하게 다뤄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절이나 법당의 정 중앙에는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아니면 권력자, 돈 많은 자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얘기를 할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뻔한 얘기, 형식적 얘기, 가식적 얘기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의 등불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구체적으로 '이것이다'라고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피자 한판에서 피자 조각을 나누듯 간단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믿음은 마음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난타의 등불을 믿음의 등불이라고 말한 것은 마음을 담아낸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꽃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왜 꽃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가? 아름다와서, 아니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꽃을 좋아하는 것은 꽃이 향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교에서 연꽃을 상징적인 꽃으로 쓴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제가 얘기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연꽃은 연꽃일 뿐 어떤 것도 상징하지 않습니다. 그저 연꽃을 끌어다가 상징으로 쓰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스스로 향기를 잃지 않고, 스스로의 향기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합니다. 권력이 있으면 기고만장하고, 권력이 없으면 한없이 고개를 떨굽니다. 돈이 좀 있으면, 술집에서 종을 사정없이 흔들어버리고, 돈이 없으면 사정없이 어깨가 처져 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힘이 있으면, 그 권세가 날아갈 듯 합니다. 그러나 힘이 없으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연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고유의 향기를 잃지 않고 향기를 담아냅니다. 연꽃이 불교의 사랑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비들도 연꽃을 좋아합니다. 선비들은 그 꽃을 군자에 비유합니다. 독립기념관의 개관 때 연꽃이 많았다나요. 그런데 기독교인 관장이 부임하면서 연꽃을 다 뽑아버렸다나요? 참으로 이해 못할 것이 많습니다. 꽃이 무슨 죄이겠습니까.
꽃은 스스로 향기를 담아 냅니다. 믿음은 스스로 마음을 담아 냅니다. 믿음, 꽃, 사랑은 거의 같아요. 사랑이란 내 마음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눈빛만 봐도 안다고 하는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마음을 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향기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거기에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기야 이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중요하니까요. 우리는 잡초를 뽑아 냅니다. 꽃과 곡식 이외의 모든 잡초가 없어지면, 인간이 행복할까요? 꽃과 곡식 이외에 모든 잡초를 없애고 나면, 미안한 얘기지만 인간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꽃이고 곡식이고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굳이 언어로 표현하다 보니 거기에 방점을 찍어서 그런 것입니다. 중요하다 또는 중요하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은 주관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수선화를 하두 좋아해서, 중국에 아버지를 따라 갔다 오면서 수선화를 몇 송이 얻어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가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되자 그 곳이 수선화 천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밭에 있는 수선화를 제주도 사람들은 지겨워하고, 농부들은 수선화를 보면 잡초라 여겨 뽑아 버립니다. 제주도의 농민 입장에서는 필요한 것은 한 홉의 곡식이지 수선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하다는 언어를 쓰는 것은 언어로 소통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형식이란 아름답게 꾸며지는 것입니다. 내용이란 꾸며지지 않고 소박한 것입니다. 형식은 화장을 한것, 옷을 걸친 것과 같습니다. 내용은 어떤 옷을 걸쳐도, 화장을 하든 하지 않든 원래 있는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용보다 형식에 눈이 돌아갑니다. 내용은 꾸미지 않아 소박한 것이며, 형식은 아름답게 꾸민 것입니다. 어떤 총각이 장가를 못갔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안갔는지 못갔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총각이 이쁜 처녀만 찾는다는 것입니다. 총각만 이쁜 처녀를 찾을까요? 처녀도 멋있는 남자를 찾습니다.
내가 이쁜 여자를 고르려면, 내가 멋진 남자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멋진 남자가 아니라면, 이쁜 여자가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살 확률은 마른 하늘에 벼락 맞아 죽은 확률보다 낮습니다. 비오는 날 벼락 맞을 확률은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높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급적 비오는 날에 나가지 마세요. 로또에 맞는 것보다 높은 것이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죽는 일이니, 옛날 사람들은 '마른 하늘에 벼락에 맞아 죽을 놈'이라고 욕을 합니다. 멋진 여자가 나와 살아줄 확률이 마른 하늘 벼락 맞아 죽는 확률보다 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요시 합니다. 마음을 담는다는 것은 내용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담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어법에 따르면, 동양적인 사고에 따라 용어를 빌리면, 덕(德)이 적절할 것입니다. 덕은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덕이라는 의미를 쉽게 이해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향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이란 그 사람의 향기입니다. 꽃만이 향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는 나오는 향기, 즉 덕이 없으면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중국 북송 때 오조 법연 스님이 제자 혜근이 태평사라는 큰 절 주지로 가게 되자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합니다. " 주지라고 해서 주지의 권한을 다 쓰지 마라! 주지라고 해서 주지의 권한을 다 쓰면 외로워진다." 내가 권력이 있다고 해서 권력을 다쓰면 외로워 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재물이 있다고 해서 그 재물을 너 자신만을 위해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로가 불행해지고 비참해 집니다. 사람의 향기, 그 덕이라고 하는 것이 오조 법연의 말 속에 들어있죠.
여러 번 말했지만, 불교는 상식을 초월해 존재합니다. 불교의 믿음은 어떠한가? 에도막부의 상대장군 이에야쓰는 기리스탄을 일본에서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기리스탄이 뭐냐고요? 기리스탄이란 일본어로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인을 추방하기로 결심한 것은 선교사들의 행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지방 영주나 행정가들의 머리 위에 앉아 본국과 내통한다고 의심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에도막부의 이에야쓰는 일본의 안전을 위해 그리스도교를 척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선교사를 외국의 첩자, 그리스도교인들을 이 첩자에 포섭된, (대한민국이 그렇게 좋아하는 단어) 간첩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그리스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해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씨가 대한민국에는 빨갱이가 많다고 했던가요? 그런데 누가 빨갱이인지 어떻게 알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기가 막힌 방법을 고안해 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믿다가 배교한 배교자 고안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십자가를 밟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안을 낸 사람은 천재입니다(?)
부처님은 네 종류의 인간, 즉 천재, 수재, 법재, 둔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네 종류의 인간은 태어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즉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선천적이라는 설이 우세했습니다. 지금은 천재가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동물이 태어나자 마자 움직이는 것은 뇌가 다 성장해 굳어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은 0~4세까지 뇌가 성장한다고 합니다. 뇌가 완전히 성장해버리면, 엄마 배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성숙 상태에서 나옵니다. 인간은 이 시기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5감의 성장을 통해 뇌가 성장합니다. 즉 오감을 얼마나 자극시키는가에 따라 뇌의 성장이 좌우됩니다. 우리는 흔히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애가 엄마 또는 아빠 닮아서 그렇다!"고 상대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닮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모가 내 아이의 성장에 별로 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재, 수재, 범재. 둔재는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입니다. 부처님이 안이비설신이나 색성향미촉을 말하는 이유가 다 그것입니다. 천재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면 힘들어 하실 것 같아서 위로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아버지나 어머니 탓이라고 하면 위로가 좀 됩니까? 여기 현수 부모님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갑니다. 이에야쓰의 방법은 역시 효과가 좋았습니다. 수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못 밟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조선의 영조 같은 임금은 바보입니다. 일본은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라는 식의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인을 색출해 간단히 정리했는데, 조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상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교도는 태연히 십자가를 밟습니다. 그리고는 태연히 돌아가 기도합니다. 그 십자가를 밟느냐 안 밟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밟고도 태연히 돌아와 기도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믿음입니다.
불교의 믿음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채우는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에 관해 말하려고, 에도막부 상대장군이 그리스도교인들을 척결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임이 탄로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인데도, 왜 십자가를 밟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십자가를 밟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죽는 사람입니다. 이념을 위해 죽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밟는다고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전향서 한 장 쓴다고 해서 양심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아니라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명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유교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명분에 죽고 사는 명교입니다. 동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명분입니다. 그것이 실제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분이 중요합니다. 명분을 위해 죽고, 명분을 위해 삽니다. 순교니 이념을 위해 죽는다는 것도 알고보면 명분 때문입니다. 스스로 내용이 부족하니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불교도라면 태연하게 그 십자가를 밟아야 합니다. 그리고 태연하게 돌아가 기도하면 됩니다. 종교적 상징물을 우상시하는 것, 그것은 내용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부처님이 항상 얘기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내면으로의 회귀를 말합니다. 내면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내용을 채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꽃이 향기를 담듯이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항상 드러나지 않은 것보다 드러난 것을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항상 소박한 것보다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면의 향기를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릇에 무엇을 담아야, 담아서 가득차게 되면 넘쳐흐는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물이 차야 넘치죠. 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두껑을 닫아 흔들어 보십시요. 흔들리지 않습니다.
꼴불견 중의 하나가 반찬은 많은데 먹을 반찬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릇은 화려한데, 음식은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전라도 음식을 싫어합니다. 그 분들은 싫어할 지 모르겠지만, 제가 전라도에 한 10년 정도 살아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 쪽 식당에 다녀와 겨우 생명은 유지하고 다닙니다. 보통 3,000원 정도로 백반을 시키면, 강원도에선 고등어 하나, 나물 해서 3가지 정도 반찬일 것입니다. 전라도에선, 내가 직접 세어보니 23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놀랐습니다. 놀라서 죽을 뻔 했지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더 놀란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 수는 많지만 그 놈이 그 놈인 반찬입니다. 젖갈 좋아하십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반찬이 젖갈인데, 이 젖갈 저 젖갈 해서 가지 수만 많고 먹을 것이 없더라는 얘깁니다. 그릇은 화려한데 내용이 빈약합니다. 60년대, 70년대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외지에 살던 고모나 삼촌이 오는 날이면, 그 종합선물세트 때문에 밥을 안 먹어도 행복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선물세트를 펼쳐 놓으면 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합선물세트는 내용이 부실합니다. 마치 종합선물세트와 같죠.
부처님이 말하는 믿음은 마음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요?
우리 불교는 대단히 형식적입니다. 한국불교는 역사적 불교입니다. 불교는 불교 원래의 불교, 즉 원형의 불교와 역사적인 불교로 구분됩니다. 이 구분을 잘 해야 합니다. 한국 불교는 역사적인 불교입니다. 그렇다 보니 형식적입니다. 형식적이라는 말은 보여주기 위한 불교라는 것입니다. 즉 이벤트죠. 그저 성지 순례를 간다면 미꾸라지를 사가지고 문무왕의 해장릉이 있는 바다에 쳐넣고, 바다 거북을 사서 소양강에 투하합니다. 물론 전에는 이런 성지순례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미꾸라지를 바닷불에 푸는데, 미꾸라지 입장에서는 그 때가 아니면 언제 바다구경을 하겠습니까? 바다거북은 언제 또 소양강물을 헤엄쳐 보겠습니까? 물론 생명을 담보해야죠.
절에서 하는 절 3,000배를 처음 유행시킨 사람은 해인사 성철 스님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이때의 삼천배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은 자기를 만나려면, 자기를 만나 공부하고 진리를 얻겠다는 사람은 적어도 그 정도의 노력, 그 정도의 투지, 그 정도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절을 보면, 그저 헬쓰클럽에서 운동하는 수준이죠. 나도 요새 운동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소양강변을 한바퀴 도는데, 소양강 처녀상이 서있더라구요. 그리고 누르라고 되어있어 눌렀더니, 소양강 처녀라는 노래가 나옵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합니다. 눌르라니 눌러야죠. 오다가 보면 운동기구가 9개 있는데, 하나하나마다 인사를 하죠. 오는 길에 보니 대룡산자락의 뭉게구름이 참으로 아름답습디다. 헬쓰클럽 회원권이 없어도 좋습니다.
원래 절은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부처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동남아에서는 지금도 스님들이 맨발로 다닙니다. 평소에는 찌게다시, 즉 샌달같은 걸 신지만 말입니다. 2,500년전에는 수행자가 맨발로 다녔습니다. 소똥도 밟고 말입니다. 제가 미안마 있을 때인데, 그 곳은 맨 소똥입니다. 안 밟으려면 공중에 떠다닐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소똥으로 가득합니다. 남방 소 20~30마리를 현수만한 7,8살의 아이들이 몰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 소들은 집에서 교육도 받지 않는지 비는 오는데 소똥을 아무데나 갈깁니다. 처음에는 참 거시기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소똥을 밟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요. 아 한번 밟아봐요. 그러기 때문에 발은 더러워집니다.
고대인도 신화에서 노예가 창조주 브라만의 발꼬락에서 나왔다는 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그 더러워진 발에 머리를 대고 입을 맞춘다는 것은 더 이상의 공경의 예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발에 머리를 대고 입맞춘다는 것, 그 이상의 존경심, 믿음을 나타내는 방법은 없습니다. 혜가가 달마대사에게 배움을 청하러 왔는데 달마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밤새 눈이와 꼼짝않고 기다리던 혜가는 허리에 눈이 차 옵니다. 그러나 달마는 법을 구하려는 자가 겨우 하룻밤 눈 속에 있다고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공경, 즉 정성이 부족함을 나무랍니다. 그러자 혜가는 손목을 잘라 법을 구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절은 공경의 표시이며, 그래서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대고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지금의 절은 어떤 믿음이나 부처님에 대한 공경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참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경박하고 촐랑댄다고나 할까요. 딱 그저 굳이 찾아낸다면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3,000배니 108배니 하는 절을 부처님의 발에 대고 침구하는 그 마음으로 할려면, 몸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절제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절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3,000배니 108배를 고집하는 걸까요? 형식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절에 마음을 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3,000배를 자랑하고 떠들고 싶어합니다. 차라리 영화를 찍는게 낫지 않을까요.
난타가 그 등불을 켰을때, 그리고 그 등불이 꺼지지 않을 때, 부처님은 그 등불을 마음의 등불, 즉 믿음의 등불이라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그녀에게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파세나디왕이 말합니다. "부처님 저는 수미산 같은 등불을 켰는데도, 저에게는 어찌 축복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까?" 고려 균여 스님이 보현십원가에서 말한 것처럼, 그 왕의 부처님 섬기기가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대해 같다고나 할까요. 부처님이 말합니다. "빔비사라여, 난다의 등불은 그의 전부이니라. 그러나 그대가 켠 등불은 부분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왕의 등불은 왕이 가진 것의 부분에 불과합니다. 유식한 표현으로 사자성어를 쓰자면, 구우일모(九牛一毛)입니다. 그러나 난다는 그것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파세나디왕의 것은 크고, 난다의 것은 작습니다. 산술적으로,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바로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용을 봐야 합니다. 겉모습과 형식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난다의 등불을 마음의 등불이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은 마치 꽃이 향기를 담아내듯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사랑, 꽃은 같습니다. 모두 마음을 담아내기 때문이죠. 사랑하지 않으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죠. 예불문에서는 그것을 헌신(獻身)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헌(獻)은 드린다, 즉 담아낸다는 뜻입니다. 내가 절을 하면서 내 마음과 몸을 담아내지 못하면 절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서 내 마음과 몸을 담아내지 못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경전 읽으면서 내 마음과 몸을 담아내지 못하면 경전을 읽어도 읽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행을 하면서 내 마음과 몸을 담아내지 못하면 결코 수행이 아닙니다. 담아낸다는 것은 내용물을 말하는 것이지 형식, 드러난 것, 화려하게 꾸며진 것이 아닙니다. 난다가 믿음을 등불을 켜듯이, 이 모든 것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녀가 믿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은 진실을 담는 것입니다. 진실을 담는다는 것은 형식과 가식 그 어떤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담는다는 것은 오직 내 스스로의 본래 모습, 있는 그대로 부처님께 나아가는 것, 그리고 나에게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달력이 안 넘어 갔는데, 6월 29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서울에서 돈있고, 권세 있고, 빽있는 사람들이 자주 가고, 사랑했다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입니다.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느냐? 그 날은 백화점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무너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내용도 없이, 그저 화려하게 겉만 치장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무너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을 세자로 줄여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골 볐네!'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은 삼풍백화점에서 뜻하지 않게 참변을 당한 그 당시의 많은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불자님들과 그 가정에도 은혜와 축복 속에 내용 가득한 충실한 복된 삶이 이어지고, 정과 사랑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싸두 싸아두 싸아아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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