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둑카 속에서 온다 |…… 혜천스님설교

2018. 11. 18. 10: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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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5년 6월19

행복은 둑카 속에서 온다


 

  

지난 금요일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어요. 춘천에 사는 분이 아니고, 멀리 서울 사는 분인데 보리도량 카페를 보고 한 전화인데, 지난 주 강론이 난해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강연 내용이 난해하기보다는 낯설음이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요지를 한참이나 말씀 드렸습니다. 강론에 대해 이해가 잘 가지 않거나, 납득 안되는 것이 있으시면, 강론 끝나고 차 마시는 시간에 물어 주시면 친절하게 부연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요즘의 강론들에 낯설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얘기들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행복은 둑(dukkha)속에서 온다'입니다. 번역어 고(苦)라는 말을 쓰지 않고, 원어 두카, 둑카(dukkha)를 쓰는 이유는 둑카를 고(苦)라고 번역하는데, 번역어 자체가 맘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苦는 단순한 말입니다. 원어 둑카는 고통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불만족 스러운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뒤트려 있는 것을 말합니다. 뒤틀려 있다는 것은 안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뭔가 틀어져 있는 것, 바로 잡혀 있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苦는 불교에서 말하는 둑카의 의미를 왜곡, 호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는 않지만 둑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행복은 둑카 속에서 옵니다. 행복은 둑카를 지나지 않고는 올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하면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둑카는 가려진 짐실, 감추어진 진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가요? 행복은 불안정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누구도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모두들 행복해 지고 싶어 합니다. 행복은 불안정합니다. 행복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우리가 상대적 가치 속에서 행복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이 둑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둑카이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것이 행복입니다. 모든 것이 둑카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둑카는 상대적 개념이거나 비대칭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늘이 있어서 땅의 개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염전의 염부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좋은 소금은 폭염 속에서 온다.' 즉 좋은 소금은 작렬하는 태양 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염전의 염부들은 절대로 소금을 만든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온다고 표현합니다. 폭염 속에서만이 소금의 입자가 고르고, 미네랄이 풍부하고, 맛있는 소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도 없고, 구름 한 점도 없는 뜨거운 작렬하는 폭염 속에서 좋은 소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둑카를 지나지 않고는 행복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둑카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가 苦, 즉 둑카라고 했습니다. 맞는 얘깁니다. 생로병사가 둑카이기 때문에, 곧 생로병사가  낙(樂)입니다.

 

제가 미안마에 있을 때, 누워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었을 때 일입니다. 몸의 관절 하나하나가 분리되어 오는 고통에 힘이 들어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마디 마디가 분리된 것 같아서, 고통스럽고, 힘들었습니다. 일어나고 싶은데,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상태로 한참 지나서, 어느 순간 그것을 벗어나 일어나 보니, 식은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던지 가사가 다 젖었습니다. 전에도 언젠가 이런 얘기를 한 번 한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웬만한 육체적 고통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고통도 당시에 겪은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든지, 신음 소리도 안 옵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 죽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오직 일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납니다. 그러나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웬만한 육체적 고통은 맘에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강렬함을 느끼지 못하면 행복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움직이고,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둑카 속에서 행복이 온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둑카는 행복과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경전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내가 아리따운 처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묻죠. 그러자 그 처녀가 대답합니다. " 나는 길상천의 행운의 여신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죠. "당신은 내게 무슨 이익을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행복해지기만 합니다." 그런데 다른 여인이 찾아 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흑암천 재앙의 여신입니다." 당신은 왜 여길 찾아 왔습니까?" "나는 내가 이 집에 머물러 있고 싶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내는 '필요없다."고 말하죠. 그러자 그녀가 말합니다. " 나는 언제나 언니와 함께 다니죠. 조금 전의 길상천녀 행운의 여신은 나의 언니입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묻죠. "흑암천녀가 당신의 동생인가?" 그러자 언니가 말하죠. "네, 그녀는 나의 동생입니다. 주인께서 나를 사랑해 주실려면, 나의 동생도 함께 사랑해 주셔야 합니다. 나를 선택하려면, 동생도 선택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선택하려면, 둑카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받아들이려면, 둑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행복은 둑카 속에서 옵니다. 행복은 둑카를 지나서 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결같이 둑카를 밀어내려 합니다. 둑카를 밀어내려 하기 때문에 둑카가 오는 것입니다. 둑카를 받아들이면, 더 이상 둑카는 없습니다.

 

제가 무학산 금산사에 있을 때 일입니다. 그 당시 야생 차밭이 있었지만, 가꾸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차밭이 있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가시덤불로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봄에 오셨던 도법스님이 가시덩쿨을 걷어내고 차밭을 가꾸고 싶어했죠. 아마 봄에 우리 절에 오셨던 것도 나에 대한 이런 기억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엄학림을 함께 결성한 분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추진하기로 하였지만, 누구도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요즘 날씨 같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였습니다. 내가 입승을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승은 책임자입니다. 그런데 입승은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직책이라 좋은 소리를 못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능력이라기 보다는 서열상 띨띨한 내가 걸려 든 거지요. 어쨌거나 일을 시작해보니, 낫을 들고 깍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맨 꼭대기서부터 깎아 계곡 아래로 굴리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집채만한 가시덤불을 계곡 아래로 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땀흘리고 내려와 계곡에서 목욕을 하니, 기분이 상쾌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목욕을 하는 느낌도 그저 하는 목욕과 일하고 땀을 흘리고 난 후 하는 목욕은 느낌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그 일을 하는 이들도 나중에는 다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의미와 같습니다. 우리가 의미있는 땀을 흘리고 씻을 때 행복합니다. 행복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행복합니다. 그것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면 행복합니다. 가리려고 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생로병사가 둑카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받아들이면, 그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아닙니다.(?) 생로병사가 고통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행복합니다. 있는 그대로 듣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명상할 때는 받아들이면서, 일상에서 겪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 앉았을 때는 받아들이면서, 서 있을 때는 부딪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우리가 단 맛을 느끼는 것은 다른 다섯 가지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쓴 맛, 단 맛이 있기에 단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짠 맛이 있기에 싱거운 맛을 느낍니다. 

 

생로병사는 계절과 같습니다. 생은 봄, 로는 여름, 병은 가을, 사는 겨울입니다. 봄에는 모든 것이 생동하면 일어나죠. 여름에는 숲이 무성하죠. 그 숲은 아무리 뭐라해도 봄 숲에 비해서는 노화가 진행된 상태입니다. 우리는 어미니 뱃속에서 수정되는 순간부터 성장하기 위해 늙는 것입니다. 생로병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것입니다. 생로병사는 둑카입니다. 생로병사는 또 그대로 락(樂)입니다. 왜일까요? 행복은 둑카 속에서 오기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어느 날 고행을 하다가 그만 둡니다. 고행을 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어린 시절 태자였을 때 일입니다. 지난 날 잠부나무 아래에서는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예전에 파종을 할때는 임금이 나와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도 어린 태자 싯타르타의 부왕인 정반왕이 파종행사를 합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유모와 함께  잠부나무[閻浮樹] 아래서 쉬고 있었습니다. 유모는 구경을 가 혼자 파종행사를 보게 됩니다. 한꺼번에 수 백대의 쟁기가 동시에 밭을 갈고 씨뿌리는 파종행사입니다. 동시에 수백 마리의 소가 쟁기를 끌고 밭을 갈기 때문에, 벌레가 나옵니다. 그 벌레를 잡아 먹으려, 새들이 몰려 듭니다. 새들이 그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싯타르타는 마음이 아파 그 생명들에게 무한한 자애심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아파마나입니다. 아파마나 수행을 한 잠부 나무 아래에서의 경험을 떠올린 것입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경험하지 않은 어린 시절에 잠부 나무 아래서의 경험을 어떻게 행복이라고 느깔 수 있었을까요? 

 

부처님의 고행은  잠부나무 아래서의 행복과 같습니다. 별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분리해서 생각하죠, 전자인 부처님의 고행입니다. 그 고행을 부정합니다. 후자는 잠부나무 아래서의 행복입니다. 행복은 긍정하죠.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 둑카의 경험 속에서 그의 행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실연의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의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앞서 말한 염전 염부들의 얘기가 너무 맘에 들어요. 우리 삶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둑카가 크면 클수록, 행복이 커지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행복해지려면 둑카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행복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자각입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그만두고 스스로 자각하듯이,  우리도 둑카 속에서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고보면, 그것이 자각입니다. 어떻게 자작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폭염 속 소금은 내가 거부한다고 오지 않고, 내가 거부하지 않는다고 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염부들이 원한다고 좋은 소금이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소금이 오는 것을 염부들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행복도 오는 행복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똑 같은 걸 어떤 사람은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고苦가 존재해서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밤이 없는 낮이 있던가요? 밤이 없으면, 낮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치 달과 해가 교차되는 것과 같죠. 생각같아서는 한꺼번에 떠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지구 상에 밤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명체들이 불행해지죠. 밤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휴식을 주죠. 그래서 밤은 정(靜)입니다. 고요롭죠. 낮은 활발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동(動)입니다. 정이 있기 때문에 동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둑카 속에서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둑카 없는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파마나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애별리고를 말합니다. 이별은 왜 아픈가? 이별은 홀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주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홀로 서는 사람만이 마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분법적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전체를 봐야죠. 전체를 보면, 행복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둑카를 얘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불안정하다는 것을 네가 알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뚜기가 뒤뚱거리는 것을 본래 그렇다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찻잔이 기울어져 있으며, 우리는 불안해 합니다.  그것은 본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오뚜기는 원래 뒤뚱거리고, 컵은 원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오뚜기 같을 수 있다고 긍정해 버리면, 우리는 그 어떤 사물에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안정되어 있는 걸 원합니다.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뜻합니다. 이 세상에 안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둑카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집니다. 거기에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안정된 것이 깨질까봐 그런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너무 행복한데, 언제 불행이 올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주관상을 보고, 점쟁이를 찾아간 사람들은 오지 않은 미래의 불행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묻는 사람들은 내가 혹시 이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래는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궁금해 하고,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서 묻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냄새를 불평합니다. 먹으면 배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먹으면 배설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배설하기 때문에, 다음에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배설행위는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과 민비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순종을 마지막 왕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는 일본이 임명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며칠 만에 죽었습니다. 엄마 젖은 먹는데, 아이는 항문이 없었던 것입니다. 배설하지 않으면 다음에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둑카는 배설하는 것과 같죠.

 

둑카와 행복은 하나의 짝입니다. 둑카와 행복은 그래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둑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쫓아내고, 거부합니다. 그럴수록 그 위치는 강고해집니다. 내가 받아들일 때, 내가 문을 열 때, 그것이 약해지죠. 부처님이 깨어 있는 삶을 말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삶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해 병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권도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 사람들이 나의 글씨를 괴(怪)하다고 한다면서,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것을 어떡하느냐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 글씨를 평하기를 '추사의 글씨는 괴하다. 즉 그것은 그의 개성이다.'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개성, 그 사람의 모든 걸 받아들이면, 우리는 편안해집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의 모든 걸 받아들이면 편안해 집니다.    

 

부처님은 '나를 닮으라, 나를 따르라'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말고, 법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각자에겐 각자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나입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그는 그의 길을 가면 됩니다. 그와 같아지려고 하니 괴롭죠. 둑카가 생깁니다. 부처님은 네 자신의 스스로의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물처럼 말입니다. 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릅니다. 물은 평지를 만나면 잔잔하게 흐르고, 언덕을 만나거나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 흐르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수가 되어 흐릅니다. 물은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물은 바위를 만나면, 넘너뜨리려 하지 않고 돌아갑니다.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강의 돌을 파낼 거냐 하는 것입니다. 다 파내고 나면, 아무 문제 없어질까요? 강은 돌과 모래를 나르고 나무를 키우죠. 없앤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물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나가듯이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인간은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해 후회 같은 것은 잘 하지 않습니다. 뻔뻔할 정도로 큰 소리 칩니다. 그 선택이 잘못되어 고초를 겪더라도 말입니다. 도전의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염전 염부들이 30년 도 닦은 스님들, 신부들, 목사들 보다 낫습니다. 그 분들은 모든 걸 받아들이잖아요. 다른 인간들이 30년 동안 도를 닦아 안 것을, 그 분들은 염전에 들어선 순간 알잖아요. 결국 자각입니다. 행복이 둑카 속에서 온다고 하는 자각을 하면, 더 이상 둑카는 없습니다.

 

나는 요새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렸을 때 경험조차 잊고 살까? 놓아 두면 안정되죠, 우리의 마음도 놓아두면 안정되죠. 그런데 자꾸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뭔가를 하니 불안정해지는 것입니다. 떼를 많이 쓰는 아이에게 약은 울다 지치게 놔 두는 것입니다. 두 눈 딲 감고 세 번만 해보세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백화점에 갔을 때, 아이가 뭘 사달라고 떼를 쓰며 드러누우면, 주위의 눈 때문에 단호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번 만 눈감고 가버리면, 아이는 떼를 쓰도 소용없고 자신을 버리고 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뭘 사달라고 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지 못해 아이한테 끊임없이 끌려 다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래서 끊임없이 끌려 다니게 됩니다.

 

부처님에게는 모든 것이 둑카입니다. 둑카와 동거하는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일부분이 둑카라면 선택하면 되지만, 모든 것이 둑카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둑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즉 자각하게 되면 모든 게 행복합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행복이 둑카 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왜 속에서 온다라는 표현을 썼는지 이해하시겠어요? 오직 둑카 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둑카 속에서 행복이 오기 때문에 둑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둑카는 락(樂)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항상 시간을 내어서, 앉아 있든 누워 있든 아파마나 수행을 하십시요. 아파마나는 자애심입니다. 아프면 아픈대로, 기쁘면 기쁜대로 차별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차별없는 마음을 일으켜 내 주위에 해당시키면 됩니다. 아파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뻐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차별없는 마음이 있기에 차별 있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아파마나하라는 것입니다. 아파마나 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제가 거울을 주제로 강론했는데, 거울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거울은 내가 자각한다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춰진 것은 내 자신입니다. 거울이라는 명칭이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각은 내가 느끼고, 내가 보고, 내가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두카 속에서 행복이 온다라고 하는 강론도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내려가 차한잔 하시지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차 마시는 시간에 말해 주십시요.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삶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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