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8. 15:5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선장이신 부처님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9월 5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선장이신 부처님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세상에 고苦가 없으면 나는 출가하지 않았다" 고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보통은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원어 '두카'는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뭔가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불편한 것, 그것을 두카라고 합니다. 두카는 대체로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마음에 담아져 있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것이 폭발하면 남을 분노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즉 두카가 외형화되면 '도다'입니다. 도다를 분노, 화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도는 그것보다 더 총체적인 것입니다. 불만족이 외형화되면 화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폭력, 욕, 자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아 타이거즈 윤정환인가?( 확실히 스님은 세상 물정에 약하셔. 윤정환은 축구선수인데 , 기아 타이거즈 투수 윤석민을 말하는 것임, 관련기사 참조) 자기가 잘 던져 이기다가 구원투수가 3점을 까먹고 저버렸습니다. 프로야구 투수의 연봉은 승률과 관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화가 나 주먹으로 운동장 라커룸의 벽을 쳤는데, 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손가락이 부러져 경기에 얼마간 못나오게 되니 손해가 많습니다. 몇 달 경기에 오를 수 없으니, 팀 입장에서는 우악스런 사람이겠죠. 두카가 외형화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불만족! 불만족은 왜 오는가?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불완전한 상태이므로 불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두카의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그 두카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구합니다. 두카의 바다 이것이 고해苦海입니다. 항해란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가는 것인데, 이 쪽은 불만족스러운 곳이고, 저 쪽은 그것이 없는 곳을 뜻합니다. 그것이 없는 것을 열반, 해탈, 깨달음을 얻었다고 표현합니다. 항해란 불만족에서 불만족으로 없는 것으로 가는 것인데, 이것이 해탈, 열반,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고해의 바다를 건네주는 선장입니다.
<자타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불교를 이해 할려면 자타카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자타카라는 우화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타카의 주인공은 대체로 동물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에 망고원이 있습니다. 망고는 동남아에서 과일의 왕이라고 불립니다. 밀림 속에 망고원있는데, 이 밀림의 주인공인 원숭이가 망고를 따먹고 즐겁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망고라는 과일이 워낙 달고 맛있습니다. 그러나 덜 익은 여름 망고에는 독성이 있습니다. 제가 미안마 시절 이 여름 망고를 많이 먹고 발진이 나서 엄청난 고생을 한 스님을 보았더랬습니다. 그 쪽 사람들은 망고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망고원에는 유독 크고 단 망고가 있어 원숭이의 사랑을 받았는데, 농익어 떨어진 그 망고가 물 따라 흘러 내려갑니다.
무릉도원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죠. 무릉도원은 동진 때 시인 도연명의 시에 처음 등장하죠.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 개울가에 복숭아가 떠내려 오는 걸 보게 됩니다. 그걸 주워 먹어 봤더니 너무 맛있어 개울을 따라 올라가니 어떤 동굴이 나오는데, 그 동굴을 지나니 그 곳이 바로 무릉도원입니다. 안평대군이 꿈꿨다는 무릉도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대 참 재미있는 것이 있죠. 이 꿈을 그림으로 그림 안견의 무릉도원의 그림, 몽유도원도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안평대군이 본 무릉도원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근데 왜 이런 이야기에서는 왜 꼭 동굴이 등장하는지 몰라? 이 굴을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아마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무릉도원은 인간세계와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굴은 어둡고 칙칙하죠. 여길 지나면 무릉도원이 나타난다는 것이죠. 심리학적으로 주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여기서는 그걸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을 나온 그 사람이 나중에 가족을 데리고 갈려하니 그 동굴의 구멍을 찾지 못하겠더라는 것입니다. 나뭇꾼이 우수 인재가 아니라서 그곳에서 안받아준가? 아니면 뛰어난 과학자, 또는 돈많은 사람이 아니면 그 곳이 이민제한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다시 망고 얘기로 돌아가서, 망고가 떠내려 갔는데 우연히 뱃놀이를 하던 왕이 그걸 건져 먹게 됩니다. 먹어보니 혼자 먹다 죽을 정도로 맜있습니다. 왕은 틀림없이 맛있는 망고가 강을 따라 떠내려 왔으니 위에는 망고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슬러 강을 올라가니 과연 망고원이 있습니다. 유독 맛있는 큰 망고가 보였습니다. 큰 망고는 변이죠. 진화는 일종의 변이입니다. 난도 변이종은 겁니게 비쌉니다. 촉당 몇 천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비싸죠. 그런데 그 큰 망고의 나무에는 원숭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명령하죠. 망고나무에 화살을 쏘아 그 원숭이들을 떨어뜨리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옛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땅은 왕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왕의 것이죠. 특히 중국은 그런 것이 강합니다. 중국 최고의 신은 하늘(天)입니다. 하늘이 왕에게 이 땅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천명(天命) 입니다. 그러니 왕이 볼 때 내 것을 원숭이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 비오듯 화살이 쏟아지니 원숭이들이 나무잎 떨어지듯이 떨어집니다.
인간세계 뿐만 아니라 짐승세계에서도 군집생활에는 리더가 있습니다. 인간세계의 왕이 있듯이 원숭이 세계에도 원숭이의 왕이 있는 것이죠. 원숭이들이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의 반대 편을 향해 건너 뛰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갈려니 너무 거리가 멉니다. 넝쿨 식물을 타고 건너편을 연결할려니 너무 짧습니다. 그런데 이 때 원숭이왕이 왼쪽으로 넝쿨을 잡고 오른쪽 반대편 나무를 잡고 다리를 놓습니다. 그 때야 원숭이들이 건너가게 되는데, 모든 원숭이들이 다 건널 때까지 자기는 화살을 맞고도 그 다리를 놓지 않습니다. 그 때 왕이 다시 명합니다. "화살을 멈춰라! 원숭이의 왕도 자기 백성을 위해 화살을 맞고도 놓지 않는구나! 인간의 왕인 나보다 원숭이왕이 훌륭하도다." 이 원숭이왕이 부처님 전생이라는 것이 자타카의 얘깁니다.
왜 이런 얘기를 자타카에서 하는가? 부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는 이유가 많은 사람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전도선언에서도 그랬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모든 중생들이 안전하게 고해를 건너 행복하게 하기 위해입니다. 이 쪽 망고나무에서 비오듯 화살이 쏟아지죠. 그것이 두카입니다. 건너게 하는 것은 저 쪽에 두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행복을 얻는 것이 그 곳입니다.
나는 자비, 사랑, 자기 희생... 이런 언어문자를 늘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것이 있습니다. 밑에 불을 하고 그 위에 사람을 매달아 놓으면? 실제 나치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인데 여자보다는 남자가 배 이상을 버틴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에게 아이를 안겨서 실험을 했더니 아버지의 경우에는 혼자 일 때와 시간 차이가 없었는데, 어머니의 경우에는 혼자 매달려 있을 때보다 오히려 3배나 더 버텼다고 합니다. 남자에게는 아이를 안겨도 별 차이가 없는데, 엄마는 매달려 았는 시간이 3배나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성 자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홀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듯이'라는 표현이 그런 것입니다. 자식사랑에는 엄마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엄마는 자식과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비, 사랑, 희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도 이런 걸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나무도 위기감을 느끼면, 고사직전에 솔방울을 두 세배 많이 단다고 합니다. 이것은 식물의 자기 사랑이죠. 부처님의 이야기를 자비, 사랑, 자기 희생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붓다이며, 그것이 다르마의 본질입니다.
어떤 생명이든 자기 생명은 소중이 여깁니다. 저도 쏱뚜껑 운전 경력이 솔찮은데, 가끔 봉변을 당합니다. 식었다는 생각에 덜 식은 솥에 손을 얹기라도 할라치면, 즉 데기라도 하면 닿는 순간 그렇게 동작이 빠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뜨거운 걸 잡고 버티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반드시 날아오는 총알에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순자가 옵니다. 순자가 오는 줄 알면 '순자가 오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숨었다 갑자기 나타나면 순자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왜일까요? 무방비 상태라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죠.
우리에게는 철천지 원수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서는 그들의 영웅입니다. 그의 책사 구로다 간베에는 모사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히데요시의 권력 장악에는 이 구로다 간베에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전술, 전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히데요시가 간베에가 어느 날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가 무슨 유언을 남기지 않았는가라고 물었으나,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그가 무슨 말을 남겼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가 남긴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재주가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다이묘가 되었을 것인데, 재주가 있는 죄로, 그 재주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다이묘 한 번 못되어, 그게 한이다" 구로다 간베에는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히데요시는 다리가 불편한 간베에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이유로 영지를 주지 않습니다. 군사를 거느리리면 영지가 있어야 합니다. 영지가 있는 사람이 다이묘입니다. 히데요시가 영지를 주지 않은 거죠. 왜? 누구보다 그의 재주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구로다 간베에가 다이묘가 되어 다른 생각을 품으면,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는 임진왜란 이후에 주종의 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조선 성리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사무라이끼리의 관계는 계약관계입니다. 계약이 해지되면 상대방은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효과적 감시는 내 눈앞에 두는 것입니다. 언제나 감시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제거할 수 있죠. 그렇게 때문에 히데요시는 간베에를 높이 대우했지만 영지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놀라는 이유도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제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통제되지 않아 두려운 것입니다.
<자타카>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존재하는 목적이 중생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성취해 주기 위해 부처님이 존재합니다. 모든 동물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경우 가만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도 그런 얘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멍석 깃발이라는 일본의 얘기가 있습니다. 막부, 전국 시대에는 농민에 대한 수탈이 특히 심해서 곡식을 넣는 멍석을 짤라 깃발을 만들고, 그 깃발을 들고 항쟁에 나섰습니다. 이승만과 조병옥의 대선에서 조병옥의 선거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습니다. 농민들이 얼마나 수탈을 견디지 못하면, 깃발을 만들 천도, 거기에 써 놓을 문자가 없을 정도이겠습니까. 이런 경우 농민들은 굶어서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나서는 순간, 주위에서 낫, 괭이, 쇠스랑을 들고 따라 일어나는데, 이런 때는 통제 불능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죽기 전에는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살기 위해, 부를 탐해 전쟁을 일으킨게 아닙니다. 죽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 입장에서는 싸우다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통일제국 진나라 진승은 원래 별 볼일 없는 건달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 댓 명 정도 반란을 일으켰죠. 그런데 당시 만리장성을 쌓는데 기한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 때 태풍일 일어나 거기에 도착하기에 이미 늦 어버린 농민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농민들은 가도 죽게 되었으니 반란군을 돕습니다. 농민들도 굶어 죽는 위기에는 반란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이라 동물들도 자기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하물며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던져 넣는다고 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비심, 자기 희생 이런 말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구가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구는 모든 사람의 안락과 행복을 위한 의무와 책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뿐만 아니라 그 제자도 그런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에 종사하면 이해관계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게 됩니다. 자타카의 얘기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수가 존재의 의미인가, 이유인가 하는 노래를 불렀던가요? 붓다의 존재이유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붓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숭이왕의 행위는 너희는 나를 밟고 안전하게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를 밟고 열반의 세계로 가면 됩니다. 붓다가 다리가 되고, 배가 되어 줍니다. 너희들이 행복과 안락을 성취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나를 밟고 건너라는 것이 자타카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고苦를 피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의 고는 내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 경전인 법화경에 보면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삼계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왜 나오려 하지 않는가? 개구리도 뜨거운 물에 넣으면 튀어 나옵니다. 무협지를 읽어보면, 방탄지공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튕겨져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먹을 치면 주먹이 부숴집니다. 그렇지만 개구리를 처음부터 뜨거운 물이 아닌 찬물에 넣어서 서서히 물을 뎁혀 끓이면 죽습니다. 파충류 개구리는 온도변화를 인지 못해 나오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재미있다기 보다는, 참으로 우리의 삶과 이와 다를 바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큰 사건이 일어나면 순간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서서히 위해를 가해오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습니다. 우리는 냄비의 물이 온도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당면과제라도 서서히 변화를 일으키면서 다가오면 잘 모릅니다. 관을 보고야 눈물을 흘리죠.
"인간은 관을 보지 않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오늘 아침 장례예식장을 다녀왔습니다. 이럴 때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보통은 화장에 들어가는 영가가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들어야 변화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나의 일이자 당면과제가 됩니다. 가서 눈물을 흘리지만, 나에게는 20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추모했다고 할 일 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두카는 당면과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입니다. 너희는 왜 나라는 존재를 밟고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 하지 않느냐? 부처님께서는'나는 고해를 건너 주려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존재이유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오직 중생인 우리들이 행복한 그 날까지 그 임무는 끊나지 않습니다.
저도 가물가물합니다. 매일, 매순간 그래야 하는데... 이게 뭐 귀한 것이라고 추석, 설 같은 명절에만 생각하는 건 아닌지. 나는 부처님 제자로서 그 책무를 얼마나 이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당면해 있는 것을 너무 멀게 생각합니다. 내 눈 앞에 있는 걸 느끼지 못하고, 너무 거창한 걸 얘기합니다. 지금 폭풍우가 닥치고 있으면 피하는 게 당면과제입니다. 폭풍우에 미꾸라지를 주울 생각을 한다면? 미꾸라지는 빗물을 타고 오르다 떨어집니다. 항용유회( 亢龍有悔)란 주역에 나오는 말로, 높이 올라간 용은 반드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역의 품위에 비추어 미꾸라지라고 하면 품위가 낮아보여, 용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당면해 있는 것에 무관심합니다. 왜냐하면 거창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에 매몰되어 실질적인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막걸리가 유행해 잘 팔려나가면 막걸리에 물을 탑니다. 주전자를 찌그러뜨려 양을 줄이기도 합니다. 마치 이처럼 막걸리에 물을 타 희석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거대 담론에만 치우쳐 나머지는 찌질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백유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3층집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내가 가진 재물이 저 3층누각의 주인보다 못할 것이 없다 여겨, 목수를 불러 3층집을 짓게 합니다. 그런데 그는 목수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3층집을 갖고 싶은데, 어찌 1, 2층을 짓는냐?" 그러자 목수는 1, 2층 을 올리지 않고 어떻게 3층을 지을 수 있냐며 '그러면 니가 지어'라고 떠납니다. 우리가 그와 똑 같죠. 3층이 좋다는 것 때문에 1, 2층을 무시하고 간과합니다. 어느 누구도 1, 2층을 밟지 않고 3층을 알수 없습니다. 1층은 우리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부처님은 이를 두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나를 밟고 행복을 얻어가라는 것입니다. 자타카 이야기에서 원숭이왕이 화살을 맞으면서도 한마리의 원숭이라도 건네려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 땅의 모든 중생이 행복할 때까지 부처님의 의무와 책무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몽고의 격언을 인용하겠습니다. "되는 일은 걱정말고, 안되는 일도 걱정 말라" 되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안되는 일은 니가 머리 싸매도, 드러누워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는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의무와 책무를 말합니다. 부처님의 존재이유를 말합니다. 마지막 한 중생이 행복을 성취하는 그 때까지 부처님은 쉬지 않습니다. 오늘 강연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여기 계신 불자님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릴려면 너무 힘들잖아요.
기아 윤석민 화풀이 하다 손가락 골절상(2010.6.20) 타이거즈 마운드에 비상이 걸렸다. 기아의 에이스 윤석민이 새끼손가락 골절 부상을 입어 6주 정도의 치료와 재활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온 것. 윤석민은 18일 밤 문학 SK전 선발 등판 후 화를 참지 못하고 라커의 문을 손으로 가격하다 부상을 당했다. 곧바로 인천 길병원에서 X-레이와 CT 촬영을 한 결과 오른손 5번째 중수골 골두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윤석민은 "SK에 지고 싶지 않았고 내가 해결하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내려와 자책감이 들었다"며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해 팀 전력에서 빠지게 돼 동료는 물론이고 팬들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말했다.이날 윤석민은 8회까지 1실점 호투를 하다 3-1로 앞선 9회 완투승을 눈앞에 두고 3-2 추격을 허용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후 KIA는 손영민-서재응이 구원에 실패하며 3-4로 아쉬운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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