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2)|…… 혜천스님설교

2018. 11. 10. 14:1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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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라.  누가 내 눈을 감겼는가..


사물을 내 스스로 보지 못하고

남의 눈으로 보아 온 그릇된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활짝 열린 눈에는 티끌도 없다. 

눈이 열려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 아함경에서
 

* 우리가 사는 현상계 세간법은 모든 것이 '나' 위주의 삶입니다.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중중무진연기!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알고

유정 무정 모두 나와 같은 존귀한 부처임을. . .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5년 6월11일 

거울

 

 

오늘 강론의 주제는 거울입니다.

 

부처님의 거울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말했습니다. "라훌라야, 거울은 뭐하는 데 쓰는 거지?" "비춰보는 데 씁니다, 부처님." "마찬가지로 라훌라야,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행동을 해야 하고,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말을 해야 하고,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것이 꿈인 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꿈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꿈을 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알수 있습니다. 영원히 꿈을 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면 해가 뜹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재인가요? 허상인가요?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태양이 지구를 돕니다. 그래서 태양이 돌아서 해가 뜨는 것이며,  지난 밤처럼 보름달이 뜨는 것입니다. 시각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 해가 뜬다고 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실제로는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적으로는  태양이 지구를 돕니다.

 

불교에서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실재하는가 또는 실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실재하는가 아니면 실재하지 않는가? 가상인가? 미망인가? 마야(환상)인가? 관념(삔냐 Pinnyata)인가? 다시 말하면, 실재인가 아니면 환상인가하는 것을 따져 묻습니다.

 

불교는 본질을 다룹니다. 원래 모든 종교는 본질을 다룹니다. 특히 불교는 오직 본질만을 다룹니다. 불교는 원래 시스템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실재인가, 가상적인 관념인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시스템의 바탕이 되는 것은 불신(不信)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다루는 것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시스템은 다른 말로 하면, 사회 구조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게 뭐냐면, 시스템이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바탕은 불신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에 우리는 시스템을 촘촘히 짜죠. 대한민국의 삼권분립 역시 불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상호 견제로 안정을 꾀하려는 것은 불신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공자님도 신(信)강조합니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인간을 믿지 않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법가사상입니다. 법가사상의 대표자로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가 있습니다. 한비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순자의 사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라는 시스템으로 인간을 계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법가의 사상이 한비자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시스템은 그래서 존재하게 되죠.

 

불교는, 정확히 말하면 부처님은 시스템을 다루지 않습니다. 본질을 다룹니다. 왜?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떠한 시스템이라도 그물처럼 촘촘히 짠다해도 그물의 효용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다룰려면, 그것이 실재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역사 이래 많은 문명이 발전했지만, 인간의 삶은 별로 나아진게 없습니다. 어떤 문명 비평가의 말에 따르면, 현대과학의 기적은 오직 부엌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즉 냉장고, 세탁기,전자 렌지 등 수많은 것을이 발명되었죠. 우리는 본질적인 것보다 시스템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은 모든 종교들이 본질을 다루지 않고 시스템을 다룹니다. 오직 시스템만을 다루죠. 현대 종교의 근본적인 본질은 사회복지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이 필요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선후가 바뀐 것입니다. 사회시스템에서 걸러져야 할 것을 본질을 추구해야할 종교가 다룹니다. 즉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어떤 현상이 오는가?  

 

1999년도에 만들어진 <메트릭스Matrix>하는 영화가 있죠. 지금은 모든 종교가  메트릭스 속의가상세계임을 보여 주죠. 메트릭스 속의  인간은 인간 건전지에 의해 움직입니다. 즉 가상의 세계 속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걸 다 영위하지만, 통 속에 갇혀 있는 인간 건전지일 뿐이죠. 거기서 인간은 뇌 속의 신호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 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 현실의 세계가 아닌 가상으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 속의 메트릭스 세계처럼. 모든 종교는 메트릭스 세계를 강화시킬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메트릭스의 세계는 현실 세계가 아닙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거울 속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현실일까요? 가상일까요? 부처님은 그걸 묻고 있죠. 거울 속에 비춰진 너의 모습이 네 자신인가 아닌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메트릭스라는 영화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 영화의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 영화를 흥미있게 봤어요.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실재(빠라마타 Pramatta) 인가? 아니면 가상( 삔냐타Paññatta)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즉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실재인가 가상인가 하는 얘기입니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인가, 가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메트릭스>라는 영화 전편에 흐르고 있는 것은 조로아스트교 사상입니다. 즉 선악의 두 기둥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기독교적인 요소, 불교적인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선의 대표는 네오,  모피어스 악의 대표는 스미스입니다.  어느 집단이라도 집단을 이탈하는 사람이 있죠. 기독교에서는 유다가 그렇고, 불교에서는 데바닷타가 그런 인물입니다. <메트릭스>에서는 사이퍼라는 사람이 배신을 하죠. 사이퍼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 음식을 먹으면서 얘기하죠. "나는 이것이 뇌 속의 전자신호라는 걸 알아. 하지만 모르는게 약이지. 무지가 행복이야. 그래서 나는 메트릭스 속으로 되돌아 가려는 거지 " 사이퍼가 배신하려 합니다. 그러자 트리니티가 사이퍼에게 말하죠. "메트릭스의 세계는 거짓이고 환상이야, 돌아가면 안돼!" 그러자 사이퍼가 말합니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지긋지긋한 현실보다 메트릭스의 세계가 더 행복하지"

  

불교는 본질을 다룹니다. 불교는 거울을 활용합니다. 메트릭스의 많은 부분이 불교의 이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네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실재인가?"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즉 네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재인가? 아니면, 가상인가? 사실 우리는 실재와 가상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뇌의 전자 신호를 받는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뇌가 전달하는 신호로 인지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가상인지 실재인지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려면, 본질을 보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정면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회피하지 말고. 부처님은 본질만을 다룹니다. 시스템은 다루지 않습니다. 불교는 길 없는 절벽 위의 성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길이 없는데, 절벽 위의 성을 어떻게 올라 갈 수 있을까요? 한 번 말해 보세요?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설 <천궁의 성>처럼 공중에 떠 있는 성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말합니다. 그 곳에 성이 있다는 것은 수 없는 인간이 그 성을 오르내렸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곳을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그 성이 거기 있다는 것은 그 성을 건설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길이 있는 것입니다.  길이 없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 성을 본 순간 좌절과 절망에 빠져 그 길을 읽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두려움을 갖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환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천궁의 성>에서 처럼 공중에 뜨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피하려고만 합니다.  

 

손자병법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36계, 즉 싸우지 않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손자가 36계 줄행랑을 1계에 놓지 않고, 마지막 단계에 놓았냐는 것입니다. 손자병법은 지금도 전세계에서 중요서 전술의 병법서로 꼽힙니다. 그것이 젤 마지막에 들어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자만이 진정한 장수'입니다. 그러나 싸움을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은 많은 전술 중 하나의 전술일 뿐입니다. 즉 싸움을 회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붙어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을 회피하면 그것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을 회피하면, 그것은 언제나 남아있습니다. 일본 조동종의 개조 도오겐 선사는 쇼군 막부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도오겐 선사는 권력을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일본 최고의 명문가입니다. 그런데 그의 친아버지가 어린 날 암살을 당하는데, 외갓집에 의해서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최고 명문가의 아들인 도오겐은 그 후 자기 외삼촌을 스승으로 출가합니다. 그건 어머니가 원한 것이기도 했지요. 남편이 친정에 의해 죽는 걸 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도오겐은 권력을 혐오했습니다. 그러던 도오겐이 어느 날 쇼군의 초청으로 설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가 쇼군으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아가지고 돌아옵니다. 도오겐은 너무 화가 나 땅문서와 함께 제자를 쫒아냅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제자가 수행하던 자리의 땅을 3M나 파버렸습니다.

 

우리가 발본색원이라는 말을 씁니다. 말 그대로 발본색원한 것입니다. 발본색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예전에 미얀마에 있을 때, 발에 티눈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맨발로 걸으니 큰 티눈 때문에 아파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헐 수 없이 쑥으로 태웠습니다. 아? 뜨겁냐구요? 스스로 알 것입니다. 알고 싶으면, 티눈 위에다 쑥을 놓고 그 뿌리까지 태워 보세요.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날 것입니다.  처님은 본질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환상이나, 가상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피할 수가 없어요.

 

메트릭스 영화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상과 현실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트릭스에서 얘기하고 잇는 것은 가상세계입니다. 현실 그 자체도 가상이라는 것을 스미스 요원이 말하죠. " 원래 메트릭스는 완벽하게 짜져 있어. 하지만 너희 인간들이 그걸 거부한 거야.  오직 행복만을 추구하는 완벽한 세계를 너희 인간들이 거부한 거야. 그래서 새로 짰지. 그게 바로 너희들이 경험하는 세계지."

 

왜 부처님이 끊임없이 본질을 얘기할까요? 많은 수행자들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죠. 내가 보기에는 4,500만 인구 중 깨달았다는 사람이 9,000만은 되는 것 같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깨달은 사람들만 사는 세계인데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 마음은 마야(마술사)와 같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죠. 가상, 환상, 관념의 세계. 이 세계를 내가 만들죠. 그리고 내가 만든 세계에 내가 갇히죠. 지난 주 강론에서 이것을 '마음의 감옥'이라고 했죠.  나는 어떤 분이 이에 관해 묻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만드는 환상입니다. 본인이 보고 느낀다는 것은 본인이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지 마시요.' 우리는 스스로 마음이 만든 환상, 관념의 세계에 스스로가 갇히는 거죠. 

  

미안마에 가면 샤야도들이 하는 일이 없습니다. 수행은 스스로 하는 것이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수행자들이)  보았다는 것, 느꼈다고 하는 것이 실제인지 환상인지를 분별해주는 것을 합니다. 샤야도가 하는 인터뷰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집니다. 그 판단이 100% 옳다는 것을 누가 보증하한단 말입니까? 본인이 느끼고 옳다는 것을 남이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품위가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을 돌려서 못합니다. 말을 순화하지 못해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오늘은 아이들도 없고 하니, 거북해도 들으세요. 남녀가 섹스를 할 때, 강한 오르가즘을 느끼죠. 그런데 그것은 각자가 각자의 느낌만 느끼는 것이죠. 상대방의 느낌까지 느끼나요? 상대방의 뇌의 전자신호를 내가 어떻게 느낄 수 있겠어요. 미안마에서는 스승이 빠라마타와 삔냐타를 구분합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개성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된장찌개를 먹고도 그 느낌이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왜 부처님이 거울 이야기를 할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실재이든 환상이든, 그것은 자신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이 진실입니다. 물론 여기서 진실은 실재하느냐 환상인가 하는 그런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태양이 뜬다고 하죠. 이게 진실입니다. 현대인들이 아닌 고대인들의 경우, 그렇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진실입니다. 왜냐구요? 이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벽 위의 성, 천궁의 성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 성에 올라야 하는데,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실은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직 본질을 이야기 하죠.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시스템을 붙잡고 있죠. 시스템은 불신을 바탕으로 하고, 본질은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시스템은 실재하는 것 같지만,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유지시키기 위해 얽어 놓은 것입니다. 좌선할 때, 제일 재밌는 것이 뭔지 아세요? 좌선에 들어가기 전 영화 한 편을 찍는 것입니다. 좌선에 들어가면 왜 그렇게 시나리오가 잘 써지는지 몰라요. 영화 한편을 찍고 나오니 재미 있습니다. 인간이 환상과 관념을 쫒는 것도,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히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메트릭스입니다. 1편부터 4편까지 정교하게 봤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써먹을 생각으로 본 건 아닙니다. 그 영화는 흥미롭죠.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가 공존합니다. 이야기와 줄거리는 고급문화, 살육과 폭력은 저급문화죠. 영화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데, 전편에 흐르는 것이 무협지입니다. 즉 다다익선이죠. 무기가 많으면 이깁니다. 네오는 온갖 무기를 다 걸치고 들어갑니다. 메트릭스는 엄청난 폭력을 드러내죠. 그리고 그 폭력을 옹호합니다. 폭력으로 악을 제압하는 논리입니다. 조로아스터교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화를 돈내고 안봅니다.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저급문화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흥미를 느꼈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가 거울입니다. 거울에 비친 것이 환상인지 실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울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선사라면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거울은 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거울이 없다고 해서 거울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거울을 실제로 존재케 하고 있는 것은 내 자신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거울이 존재하고 있지 않아도, 거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은 내 자신입니다. 거울의 유무가 문제가 아닙니다. 거울이 있게 한 것은 내 자신입니다. 그리고 거울이 곧 내 자신입니다. 거울이 곧 내 몸과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마음 속의 환상을 경계하였습니다. 환상, 관념(위빠사나 수행할 때는 삔냐타)을 경계합니다.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합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본질을 피하지 말라.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에서 자유로와 질 것입니다. 거울은 영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거울은 다만 비춰줄 뿐입니다. 멋진 총각이 있다, 쑥대머리 총각이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거울은 사물에 대한 어떤 집착도 없습니다. 그저 비춰줄 뿐입니다. 거울의 영상에 집착하는 것이 속박입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 속박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속박되든, 자유인이 되든 그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서두에서 한 말이지만,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라훌라야, 거울은 뭐하는 데 쓰는 거지?" "비춰보는 데 씁니다, 부처님." "마찬가지로 라훌라야, 네가 행동하려 할 때는 거울에 비추어보고 행동하고, 네가 말할 때는 거울에 비추어보고 말하고, 네가 생각할 때도 거울에 비추어보고 생각하라."  여기서 부처님이 말한 거울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거울은 곧 자기 자신의 마음입니다. 거울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역시 그렇게 말합니다. 거울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울이 존재하는 것도 내 자신,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내 자신입니다. 거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거울은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 그것이 거울입니다. 내가 아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실재입니다.

 

아까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나는 여전히 믿습니다. 시각적으로 봤을 때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지구를 보았을 때, 태양이 도는 것을 확인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걸 부인하면 왕따가 될까 두렵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태양이 지구를 떠돌아, 해가 떠오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걸 가리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내가 아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나는 그래서 존경하는 스승은 여럿 있지만, 긍정하는 스승은 없습니다. 내가 그 분을 긍정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아는 것 이외에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 돌아가서 거울을 비춰 보세요. 거기에 비친 내 자신이 진실인지 아닌지. 봄이 되어 재미있는 강론을 해야 하는데, 이번 봄에는 재미있는 강론이 없습니다. 요새는 본질적인 것을 애기할 필요가 있다 싶어, 본질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고 복된 삶 되시길 기원합니다.  

   
1988년 히트곡 모음 _ k-pop hits of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