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샬리 Vaisali
오늘은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도시, 바이샬리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여성이 처음 출가한 곳이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린 곳,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은 곳,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운 곳,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100년 후에 제 2결집이 이뤄진 곳, 또 불멸 후 500년 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유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전 4시 30분, 새벽녘 일어나 짐 싸고 움직이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무심히 달려 나가는 버스 속에서 순례객들은 아침 예불을 올렸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기 전 마지막 여정은 영축산에서 시작해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에서 끝이 납니다. 순례객들도 어제 영축산에 이어 오늘은 바이샬리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비하르(Bihar)주의 수도 파트나, Patna
오전 7시쯤, 스님께서는 수신기를 통해 버스 안에서 푹 자고 있던 순례단을 깨우며 “지금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비하르(Bihar)주의 수도 파트나입니다. 비하르주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8천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또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뒤에 아쇼카 왕의 마우리안 왕조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작은 나루터였는데 당시 부처님께서 이곳에 큰 도시가 들어설 것이며 그 도시는 물의 재앙, 불의 재앙, 사람의 재앙, 세 가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후에 큰 홍수와 큰 불과 내분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라고 파탈리 푸트라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파트나는 야무나, 강가, 고그라, 간다키, 숀 이렇게 다섯 개의 강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다리가 시작되는데, 이 다리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입니다. 다리 길이가 11km 정도 됩니다. 누가 전봇대 개수를 한 번 세어보세요.” 라며 지금 건너고 있는 다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습니다.
차창 밖, 강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고요히 그 풍경 속으로 젖어들었습니다.
원숭이가 꿀 공양을 올린 곳, 원후봉밀터
원후봉밀터에 도착하자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이 곳에도 아쇼카 왕이 석주를 세웠는데, 아쇼카 석주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훗날 이 곳에 승원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성지에 비해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한편 원후봉밀터로 들어가는 길에도 구걸하는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보통 탑 앞에 자리를 잡았지만, 스님은 순례객들이 오랜 시간 햇볕 아래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할 것을 염려하여 다른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순례객들은 스님의 안내에 따라 탑이 보이면서 햇볕을 등질 수 있는 잔디밭에 자리 잡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무척 많습니다. 보통 순례객들은 라즈기르에서 쿠시나가르를 가는 길에 바이샬리를 잠시 들렀다가 가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햇볕을 등지고 스님은 햇볕을 마주한 채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도시, 바이샬리 Vaisali
부처님께서는 공화정을 구성해 나라를 운영했던 민주적인 바이샬리를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또한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풍요롭고 자유로운 도시였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조각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리는 장면입니다. 부처님과 제자 500명이 어느 날 대중의 공양을 받으려고 발우를 쭉 일렬로 놔두었어요. 그러면 신도들이 음식을 가져와서 그 발우에다가 넣거든요. 보통은 발우 뒤에 사람이 앉아 있는 상태에서 음식을 나눠주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어쨌든 발우만 쭉 놔두고 사람들은 없었대요. 그랬는데 일단의 원숭이 무리가 다가오더니 그 발우 500개 중에서 부처님 발우에만 꿀을 딱 넣었다는 거예요. 이걸 기적적으로 표현한 것은 동물도 부처님을 알아봤다는 뜻이죠.
그래서 부처님의 일생에서 기적을 묘사한 조각을 보면 이곳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꿀을 공양 올리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왕사성(라즈기르,Rajgir)는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사위성(쉬라바스티(Sravasti)는 천불화현(千佛化現)으로, 상카시아(Sankasia, 산카샤)는 부처님이 도리천(忉利天)에서 내려오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네 개의 도시는 다 약간의 기적적인 모습으로 표현이 돼 있습니다.
아무튼 이곳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원후봉밀을 꼽아요. 다른 것도 많겠지만 아마 그 당시의 사람들의 어떤 믿음하고 관계가 있겠죠. 아쇼카 석주나 이런 기념물은 다 그것에 대한 표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또 바이샬리는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내가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라고 선언하셨어요. 경전에는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코끼리가 덩치가 크잖아요. 고개를 한 번에 싹 돌리지 않고 천천히 돌리겠죠. 젊은 코끼리도 아니고 늙은 코끼리면 더욱 그렇겠고요. 묘사가 그렇게 돼 있어요.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부처님께서 바이샬리를 뒤로 돌아보고 ‘내가 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겠구나’라고 말씀하시고, 광장에 대중을 모아놓고서는 ‘나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어서 스님은 여성이 어떻게 최초로 출가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누구나 수행하면 해탈할 수 있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시에 인도 전체에서 제일 진보적인 도시였습니다. 굉장히 자유분방했어요.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5비구에게 교화를 하고, 야사 등이 출가하면서 비구가 먼저 생겼습니다. 그리고 야사의 부모님으로부터 재가 수행자가 나왔죠. 야사의 아버지로부터 재가 남자 수행자인 우바새가 나오고, 야사의 어머니와 부인으로부터 재가 여자 수행자인 우바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비구니 스님은 아직 안 나왔습니다.
부처님이 카필라 성을 방문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를 했지만 부처님의 부인이나 어머니 같은 분들은 법을 듣고 지혜의 눈은 열렸지만 여성 출가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출가를 할 수 없었어요.
그 당시 인도에서는 여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릴 때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 없는 여자가 딱 한 종류 있었어요. 유녀(遊女), 즉 기생이에요. 이 사람들은 주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비구니 제도를 허락했을 때 사람들이 기생과 제일 혼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비구니 성폭행 사례가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사회 시스템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비구니를 허용했다가 나중에 이런 문제 때문에 할 수 없이 비구 교단 옆에 둬서 보호를 받도록 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어쨌든 보호자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같이 살지는 않아도 옆에서 수행하게 한 거예요. 팔경법(八敬法)이라고 해서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비구에게 비구니가 약간 귀속되는 것 같은 시스템을 취하게 된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필요한 일이었어요.
그런 조치를 취하더라도 당시에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는 게 핵심이에요. 부처님이 성도하신 지 20년 정도 지난 뒤에 비구니 제도가 생겼습니다. 그때 부처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부처님의 아들은 이미 출가를 했고요.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혼자 남은 거예요. 부처님이 출가해버렸으니까 아들도 없죠. 손자도 출가해버리고 없으니까 남자가 없어요. 부처님의 전 부인인 야소다라(Yaśodharā) 공주도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죠, 남편인 부처님은 출가했죠, 아들도 출가했죠. 그러니까 여자만 남은 거예요. 게다가 그 당시에 석가족 젊은이들이 워낙 출가를 많이 하다 보니 석가족 여성 중에 이렇게 홀로 된 여성이 많았습니다.
남편인 정반왕(淨飯王, Śuddhodana)이 죽자 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Mahāprajāpatī) 부인이 출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경전 기록에 따르면 500명의 여성이 같이 출가하겠다고 부처님께 요청을 드렸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거절한 거예요. 그러자 또 가서 청했어요. 또 거절을 했어요. 불교에서는 대중이 세 번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는 문화가 있어요. 세 번 요청하면 거의 다 받아들이는데, 여성들의 출가는 세 번을 요청했는데도 세 번 다 거절하셨어요.
부처님은 카필라 성을 떠나서 바이샬리로 오셨어요. 그런데 이 500명의 여성들이 출가는 포기하지 않고 여자들끼리 모여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당시에는 아주 특이한 경우였죠. 그렇게 여기까지 따라와서 부처님께 또 요청을 했는데, 부처님이 또 거절을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울고 나왔어요. 여기까지 와서 청했는데 또 거절당하니까 너무너무 실망이 컸던 거예요. 그래서 아난다가 왜 그러는지 물으니까 부처님이 출가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얘길 했습니다. 그래서 아난다가 자기도 마음이 안 좋았기에 부처님께 가서 여쭸습니다. ‘부처님, 여성은 수행하면 해탈을 못 합니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부처님이 ‘능히 할 수 있다’ 이러셨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능히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물었어요. ‘그런데 왜 허용을 하지 않으십니까?’
본질적으로는 누구나 다 수행하면 해탈할 수 있는 건 맞아요. 그러나 당시 인도의 사회 시스템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삶의 자세는 장부가 되기는 부족했습니다.
그건 무슨 얘기일까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을 안 하고 남자한테 의지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거예요. 이런 태도는 부처가 되는 길의 최대 장애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아직 우리에게 그런 과거의 까르마가 남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어땠겠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불법을 이해한다고 해도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세가 안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경전을 보면 아난다가 부처님께 가서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부처님을 어린 시절부터 키운 공로가 얼마나 큰지 말씀드렸다고 해요. 태어나서 일주일 만에 생모가 돌아가시고 실제로는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다 키웠어요. 그런 공로를 다 얘기했더니 부처님께서 ‘여인의 출가를 허용하라’ 라고 하셔서 출가가 허용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성 출가를 바로 이곳에서 허용을 했어요. 이곳에서 허용을 한 이유는 제가 볼 때는 두 가지 같아요. 첫째, 여성의 출가라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바이샬리는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체 인도에서 그래도 허용한다면 이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다른 데는 불가능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도시가 진보적이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해요.
둘째, 여성들이 카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몰골이 형편없어지는데도 스스로 걸어왔다는 건 이미 주인 될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잖아요. 여기까지 왔다는 건 자기 준비가 어느 정도 됐다는 뜻이죠. 이 두 가지가 아마 부처님께서 고려하신 대상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곳 바이샬리는 최초로 비구니가 허용된 곳입니다. 그래서 사부대중(四部大 衆)이라고 하는 상가가 완전히 성립되었어요. 이것은 여성 해방의 효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자가 비구니가 됐다는 것은 ‘누구의’ 라는 것 없이 자기 이름을 자기가 갖는 거예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란 말이 없어지고, 자기 이름을 갖는 첫 시작이 된 거예요. 그래서 이곳 바이샬리는 여성 해방 운동의 효시입니다.
남방 불교에서는 비구니 제도가 그 이후에 없어졌어요. 그로부터 한 500년 뒤에 세속의 물이 들어오면서 비구니 제도를 없앨 때 핑계가 이거였습니다. 부처님이 여러 번 거절을 했는데 아난다 존자가 자꾸 요청을 해서 부처님이 할 수 없이 허용을 했다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래서 이걸 전부 아난다 존자에게 책임을 넘겼어요. ‘부처님은 원래 안 하려고 했는데 아난자 존자가 자꾸 졸라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거는 원칙적으로 부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핑계로 이 제도를 없앴어요.
그래서 지금 남방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순수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이건 거꾸로 돼 버렸어요. 붓다 당시에 여성 출가를 허용 안 했다 하더라도 시대가 바뀐 지금은 허용해야 할 텐데, 당시에 했던 것을 지금 아직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스리랑카 종정을 만나서 이 문제를 제기했어요. 여성들이 고등 교육을 받고 사회활동도 늘어나기 때문에 당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 안 하면 여성 엘리트 계층이 전부 기독교로 다 가서 불교가 여성을 차별하는 종교로 인식되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발생한다고요. 그랬더니 ‘그건 너희 한국이나 그렇지! 우리는 굳이 비구니가 안 돼도 괜찮다’라는 거예요. 남방에서도 여성이 출가해서 수행을 합니다만 비구니로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황색 가사를 못 입고 하얀 옷을 입어요. 머리도 깎고 절에서 공동체도 이루고 살고요. 수녀들처럼 미사집정권이 없는 거예요. ‘가사를 못 입을 뿐이지, 수행집단도 이루고 살 수 있고 수행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걱정 안 해도 된다’라는 거예요
여성 출가가 허용됐다가 테라바다(Theravada), 즉 소승에서 여성 출가가 폐지됐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여성 출가를 다시 복원했습니다. 그 결과 대승 불교권에는 비구니 제도가 남아 있고 소승 불교권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나라 비구니 스님들에게 다른 일보다 이곳 바이샬리에 비구니 사찰 하나 지어서 남방 불교 여성들이 여기 와서 계를 받도록 하라고 권했어요. 부처님이 여기서 비구니 제도를 처음 허용했으니까 그 역사적인 근거를 대서 여기서 비구니 계를 받으면 좀 저항이 적지 않을까 해서요. 제가 그냥 팍 지어버리려다가 안 했어요. 제가 지어버리면 칭찬은 들을지 몰라도 비구니들의 자립성에는 도움이 안 되잖아요.
아무튼 바이샬리는 이렇게 여성 출가가 허용된 성스러운 곳입니다.”
스님은 이외에도 암나팔리의 귀의, 자등명 법등명,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100년 뒤 열린 제 2결집, 유마거사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님께서 먼저 설명하신 내용의 경전을 순례단이 함께 독송하였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미리 듣고 경전을 읽으니 더 생생하며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스님의 세심한 지도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여성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기를 발원하며 스님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스님께서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공양 올리기를,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고, 하루 속히 통일이 이루어져 북한동포들도 우리와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우리 모두가 하는 일마다 자신감을 갖고 행복하게 수행자답게 살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순례단 또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함께 발원하니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탑돌이를 했습니다. 400여명이 노란 가사를 수하고 한 줄로 원후봉밀터를 에워싼 모습이 무척 멋있었습니다.
탑돌이까지 마치고 대중이 자리에 앉자 스님은 설명을 조금 더 보충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막연히 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태어나서 성장했고, 고뇌했고,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는 것은 그런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부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고뇌가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극복하고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법,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미소 띤 얼굴로 살아가는 법을 제시하신 겁니다.” 라며 성지순례를 하는 목적을 다시 상기해주었습니다.
순례단은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앉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도시락으로 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비슷한 반찬이지만 허기까지 보태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바이샬리 진신사리탑
진신사리탑 앞에 도착한 순례단은 4줄로 서서 가사를 입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으로 나아갔습니다. 먼저 온 순례팀이 진신사리탑을 에워싸고 기도를 하고 있어 정토회 순례단은 조용히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자 순례단도 탑을 참배한 후 한쪽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화장하고 남은 유골인 진신사리를 모신 탑입니다.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여덟 몫으로 나뉘어져 모셔졌습니다. 여덟 몫 가운데 하나가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 모셔졌습니다.
현재까지 8개가 있는데 딱 3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 이 곳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을 지금 여러분들이 참배를 하신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떠올리며 예불 공양을 드린 후 바이샬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며 고요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원후봉밀터와 진신사리탑 두 곳을 둘러보고 인근의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숙소 근처 바이샬리 왕궁 터로 바로 답사를 갔습니다. 저녁에 대중들과 다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로 적합한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답사해본 결과 똥밭도 아니고, 다함께 둘러앉기에 딱 좋은 공터였습니다. 순례객들은 숙소에 도착해서 저녁준비를 마친 후 왕궁 터로 모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다함께 둘러 앉아 노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우리 숙소가 절이니 절에서는 조용히 하고, 여기서 실컷 노세요.’며 ‘자발적으로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은 나와서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노래 부를 사람이 나와서, 밤새도록 놀아도 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해가 완전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이슬이 내리기 직전까지 함께 여흥을 즐겼습니다. 순례객들은 아쉽지만, 짧고 굵어서 좋았다며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어둠이 내리자 인도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추위를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의 마지막 이별을 기념하여 세운 케사리아 탑, 춘다가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터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다는 카쿠타 강에 내려 강물에 손을 담가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