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5. 11:1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5년 6월26일 자오(自悟)
오늘은 강론을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일요일마다 매주 해오던 강론은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오늘을 끝으로 당분간 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강론을 하지 않습니다. 일요법회에 참석하시는 분은 예불문을 읽고, 아파마나 좌선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10분이고 20분이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서 수행을 하다가 돌아가시고 싶을 때 돌아가시면 됩니다.
앞으로 저를 볼 분들은 일요일만 오세요. 초하루 보름 법회는 할머니들이 오는 날이니 그 날은 할머니들을 만나고, 일요일은 여러분들을 만나는 걸로 하겠습니다. 오늘 가급적 많은 분들을 참석하라고 한 것은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일요법회의 강론은 하지 않습니다. 아파마나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봄에 사실 춘천에서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ㅇㅇㅇ씨가 춘천을 떠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 분은 천상세계로 갔습니다. 그 분이 남고 내가 갔더라면 차라리 맘이 편했을 것입니다.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 분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피하고자 했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호자 역할을 못했습니다. 그 분이 남고 내가 갔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그림일텐데, 그 문제로 이것 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 곳에서 물러날 수 없어서, 이걸 선택했습니다.
강론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 동안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이제는 말을 쉬어야 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가급적이면 참석하라고 한 것도, 전해 듣는 것보다는 직접 듣는게 나을 것 같아서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강론은 없습니다. 들숨 날숨에 집중하면서, 아파마나 수행을 하십시요. 누구에게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지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아파마나 수행을 하십시요.
오늘 강론의 주제는 자오(自悟)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좌에서 깨달음을 얻죠. 처음에는 깨달음을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음이 상식을 뒤엎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뒤엎는 것이 무얼까요? 다시 말하면 일반적 사고를 뒤집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에는 망설입니다. 알면 침묵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말하면 말할수록 적만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세상과 맞서지 말라고 저에게 충고를 합니다. 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상식과 맞서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부처님은 결단을 하죠. 자기와 같이 수행하던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우루웰라를 떠나 그들이 있는 바라나시로 가게 됩니다. 길을 가는 도중 이교도 수행자 우파카를 만나게 됩니다. 다음은 그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벗이여, 그대의 안색은 맑고 피부는 깨끗해 광채가 납니다. 그대는 누구에게 출가하였습니까? 그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누구의 가르침을 따릅니까? " 부처님이 대답합니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단지 스스로 깨달았을 뿐입니다. "
이를 무사자오(無師自悟)라고 표현하죠. 스승없이 깨달음을 얻었다 것을 단순히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았다고 이해하면, 부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깨달음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온다는 걸 뜻합니다. 우리는 모든 걸 밖에서 찾죠. 그러나 밖에서 찾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진실, 깨달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것을 말해 줍니다. 진실, 깨달음은 안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입멸 시,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부탁합니다. "부처님 저희들에게 감추고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요." 붓다는 부다가야 북쪽의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듭니다. 그는 열반에 들며 마지막으로 "아난다야,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고 친한 사람과는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다. 아난다야, 내가 입멸한 뒤 가르침을 말할 스승이 없으니‘우리들의 스승은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지금까지 말하고 제정한 교법과 계율이 입멸 후에 곧 너희들의 스승이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모든 것은 변천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설법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자오'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기에 잇대어 다시 말합니다.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오직 법을 의지할 뿐,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말며,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불교는 다르마의 종교입니다. 붓다를 말할 때도 다르마의 붓다를 말합니다. 인격불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도 남의 스승을 자처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을 뿐입니다.
나는 '자오'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어요. 자오란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디에서? 꿈 속에서. 꿈은 뭔가요? 꿈은 현실이 아닙니다. 꿈 속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꿈을 꾸면서, 그게 꿈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날 때만이, 그게 꿈이었다는 걸 압니다. 꿈에서 깨어나야만, 꿈을 꾼것을 압니다. 자오라는 것은 꿈에서 스스로 깨어난 것을 말합니다. 누가 깨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미망과 무지입니다. 미망과 무지에서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 자오입니다. 미망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말, 사상가 탁오 이지는 그와 사상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경정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낮에 잠꼬대를 하는데, 공은 혼자 꿈 속에서 대낮 얘기를 하니 항상 깨어있다고 할만하겠군요." 눈을 감고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심각합니다. 미망과 무지는 대낮에 눈을 뜨고 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가려진 진실을 진실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프로그램을 참된 프로그램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무거운 돌을 지고 가다가, 황금을 발견해도 그대로 돌을 지고 갑니다. 당연히 돌을 버리고 황금을 지고 가야 마땅한데도 말입니다. 그 동안 지고 온 돌이 아까워서 도리어 황금을 돌아보면서 무거운 돌을 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이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삶을 살고 있죠. 내 노고가 아까워 돌을 버리지 못해 황금를 포기합니다. 미망과 무지는 이와 같습니다.
지난 주 강론에서, 좋은 소금은 폭양(曝陽) 속에서 온다, 행복은 둑카 속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자오도 똑 같습니다. 염부는 소금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금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폭양, 즉 뜨겁게 내리쬐는 볕에서 조용히, 말없이 소금이 오는 것입니다. 미망과 무지 때문에 소금을 만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바닷물을 퍼올리고, 거기에 와 계신 소금을 모을 뿐입니다. 즉 모든 것은 자연이 만듭니다. 바닷물, 태양, 소금, 이 모든 것이 자연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만든 자가 없습니다. 왜 부처님이 자오라고 표현했을까요? 그래서 자오라고 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안에서 조용히 옵니다. 그것이 자오입니다.
자오는 내 자신이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않은 것은 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지 않은 것을 내가 보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의해 들은 것은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아는 것이 진정 내가 아는 것입니다.
문 밖에서 온 것은 가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안에서 이뤄진 것이 가보입니다. 변화는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면, 평생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다보면, 머무르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퇴행하게 됩니다. 변화된 나는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나는 안내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내가 안내해 줄 뿐, 그것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진실된 말이 없습니다. 내가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죽어도 그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대신 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스스로가 먹어야 배가 부를 수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자오입니다. 즉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알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의 계승자가 아닙니다. 왜 누구로부터 배웠다고 얘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실제로 부처님은 여러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부정하고, 감추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체득(體得)은 스스로 하라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내 몸으로 익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예민한 곳이 어디일까요? 아마 뇌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죠. 몸으로 부딪쳐서 내 세포에 각인된 것은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 내 몸의 세포 속에 각인되어서, 내 몸의 세포가 분열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그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 몸에 체득된 것만이 진실입니다.
자오는 내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체득입니다. 체득되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으로 체득되어야만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금은 말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체득은 없습니다. 말이 없어서 체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강론을 하지 않고, 아파마나 수행을 하라는 것도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제가 4년간 많은 말을 쏟아냈는데, 매주 한 말이 거기서 거기 한 말에 불과합니다. 나는 법정스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쓴 책은 읽지 않습니다. 책이 수 십권되지만, 가장 처음 나온 책이 나머지 책을 포괄합니다. 생각이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 없는 책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봄이 되면 나뭇잎이 돋고, 여름이면 무성하고, 가을이면 붉게 물들고, 가을이 지나면서 잎은 다 떨어지고 겨울에는 나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잎이 떨어져 그대로 드러난 나무를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고 표현하죠.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그 나무를 얘기한 것일 뿐입니다. 단지 계절에 맞는 나무 모습을 설명할 뿐이죠. 다만 나무의 본질을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나무의 외형화된 모습을 얘기할 뿐입니다. 내가 법정스님을 존경하지만, 그 분의 책을 읽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그의 말은 거기에 있죠.
부처님같이, 근본적으로 그 생각을 깨트리고, 새 프로그램을 쓰지 않는 한, 그 프로그램 안에 있게 됩니다. 어떤 인간도 그 프로그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 프로그램이 잘못된 프로그램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처님은 오직 스스로가 체득한 것만이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의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왜? 나를 변화시켜 주는 것만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자오는 스스로 꿈 속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합니다. 잘못된 프로그램을 알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 있는 한,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황금을 만나도 돌을 그대로 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미망과 무지 속에서 삽니다. 이걸 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소신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알고, 바꾸려 할 때, 그게 소신입니다. 나는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무엇을 지키려는 마음일까요? 내 명예입니다. 내가 강론을 잠시 쉬려고 하는 것도 그래서 입니다. 많은 말을 쏟아냈는데, 쓸모없는 말입니다.
미안마에 있을 때, 떼자냐 사외도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그랬더니 떼자냐 사외도께서 웃으시더군요. 아마 걱정스러워 그랬을 것입니다. 세상에 맞서는 것을 걱정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지난 주 일요일 오후 나의 오랜 한국 스승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말은 춘천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지만, 내가 안가니 온 것입니다. 그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요지는 이렇습니다. 세상과 맞서지 말라. 스스로의 능력을 모르고 뭔가를 하겠다는 내 걱정을 한 것입니다.
지난 6월 3일 오전 8시 45분. 이것을 정확히 기억하는 건 내가 출가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내가 미안마에서 출가한 날입니다. 그 날의 출가를 왜 출가라고 하느냐면, 그 전에 나는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남의 그림자를 보고 쫒는 사람에 불과했죠. 미안마에 갔다온 후, 적어도 남의 그림자는 쫒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뭔가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변화를 위해 꿈틀대는 욕망이 있어요. 그래서 일요일 이외에는 만나뵙지 않으려고 그래요. 내 스스로 뭔가 변화시키고 싶어서입니다. 지키고 싶은 걸 버리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변화는 안에서 일어나지, 밖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 변화시키는 것은 자기 본성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오죠. 나는 내 본성에 충실해요. 누가 뭐래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은 '나는 누구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정작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나는 가르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적어도 부처님의 단계는 되어야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체득한 것이 아닌데, 무엇이 내가 보고, 무엇이 내가 듣고, 무엇이 내가 아는 것입니까? 철학에서는 이런 것을 회의론이라고 합니다. 나는 회의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내가 보고, 내가 듣는 것이 진실이라는 얘기입니다.
둑카는 가려진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강론에서 행복은 둑카 속에서 온다고 한 것입니다. 가려진 진실을 장막을 걷고 보게되면, 두카가 없습니다. 지난 주 행복은 둑카 속에서 온다는 것은 그래서그런 것입니다. 행복, 깨달음, 안온, 열반도 다 같은 의미입니다. 스스로가 장막을 걷고, 스스로 본 것이 진실입니다. 누가 보았다고 전해 듣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가 스스로 마음에서 일어나고, 몸에서 체득한 것이 진실이고, 실재입니다. 그 외의 것은 꿈 속에서 본 것에 불과합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왜? 현실은 냉정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손톱 밑에 가시만 있어도 아픕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어요. 오직 내 몸과 마음으로 견딜 수 밖에 없죠. 그것이 진실이고 실재입니다. 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안에 있죠. 이 때 안과 밖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와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안이고 대상은 밖입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마음에 일으켜 체화해야 합니다. 체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갔다 온 것 같은데... 갔다 온 것 같은데는 갔다 온 것 같을 뿐입니다. 마치 안개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물이 보이지만 선명하지 않습니다. 안개 속의 사물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밝은 중천의 태양 아래서 보는 것만이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자오를 우리가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는 무조건 믿으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네가 확신할 때 믿으라고 말합니다. 네가 확신하지 읺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죠. 우리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안개 속에서 사물을 찾는 것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것은 네가 분명하게 보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부처님이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듣는 것은 듣는대로 받아들이고, 듣지 않은 것은 듣지 않은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설사 그것이 나로부터 나왔다 하더라도, 네 판단에 옳지 않으면, 그것을 실행할 필요가 없다." 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믿으라해도, 네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할까요? 왜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는 걸까요? 인간은 오직 권위에 복종합니다. 동시에 권위를 욕하죠. 그러면서도 권위에 복종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설사 그것이 나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확신이 없으면 버려도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난다 존자에게 한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동안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것은 오직 법을 위해서이다. 내가 가고 난 뒤, 너희들의 수행에 방해되면 버려도 좋다." 부처님은 천만년을 가도 바꿔서는 안된다고 한 말이 없습니다. 수행에 방해되면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체화, 체득 하는데 불필요한 것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밖에서 오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밖에서 온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꿈도 내 스스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깨어니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깨울 수 없습니다. 깨달음도 오직 스스로가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은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알게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부처님 이후 불교는 그러게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생명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실은 은폐됩니다. 아니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 조차 경계가 모호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아닌지 가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중동의 건설 붐으로 중동에 간 노동자들이 들어올 때 웅담을 가지고 와서 팔았습니다. 사막에 곰이 있을리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 당시 연로하신 한의사 한 분이 이렇게 탄식합니다. "요새 젊은이들이 진짜 웅담을 봤어야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는데, 진짜 웅담을 본 한의사가 없어. 더군다나 야생 곰의 웅담을 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조상대대로 웅담을 취급해 볼 기회가 있었지만 말이야." 진짜를 보지 않으면, 진짜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섬기지 말고 법을 섬기라는 부처님이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가 "자오'입니다. 스스로의 눈으로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를 구별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잠에서 깨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가장 쉽잖아요. 나는 부처님의 이 말이 가장 쉬워요. 네 눈으로 보고, 네 귀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하려고 시간을 할애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못했을 뿐입니다.
소설가 김훈의 수필집 제목에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밥벌이에 골몰하느라고 밥벌이에 시간을 쏟죠. 밥벌이에 매진하다 보니, 삶의 여유조차 없죠. 우리는 밥벌이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 속에서는 한 단어만 각인되어 있습니다. '밥' 나는 그 책 제목을 보고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논어나 금강경을 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오랜 친구인 도반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법화경을 많이 연구하신 분입니다. 나는 법화경보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즐거운 사라를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이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속에서 천불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얘기했을까요? 우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내가 30년 전에도 들었던 얘기라서 짜증이 나서 한 말입니다. 15년만에 만났는데, 똑같은 얘기를 해 짜증나서 한 말입니다.
오늘 '자오'라는 주제로 강론을 하는데, 이 대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는 안에서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다른 건 기억을 잘 못해도, 그런 것은 잘 기억합니다. 저는 지난 5년간 옛 친구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 입니다. 옛 친구는 할 말이 많은데,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나 놓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 결례가 되기 때문이지요.
오늘 강론의 주제가 스스로 깨닫다는 '자오'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스스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걸 벗어나 깨트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강론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주부터는 강론이 없습니다. 예불문을 함께 읽고, 아파마나 좌선을 하시면 됩니다.
항상 정과 사랑 넘치는 복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중년 애창곡 트로트 모음 72곡(가사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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