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5. 19:4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스님 일요강론 2011 09 25 이동
어느 날, 소나라는 제자가 부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부처님, 저는 수행이 너무 힘듦니다. 그동안 부단히 노력하였지만 어떠한 성과도 진전도 없습니다. 이제 지쳤습니다. 집에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살아볼까 합니다' 그러자 부처께서는 소나에게 불가에 들어오기 전에 무엇을 잘 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위나를 잘 연주했습니다. 위나는 현악기로 거문고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께서는 "수행은 위나의 줄을 조율하는 것과 같다.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느슨해지면 좋은 연주가 안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 할지라고 반드시 적절한 조율은 필요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소나는 이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어 수행을 더욱 열심히 하여 아라한과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조급해합니다. 조금 하다가 자포자기 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빨리 성과를 내고 싶어하고 그것이 안되면 포기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심으로 이동하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중(中)은 가운데가 아닌 한결같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동시켜 거기에 머무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수행은 우리 일상의 삶과 마음이 한결같음을 말합니다. 학교 다닐때 시험이 다가오면 머리띠 묶으며 새롭게 결심을 합니다. 그렇지만 한때 잘하기는 쉬우나 한결같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성과가 안나타나면 지칩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나라는 비구도 이점을 얘기한 것입니다.
암벽 등반이라는 스포츠는 이동과 중심에 초점을 두는 운동입니다. 우리의 수행이나 일상, 삶이 암벽타기와 같은 것입니다. 지치게 되면 창의성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망상과 창의적 생각의 차이는 실천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망상은 실제로 했을때 성과가 나올수 없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성과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과학은 어떤 이론을 실천을 통해 그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속에 있는 생각도 실천이 없다면 망상이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삶에 중요한 것은 머리띠가 아닌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 부처님은 "중심으로 이동하라"고 했을까요. 중심으로 이동하기 위해 한결같이 하다보면 당신도 종행?을 이끌어 냅니다. 한결같은 마음과 삶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과 때문에 급급합니다. 수행은 중요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지런한 농부가 논에서 살다시피 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곡식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 저는 이말을 듣고 발소리를 녹음해서 논에다 틀어놓을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 그렇게 열심히 농사를 짓는데 벼 이삭이 기대보다 늦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농부는 뭐가 걸려 자라지 않나보다 일일이 벼의 목을 잡아당겨 놓습니다. 그 다음날 농부가 논에 나와보니, 온 벼가 다 누렇게 목을 뽑고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지금 급한 마음에 벼의 이삭을 뽑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조급증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수행을 잘할려고 하는 것, 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장애가 됩니다. 잘 하려고 하고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하면 문제가 나타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작심삼일이라 하여 결심의 머리띠가 효용이 있다면 온 몸을 그 머리띠로 묶을 용의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우리의 생체리듬이나 의지는 어느 날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386컴퓨터가 갑자기 XP급으로 되겠습니까. 차근차근 업그레이드 해 나가서 한결같은 마음을 지속해나가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를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 것고 같음"이라고 하셔씁니다. 이는 미국 원주민들이 부싯돌처럼 쓰던 참목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에다 나무를 비벼 불을 얻는 것인데 불씨가 튈때까지 계속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힘들다고 잠시 쉬거나 하면 불꽃이 일어날리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하는 것입니다. 한때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애할 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읶겠습니까. 그렇지만 한결같이 이를 지속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요즘도 결혼식 주례사에거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좋을때나 나쁠때나 한결같이 살아가라는 얘기를 합니다. 종요한 삶의 이야기입니다. 설사 부족한 사람이라도 내가 채워주는 것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부부는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속효심(速效心)은 조절이 부족한 것이고, 퇴타심(퇴墮心)은 속도와 도전의식이 부족합니다. 역사학자 카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이승엽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타자입니다. 그렇지만 이승엽 선수는 그날 성적이 좋지 못하면 새벽 4시까지 천번 만번 배팅볼을 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명성은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매일 잘하는 선수는 없습니다. 못했을때 치고 나오는 선수가 프로입니다. 이럴때 도전의식이 필요합니다. 도전의식과 성과주의는 다른 것이지요. 성과주의는 결과에 급급한 것이고, 도전의식은 좋은 결과가 나오든 의도한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멈추지않고 계속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항상 승자일 수는 없습니다. 속효심과 퇴타심은 다 하나씩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한결같은 자세이지요. 저는 굳이 채찍이라는 말은 쓰고싶지 않습니다. 한결같은되 자신을 독려해 나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여기에 자기 신뢰가 전제되는 것이겠지요. 자기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위의 비구 소나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결같음은 이렇게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 어떠한 전진하지 않더라도 조금 쉬고나면 다시 전진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소나에게 무엇을 일깨웠던 것일까요. 소나는 위나연주의 명인이자 일인자였습니다. 수행은 위나연주와 같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네종류의 말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양마로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말입니다. 그 다음이 무마로 채찍이 털에 스치면 달리는 말입니다. 세번째가 육마로 채찍이 털과 가죽을 때려야 달리는 말이고, 네번째가 골마로 채찍이 내리쳐 뼈까지 사무쳐야 비로소 달리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이 되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본 3층집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 몇년후 3층집을 짓게 되었는데 건축업자가 터를 딱고 주춧돌을 놓는 작업을 시작하자 '왜 주줏돌을 놓고 난리냐, 난 1,2층은 필요없으니 빨리 삼층에 건물을 지어라'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이 기술자는 '세상에 어떤 기술자도 1,2층이 없는 3층집은 지을수 없으니 그런 사람을 구해서 지으라' 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미국은 현재 자본주의의 종가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가 미국처럼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남의 것을 강탈하는 바탕위에 설립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인디언이 살던 남의 땅에서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남의 노예를 기반으로 성장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거대제국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 중동지역에서 싸움을 벌이고 고전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급하다고 해서 시간이 함께 급한것은 아닙니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속효심만있다면 삶이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예전에 땡감을 카바이트 불빛으로 하룻밤만 구우면 금방 홍시가 되었습니다. 음식의 안전성이 문제가 안되던 시절이었죠. 그처럼 나만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하면 마으미 급해지고, 무리를 하게 됩니다.
세상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해 보입니다. 이것이 속효심입니다.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내 스스로 위나의 줄을 너무 바싹 당겨서 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자신있게 자신의 줄을 당겨 보지도 못하는 비겁을 겪기도 하고 남들의 줄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서워 줄을 고르지도 못하는사람들을 봅니다. 이렇듯 속결심과 퇴타심, 둘 다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가고 하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한 방법을 찾아 선택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선택이 줄을 당기고 늦춰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언제나 세상의 중심에 머물러야 합니다.
중(中)은 한결같고, 가장 알맞는 조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결같지 못한 이유는 내 힘이 넘치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결같고 조화로운 것은 알맞고 편안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속할 수 있습니다. 설악산 단풍보다 등산인파의 단풍을 보는 일이 더 장관일때가 오고 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날때부터 배우지 않아도 앎)는 인간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말씀하시는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에서 온전한 존재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는 것이 끝없이 조율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울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생이지지나 돈오가 없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이것을 향해 자신을 이동시키고 조율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수행이고 삶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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