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찾기 |…… 혜천스님설교

2018. 6. 30. 16: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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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리 찾기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8월 29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제자리 찾기'입니다.

 

미야자카 유소(?)라는 일본의 불교학자는 <불교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불교는 사카족의 전통적인 종교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 근거로서 이것을 얘기하죠. 부처님 당신은 일곱 번째의 붓다로 그 이전에 여섯 분의 붓다가 있었다는 거죠.

 

석가모니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하는 일곱의 부처는 1. 비바시불(昆婆尸佛, Vipasyin), 2. 시기불(尸棄佛, Sikhin), 3. 비사부불(毘舍浮佛, Visvabh ), 4. 구류손불(拘留孫佛, Krakucchanda), 5.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anakamuni), 6. 가섭불(迦葉佛, Kasyapa), 7.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Sakyamuni)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음을 깨쳐 성불했느니 하는 의도나 생각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중요시 합니다. 법구경에서도 '마음이 근본'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부처님이 마음이 근본이라고 했다고 해서 마음이 지말이라고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대념처경>을 강의할 때 말했다시피, 마음이라고 할 때는 마음이 근본, 몸이라고 할 때는 몸이 근본, 대상이라고 할 때는 대상이 근본입니다. 마음, 몸, 대상이 주종의 관계이거나 본말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본말의 관계, 주종의 관계로 파악하니 모든 걸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념의 유희 속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깨달음은 관념의 유희입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명상을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관념의 유희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념에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을 주종이나 본말의 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깨달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솔직히 한 번 말해 봅시다. 깨달을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까? 영성, 불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 씨앗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것은 인도 <우파니샤드>의 주장입니다. 아트만이 심장 속에 씨앗처럼 자라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의하면, 마음은 문화적인 것입니다. 마음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형성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 불교식으로 말하면 심층의식이 그것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나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그 때 그때 형성되어 지는 것이 마음입니다. 

 

가수 태진아는 '돈보다 사랑이 좋아'라고 노래합니다. 내가 여쭤 보겠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돈이 없으면 사랑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남자를 선택할 때, 잘 생긴 종업원 보다는 못생겼더리도 로렉스 금시계를 차고,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장에게 끌립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누구와 결혼했을 때, 경제적 능력이 내 아이를 양육하는데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씨앗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와 대상이 언발란스 한 것입니다. 나와 대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대상 속에 있고, 대상은 나와 함께 존재합니다. 내가 대상이 있으니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이외에는 모두 대상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산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구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내 가삿자락을 잡고 따라 다녀도 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와는 천리 만리 떨어져 있는 것이요, 비록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내 가르침을 이해하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좌에 앉아서 마음의 깨달음을 얻어서 성불했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정의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헌신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정답은 '그 때 그 때 달라요'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가장 명쾌한 정의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의 마음이 그 때 그 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것인데도, 어떨 때는 기쁘고, 다른 때에는 화나는 것입니다. 

 

중국의 책 <여씨 춘추>(?)인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잘 생긴 미소년을 좋아해 궁궐에 그들을 두고 총애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미소년은 왕의 신임을 믿고 왕의 수레를 몰래 타고 나갑니다. 법에 의하면 왕의 수레를 몰래 타고 나가는 자는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신하들이 죄를 물어 벌할 것을 주장하자, 왕이 변호합니다. '그가 나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강하면, 내가 귀찮아 할까봐 그것이 염려되어 몰래 수레를 몰고 나갔겠는가! 나를 생각해 물어보지 않고 한 것이다.' 그 후에 어느 날에는 왕과 그 미소년을 비롯해 여러 신하들이 임금 소유의 과수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 미소년은 사과를 먹다가 사과가 겁나게 맜있다면서 먹던 사과를 왕에게 주는데, 그걸 왕이 덥석 받아 먹습니다. 법에 의하면 먹던 음식을 왕에게 주는 것은 죽음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신하들이 죄를 청하자 다시금 왕이 변호합니다. '나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강하면 먹던 것을 차마 혼자 다 먹지 목하고 나에게 주었겠는가?'

 

그러나 세월은 흘러 그 미소년도 자라 수염이 나며 어른이 되자 왕의 사랑도 식어갑니다. 그러자 왕의 마음도 변합니다. '저 놈은 지난 날 나에게 고하지도 않고 수레를 훔쳐 탔을 뿐만 아니라 무엄하게도 자기가 먹던 걸 나에게 주었으니, 저런 자를 살려두면 누가 내게 충성할 것이며 , 법이 어찌 공정하다고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신하을 목을 쳤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사랑이 식으니까 공정한 법 집행을 명분으로 신하를 죽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종자가 있다면 왜 그것이 변해 신하를 죽이겠습니까? 

 

마음은 나와 대상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때 그때 다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깨달을 마음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입니까? 깨달을 마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얘기가 있는데, 틀린 말입니다. 부처님은 다르마를 깨달으신 분입니다. 정확하게는 경전에 의하면, 다르마를 아시고 발견해 선포한 것입니다. 다르마를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부처님이 6-7년의 고행을 갑자기 그만둡니다. 우리는 그리고 나서 보리수좌에 앉아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부처님이 갑자기 고행을 그만 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처님에게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처럼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는 식으로 보면 안됩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합니다. 깨달음은 군인이 별을 다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의 경우는 대령에서 별 하나를 달게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깨달음을 얻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되어 깨달은 것입니다. 사고의 전환이 왔기 때문에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사고의 전환이 온게 아닙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 부처님은 제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깨달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부동심(=금강심)을 가지고 앉아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고의 전환이 왔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사고의 전환은 바로 다르마의 발견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비로소 부처님은 붓다 자신으로 제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붓다 자신으로 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누군가의 바람을 실현해주는데 더 많은 세월을 보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법정 스님이라고 좋은 차를 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을까? 어떤 사람은 스님이 되는 이유를 불국사의 주지가 한 번 되어 보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법정스님이라고 좋고 큰 절의 주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요? 경전에 보면, 마라가 부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붓다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당신이 권력을 잡으시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가장 좋은 방법은 권력을 획득해서 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맑스는 사회혁명을 꿈꿨죠. 그러나 그 사회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부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개인의 변화없이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변화 없이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는 개개인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사회는 열린 사회입니다. 열린 사회란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사회입니다.

 

불교는 국가주의를 부정합니다. 즉 국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라는 공동체의 개념은 있습니다. 일인지배의 국가 개념은 없지만, 공동체의 사회는 인정하는 것입니다. 열린사회에는 열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변화 없이는 사회의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제도이든지, 심지어 공정한 사회도 이것을 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이 공정하지 않으면 그 룰(rule)이 공정해질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마라의 속삭임이라지만 그걸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열린 사회는 모든 사회가 평화와 행복을 우리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확 바꿔버려?'라는 생각이 듭니까? 부처님은 크샤트리아 출신입니다. 그것은 지배자 교육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이 서민을 어루만져 주는지 잘압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젊어서 주옥같은 글을 썼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법정스님의 삶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법정스님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남에 법정스님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삼배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법정스님이 사치를 한다고 비난이 등등합니다. 이유인즉 법정 스님이 TV에 나오는 걸 보았는데, 비싼 다기를 쓰더라는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법정스님이 그것을 돈 주고 샀을리 없잖아요. 누군가 선물했다면 예의상 한 두번 사용할 수 도 있고, 그 때 카메라가 돈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 지자구요. 아니 법정스님은 이빨 빠진 그릇을 써야 됩니까? 이건 너무 작위적이지 않습니까? 비싼 다기에 차를 마셨다고 욕을하는 이 분은 아마 법정스님이 길상사에 외제차라도 손수 몰고 등장하면 차를 부숴버릴 사람입니다.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법정스님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다 떨어진 옷, 된장 한 그릇, 풋고추 하나, 좀 호사스럽다면 거기에 더해 상추나 쑥갓 정도일 겁니다. 본인 스스로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얘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상이 법정스님이 그렇게 살도록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난 다기 쓰는 걸 욕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더랬습니다. 비싼 다기에 차를 한 잔 얻어 먹는 것이 이렇게 죄가 되는지말입니다. 현수가 선물한 비싼 다기 찻잔이 이빨이 빠져 부담스럽습니다. (사족: 그런데 그 그릇 만든 바우는 깨져야 도자기라면서 그래야 저들도 먹고 살수 있다고 하더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대해 내가 원하는 삶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내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보면, 내가 생각하는 삶을 아이에게 만들어 줄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분재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나도 옛날엔 분재를 참 좋아 했습니다. 분재라는 것은 뒷산의 잘 자라는 나무를 자르고 구부리고 하는 것입니다. 바위 틈의 소나무는 용케도 자랍니다. 그 수세가 이쁘게 큰다고 하여, 오함마로 때리고 정을 박고 하여 뺀 적이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 소나무를 가져오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분재는 참 이쁘걸랑요. 

 

카와쿠라 막부시절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쿠사>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분재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른 하늘에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 남의 집 대문에 비를 피해 섰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재같이 생긴 사람이 들어오는데, 가까이서 보니 왜소하고 건강한 사람이 못되어 보였습니다. 그런 후 집에 돌아와 분재를 보니 꺽고, 자르고, 비튼 것이 눈에 들어와 그 분재들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마치 분재를 키우는 것과 똑 같죠. 우리는 하나를 잊어 버리고 삽니다. 절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단 스스로가 변화되기 전에는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더 재밌는 것은 자기는 안 변하면서 남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이죠. 한 번 생각해 보셔요. 우리는 많이 그럽니다. 

 

나는 라디오를 많이 듣습니다. 들으면서 생각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내가 변하기를 원하면서 자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변할 게 없어, 니만 변하면 돼' 미안한 얘기지만 자기 자신의 원하는 삶을 우리는 타인에게 변하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정작 자신은 안 변하고 말입니다. 제가 부부얘기를 하는 것은 가장 비유하기 좋아서 입니다. 부부는 결혼하기 전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랍니다. 즉 가풍이 서로 다르죠. 이 집과 저 집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집에서는 자기 전에 이불을 펴고 그 속에 들어가 덥혀 놓으면 효자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옆집에서는 어른보다 애가 먼저 이부자리에 들어갔다고 버릇없다고 욕을 합니다. 전혀 다른 문화에서 자란 성인들이 함께하면 충돌합니다. 우리 문화는 6:4 정도(그것도 후하게 친 것입니다) 남자 집안에서 여자의 문화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래요. 나도 시어머니의 그것 때문에 갈등을 겪었지만, 막상 내가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가 내 문화 속에서 비뀌길 바랍니다. 옛날에는 100% 바뀌길 바랬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바뀌길 바랍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환경과 문화가 다른데, 남자가 지배해 바뀌길 바랍니다. 나는 변하지 않은 채 상대가 변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내가 살지 않은 것, 내가 하지 않은 것을 누군가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작년에 전세계적으로 영화 흥행의 새로운 역사를 쓴 <아바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내가 내 아바타, 아이가 내 아바타, 남편이 내 아바타이길 원합니다. 아바타는 인도 산스크리스트어로 '분신'이라는 뜻입니다. 나 이외의 다른 나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화 속에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나, 즉 나의 자리가 어정쩡 한 것입니다. 온전한 나, 나의 자리가 존재하기 힘듭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은 간단하죠. 온전한 나의 자리, 온전한 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7년의 고행 끝에 보리수좌에 앉는 것은 부처님이 제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제자리 찾기입니다. 부처님은 신의 영원성, 절대성, 주술 만능주의를 부정합니다. 왜일까요? 그건 결국 누구의 아바타란 거죠. 옛날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의원이 대통령 후보 시절 유행시킨 말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개그맨이 패러디하기도 했죠. 부처님의 뜻은 단순, 명쾌합니다. 아바타로 살아서 삶이 행복해 졌습니까?       

 

부처님은 주종, 본말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가 주-종, 본-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정되어 있고, 고착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가? 아바타가 또 다른 아바타를 만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인셉션>이라는 영화가 최근 개봉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꿈 속에서 또 꿈을 꿉니다. 이중의 꿈을 꾸는 것이죠. 감독이 16살 때 구상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여주인공은 꿈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즉 현실을 꿈, 꿈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꿈과 현실이 고착화된 것입니다. 이 영화는 서양의 정신분석학적 측면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영화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영화를 이해하기 불가합니다. 꿈이 꿈을 꾼다는 것은 아바타가 또 다른 나라는 것과 같습니다. 제 자리 찾기는 온전한 나, 온전한 나의 자리 찾기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오늘이 일제가 조선의 강탈을 선포한 날, 국치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면 한 국가이든, 개인이든 이렇게 남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선은 자기 자신을 몰랐습니다. 조선은 자기의 능력도 몰랐고, 자기의 자리도 몰랐습니다. 온전한 자신, 자기 자리를 모르면 남의 노예가 됩니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딱 한가지, 변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 자리 찾기는 자기변화입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똘똘하고 또한 가장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모든 인간에 대헤 변화하라고 소리칩니다. 좁혀서 딱 얘기하겠습니다. 부부가 마주 보고 서로를 향해 변화해야 할 것은 너라는 거죠. 손가락을 돌려야죠. 자기 자신에게로. 그것이 바로 제 자리 찾기입니다. 성불하겠다, 수행하겠다면서 다리꼬고 앉는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을 밖으로 향하지 말고 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바뀝니다. 그러면 우리는 제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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