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 혜천스님설교

2018. 12. 1. 11: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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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생의 병은 번뇌에서 생기고
보살의 병은 대비에서 생긴다.

보살은 지혜를 가진 고로 생사에 안주하지 않으며
자비심을 가진 고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다.

- <유마경>

혜천스님 법문 2011년 8월 20일

팔정도

좌선, 행선, 일상선

 

 

강론을 하기에 앞서 한가지 공지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는 10월 22일 봄에 못갔던 봉정암 행선을 가기로 했습니다. 석두가 20명 예약을 했으니, 뜻있는 선우님들의 많은 참가를 바랍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방법으로 좌선, 행선, 일상선이 있습니다. 좌선은 보통 우리가 많이 봐온 앉아서 수행을 하는 것이고 행선은 걸을면서 하는 수행이고, 일상선은 일상에서 수행하는 것을 일컸습니다. 저도 월정사에 있을때 새벽 2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잠자리에 들때까지 공양시간을 빼고는 꼬박 앉아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몇년 하다보면 허리가 다 나갑니다. 남방쪽에서는 이렇게 좌선하는 것을 가장 쉬운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에는 1시간 좌선을 하면 반드시 1시간은 행선을 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좌선 - 행선 - 좌선 - 행선... 이런 식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산에 오를때나 걸을때도 이렇게 행선을 하면선 올라가면 힘들지 않습니다.

 

잡아함경에 보면 라다상응(相應)경이 있습니다. 라다라는 비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면 부처가 여기에 대답을 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인데 불교의 핵심 개념들이 잘 정리돼 있어 우리에게 매우 수중한 개념정립서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苦, 두카), 무상, 무아 등의 질문이 있고, 여기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이 있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어서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 질문 중에서 '악마란 무엇인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악마는 마라, 비인간적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접신이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이것을 일종의 뇌질환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간질을 앓는 사람들중에 특출난 예술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뇌질환은 창조적 활동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든, 악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라다여, 색(色)이 악마다. 색을 알아차리고 관하라. 수(受)가 악마다. 수를 알아차리고 관하라, 상(想)이 악마다 상을 알아차리고 관하라. 행(行)이 악마다. 행을 알아차리고 관하라. 식(識)이 악마다. 식을 알아차리고 관하라"라고 대답합니다. 색,수,상,행,식으로 오온(五蘊)을 의미합니다. 색은 물리적인 것, 즉 육체, 루빠를 의미합니다. 수는 마음의 작용 중 갖게되는 느낌을 말합니다. 상은 이미지 구성, 행은 의도하는 마음의 작용을 뜻하고, 식은 분별, 판단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다섯가지의 기운이 복합된 존재인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히퍼는 '미친 운전자가 운전을 하면 사상자들을 돌보는 것보다 핸들을 빼앗는 것 급선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상자들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되면 계속되는 사상자들을 막을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핸들을 빼았는 행위는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악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네 몸과 마음이 악마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마 지금 종교들이 이렇게 얘기한다면 모두 도망가고 말겠지요. 그렇지만 내 몸과 마음이 악마라는 말에서 '아 그렇구나'하는 수준에서 한단계 더 고민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두가지로 볼수 있는데 첫째가 이법(理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고 둘째가 행법(行法)으로 이러한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에 녹여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내가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이는 것도 내 입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행에 신사임당이 아무리 많이 모셔져 있더라도 내 주머니에 돈 만원짜리가 없다면 나는 굶어죽게 되는 것입니다.

 

행법은 부처님의 가르침(八正道)을 수행하고, 팔정도를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팔사도를 행하면 악마가 되는 것이고 팔정도를 행하면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마와 성자는 분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악마나 성자는 정해져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법을 어찌하는냐에 따라 둘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견을 버리고 정견해야 됩니다. 정견(正見)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말합니다. 사성제(고집멸도)를 바로 보고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일이 결국은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 가의 문제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알고....., 인간은 자기 눈높이에서 세계를 바라봅니다. 무엇을 이해하는가의 여부는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 여기까지 정리라고 한답시고 쭈구려 앉았는데 문혜님 들어오셨고, 순간 나의 얼굴엔 평화가 깃들었으며 이내결연한 졸음수행으로 관하셨으니, 이후는 문혜님의 마무리 릴레이 정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 석두님 녹취 

 

비몽사몽, 취중숙취로 따지면, 만만치않은 나를 두고 본인은 존다지만 저리 자다니 나는 누굴 의지하란 말이요. 부실한 중에 이어 봅니다.

 

 


부처님은 팔정도와 팔사도를 얘기합니다. 정과 사예요. 팔사도를 행하면 네가 악마라는 거예요. 악마와 성자는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죠. 태어날 때 부터 성자가 있고, 태어날 때부터 악마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팔사도를 행하면 그가 악마고 , 팔정도를 행하면 그가 성자죠. 본래부터 생이지지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알고, 태어날 때 부터 정해진 그런 것은 없어요. 성자와 악마도 오직 스스로의 행법에 달려 있죠.  부처님은 팔정도와 팔사도를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사견을 버리고 정견하라고 이야기 하죠. 우선 정견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경전에서는 사성제에 대한 이해라 그러죠.  사성제가 무엇입니까? 고집멸도 아닙니까?  고? 거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고입니다.

 

삶이란 불만족스럽고 뒤틀려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불안정 해서 뒤틀려 있죠. 걸래를 빨아 방을 닦고, 다시 걸래를 던져 놓으면, 그게 두카의 모습입니다. 두카를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걸래는 잘 마르지 않고 스스로 곰팡이가 생겨 썪죠. 탈탈탈 털면 그게 정상입니다.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정견입니다. 삶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사견이죠. 정견이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면, 사견은 삶에 대한 그릇된 이해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보고 이해하느냐, 우리가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느야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만납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알고, 냄새맡고.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걸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걸 잘 몬하죠. 인간은 오직 자기 눈 높이에서만 봅니다. 자기 눈높이 이상 보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눈동자가 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나같은 부류가 아니면, 용납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부류가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면 그가 성자이고, 삶에 대해 그릇된 이해가 있으면, 그가 악마입니다. 악마는 외부에서 와서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은 정사입니다. 부처님은 올바른 이해를 통해 올바른 사고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제가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깨달음이 없어서 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서 보여지는 것도 그와 같죠. 내가 어디에 서서 어느 지점을 바라보느냐와 같습니다.

 

얼마 전에 노르웨이에서 자동소총으로 청소년 캠프를 덮쳐 80여명의 사살한  낸 희대의 살인마가 있었죠. 그는 자기가 옳은 일을 했다고 법정에서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정신이상자가 아닙니다. 그는 노르웨이가 악마에 물들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르웨이가 타락해 있고, 그것에 사회당 정권이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그 청소년 캠프는 사회당이 주최한 것입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국가로 대한민국을 들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찬양합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는 그가 흠모하고 존경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릇된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살인을 하면 부끄러워하고, 뉘우칩니다. 그러나 그는 확신범입니다. 그는 자신을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저지른 짓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고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어떤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 그 행동도 나타납니다.

 

부처님은 올바른 사고를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릇된 사고를 하면 그가 악마라는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확신범은 악마도 존경을 표할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이 지옥보다 열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지옥이 부럽습니다. 적어도 지옥은 공평한 사회입니다. 다같이, 똑같이 고통받기 때문에 거기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가장 좋은 세계가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옥은 평등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지옥만도 몬하죠. 애들 밥 한끼 먹지고 180억을 들여 투표를 합니다. 부처님은 올바른 사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고를 못하면, 그 아까운 180억이 종이떼기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부처님은 "말법시대가 되면, 마라가 가사를 입고 나의 가르침을 설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정어를 하라고 말합니다. 정어은 올바른 말입니다. 올바른 말이란 책임지는 말입니다.

 

정업은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말하고 책임지지 않으면, 그가 악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으면그가 악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죠. 그러나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서 이 세상 얘기를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구요? 살아 있는 것은 말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행동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나름 많이 애씁니다. 말에 대한 책임이 없으면, 행동에 대한 책임이 없으면 그가 악마입니다.

 

정명은 삶에 대한 책임입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제발 부모, 이웃, 형제 탓하지 말고.  나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자식에게 공부 잘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공부 잘해봐야 뭐 합니까? 기껏해야 남의 노예 노릇밖에 더 합니까? 공부를 잘하면 검/판사가 되는데, 검/판사가 가난한 자를 위해 그일을 하던가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면 검/판사가 되는데, 남의 노예 노릇을 합니다. 

 

자식에게는 이런 말을 해줘야 합니다. "네가 책임질 말을 했으면, 책임져라! 네가 책임질 행동을 했으면, 책임져라!"자식에게는 요것만 가르쳐 주면 돼! 공부는 급해지면 자기가 다 합니다. 나는 책이라면 그저 무협지, 만화만 봤습니다 내가 필요하니 다른 책도 보게 됩니다. 요새 무협지는 재미없어서 안 봅니다. 정업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무책임하게 삶을 방치하면 그게 악마라는 것입니다.

 

정정진은 불퇴전의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산을 오르다가 조금만 힘들면, 산에 오르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설사 기어서라도 올라 가는 것, 그것이 정정진입니다. 왜 부처님이 불퇴전의 노력을 얘기할까요? 우리는 결과를 얘기합니다. 솔직히 인간세계에서 결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세계는 과정만이 존재합니다. 내가 얻었다는 결과도 따지고 보면, 과정입니다. 태어난다는 것, 죽는다는 것이 모두 과정입니다. 결과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세계는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만이 존재합니다. 과정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결과를 도출하려니, 삶이 덜컥거리고, 팍팍한 것입니다.

 

100M를 달려 테이프를 끊는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과정만 있지, 결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를 찾죠. 그래서 두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도출하려는데, 결과가 없습니다. 이게 끝 지점이 아니라 또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보름에 해제하고, 점심을 먹고는 동산면에 행선을 갑니다. 능선을 걷다보면, 올라가면 내려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이고 편안해서 좋네 하면 다시 올라가죠. 산의 능선을 걷는 것과 같죠. 산에 꼭지점은 없습니다. 산에서 영원히 내려오지 않는 한, 히말라야 설산이라도 영원히 그 곳에 살지 않는한 내려와야 합니다. 인간 세계에는 꼭지점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내려와야 하니까. 꼭지점에 서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인간세계에는 오직 결과는 없고,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불퇴전의 노력을 말합니다. 과정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의 능선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불퇴전의 노력이 없으면, 그건 사정진라고 말합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누워서 남 탓만 하면 그게 악마라는 것입니다. 두 발로 걷지 못하면 네발로라도 걸으라는 것입니다.  두발로 걷는다는 고정관념입니다. 네 발로 걸어보면 의외로 편안하고 좋습니다. 허리가 편안합니다. 요가에서는 쉬는 자세가 네발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워 있는 것보다 편안한 자세입니다. 

 

부처님은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정념입니다. 언제나 깨어 있는 것이 정념입니다. 부처님은 대 낮에 눈 뜨고 잠꼬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낮에 눈뜨고 잠꼬대를 하면, 그게 사념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낮에 눈뜨고 잠꼬대를 하죠. 대한민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믾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지배세력입니다.

 

부처님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으라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깨어 있는 것은 정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정안은 지혜의 눈이 번뜩이는 것입니다. 지혜의 눈이 번뜩여야 남의 노예 노릇을 않죠. 

 

중국의 남전선사가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얘기합니다. 병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병 속의 새는 사물을 보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병속에서 바라보는 사물과 병 바깥에는 바라보는 사물은 같지 않습니다.  왜 같지 않을까요? 병 속의 사물은 사물의 본질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전체를 봅니다. 그녀가 아침에 무슨 비누를 썼는지 느껴지죠. 그러나 차단된 병 속에서는 그걸 느낄 수 없습니다. 병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물의 고유한 본질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남전선사는 '병속의 새'라는 화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과 깨어있지 않음의 차이는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정정하라고 말합니다. 삼매는 언제나 평온한 마음입니다. 삼매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평화롭죠. 평화를 말한다고 평화로운 것이 아니죠. 진나라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하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죠. 더 이상 전쟁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는데 어떠했던가요? 통일 진나라는 12년을 넘기지 못했어요. 명말 사상가 탁오 이지는 진시황을 평하기를 중국의 유일한 화제라고 했습니다. <장서>라는 역사서에서 부기에 "그렇지만 모든 병장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든 것은 어리석은 짓거리였다"라고 썼습니다. 

 

병장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든다고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핵무기를 곳곳에 세운다고 평화가 이루어지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중국의 만선 행주선사는 "태평성대는 장군이 이룩하나, 장군의 편안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장군이 평화를 만들지만, 장군이 평화로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정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시기하면 그것이 악마입니다. 8정도를 행하면, 성자입니다. 8사도를 행하면, 악마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복잡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수신(守身), 수심(守心)하라는 것입니다. 지킬 수(守)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호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방어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보호와 동시에 방어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심하고 수신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고, 스스로의 몸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수신하고, 수심하라!  수신하지 않고,  수심하지 않으면,  그게 악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왜 네 몸이 악마라고 했겠습니까? 8정도는 수신과 수심입니다. 행동, 말, 삶에 한 책임은 수신입니다. 삶에 대한 이해, 불퇴전의 노력, 평화로운 마음, 이것은 수심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고 몸을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행법입니다. 스스로의 말을 책임지고,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지고,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올바른 안목을 갖고, 올바른 이해를 하고, 올바른 사고를 하고, 불퇴전의 노력을 경주하고, 대낮에 눈뜨고 졸지않으며,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게 수심입니다. 

 

악마라고 하는 것이 어떤 외적 존재로 내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네 스스로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겠습니다. "부처님 악마란 무엇입니까?" "나는 네가 젤 무서워! " 왜일까요? "네가 수신, 수심하지 못하면, 악마도 너보다 못하지."

 

시리아 대통령이 요새 국민들을 사냥하고 있다고 합니다. 악마도 그런 악마가 없습니다. 비유가 부적절하겠지만, 시리아 대통령에 대면, 전두환은 얼라죠. 어떤 악마도 수신, 수심하지 않는 인간보다 더 극악한 악마는 없습니다.

 

어제 행선을 갔을 때, 노루가 후다딱 튀어나가 놀랬습니다. 노루 입장에서는 '너 때문에 내개 더 놀랬다."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내가 노루의 영역에 침입한 것입니다. 어제 정말 놀란 것은 노루이지 내가 아닙니다. 수신하고, 수심하지 못하면, 그가 악마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네 몸이, 네 마음이 악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하면 어떻게 우리는 그와 같은 걸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말과 행동과 삶에 책임지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잘못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기억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동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죠. 입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해 나이 50이 되어서도 엄마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리하다 편지 한통을 발견합니다. 발신인은 자기, 수신인이 엄마로 되어 있습니다. 그 편지에는 엄마에게 집에서 학교다니면 안되냐고 적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엄마가 자기를 쫒아내어 멀리서 학교를 다닌 줄 알았습니다. 엄마가 오히려 자립하라고 대학진학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기억은 반대입니다. 인간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철저히 나에게로 유리한대로 각인되죠.  

 

우리가 스스로의 말과 행동과 삶에대한 책임이 없으면, 우리는 악마와 다를 게 없어요.  악마라고 하는 존재가 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가 시키는 것도 아니죠. 항상 수신하고, 수심하세요. 지난 번 법회때, 잠시 앉자고 한 것도 그래서 그렇습니다. 아마 앉는 앉는 것이 익숙하지 않는 분들은 불편한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우리 마음이 고요해지고 가라 앉는 것이 좌선입니다. 미안마 사외도는 행선이 좌선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코리안들은 앉으라고만 해! 일상의 선과 좌선이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좌선이 가장 쉽습니다. 좌선은 수심의 근본이 되죠.  행선은 수신의 근본이 됩니다. 행선을 하면 부수적으로 몽이 건강하게 되죠.  수심하고 수신하세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수신과 수심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주적 깨달음을 특별히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구요? 스스로의 삶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웬 우주겠어요? 적어도 스스로의 삶을 이해한 사람이 우주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는 겁니다. 걸음마도 띠지 못했는데, 100M 세계 신기록을 내겠다고 우샤인 볼트 보고 함께 뛰자는 것과 같죠. 삶에 대한 이해가 먼저 가야 돼요.  그건 수심과 수신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분명해요. 우선 너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하라고 하기 전에 우선 너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너부터 하고 , 남에게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잘못은 뭐냐?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공자님도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라고 하지 않는 것이 인(仁)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도 뭐 어려울게 없어요. 우선 너부터 해라! 얘한테 공부하라고 하지 말고 우선 너부터 책 좀 들으라는 얘기입니다.  수신, 수심이 안되면, 살불살조를 이야기하고  돈오돈수를 얘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공허한 겁니다. 부처님은 왜 행법를 말씀하시냐면, 행법이라고 하는 것은 내 삶 속에서 녹아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차하고 과자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차를 드실 때는 차에서 느껴지는 향과 맛을 하나하나 느끼세요. 하나하나 느끼시면 그게 일상의 선입니다. 과자를 먹으면서, 그 과자의 맛과 과자의 달콤함, 과자가 부서지는 것, 씹히는 느낌, 그것이 목넘어가는 느낌, 이것을 하나하나 관찰하시면 그것이 수행입니다.일상의 선이라고 하는 것이 다를 것이 없어요. 우리가 집에서는 잘 못하니까 여기서라도 한번 하세요. 모든 것은 숙달시키면 됩니다. 처음부터 숙달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네 합장하시죠. 기도하시고 내려가시죠.

 

자비하신 부처님!

오늘은 법회를 시작한지 4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신하고 수심하는 삶이 되도록  불퇴전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같은 공덕으로 저희 삶에 장애와 어려움이 없이 부처님의 은혜와 행복속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_()_

내려가시죠.

 

  

팔정도

① 정견():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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