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8. 14:0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스님 일요강론 2011 09 18 마음은 인간의 최대 창조물이다
부처님의 전도 선언을 보면 '사람들중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사람이 있어도 그들이 진리의 말, 법을 듣지 못하면 악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구들에게 그 법을 전하라 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은 인간 역사의 출발점이자 문명의 발상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의 역사, 문명은 업었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인간의 마음은 백번을 강조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말과 자신의 행동, 자신의 생각을 마음에 비추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사람의 마음의 오염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이들, 그들을 위해 그들을 도와주자, 그냥 놔두면 그들도 타락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때 선하고 악한 본성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경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것으로 좋은 환경, 마음의 환경은 표백된 것입니다. 천에 물을 들이려면 먼저 천을 깨끗이 빨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얗게 표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염료를 한번 해서는 안되고 두세번 반복해서 해 주어야 아름다운 색감을 내는 천이 나옵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가사도 처음에는 다만 명주였을뿐, 두번 세번 염색을 해서 이렇게 고와진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드는 것이지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친구나 사회같은 환경에 의해 서로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1900년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미국내의 자살율과 타사율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를 통계로 분석해 내었다. 그것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세번의 자살율 고점과 세번의 저점을 나타내는데 이는 특정정당의 정권 창출에 따른것과 연결이 되었다. 자살율은 특정정당의 대통령의 집권시기와 유의미한 관련을 맺는 다는 것이다. 공화당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 처음에는 자살율이 낮지만, 임기 후반인 집권말기에 가면 자살율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 취임초기에는 자살율이 높지만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자살율이 적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타살율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날까요. 공화당이 정권을 잡고 정책을 피면 열등감과 열패감이 늘어나고 힘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해도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민주당이 집권을 해서 정책을 펴면 사회적 열패감이 줄어들고 사회적 약자들을 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해서 자연적으로 자살율과 살해율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흥미로운 조사를 통계적으로 풀어낸 사람이 미국 뉴욕대학 정신의학자인 제임스 길리건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누군가, 무엇으로부터 물드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관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이 존재관이 되고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를 위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환경이 중요한 따름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좋은 옥수수를 수확하는 농부에게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는 가장좋은 종자를 가진 옥수수를 이웃들에게 나눠준 것이 그 대답이라고 했습니다. 바람에 의해 수정을 하는 옥수수는 좋은 옥수수 종자가 이웃해 있어야 좋은 옥수수를 얻을 수 있으므로 주위의 모든 밭의 옥수수 종자를 좋은 종자로 안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살율 통계와 좋은 옥수수 사례는 같은 얘기입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전하라. 오직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사람들은 이를 원음(原音)이라고 합니다. 원음은 부처의 말씀을 이릅니다. 어떠한 흠절도 없는 완벽한 말이라는 뜻이지요. 자신만의 이익, 자신의 생각,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모든 공동의 이익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위한 환경조성이 필요합니다. 관련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맒씀하십니다. 옥수수 농부가 좋은 옥수수 씨앗을 전파하듯이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깨어야 합니다. 죄악중의 가장 큰 죄아근 '무지한 것'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고집을 부리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명심견법(明心見法) 지혜로운 마음으로 다르마를 보라. 마음이 지혜롭지 못한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면 누군가가 행복하겠습니까? 누군가가 웃어야 누군가가 해복하겠습니까.
무지를 표백해서 지혜를 빛내야 합니다. 지금 몇년간 전 세계는 초유의 경제위기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언제인들 경제가 어려운적이 아닐때가 없었지만, 이번처럼 한 지역의 공황이 아닌 지구촌 전체가 이런적은 없었습니다. 인간의 무지는 이러한 세계경제 위기에 숟가락 한번 제대로 얹은 적이 없지만 어려움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공업중생... 같은 시기의 중생들은 같은 이익, 같은 손해를 공유하게 돼 있습니다. 이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 이상 피할수 없는 숙명같은 것입니다. 무지는 철옹성과 같아서 쉽게 벗을 수 없습니다. 무지가 있는 한 인간은 끊이없이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만이 인간 존재를 파괴하고, 문명을 위기로 몰아놀수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이 인간의 무지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히틀러에 의한 나치스 독일이 수없는 유대인을 죽이고, 정신지체자, 장애인, 이민족을 살육할때 독일 교회, 캐톨릭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지 하는 의문말입니다. 일본이 동아시아를 점령하면서 참살에 들어갔을때 일본 불교는 그것을 찬양하고 고무했던 것입니다. 나치스 치하의 독일 교회나 일본불교는 찬양만 했지,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바이러스 감염과 같아서 이성적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이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함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금강부동심을 얘기 했습니다. 세간에 '미워하면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집안이 폭력이나 주사, 무능한 아버지가 있었다면 그 아들도 그럴 확률이 높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 친구, 가족 사회등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행동은 없습니다. 네가 지시하지 않으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는게 미국 정신의학계의 얘기입니다. 이처럼 모든 출발점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표백하는 것이 금강부동심이비낟.
사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돌이키지 못함입니다. 실수와 잘못은 이어집니다. 인간이니까 어쩔수 없는 노릇이지요. 실수없는 성공은 있을수 없는 것이고 무지하기 때문에 실수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1명의 제자들에게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전도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두사람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각자의 길로 떠날 것을 말하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전도여행을 혼자 떠나기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겠지요. 낚시를 하다보면 한번 낚인 물고기가 다시 또 그 미끼를 밀고 올라오는 일이 있습니다. 이는 물고기니까 그래도 되지만 인간은 그러면 안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과거의 역사이고 현재의 여행자이자 미래의 기획자로 지금까지 인간이 개발한 최고의 발명품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해도 흠이 되거나 넘치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금강부동심이 아니어서 환경에 지배당하고, 자꾸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훈련과 반복이 이러한 금강부동심에 이르는 길입니다. 실수는 삶의 수업료와 같습니다. 수업료 없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도 6년의 부단한 수행과 노력에 걸쳐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붓처님이 6년씩이나 걸린 일인데 그 이상이 걸린들 무슨 허물이 되게씁니까. 옛날에 운봉 스님이 그의 스승 대우 수지 선사에게 하도 진리를 알게 해 달라고 보채자 대우 수지 선사께서 "왜 법이 썩을까 걱정이냐?"는 갈을 날리신바 있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각자에게 충분하게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할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나의 마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더 없는 행복을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생각할 때 "스스로의 마음에 비추어 보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이야말로 모듯 것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학자인 목갈리나에게 "내가 장안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었지만, 실제로 장안에 이르는 사람이 있고 글치 못한 사람이 있다. 내가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없는 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아마존의 부족에게 보여준들 쌀 한말, 쥐 한마리와 바꾸려고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주위의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는 것이지요. 깨달은 자는 두번의 화살에 맞지 않는 법입니다. 이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예전에 화살10만개를 만들라는 말에 제갈공명은 일주일 말미를 주자 단 사흘이면 된다고 하고, 안개가 짙은 날 작은 배 스무척을 띄워 징과 꽹과리를 치면 적의 화살을 수집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지가 무슨 공명이라고 같은 화살을 수없이 몸에 맞습니다. 고슴도치가 친구하자고 할 수준이지요. 이렇게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얘기이지요.
내 마음이 만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크샤트리아 계층은 싸음을 주특기로 한 무사계급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나면 농민, 노예등도 전쟁에 나섰지만 이들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아리안 족의 크샤트리아 층은 적의 가족과 가축을 약탈하기 위해 양성된 조직입니다. 왕이 아직 전제적 성격이 되기 이전 단계여서 종신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많은 것을 약탈하는 능력자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해 그러한 능력을 입증해야,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왕좌를 지킬수 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왕을 아버지로 둔 아들이었습니다. 경(經)을 보면 부처님의 아버지는 선한 사람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카밀라 왕조는 특히나 선출직 전통이 강한 나라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나라의 왕이 되려면 매해 그러한 능력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무지에 의해 역사의 수레바퀴가 이그러집니다. 무지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10만개의 화살이 제몸을 꽤뚫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지를 악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무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잘못을 모르고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1930~40년대의 독일 캐톨릭과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히틀러 시대 캐톨릭은 침묵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과 장애인, 정시지체아, 폴란드 민족이 참살을 당해도 침묵했습니다. 폴란드 침공을 마친 히틀러는 '너희들은 노예다. 게르만족에게 충성하라'란 말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바로 로마 캐톨릭에게 공격의 화살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독일교회는 그동안의 침묵고 방관을 후회하였습니ㅏㄷ.
인간의 무지가 이와 같습니다. 인간의 불행한 역사의 시작은 무지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다르마을 봅니다. 주체적인 마음이 아닌것은 노예와 같습니다. 주체적인 의지가 아닌 행동은 로봇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환경에 복종하고 두려움에 쌓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양이 무섭다하니 과천부터 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임금이 계시는 한양이 무섭다는 소문을 들은 촌뜨기 농민이한양이 무서워 한양도 가기전인 과천에서 부터 설설 긴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자기 자신으 주체가 되기 힘든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한순간에 부단히 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반복과 노력을 하다보면 그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을 물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빨고 표백하고 염색하는 부단한 과정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과정속에 있는 것입니다. 조급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나 과정을 생각하며 눈물바람에 빠져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지나 또 하나의 과정을 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역사이자, 현재의 여행자, 미래의 기획자입니다.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간만에 하려니, 처삼촌 벌초하듯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선우님들의 보완 부탁드립니다. 한편 시월 스무둘쨋날 있을 봉정암 행선을 대비한다는 핑계로 대룡산 어디쯤의 능선에 한땀한땀 바느질하듯 자신들의 걸음을 꼭꼭 수놓고 있을 청청브라더스, 법련내외, 법화님의 산행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한 산행행각이 좋지 어찌 이 쾌쾌한 삼실에서 타자수를 치는 이신세가 좋겠다느 말입니까. 내심 무척 함께 하고 싶었던 석두가 그리움과 경의를 함꼐 보내는 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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