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18. 11. 18. 09: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행복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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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18.11.10 (아침) 공동체 행자들과의 대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아침 일찍 공동체 행자들을 위해 법문을 한 후 행복학교 학생들에게 불국사, 황룡사를 안내하고 즉문즉설을 하였습니다.

붉은 단풍과 함께 한 해가 저물어가는 가을입니다. 한국인에게 다음 해의 준비는 김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법륜스님을 스승으로 일과 수행을 하며 살아가는 정토회 서울 공동체의 행자들도 김장을 담그기 위해 어젯밤 두북 정토수련원으로 왔습니다.

스님도 함께 김장에 참여할 계획이었지만, 행복학교 경주 순례 일정이 생겨 이른 시간에 법문만 하게 되었습니다. 행자들은 동이 트기 전, 새벽예불과 기도를 마치고 6시에 강당에 둘러앉았습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0년 가까이 수행공동체 생활을 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간 수행을 하며, 사회 활동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며 궁금했던 점을 질문하고, 스님의 말씀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출가 수행자의 길

공동체에 들어온 지 1년 된 행자님은 흥분을 잘하는 성격인데 마음 보기가 어렵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출가수행자의 관점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번뇌에 얽매이는 줄도 모르고 살게 돼요. 먹고 싶으면 먹는 것이 정당한 길이고, 자고 싶으면 자는 것이 정당한 길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뜻대로 안 돼서 괴로워하는 거죠.

그러나 수행자가 되면 ‘이것은 욕구를 채우려고 집착하는 데서 괴로움이 발생한다’라고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전에는 욕구를 채우는 것이 과제였다면 이제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과제가 됩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환경에 살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훨씬 쉽겠죠. 둘째, 초심자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과제를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꾸 욕구를 충족시켜 좋아지는 쪽으로 가게 되면 수행에 진척이 없어요. 초심자일수록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초심자는 지켜야 하고, 오래 산 사람은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초심자는 지금까지 욕구를 정당화하고 살았기 때문에 욕구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을 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초심자는 반드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산에 가서 혼자 수행을 하면 자기 식으로 합리화해버릴 위험이 높습니다.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공부하거나, 스승 없이 공부하거나, 공동체 생활을 안 하고 공부하면, 사이비로 빠질 위험이 높아요. 물론 자기 절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100%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초심자는 반드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에 대한 엄격함이 필요합니다.

운전에 비유하면 처음부터 도로에 나가서 운전할 수 없는 것과 같아요. 운전을 배울 때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제한된 공간에서 운전 연습을 충분히 해야 합니다. 둘째, 도로에 나가더라도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도로 주행 연습을 해야 합니다. 셋째, 도로 주행이 원숙하게 되면 이제 혼자서 차를 몰고 다녀도 괜찮습니다.

그것처럼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공동체 안에서 스승을 모시고 철저하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둘째, 정말로 내가 이 길을 가야 되겠다고 결심이 서면 직접 실험을 해봐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밖에서도 적용이 되겠는지 도로 주행 연습하듯이 실험을 해봐야 해요. 이것을 ‘보림(保任)’이라고 합니다. 밖에 나가서 실제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적용이 되는지 연습하는 겁니다. 시장에 나가서 장사도 해보고, 거지 생활도 해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사람들 속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면, 그때서야 법을 알고 법을 경험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셋째, 이제 법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법을 말할 수 있게 되면 수행의 단계에서 전법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죠.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눠서 수행을 말합니다.

우리는 좀 더 진실하게 살려고 수행자가 되었지 위선자가 되려고 수행자가 된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을 스님이라는 권위와 형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가장 큰 문제점은 여러분들이 정체성을 못 갖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여러분들은 수행자입니다’라고 강조해도 여러분들은 ‘나는 출가한 수행자이다’라고 생각을 잘 안 하잖아요. 그 이유는 머리카락이 붙어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예요.

공동체에서는 여러분들을 ‘출가 수행자’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신이 출가 수행자라는 관점을 안 갖고 있을 때가 많아요.

자기 정립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출가 수행자로서 자기 원칙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원칙이 딱 서고, 그다음에 못 지키는 것들을 계속 돌이켜 나가면 내가 수행의 주체가 됩니다. ‘내가 수행이 되는지, 안 되는지’ 이렇게 관점을 갖고 살면 되는데, ‘공동체 들어와서 월급도 안 받고 열심히 사는데 왜 자꾸 나보고 문제 제기하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공동체 생활이 자꾸 피곤해지는 겁니다.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하고, 반성할 건 반성하고, 문제 제기를 하면 ‘어, 내가 잘못했다’ 하고, 이렇게 살면 삶이 가벼워집니다.”

스님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내용은 서릿발 같았습니다. 행자님들도 졸지 않고 집중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또 수행을 하면 신통력이 생기는 건지 궁금하다는 질문에도 불교와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님은 명확히 알려주었습니다.

수행을 하면 신통력이 생기나요?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능력’이 중심이 아니에요. 세상에서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종교를 믿거나 수련을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능력을 키워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나의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알아 무지를 깨뜨리는 것이에요. 관점 자체가 달라요.

세상 사람들은 능력, 즉 신통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깨달으면 신통력이 생긴다고 보는데,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이 있는 제자에게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어요. 수행의 관점을 흐리기 때문이지요.”

일과 수행의 통일

정토회는 ‘일과 수행의 통일’을 지향합니다. 불교 용어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사회활동과 수행을 통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현실에서는 헷갈린다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일과 수행의 통일이 무엇인지 헷갈립니다. 저희 팀은 밤늦게 까지 일하거나 외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더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싶어 하고, ‘법회를 꼭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고, ‘일을 해야 하는데 공동체 울력에 참가해야 하나’ 하고 공동체 생활을 불편해할 때가 많아요. 반대로 수행을 더 하기 위해서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은 ‘일이 너무 많아서 정진을 못한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럴 때 일과 수행의 통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수행이란 무엇일까요?

“수행이라는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지위, 명예를 추구하는 세속 생활을 끊고 절에 들어와서 명상하고 절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수행은 언제 하십니까?’라고 물어요. 절을 언제 하느냐, 참선을 언제 하느냐, 염불은 언제 하느냐, 이런 뜻으로 묻는 거겠죠.

반면에 사회적 실천 활동은 환경 운동이나 평화 운동과 같이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활동을 뜻합니다.

정토회는 자기 내면의 평화를 위한 수행만이 아니고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만드는 사회 운동을 함께 해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NGO 활동을 하기 위해 정토회에 들어온 사람은 수행이 NGO 활동을 하는 데에 장애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평화재단은 사회적 실천 활동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예요. 많은 전문가들이 조언도 하고 역할도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에게 ‘사회 활동을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하고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하안거, 공동체의 날, 포살 법회, 저녁 예불, 여러 가지 이유로 일정에 빠지니까 ‘이래 가지고 어떻게 사회 운동을 하느냐’ 고 불만입니다.

우리는 사회 운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의 도움과 조언이 꼭 필요합니다. 가능하면 그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재편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의견을 100%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 활동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반면에 수행을 하기 위해 정토회에 들어온 사람은 ‘수행은 안 하고 내내 일만 하는구나’라고 불만입니다. 문경 수련원에 가면 밭일만 하는 것 같고, 서울회관에 가면 직장 생활만 하는 것 같아요. 참선할 시간도 보장해 주지 않고, 기도할 시간도 보장해 주지 않고, 경전 공부할 시간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에게는 제가 ‘수행만 하고 싶으면 다른 절에 가라’고 말합니다.

병행? 통일!

정토회에서 지내려면 수행과 사회운동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일과 수행, 두 가지를 함께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해요. 그런데 ‘병행’이라는 용어를 안 쓰고, 왜 ‘통일’이라는 용어를 썼을까요?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예요.

병행하는 것은 통일이 아니에요. 명상을 하고 절을 하고 조석 예불을 함으로써 번뇌가 적어지는 것이 일에 효율적입니다. 번뇌가 많으면 일에 비효율적이에요. 일을 정말 효과적으로 하려면 나 혼자서는 안 돼요. 누군가가 도와주고 연대하고 함께 해야 해요. 함께 일하는 사람과 취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달라도 그 사람이 있는 게 일에 효과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수용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예를 들어 남북통일을 하려면 나에게 그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그 사람은 맨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점심시간에 한 번 나가면 2시간씩 있다가 들어오고, 원칙적으로 보면 문제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걸 보고 내 마음에 분별심이 생겨서 화가 나고 ‘저 인간과 일 못하겠다’ 하는 것은 수행적 관점이 덜 잡힌 겁니다. 그래서 저 사람과 일을 같이 하지 않으면 싫음에 사로잡혀서 일에 비효율이 발생하는 것이 돼요. 그 사람이 전화라도 받아주면 일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데, 목표 의식을 놓쳐버린 거죠. 일의 관점을 놓쳤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일의 관점만 정확하게 갖고 있으면 이런 문제들도 다 수용을 하게 됩니다. 그게 곧 수행입니다.

일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사람의 문제까지 다 수용해서 함께 일하는 것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분별을 극복하는 수행과 결과적으로 같은 효과가 납니다.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수행적 관점을 갖는 것이고, 수행적 관점을 정확히 지킴으로서 일도 효과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일을 하려니까 수행이 안 되고, 수행을 하려니까 일이 안 된다고 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병행을 해야 해요. 어느 하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다 하게 되는 거죠. 두 가지를 다 하다 보면 둘 사이의 비중을 두고 모순이 발생해요. 이때 일과 수행의 통일은 여기에 모순이 없게 만드는 거예요. 일을 효과적으로 하려고 하는 관점만 탁 가져도 분별심이 저절로 없어지게 되고, 수행적 관점만 탁 가져도 번뇌가 사라져서 일의 파워가 더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일만 하다 보면 수행을 놓치기 쉬워요. 습관이 붙기 때문이에요. 일에 집착해서 일을 효율적으로 해야 된다는 것에 너무 빠져버리면 수행의 관점을 놓칠 수가 있으니까 때로는 ‘네가 수행자다’라는 자각을 하려고 1년에 몇 차례씩 날짜를 정해서 이렇게 울력도 하고 하안거도 하는 겁니다.

하안거를 하는 것이 일에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하안거를 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나 의문이 해소되고, 공동체 도반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집니다. 일을 비록 20일 쉬었다 하더라도, 20일 안 쉬고 계속 일만 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일과 수행, 비중을 어디에 둬야 할까요?

일과 수행의 비중은 인연 따라서 이쪽으로 정해지면 이쪽으로 저쪽으로 정해지면 저쪽으로 물이 출렁거리듯이 정해지는 겁니다. 일만 생각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단기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도 안 하고 일만 계속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수행의 원칙을 놓쳐버리고 세속화되어서 일을 오래 못하게 됩니다.

우리들 중에 문경 수련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과 수행 중에 수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면, 업무가 바쁜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예불할 시간 빼놓고는 수행할 시간이 거의 없죠. 주어지는 대로 이렇게 흐르면 이쪽으로 조금 갔다가 저렇게 흐르면 저쪽으로 조금 갔다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 쪽으로 비중이 많은 환경에서는 일을 수행으로 삼아야 됩니다. 수행 쪽으로 비중이 많은 환경에서는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정진을 할수록 나중에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라는 관점을 갖고 지내야 합니다.

병행의 관점에서는 ‘일을 하려니까 수행이 안 되고, 수행을 하려니까 일이 안 된다’는 말이 맞지만 통일의 관점에서는 둘 사이에 모순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이외에도 서울에서 공동체의 대표 역할을 맡은 행자님은 공동체에서 매달 하고 있는 연찬이 의무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염려하며 연찬의 역할과 그 자세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초기에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와 안정화된 공동체에서 살 때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였습니다.

“안정화된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의 삶을 자기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찬은 수행자로 사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탐구해보는 것이에요. 연찬을 했는데도 합의한 결과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면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탐구해보는 연찬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교육적 성격의 연찬을 했거나, 둘째, 이성적으로 동의해도 개개인의 습관의 문제로 잘 지켜지지 않을 수 있어요. 연찬의 성격이 문제라면 제대로 하는 것이 필요하고, 개개인의 습관이 문제라면 정진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토회의 공동체도 초기와 달리 생기를 잃을 수 있으니 연찬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질문을 받고 나자 스님은 지난 일주일간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에서 보고 느낀 것도 자세히 나누어주었습니다.

“환경, 평화, 구호, 수행 등 우리가 가진 문제의식이 곧 세계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다만 분노 없이 어떻게 사회정의를 실현해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아직 교통정리가 필요해 보였어요. 그렇기에 수행자가 하는 사회운동이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국제활동도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왔습니다.”

어느덧 두 시간이 흐르고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행자님들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습니다. 몇 분에게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내 생각을 내려놓다 보면 수행이 된다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일의 목표에 집중해버리면 번뇌가 없어져버리거든요. 그동안 분별하면서 일을 할 때가 많았어요. 내 주장을 강하게 했던 것이 많이 돌아봐져요.”

“직접 스님에게 질문하고 들으니 좋네요. 아쉬운 것은 일과 수행의 모순 때문에 고민하는 우리 팀원이 직접 질문했다면 즉문즉설이 제대로 이뤄져서 좋았을 것 같아요. 스님 말씀 듣고 나니 ‘일을 하는 것이 수행과 다르지 않구나’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요.”

스님은 행자님들에게 함께 김장하지 못하는 것에 양해를 구하며 행복학교 학생들을 만나러 경주로 이동했습니다. 행자님들은 밭에서 배추를 뽑고 다듬고 절이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000 ~ 2005년도 발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