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부증불감|******@불교의우주론@

2018. 6. 30. 15:32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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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로의 눈물 ]


<26>부증불감

- 무분별·무심 경지서 보면 생멸증감은 없어-
- 일체는 변하지만 바닷물과 파도 같은 현상 -

어떤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 본 적이 있다.

불교에서는 윤회한다고 하지만 지구 위에 사는 사람의 수는 계속 늘어가기만 하는 데 그러면 그 사람들은 도대체 다 어디에서 오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왜 사람의 수만 세느냐고 물었다. 지상에 사는 생명체가 사람만은 아닐 것이요. 그래서 우리의 세상은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같이 살아가는 장소이다. 실제로 불교를 비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세상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윤회 사상을 부정하고자 하는 이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윤회를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는 것도 어렵겠지만, 이를 과학으로 부정하기는 더욱 어려우리라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이를 부정하려면 이 세상에 사는 박테리아의 수까지 모두 세어야 하는 데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수를 세어가면서 윤회가 맞느니 틀리느니 하고 논쟁하는 것은 불교에서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린아이 장난과 같은 것이요, 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해명하면서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선언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부증불감(不憎不減)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무엇이 부증불감인가? 흔히 바다를 부증불감의 간단한 예로 든다. 무수한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바닷물의 양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다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어느 한 순간 쉬는 일없이 계속하여 운동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강물이 흘러 들어오면서 또 한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수증기가 바닷물의 표면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바다인 것 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매 순간 변하고 있으니 바로 전의 바다가 지금의 바다가 아니요 지금의 바다가 또한 바로 후의 바다가 아니다. 이 변화의 과정 중에서도 유입되고 방출되는 양이 동적인 균형을 이루어 바닷물의 양은 언제고 부증불감이다. 생명체의 예를 들어보자. 생명계의 모습은 물론 나고 죽은 것이라고 하여야 하겠으나, 바닷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나고 죽음에도 실제로 증감은 없다. 생명체의 나고죽음이라는 것이 지수화풍의 사대(현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제 원자)가 화합하거나 별리(別離)하는 것이어서, 현상적으로 보면 나고 죽음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부증불감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나고 죽음 뿐만 아니라 매 순간의 삶이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만 한 치의 늘어남도 줄어듬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마치 바닷물에 일어나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바람이 불음으로써 그 전에 없던 파도라는 형상이 생기지만, 이 파도라는 것은 단지 바닷물이 바람이라는 인연을 만나 모습을 바꾸어 이루어진 것 뿐이므로 일체의 증감이 없다고 보아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증감이라는 집착을 갖게 되는가? 그것은 강물이 유입되는 것만을 보기 때문이며, 바다 표면에서 수증기가 증발하는 것 만을 보기 때문이며, 나는 것 만을 보기 때문이며, 죽는것 만을 보기 때문이며, 파도 만을 따로 떼어내어 보기 때문이다. 강물이 유입되고 수증기가 증발하는 것을 같이 보고, 나고 죽는 것을 같이 보며, 파도가 일고 스러지는 것을 바다와 함께 본다면, 즉 일체 존재를 이것과 저것, 또는 나와 너라는 분별상으로 나누어 보지 않고 주객을 합친 경지에서 본다면 느는 일도 없고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종륵스님은 “제법(諸法)의 당체(當體)가 진공실상(眞空實相)이니 실상의 체를 세워본즉 생멸함이 없고, 생멸이 없으니 어찌 구정이 있겠는가? 또한 구정이 없으니 어찌 증감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또한 능엄경에서는 “오음(五陰)과 육입(六入)과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가 모두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나고 인연이 별리하면 허망하게 멸한다.”로 하였으며, 또한 “업(業)을 따라 발현(發現)하는 것이어늘…다만 식심(識心)으로 분별하고 계도(計度)하는 것이라 다만 언설(言說)이 있을 뿐이요, 전혀 실의(實義)가 없다.”고 하셨다.
불구부정에서 말하였던 것과 같이 무분별 무심의 공관(空觀)으로 올바로 본다면 오직 부증불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