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중도 -둘없는 하나의 길

2018. 9. 2. 13: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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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중도 -둘없는 하나의 길



오늘 아침 선생님 법문을 듣고 보니 감흥이 일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저의 공부이야기를 다시 한번 음미해 봅니다.

 맨날 같은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이유는 본래 이것 밖에 없으니까요. 


매번 같은 얘기를 주구장창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지겹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항상 즐겁고 호기심이 나고 재밌습니다.

선사들의 득도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매번 똑같은 얘긴데 항상 새롭고 흥미진진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그렇습니다. 똑같은 얘기를 똑같은 사람이 똑같이 하는데 여태까지 

수십번은 들었을 텐데도 그게 왜 그렇게 흥미로울까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김태완 선생님 법문을 만나기 전에는 절에 다니면서 스님들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불교티비에 나오는 큰 스님들의 설법을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어서 들었고 나중에 어느정도 평정을 얻은 후에는 

깨달음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들었습니다. 하루 24시간을 그저 듣고 또 들었습니다.


5년동안 아침에는 108배를 하면서 매일 5~6편씩 들었습니다. 수천편은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다가 불교티비에서 김태완 선생님의 무심선원이 방영된적이 있는데 

그것을 계기로 설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동영상이 있어서 들었는데 한번 듣고나자 확신이 섰습니다. 이분의 설법을 듣다보면 

나도 깨달을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섰죠. 왜냐하면 너무 쉽잖아요. 

그냥 이거라고 하니까.


그렇게 한달동안 매일 들었는데 어느날 고속도로를 가는중에 문득 앞에가는 

탑차가 저처럼 보이더라구요. 차가 차가아니고 저자신을 보는듯 했어요. 


그래서 이게 뭐지 하고 고개를 숙여 내모습을 보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장막이 확겉히면서 눈앞이 확열리듯 하더군요.그러면서 하늘을 보는데 모든게 하나처럼 보여요 .


옆의 산을 보는데 모든게 하나로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운전중이라 위험하기도 하고 해서 

차를 서행차로로 하면서 휴게소를 찾았는데 마침 그곳이 청주어디쯤이라 옥산 휴게소로 

들어간것 같아요.


지금은 잘기억도 안납니다. 그런일이 있고 나서는 다른 세상에 사는것 같고 이제 뭔가를 

알았다 깨달았다 하는생각에 기쁘고 기쁘기가 한량이 없었습니다. 


이제 할일을 마쳤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이 너무 자유롭고 이제 살것같고 

이세상에서  겉으로는 눈에 보이는것은 실패했지만 가장 성공한것 같은 뿌듯함도 있었습니다.


그런 기쁨의 시간이 2~ 3개월은 갔던것 같아요.그러면서도 선생님의 설법은 빼놓지 않고 

항상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다 보니까 이게 좀 불편해요.


이 해탈자리에 있으면 너무좋고 번뇌가 없고 편한데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사람들과 교류하고 

부딪치잖아요. 그러면 감정에 흔들리고 편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이 이것 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해탈자리와 세속과의 격차가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세속은 지옥같고 해탈자리는 천당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또 한동안은 지옥과 천당을 왔다갔다 합니다.그래서 계속 이 해탈자리 

천당에만 있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그렇지만 그럴수는 없잖아요. 

세속의 삶을 벗어날수는 없잖아요. 


 그러는 과정에서 깨달음에 대한 실망감도 오고 좌절감이나 회의감 같은 것도 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중에 보면 어쩔수 없는 것입니다. 공부과정에서 오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당시에는 당사자는 그것이 괴롭죠. 그런데 그런것만 있는것이 아니고 

그런것만 있다면 못 버티죠.법은 항상 분명하고 번뇌가 없는것도 같이 경험하니까

 의심 할수가 없죠.


법만큼은 분명해서 의심 할수가 없습니다. 그게 체험의 효과죠. 

아무리 깨달음에 대해 회의가 들고 실망감이 들어도 그 자체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부정할수가 없거든요. 


스스로 에게서 증명이 되므로 의심 자체가 바로 그냥 이법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그 험난한 여정을 그냥 묵묵히 버티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이렇게 

따로따로 있는것에 대한 불편함이 인식이 되고 그게 부담으로 작용을 합니다. 


그러면 공부를 계속하는것입니다. 공부랄것이 따로 할것이 있는것은 아니고 설법을 

그냥 계속듣는 것입니다. 설법은 분별심을 조복시켜주는 역할을 하는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지나다보면 어느순간 문득 또 한번의 체험이 오는데 

그것이 불이법의 계합의 체험입니다. 어느날 직장에서 잠시 쉬는시간에 벽시계를 보는데 

벽시계는 온데간데 없고 시계가 원판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원판에 "V(브이)" 자 홈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더니 그홈이 디지탈 시계처럼 스르르 닫히더니 딱 하고 완전한 원판이 되는겁니다. 

그때가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나는 잠시 쉬고 있었거든요 .

해탈 자리를 또 즐기고 있었죠.


그러다가 그순간 또 내가 해탈자리를 만끽하고 있었구나 하고 꿈을 깨듯이 정신을 차리고 

문득 그런 체험을 했는데 그때 어떤 아이가 질문을 하는겁니다. 모르는 문제를요. 


그래서 어! 내가 또 이 해탈자리에 취해 있었구나 하고 다시 빠져 나올려고 하는데 

그게 안되는 겁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들고나오는 것이 따로 있었는데 

그계합의 체험 직후인데 바로 나올려고 하는데 나오는 것이 안되고 

그냥 그자리가 이자리 인것입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안되고 그냥 해탈자리가 세속의 자리고 

세속의 시끄러운자리가 해탈자리가 된것입니다. 

그계합 직후부터는 생각을 해도 생각이 아니고 말을 해도 말이 안되는 경험을 하게 된것입니다. 


불이법에 계합이 된것을 알수 있었죠. 그전에는 불이법이라는것이 있어서 

그것을 또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불이법도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을 

알겠더라구요. 불이법의 계합도 하나의 방편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에게 쓰는 약이죠.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이법이라는 것이 따로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진행이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체험은 한번 죽은 것입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듯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불이법의 체험 입니다. 그러면 한결 자유롭고 이게 진정한 불법(佛法)이죠. 


그렇다고 이게 공부의 끝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는 불이법이  궁극입니다만 

실재에 있어서는 습관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은 공부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꿈을 깬채로 꿈속에서 산다라고 표현 하기도 합니다. 

불이중도적인 삶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눈이 밝아지고 

이 하나의 진실에 분명해지고 걸림없는 대 자유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보선 합장 _()_


[출처] 불이중도 -둘없는 하나의 길|작성자 보선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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