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남편과 재결합 해도 될까요

2019. 1. 13. 13: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행복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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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남편과 재결합 해도 될까요


“이혼한 지 3년인데 아이가 자꾸 엇나가서
남편과 재결합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이에게 아빠가 필요한 것은
더 어릴 때입니다. 
 
이혼해서 3년이 됐다면
아이의 탈선은 아빠 때문이 아닐 수 있어요. 
 
아빠가 돌아와서
아이가 좋아질 수도 있지만
아이도 머리가 크고
남편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재결합하고 싶다면
내가 원해서 선택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지
아이가 달라질 것이다,
남편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기대하면 다시 실패할 수 있어요. 
 
재결합해서 잘 살려면
어떤 상황이든
잘 지켜보고 받아들이겠다는
자신의 마음 준비가 중요합니다. 



큰 꿈

 
“큰 꿈을 이루려고 무리하다 보니
자꾸 몸이 아프고 불안해져요.” 
 
‘대통령이 되겠다’하면 큰 꿈이고
‘장사하겠다’하면 작은 꿈일까요? 
 
그냥 꿈의 종류가 다를 뿐,
세상엔 큰 꿈도, 작은 꿈도 없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꿈에 합당한 노력을 하면 돼요.
느리든 빠르든 상관없이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데
왜 아프고 불안할까요? 
 
욕심 때문이에요.
빨리 이루겠다, 남들처럼 성공하겠다,
욕심을 내니 무리하고 아픈 거예요.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하겠다는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자기 일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성공한 거지,
이 일에 성공해야지, 성공 못 하면 어떡하나
불안해 할 틈이 없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하루하루 충실하고,
오늘도 내일도 충실하게 살면
불안해서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도시”

2019.1.11. 인도성지순례 7일째 (바이샬리)

바이샬리 Vaisali

오늘은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도시, 바이샬리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여성이 처음 출가한 곳이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린 곳,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은 곳,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운 곳,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100년 후에 제 2결집이 이뤄진 곳, 또 불멸 후 500년 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유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전 4시 30분, 새벽녘 일어나 짐 싸고 움직이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무심히 달려 나가는 버스 속에서 순례객들은 아침 예불을 올렸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기 전 마지막 여정은 영축산에서 시작해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에서 끝이 납니다. 순례객들도 어제 영축산에 이어 오늘은 바이샬리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비하르(Bihar)주의 수도 파트나, Patna

오전 7시쯤, 스님께서는 수신기를 통해 버스 안에서 푹 자고 있던 순례단을 깨우며 “지금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비하르(Bihar)주의 수도 파트나입니다. 비하르주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8천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뒤에 아쇼카 왕의 마우리안 왕조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작은 나루터였는데 당시 부처님께서 이곳에 큰 도시가 들어설 것이며 그 도시는 물의 재앙, 불의 재앙, 사람의 재앙, 세 가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후에 큰 홍수와 큰 불과 내분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라고 파탈리 푸트라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파트나는 야무나, 강가, 고그라, 간다키, 숀 이렇게 다섯 개의 강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다리가 시작되는데, 이 다리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입니다. 다리 길이가 11km 정도 됩니다. 누가 전봇대 개수를 한 번 세어보세요.” 라며 지금 건너고 있는 다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습니다.


차창 밖, 강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고요히 그 풍경 속으로 젖어들었습니다.

원숭이가 꿀 공양을 올린 곳, 원후봉밀터

원후봉밀터에 도착하자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이 곳에도 아쇼카 왕이 석주를 세웠는데, 아쇼카 석주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훗날 이 곳에 승원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성지에 비해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한편 원후봉밀터로 들어가는 길에도 구걸하는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보통 탑 앞에 자리를 잡았지만, 스님은 순례객들이 오랜 시간 햇볕 아래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할 것을 염려하여 다른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순례객들은 스님의 안내에 따라 탑이 보이면서 햇볕을 등질 수 있는 잔디밭에 자리 잡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무척 많습니다. 보통 순례객들은 라즈기르에서 쿠시나가르를 가는 길에 바이샬리를 잠시 들렀다가 가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햇볕을 등지고 스님은 햇볕을 마주한 채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도시, 바이샬리 Vaisali

부처님께서는 공화정을 구성해 나라를 운영했던 민주적인 바이샬리를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또한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풍요롭고 자유로운 도시였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조각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리는 장면입니다. 부처님과 제자 500명이 어느 날 대중의 공양을 받으려고 발우를 쭉 일렬로 놔두었어요. 그러면 신도들이 음식을 가져와서 그 발우에다가 넣거든요. 보통은 발우 뒤에 사람이 앉아 있는 상태에서 음식을 나눠주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어쨌든 발우만 쭉 놔두고 사람들은 없었대요. 그랬는데 일단의 원숭이 무리가 다가오더니 그 발우 500개 중에서 부처님 발우에만 꿀을 딱 넣었다는 거예요. 이걸 기적적으로 표현한 것은 동물도 부처님을 알아봤다는 뜻이죠.

그래서 부처님의 일생에서 기적을 묘사한 조각을 보면 이곳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꿀을 공양 올리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왕사성(라즈기르,Rajgir)는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사위성(쉬라바스티(Sravasti)는 천불화현(千佛化現)으로, 상카시아(Sankasia, 산카샤)는 부처님이 도리천(忉利天)에서 내려오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네 개의 도시는 다 약간의 기적적인 모습으로 표현이 돼 있습니다.

아무튼 이곳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원후봉밀을 꼽아요. 다른 것도 많겠지만 아마 그 당시의 사람들의 어떤 믿음하고 관계가 있겠죠. 아쇼카 석주나 이런 기념물은 다 그것에 대한 표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또 바이샬리는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내가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라고 선언하셨어요. 경전에는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코끼리가 덩치가 크잖아요. 고개를 한 번에 싹 돌리지 않고 천천히 돌리겠죠. 젊은 코끼리도 아니고 늙은 코끼리면 더욱 그렇겠고요. 묘사가 그렇게 돼 있어요.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부처님께서 바이샬리를 뒤로 돌아보고 ‘내가 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겠구나’라고 말씀하시고, 광장에 대중을 모아놓고서는 ‘나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어서 스님은 여성이 어떻게 최초로 출가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누구나 수행하면 해탈할 수 있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시에 인도 전체에서 제일 진보적인 도시였습니다. 굉장히 자유분방했어요.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5비구에게 교화를 하고, 야사 등이 출가하면서 비구가 먼저 생겼습니다. 그리고 야사의 부모님으로부터 재가 수행자가 나왔죠. 야사의 아버지로부터 재가 남자 수행자인 우바새가 나오고, 야사의 어머니와 부인으로부터 재가 여자 수행자인 우바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비구니 스님은 아직 안 나왔습니다.

부처님이 카필라 성을 방문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를 했지만 부처님의 부인이나 어머니 같은 분들은 법을 듣고 지혜의 눈은 열렸지만 여성 출가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출가를 할 수 없었어요.

그 당시 인도에서는 여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릴 때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 없는 여자가 딱 한 종류 있었어요. 유녀(遊女), 즉 기생이에요. 이 사람들은 주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비구니 제도를 허락했을 때 사람들이 기생과 제일 혼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비구니 성폭행 사례가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사회 시스템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비구니를 허용했다가 나중에 이런 문제 때문에 할 수 없이 비구 교단 옆에 둬서 보호를 받도록 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어쨌든 보호자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같이 살지는 않아도 옆에서 수행하게 한 거예요. 팔경법(八敬法)이라고 해서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비구에게 비구니가 약간 귀속되는 것 같은 시스템을 취하게 된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필요한 일이었어요.

그런 조치를 취하더라도 당시에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는 게 핵심이에요. 부처님이 성도하신 지 20년 정도 지난 뒤에 비구니 제도가 생겼습니다. 그때 부처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부처님의 아들은 이미 출가를 했고요.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혼자 남은 거예요. 부처님이 출가해버렸으니까 아들도 없죠. 손자도 출가해버리고 없으니까 남자가 없어요. 부처님의 전 부인인 야소다라(Yaśodharā) 공주도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죠, 남편인 부처님은 출가했죠, 아들도 출가했죠. 그러니까 여자만 남은 거예요. 게다가 그 당시에 석가족 젊은이들이 워낙 출가를 많이 하다 보니 석가족 여성 중에 이렇게 홀로 된 여성이 많았습니다.


남편인 정반왕(淨飯王, Śuddhodana)이 죽자 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Mahāprajāpatī) 부인이 출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경전 기록에 따르면 500명의 여성이 같이 출가하겠다고 부처님께 요청을 드렸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거절한 거예요. 그러자 또 가서 청했어요. 또 거절을 했어요. 불교에서는 대중이 세 번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는 문화가 있어요. 세 번 요청하면 거의 다 받아들이는데, 여성들의 출가는 세 번을 요청했는데도 세 번 다 거절하셨어요.

부처님은 카필라 성을 떠나서 바이샬리로 오셨어요. 그런데 이 500명의 여성들이 출가는 포기하지 않고 여자들끼리 모여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당시에는 아주 특이한 경우였죠. 그렇게 여기까지 따라와서 부처님께 또 요청을 했는데, 부처님이 또 거절을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울고 나왔어요. 여기까지 와서 청했는데 또 거절당하니까 너무너무 실망이 컸던 거예요. 그래서 아난다가 왜 그러는지 물으니까 부처님이 출가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얘길 했습니다. 그래서 아난다가 자기도 마음이 안 좋았기에 부처님께 가서 여쭸습니다. ‘부처님, 여성은 수행하면 해탈을 못 합니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부처님이 ‘능히 할 수 있다’ 이러셨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능히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물었어요. ‘그런데 왜 허용을 하지 않으십니까?’

본질적으로는 누구나 다 수행하면 해탈할 수 있는 건 맞아요. 그러나 당시 인도의 사회 시스템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삶의 자세는 장부가 되기는 부족했습니다.

그건 무슨 얘기일까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을 안 하고 남자한테 의지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거예요. 이런 태도는 부처가 되는 길의 최대 장애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아직 우리에게 그런 과거의 까르마가 남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어땠겠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불법을 이해한다고 해도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세가 안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경전을 보면 아난다가 부처님께 가서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부처님을 어린 시절부터 키운 공로가 얼마나 큰지 말씀드렸다고 해요. 태어나서 일주일 만에 생모가 돌아가시고 실제로는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다 키웠어요. 그런 공로를 다 얘기했더니 부처님께서 ‘여인의 출가를 허용하라’ 라고 하셔서 출가가 허용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성 출가를 바로 이곳에서 허용을 했어요. 이곳에서 허용을 한 이유는 제가 볼 때는 두 가지 같아요. 첫째, 여성의 출가라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바이샬리는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체 인도에서 그래도 허용한다면 이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다른 데는 불가능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도시가 진보적이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해요.

둘째, 여성들이 카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몰골이 형편없어지는데도 스스로 걸어왔다는 건 이미 주인 될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잖아요. 여기까지 왔다는 건 자기 준비가 어느 정도 됐다는 뜻이죠. 이 두 가지가 아마 부처님께서 고려하신 대상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곳 바이샬리는 최초로 비구니가 허용된 곳입니다. 그래서 사부대중(四部大 衆)이라고 하는 상가가 완전히 성립되었어요. 이것은 여성 해방의 효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자가 비구니가 됐다는 것은 ‘누구의’ 라는 것 없이 자기 이름을 자기가 갖는 거예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란 말이 없어지고, 자기 이름을 갖는 첫 시작이 된 거예요. 그래서 이곳 바이샬리는 여성 해방 운동의 효시입니다.


남방 불교에서는 비구니 제도가 그 이후에 없어졌어요. 그로부터 한 500년 뒤에 세속의 물이 들어오면서 비구니 제도를 없앨 때 핑계가 이거였습니다. 부처님이 여러 번 거절을 했는데 아난다 존자가 자꾸 요청을 해서 부처님이 할 수 없이 허용을 했다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래서 이걸 전부 아난다 존자에게 책임을 넘겼어요. ‘부처님은 원래 안 하려고 했는데 아난자 존자가 자꾸 졸라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거는 원칙적으로 부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핑계로 이 제도를 없앴어요.

그래서 지금 남방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순수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이건 거꾸로 돼 버렸어요. 붓다 당시에 여성 출가를 허용 안 했다 하더라도 시대가 바뀐 지금은 허용해야 할 텐데, 당시에 했던 것을 지금 아직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스리랑카 종정을 만나서 이 문제를 제기했어요. 여성들이 고등 교육을 받고 사회활동도 늘어나기 때문에 당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 안 하면 여성 엘리트 계층이 전부 기독교로 다 가서 불교가 여성을 차별하는 종교로 인식되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발생한다고요. 그랬더니 ‘그건 너희 한국이나 그렇지! 우리는 굳이 비구니가 안 돼도 괜찮다’라는 거예요. 남방에서도 여성이 출가해서 수행을 합니다만 비구니로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황색 가사를 못 입고 하얀 옷을 입어요. 머리도 깎고 절에서 공동체도 이루고 살고요. 수녀들처럼 미사집정권이 없는 거예요. ‘가사를 못 입을 뿐이지, 수행집단도 이루고 살 수 있고 수행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걱정 안 해도 된다’라는 거예요

여성 출가가 허용됐다가 테라바다(Theravada), 즉 소승에서 여성 출가가 폐지됐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여성 출가를 다시 복원했습니다. 그 결과 대승 불교권에는 비구니 제도가 남아 있고 소승 불교권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나라 비구니 스님들에게 다른 일보다 이곳 바이샬리에 비구니 사찰 하나 지어서 남방 불교 여성들이 여기 와서 계를 받도록 하라고 권했어요. 부처님이 여기서 비구니 제도를 처음 허용했으니까 그 역사적인 근거를 대서 여기서 비구니 계를 받으면 좀 저항이 적지 않을까 해서요. 제가 그냥 팍 지어버리려다가 안 했어요. 제가 지어버리면 칭찬은 들을지 몰라도 비구니들의 자립성에는 도움이 안 되잖아요.

아무튼 바이샬리는 이렇게 여성 출가가 허용된 성스러운 곳입니다.”

스님은 이외에도 암나팔리의 귀의, 자등명 법등명,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100년 뒤 열린 제 2결집, 유마거사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님께서 먼저 설명하신 내용의 경전을 순례단이 함께 독송하였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미리 듣고 경전을 읽으니 더 생생하며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스님의 세심한 지도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여성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기를 발원하며 스님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스님께서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공양 올리기를,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고, 하루 속히 통일이 이루어져 북한동포들도 우리와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우리 모두가 하는 일마다 자신감을 갖고 행복하게 수행자답게 살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순례단 또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함께 발원하니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탑돌이를 했습니다. 400여명이 노란 가사를 수하고 한 줄로 원후봉밀터를 에워싼 모습이 무척 멋있었습니다.


탑돌이까지 마치고 대중이 자리에 앉자 스님은 설명을 조금 더 보충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막연히 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태어나서 성장했고, 고뇌했고,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는 것은 그런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부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고뇌가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극복하고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법,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미소 띤 얼굴로 살아가는 법을 제시하신 겁니다.” 라며 성지순례를 하는 목적을 다시 상기해주었습니다.

순례단은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앉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도시락으로 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비슷한 반찬이지만 허기까지 보태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바이샬리 진신사리탑

진신사리탑 앞에 도착한 순례단은 4줄로 서서 가사를 입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으로 나아갔습니다. 먼저 온 순례팀이 진신사리탑을 에워싸고 기도를 하고 있어 정토회 순례단은 조용히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자 순례단도 탑을 참배한 후 한쪽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화장하고 남은 유골인 진신사리를 모신 탑입니다.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여덟 몫으로 나뉘어져 모셔졌습니다. 여덟 몫 가운데 하나가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 모셔졌습니다.

현재까지 8개가 있는데 딱 3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 이 곳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을 지금 여러분들이 참배를 하신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떠올리며 예불 공양을 드린 후 바이샬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며 고요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원후봉밀터와 진신사리탑 두 곳을 둘러보고 인근의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숙소 근처 바이샬리 왕궁 터로 바로 답사를 갔습니다. 저녁에 대중들과 다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로 적합한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답사해본 결과 똥밭도 아니고, 다함께 둘러앉기에 딱 좋은 공터였습니다. 순례객들은 숙소에 도착해서 저녁준비를 마친 후 왕궁 터로 모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다함께 둘러 앉아 노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우리 숙소가 절이니 절에서는 조용히 하고, 여기서 실컷 노세요.’며 ‘자발적으로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은 나와서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노래 부를 사람이 나와서, 밤새도록 놀아도 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해가 완전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이슬이 내리기 직전까지 함께 여흥을 즐겼습니다. 순례객들은 아쉽지만, 짧고 굵어서 좋았다며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어둠이 내리자 인도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추위를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의 마지막 이별을 기념하여 세운 케사리아 탑, 춘다가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터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다는 카쿠타 강에 내려 강물에 손을 담가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사귀어 줘서 고마워

연애를 하다 상대편이 떠났을 때,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에서 보면
슬픈 일이지요? 
 
하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남자, 한 여자만 사귀는 게 좋은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는 게 좋은지 생각해 보면,
상대가 떠난 건 좋은 일이에요. 
 
내 마음이 바뀌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
변덕쟁이에 신용 없는 사람이 되지만
상대가 싫다고 알아서 떠나주면,
양심에 걸림 없이 새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러니 가주는 게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그렇게 관점을 바꾸면,
‘그동안 사귀어 줘서 고맙다’,
‘가줘서 고맙다’ 할 수 있어요. 
 
이를 앙다물고 슬픔을 참는 게 아니라
관점을 바꾸면 ‘어, 좋네.’
‘나쁜 게 아니네.’ 저절로 가벼워져요. 
 

이 곳이 바로 오백 아라한이 모여 경전을 만든 곳이에요.”

2018.1.10. 인도성지순례 6일째(라즈기르)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가 생긴 라즈기르(왕사성), Rajgir

오늘은 부처님의 전법무대였던 라즈기르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법화경이 설해진 영축산이 있고, 부처님 당시 인도대륙의 최강국가인 마가다국의 수도로,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불멸 직후 제 1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나란다 대학이 있는 곳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출발한지 6일째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을 뚫고 전정각산을 뒤로 한 채 분주히 라즈기르로 출발한 시각은 새벽 5시였습니다. 떠나는 버스 앞에서 한국인 활동가들과 인도인 활동가들이 배웅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순례하는 라즈기르(Rajgir)는 왕사성이라고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곳으로 원래 이름은 라자그라하로 ‘왕의 집’이란 뜻입니다. 왕사성은 부처님 당시 북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년의 요새였습니다.

이 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에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한 곳이었고, 수행하시는 부처님의 청정한 모습을 보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면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부탁한 곳이기도 합니다.

제띠안, Jethian

버스에 타자마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아침예불을 한 후 한 시간 반 쯤 달려 제띠안에 도착했습니다. 제띠안은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곳입니다.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귀의하던 날 뿐만 아니라 빔비사라 왕과 부처님 사이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빔비사라 왕에게 무언가를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경전을 보면 늘 빔비사라 왕이 답답해서 부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빔비사라 왕은 젊은 왕자 시절에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왕이 되는 것입니다. 왕자라고 모두 다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빔비사라 왕의 경우 다른 왕자 10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왕은 한 사람이지만 왕비나 후궁은 많으니까 수많은 왕자들이 있고 그 왕자들 중에 한 사람이 왕이 되는 거예요. 둘째, 자기 나라에서 붓다가 출현하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가 붓다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넷째, 붓다의 법을 듣고, 다섯째, 그 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으니 자기가 올리는 공양을 받아달라는 청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왕궁의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왕은 성 밖에 있는 대나무 숲을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제안했고, 부처님께서는 이 청은 받아들이십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불교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竹林精舍)’예요. 절이라고 해서 무슨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이 머물 수 있는 숲을 제공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빔비사라 왕이 이때 부처님을 처음 뵌 것은 아니었어요. 부처님께서 성도하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로 수행을 하면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할 때였는데, 왕사성에서 걸식을 하러 걸어가는데 싯다르타 태자의 자세가 늠름하고 여법하니까 왕이 ‘저 수행자가 누구냐’ 하고 가서 인사를 나눕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북쪽 석가족 출신입니다.’
‘왕족이 출가했다는 분이 당신이군요.’

그리고는 빔비사라 왕이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출가사문이 되는 것은 낭비입니다. 당신의 재능을 나와 함께 사용하는 것은 어떻겠소?’ 하고 제안합니다. 당시 마가다국은 지금의 미국 같이 큰 나라였고, 카필라바스투는 싱가포르 같이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마가다국과 같이 큰 나라를 같이 다스리자는 제안이었는데, 부처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왕은 혹시 같이 다스리자고 해서 거절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군대를 줄 테니 이웃 나라를 공격해서 자기만의 나라를 만들어서 다스리는 것을 제안합니다. 부처님은 그것 역시도 거절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제안으로 자기가 왕위에서 물러날 테니 자기를 대신해서 마가다국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왕이시여, 어떤 이가 가래를 뱉었는데 옆 사람이 더 큰 가래를 뱉는다하여 그 가래를 주워 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자기 나라의 왕위도 싫다고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나라의 왕위를 탐하겠으며, 또 무엇을 위해 그 이웃 나라를 침공해서 빼앗으려 하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즉 왕위를 가래에 비유해서 표현하셨는데, 이건 이미 부처님의 수행에 대한 관점이 단호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때 빔비사라 왕은 ‘저 수행자는 분명 위대한 도를 이룰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당신이 도를 이루면 반드시 나에게 설해 달라.’ 라고 청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7년 후에 이곳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음 순례 장소는 영축산입니다. 영축산으로 가는 길에 부처님 당시 마차바퀴 자국이 돌에 선명히 남은 장소를 둘러보았습니다.


영축산, Gridhrakuta

영축산은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이 설해진 곳이고 염화시중의 미소가 행해진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영축산을 오르는 길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길이라고 하여 빔비사라 왕의 길이라고 불립니다. 왕이 마차로 산 아래까지 와서는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500미터 정도 산으로 오르다가 다시 100m 정도 걸어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오르는 길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영축산 가는 길 초입에는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바카의 망고원이 있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가기 시작한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헤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다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의 응급치료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고,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육방예경은 부처님 당시 어리석은 젊은이를 깨우치기 위하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주인과 하인 관계에서 각각 가져야할 마음자세를 가르친 이야기라고 합니다. 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도 이 육방예경을 바탕으로 주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


영축산 정상에는 신기하게도 여러 크고 작은 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곳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 등으로 불렸고 참배도 했습니다.

또한 산의 정상부근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도 있었습니다.


영축산 정상에는 독수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이 인도말로 ‘Gridhrakuta 그리드라쿠타’ 즉 독수리봉이라고 불리우는데,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영축산의 정상이 좁고 먼저 도착한 다른 팀이 기도를 하고 있어서 정토회 순례단은 모두 정상 바로 밑으로 차례대로 앉아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읽을 경전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법화경(法華經)’ 서분(序分)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열반경(涅槃經)’의 시작 부분입니다. 열반경의 시작 부분은 이렇습니다. 부처님이 이곳에 계실 때, 아자타삿투 왕이 대신을 보내서 지금 밧지국을 침공하려고 하는데 승리할 수 있겠는지를 문의하는 장면입니다. 아자타삿투 왕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인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제자다 보니까 아들인 아자타삿투는 부처님에게 굉장히 적대적이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살해하려는 데바닷타와 공모를 해서, 아들인 자기는 아버지인 왕을 죽이고 왕이 되고,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해치고 자기가 부처님이 되려는 흉계를 꾸몄습니다.

그런데 아자타삿투는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데바닷타는 성공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자타삿투가 부처님한테 크게 참회를 하고, 열성적으로 불법을 옹호하는 왕이 됐습니다. 그래서 뒤에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제1결집을 할 때 그 후원을 전부 아자타삿투 왕이 하게 됩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곳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부처님 당시에 설한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독송 후에는 예불을 올렸습니다. 400여명이 읊는 예불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도 400여명의 대중이 가사를 수하고 예불 올리는 모습에 발길을 멈춰서고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천이백대중이 함께 하였다고 하니 굉장했을 것 같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에서 바로 그 영산이 이곳입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설법을 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예불을 하면서 “영산당시” 라고 읊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영축산을 내려오는 길에 영축산 정상이 잘 보이는 곳에서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

버스로 5분쯤 걸리는 곳인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감옥터는 왕사성의 내성 맨 끝에 위치한 곳으로 감옥터만 남아 여기가 감옥이었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해가 쨍쨍해 살짝 덥기도 했습니다. 순례단은 조별로 정렬하여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듣고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스님은 빔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과 감옥에 갇혀 굶고 있는 왕에게 음식을 몰래 전하려던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골방에 갇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의 위로를 청하고, 부처님은 그런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관무량수경을 설하신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왕이 빔비사라(Bimbisāra) 왕입니다. 빔비사라 왕의 부인은 위제희 부인입니다. 당시 인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이니까 권위가 굉장했겠죠. 그런데 이 왕은 제띠안(Jethian, 제티안)에서 부처님께 귀의해서 왕 중에서는 부처님께 가장 먼저 귀의한 왕이에요. 부처님 성도 후 1년 안에 귀의한 사례니까 초기 신자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왕은 모든 걸 다 갖췄는데 아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게 늘 고뇌였습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온갖 기도를 하고 노력해도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나이가 마흔이 넘어갔을 때 어떤 선인을 불러서 물어보니까 3년 후에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옛날에 여자들은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아기 낳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왜 3년이냐고 물어보니 왕자로 태어날 사람이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하는 선인인데 그 수행자의 수명이 아직 3년 남았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수명을 마치면 왕자로 태어날 거라고 했어요.

왕이 진짜인가 싶어서 사람을 보내서 그 선인에게 가서 확인을 해봤어요. 그 사람도 ‘내가 죽은 다음에 빔비사라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걸 확인하니까 왕이 빨리 아기를 갖고 싶어서, 다시 사람을 보내서 그 선인에게 ‘빨리 죽어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거부를 했어요. 옛날에는 왕명을 거부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왕명을 거역했다고 죽여 버렸어요. 죽을 때 이 선인이 ‘내 반드시 원수를 갚으리라’ 이렇게 말하고 죽었어요.

왕이 그 얘기를 듣자 불안해졌어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부인이 아기를 딱 갖게 됐어요. 왕은 하루는 불안하고, 하루는 아들을 갖게 돼서 기뻐하고, 하루는 불안하고, 하루는 기뻐하며 지냈어요. 이렇게 해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왕은 이 아기를 원수라고 생각하고 아기를 2층에서 밑으로 집어던졌어요. 그런데 애가 안 죽고 손가락만 하나 딱 부러진 채 살았어요. 그러자 또 생각이 바뀌어서 아기를 끔찍이 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키운 아이가 아자타삿투(Aātaśatru)예요. 이 아들이 커서 19세 때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아버지를 이 감옥에다가 가두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직접 칼로 죽이지는 못하니까 감옥에 가둔 채 굶겨 죽였어요. 일체 음식을 못 주게 엄명을 내린 거예요.

그 당시에는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는 건 다반사였고, 아버지를 죽이고 왕 되는 경우도 허다했나 봐요. 부처님이 출가할 때 빔비사라 왕이 ‘부왕을 위해서 출가했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경전에 나옵니다. ‘차마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못 되니까 아버지더러 오랫동안 왕을 하시라고 아들이 출가를 한 거 아닌가’ 이런 뜻으로 질문한 거예요. 당시는 아들이 못 기다려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되니까 위제희 부인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왕이고, 자기 아들이 왕이 될 사람이었는데, 아들이 이런 쿠데타를 일으키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던 위제희 부인이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된 거예요. 여러분들은 남편이 왕이고 자기 아들이 앞으로 왕이 될 그런 복도 못 누리지만, 그 대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불행도 안 겪습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지 알아야 해요. (모두 웃음)


이렇게 딱 뒤집어지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됐어요. 왕권을 두고 부자가 싸우면 하나는 죽어야 하잖아요. 남편이 승리하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들이 승리하면 자기 남편이 죽는 곤경에 처한 겁니다. 그래서 아들 몰래 몸을 깨끗이 씻고, 몸에다가 꿀을 바른 뒤 거기다가 밀가루 반죽을 바르고서는 남편 면회를 갔어요. 왕이 엄명을 내렸다 하더라도 위제희 부인은 현왕의 어머니니까 간수가 제제를 못해요. 그렇게 가서는 몸에 발라온 꿀 반죽을 떼서 남편을 먹이고, 장신구에 포도주를 담아가서 준 거예요.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서 아자타삿투가 ‘이제 아버지가 죽었나?’ 싶어서 와보니까 안 죽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감옥지기가 말하길, 위제희 부인이 와서 먹인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나머지 칼을 빼들고 어머니를 죽이려고 들었어요. 역적의 편을 들었으니 역적이라는 거죠. 그때 지바카(Jivaka, 지와카)라는 대신과 월광이라는 신하가 막아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 전 역사를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는 케이스는 수천, 수만 건이 있지만, 제 어미를 죽인 케이스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죽인다면 이것은 왕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손으로 칼을 잡고 말렸어요. 그 말은 이런 짓을 하면 왕으로 인정 못 하겠다는 뜻이죠. 왕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를 골방에 가두었어요. 요즘 말로 하면 가택연금을 시킨 거예요.

갇힌 신세가 된 위제희 부인은 자신의 신세타령을 합니다. 아자타삿투가 데바닷타(Devadatta)와 결탁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데바닷타는 부처님의 친족입니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에요. 위제희 부인은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아들을 낳고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저런 친족을 두게 됐느냐’ 이렇게 원망과 하소연을 하면서 이런 고통이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게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즐거움이 얼마나 큰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 고(苦)든 락(樂)이든 이런 세상은 싫다’ 라고 하면서 괴로움이 없는 즐거움, 즉 열반의 세계를 바라게 됐어요. 거기에 응답하셔서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입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다 보면 위제희 부인이 ‘그런 세계를 설해주십시오’ 라고 하기 전에 막 원망을 합니다. 부처님한테 그렇게 신세타령이며 원망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장면이 넘어가는데, 그 장면 전환에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장면 전환이 일어났을까요? 위제희 부인은 왜 이런 아들을 두게 됐는지를 생각 안 한 거예요. 빔비사라 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남을 죽였잖아요. 위제희 부인도 아들을 얻기 위해서 거기에 동조를 한 거죠. 또 아들은 전생의 자기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버지를 죽이죠. 이게 이 세상이라는 거예요. 그걸 깨닫고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이런 고통이 없는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청해서 ‘관무량수경’이 설해졌습니다.

이런 고통이 없는 세상이 극락세계인데, 그렇다고 ‘관무량수경’은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간다는 식의 내용은 아니에요.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명상에 들어가 극락에 이르는 16관법이 설해져 있는 경입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라고 합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었다면 위제희 부인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헤아려 봅니다.


명상을 마치고 앉은 그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맛있게 먹은 후 다음 장소인 죽림정사로 떠났습니다.

초기 사찰의 원형, 죽림정사 Venuvana Vihara

5분쯤 달려 죽림정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콧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를 먼저 반겼습니다.

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부처님과 1,000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보시한 곳으로 초기 사찰의 원형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죽림정사로 들어서자 과연 그 이름에 걸맞게 대나무 숲(죽림)이 우거져있습니다. 땅에서 하나, 하나 솟아 있는 한국 대나무 달리, 인도의 대나무는 다발로 우거져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예불과 공양을 올리고 난 후 스님께서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 등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이 죽림정사입니다. 빔비사라 왕은 제띠안에서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를 청했지만 부처님께서는 왕궁에서 공양하는 것을 승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지나왔던 북문 밖의 여기에 있는 자기 소유의 대나무 숲을 수행자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기증을 했습니다. 북문 밖이니까 성 밖이죠.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대나무 숲에서 어떻게 정진을 하나 싶지만 그렇지 않아요. 여기는 대나무가 밀집돼서 휘어지기 때문에 느티나무 밑처럼 큰 그늘이 지고, 햇볕이 들지 않아 굉장히 그늘이 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을 가까이에서 머무셨을 때는 주로 망고나무 숲 아니면 대나무 숲에서 머무셨어요. 그래서 경전에 ‘베누반 바나’ 혹은 ‘벨루 바나’라고 많이 나옵니다. 망고나무 숲은 ‘암나 바나’예요. ‘암나’는 망고를 가리키는 인도 말입니다. 부처님이 동네 어귀에 머무르실 때는 주로 암나 바나에 많이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천 명의 대중이 이곳 죽림정사에서 머무르면서 때가 되면 왕사성에 들어가서 탁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부처님의 5비구 가운데 맨 마지막에 깨달은 사람이 앗사지(Asvasit 아슈바지트)인데, 앗사지 비구가 걸식을 하면서 걸어갈 때 그 걸음걸이가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지도 않고, 딱 한 발 앞을 보면서 천천히 걷는 모습이 너무나 여법했어요. 그 모습을 사리푸트라(Śāriputra)가 봤습니다.

사리푸트라는 육사외도, 즉 당시 여섯 명의 대스승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산자야(Sanjaya)의 제자였고 목갈라나(Moggallāna)와 친구예요. 여기 나란다(Nālandā, 나란타) 대학이 있는 곳이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목갈라나와는 고향 동문이에요. 둘 다 브라만 출신이어서 아주 계급이 높은 사람이었고요. 산자야의 제자인 동시에 자기 제자도 각각 100명씩 거느릴 정도로 당시에 꽤 유명한 수행자였습니다. 또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으십니다. 훨씬 선배 되시는 분이에요.

이런 분이 앗사지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너무 여법해서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가르침을 폅니까?’ 라고 물었어요. 스승으로서 존경해서 물었던 거죠. 그러자 앗사지가 ‘저는 타타가타(Tathāgata), 여래(如來)의 제자입니다’ 라고 답했어요. 붓다의 제자라는 뜻이죠. 이 분이 위대한 스승인 줄 알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자기는 붓다의 제자라고 밝힌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저한테 묻지 말고 스승에게 찾아가서 물어보십시오. 이 북문 밖의 죽림정사에 계십니다’ 라고 했어요.


사리푸트라가 ‘그 스승이 가르친 말씀 중 한마디만 일러주십시오’ 라고 청하니까 앗사지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하는 연기법(緣起法)을 일러줬습니다. 볏단을 세울 때 묶어서 아래를 벌리고 두 단이 서로 의지하도록 해서 세우잖아요. 이 볏단에 비유해서 ‘마치 볏단이 서로 의지해서 서 있듯이 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해서 존재한다’ 하는 것을 설명했어요. 다른 건 다 있던 용어지만 연기법은 부처님이 처음 설하신 설법입니다. 그 전에는 아무도 모르던 얘기예요. 그걸 듣자 사리푸트라는 굉장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자기가 평소에 갖고 있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확 풀어진 거예요. 그래서 스승이 어디에 계신지를 확인하고, 찾아뵙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자기의 수행처소로 돌아갔습니다.

왜 돌아갔을까요? 목갈라나와 평소에 약속하기를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나누자’ 이렇게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밝은 얼굴로 수행처소로 돌아가니까 목갈라나가 사리푸트라의 얼굴 표정을 보더니 ‘무슨 좋은 일이 있냐?’ 하고 물었어요. ‘그렇다, 좋은 일이 있지’ 라고 하면서 자기가 들은 얘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우리 같이 그 대스승을 한번 찾아가보자’ 이렇게 의기투합을 했는데, 그때 ‘야, 우리만 갈 게 아니라 우리 스승님도 모시고 가자’ 이렇게 됐어요. 산자야를 생각해서 모시고 가자고 한 거죠. 스승에게 인사하면서 ‘이런 훌륭한 큰 사문이 나타났는데 스승님도 저희와 함께 그분에게 가서 법을 청해 들읍시다’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산자야의 반응이 시큰둥했어요. 이 사람은 회의론자거든요. 그래서 ‘이것도 믿을 수 없고 저것도 믿을 수 없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스승이 가지 않겠다고 하니까 두 분이 스승을 포기하고 그냥 갔어요. 자기의 두 제자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산자야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렇게 해서 두 분은 각자 자기 제자 100명씩을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뵙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각자 100명씩 데려왔으니까 1,000명의 비구에다가 또 200명이 더해진 셈이에요. 결국은 1,200명이 된 거예요.


이 일이 불교 교단의 교화 첫 해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교단의 최장로, 즉 선배들이에요. 그래서 ‘장로 1250인’이라고 부릅니다. 앞에 60명이 또 있었잖아요. 우리가 예불할 때 부르는 ‘천이백 제대아라한(千二百 諸大阿羅漢)’이라는 말도 여기서 생겼습니다.

사리푸트라는 지혜제일(智慧第一), 목갈라나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해요. 이 두 분이 차례로 1대 제자, 2대 제자입니다. 세 번째 제자가 마하카시아파(Mahā Kāsyapa, 마하가섭)입니다. 그 분도 역시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있을 때 귀의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죽림정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명상을 하며 바로 여기에서 부처님과 제자들도 명상을 했다고 생각하니 부처님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죽림정사 연못 한 켠에서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바로 나란다 대학으로 이동했습니다. 대중들은 더 있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도반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죽림정사를 나왔습니다.

나란다 대학, 박물관

나란다 대학은 불교를 가르치던 학교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교사만 천오백명이였고 학생은 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현재 발굴된 것은 10분의 1도 안된다고 하니 당시에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팀을 나누어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았습니다. 스님을 오래전부터 뵈었던 인도인 가이드는 매우 반가워하며 한국말을 섞어서 재미있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이고 온갖 지혜가 넘쳐났을 곳을 무슬림이 침공해서 모두 불 태워버렸고,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탔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또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스님들이 대중과 멀어지면서 내부적 멸망이 먼저 있었다는 설명도 인상 깊었습니다.


제 1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오늘의 마지막 순례 장소는 칠엽굴입니다. 칠엽굴로 가는 길은 ‘온천정사’라는 목욕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온천정사의 맨 위쪽은 높은 카스트가 목욕하지만 맨 아래쪽의 더러운 물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목욕을 한다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다시 한 번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다가오는 군 생활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늘 지금을 힘들어하고
지나면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중, 고등학교 때는 대학생을 부러워해요.
대학생이 되면 취직한 사람이 부럽고요. 
 
군대 생활이 쉽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지금 여기
군대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보세요. 
 
체력을 기른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세끼 밥을 꼬박꼬박 먹는 습관을 만든다. 
 
그 목표만 이뤄도 얻는 게 많아요.
야행성 습관을 고치고
군것질로 망가진 위장이 튼튼해지고
몸이 건강해집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기간
이왕이면 이롭게 활용해 보세요.  
스님은 지난 25년 동안 기운이 빠지신 적은 없나요?”

2018.1.9 인도성지순례 5일째(수자타 아카데미 개교기념식)

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5일째로 오전에는 수자타 아카데미 개교 25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하는 날입니다.

전정각산의 새벽

오늘도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5시에 수자타 아카데미 쁘락보디홀에 모여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400명의 대중이 가사를 걸치고 함께 하는 새벽 예불은 참으로 장엄하고 엄숙합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전정각산에 오르기 위해 6시 15분에 교문 앞에 모였습니다.


어제 순례길 행군으로 피곤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라고 공지하였지만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동참하였습니다.


스님을 따라 산을 오르니 꽤 큰 웅덩이가 보이는데 물이 뿌옇습니다. 스님께서 물 웅덩이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십니다.


“이 곳이 전정각산에서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입니다. 고오타마의 샘이라고 불리는데 부처님도 이곳에서 물을 드셨다고 합니다.”

조금 더 가니 바위로 둘러싸인 평안해 보이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은 바람을 막아주어서 안온합니다. 아마도 겨울에는 여기서 주로 부처님이 머무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와 저기에 탑터가 2개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명상하던 자리로서 기념탑을 세웠던 곳입니다. 그럼 여기서 명상 하겠습니다.”

스님은 몸소 바위에 자리를 깔고서 자세를 바로 하시고 간략하게 명상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함께 명상을 하셨습니다.


“각자 편안한 자세로 앉습니다. 우선 자세부터 편안히 하고, 한 번 앉으면 움직이지 않도록 합니다. 잘하려고도 하지 말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셔야 합니다. 긴장을 풀어야 해요.

이제는 마음을 코끝에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려 봅니다. 즉,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지 체크해보는 거예요. ‘호흡하고 있구나’ 하면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 나가는 줄 알아차리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편안한 가운데 마음을 코끝에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허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춥다’ 이런 몸의 감각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이나 생각,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지금 여기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이제 죽비를 치면 모든 동작을 멈추고 호흡에만 집중해봅니다.”


대중이 모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명상을 하는 가운데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불어옵니다. 부처님께서 정진하셨던 이곳에 2600여년이 지나 그 제자인 정토행자들이 명상을 한다고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새롭습니다. 조용하고 편안한 가운데, 순례객들을 따라 온 동네 개들도 한 쪽에 자리 잡고 명상을 하는지 잠을 자는지 다소곳이 눈을 감고 곁에 있었습니다.

명상이 끝나고 스님은 잠깐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이곳 전정각산에서 이곳과 같이 저희가 현재까지 발견한 탑터는 16곳입니다. 여러분들 앉은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벽돌이 있는 터가 두 곳 보입니다. 산 능선 위에 올라가면 그저께 올라간 유영굴 뒤편으로 무너진 탑터가 두 곳 있습니다.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가면 전정각산의 정상 부근에는 탑 터가 5곳이 있습니다.

능선에 7곳, 이곳에 2곳, 학교 앞에도 2곳이 있고, 샘터에 탑이 1개, 유영굴 밑에 3개, 제 2 유영굴 1개가 있습니다. 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벽돌 무더기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이 산에 탑터가 아니면 벽돌이 있을 일이 없잖아요. 그렇게 현재 16군데 탑 터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 중에 부처님이 산에 계신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활동하셨던 곳이 주로 힌두스탄 대평원 유역이기 때문에 산지는 많지 않고, 그나마 산이라면 이곳 전정각산과 라즈기르(왕사성) 주변입니다. 이곳이 데칸 고원에서 힌두스탄 평원으로 이어지는 끝자락 지역입니다. 힌두스탄 평원에 들어서면 평원이 계속 되다가 히말라야로 연결됩니다.

자, 그럼 이것으로 마치고 내려가겠습니다. 이렇게 한가한 아침을 보내는 건 오늘 밖에 없어요. 학교에 하루 머무니까 아침에 산책도 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일어나서 천천히 내려가겠습니다.”

스님이 앞장서시고 서둘러 길을 내려왔습니다. 아침 식사 후 8시 30분부터는 인도 JTS에서 봉사하시다가 무장괴한의 침입으로 돌아가신 설성봉 거사님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빛으로 돌아오소서

먼저 향상 법사님이 추모의 글을 낭독했습니다.

"설거사님! 부를 때마다 안경 너머 작은 눈은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채비를 갖춘 선한 눈매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옅은 웃음으로 대답하셨죠.

‘세상살이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 어디 살든 나는 정토행자이고 정토행자로 살다 부처님 법 전하며 살다 죽으면 되지...’

언젠가 옥상에서 전정각산을 바라보고 허허 웃으며 하시던 말씀. 지지리도 못 살아 인간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땀이 많으신 분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인도 땅을 밟으심은 바로 그 이유였습니까? 중학교 건물 콘크리트 친다고 인도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대야에 시멘트를 이고 나르던 당신의 모습. 눈물이 납니다. 당신의 모습이 수자타 아카데미 전정각산과 더불어 더 큰 무게로 가슴을 누릅니다. 당신의 크나큰 사랑, 남아 있는 저희들이 이루겠습니다. 설성봉 거사님! 부처님 고행하신 전정각산 바람 따라 네이란자라강 흐르는 강물 따라 몸 편히 누이시고 고이 가소서! 빛으로 돌아오소서!’


그리고 무변심법사님의 염불과 함께 정성스럽게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척박한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다가 무장 강도의 총격에 숨진 거사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부디 왕생극락하시고 빛으로 돌아오소서’ 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재를 지내고, 설 거사님의 뜻을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서 인도JTS를 잘 가꾸어 나가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개교기념식

추모식을 하는 동안에 학교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부다가야의 외국절 스님들 그리고 비하르주의 농림부장관과 이 지역 내빈들이 25주년 개교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총 2600여 명이 모인 큰 행사였습니다.

요란한 축하 음악과 함께 기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는 인도어로 진행되었고 오늘을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한 학생들의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연 하나 하나 신나고 재미있고 멋졌습니다.


먼저 귀여운 유치원생들이 반짝이는 무대의상을 입고 곰 세 마리에 맞춰 앙증맞은 춤을 선보였습니다. 정말 다채롭고 인상적인 인도 공연을 보는 듯 했습니다. 때로는 인도 음악에 때로는 한국 전통 음악에 맞추어서 신명나게 즐기는 모습에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BTS의 음악에 맞춰 인도 남자 아이들이 멋진 댄스를 추자 한국인들의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아이들은 평소에 갈고 닦은 태권도 실력도 뽐냈습니다. 한국말로 “하나”, “둘”, “태권” 하는 소리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얼마 전 콜카타에서 열린 국제 태권도대회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탔습니다. 다시 한 번 스님께서 직접 시상해주었습니다.


저렇게 멋지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에서 어제까지 관광지에서 보았던 구걸하는 인도 아이들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정성으로 교육한 힘은 컸고 기적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사이사이 둥게스와리 마을 사람들의 공연도 있었습니다. 두르가푸르 마을의 어머니들은 ‘스님이 오셔 마을이 좋아져서 기쁘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고, 까나홀 마을에서는 인도 특유의 구수한 노래와 함께 연극을 하며 ‘아동 노동 금지, 아동 조혼 금지, 지참금 금지’, ‘깨끗한 인도 만들기’ 등의 주제를 표현했습니다.


한참 신나게 공연을 즐기고 드디어 스님께서 감사의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먼저 개교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을 하나 하나 언급하면서 감사의 말씀을 하는데 학생들을 제일 먼저 말씀하면서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오랫동안 지원해 주셨던 미얀마 스님을 위시하여 근처의 베트남, 방글라데시, 티벳 스님들 그리고 지역 유지들 그리고 학교를 세울 당시 땅을 보시하였던 이곳의 가난하고 헐벗은 동네사람들, 하나라도 빠질세라 스님의 세심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오늘은 수자타 아카데미 25주년 개교기념식입니다. 학교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입니다. 지난 25년 동안은 수자타 아카데미가 지금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아이와 같았다면, 이제는 성년이 되었으니까 앞으로 마을과 학생들을 위해 할 일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5년 전 이곳 둥게스와리 유영굴 근처에서 아이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이 학교를 짓게 되었습니다. 처음 학교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기증해주신 두르가푸르 사르빤지 외 10명의 어르신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가야에 있는 청년들과 선생님들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대중 박수)

아침 조회 때 아이들이 쓰러져서, 의사선생님을 초청해서 아이들의 건강을 검진했더니 의사선생님이 ‘이 아이들에게는 약보다 우유 하나, 바나나 하나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영양실조 상태입니다’라고 해서 그 때부터 급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좋은 조언을 해주셨고 그 이후에도 아이들과 주민들의 건강을 늘 돌봐주시는 닥터 B.K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학교가 시작되었을 때 석가족의 청년들이 와서 학교선생님으로서 활동을 해주셨던 YBS의 많은 활동가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YBS의 회장인 수바스씨가 이 자리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마을마다 유치원을 짓는데 유치원을 세울 수 있도록 동네마다 땅을 기증해주신 분들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땅을 기증해주신 분들 모두 한 번 일어나주세요. (대중 환호와 박수)

일일이 다 거명할 수 없지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노력에 의해서 오늘의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시작되고 운영되도록 한국에 계신 많은 분들이 후원해주셔서 이 학교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그동안 후원해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곳 둥게스와리 지역은 지난 25년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25년 전에는 문맹률이 거의 100%에 가까웠는데, 현재는 14-25세 사이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보면 언어독해율이 80%에 가깝습니다. 그동안 청년들은 거의 대부분 글을 알게 되는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인도 전 지역의 평균 언어독해율인 64%에 비한다면 80%는 평균을 넘어서는 수치입니다.

동네마다 유치원이 있어서 이제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나아가 수자타 아카데미 학생들의 출석률은 90%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 동네에 왔을 때에는 결핵 환자가 많았습니다. 현재 12,000여명이 사는 둥게스와리 지역에 결핵 환자로 관리 받고 있는 환자 수는 3명에 불과합니다. 아기를 낳다가 산모가 죽거나 어린 아이가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사고도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가만히 있는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변화를 위해 우리가 노력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들이 배우고 자라듯 주민 여러분들도 변화를 위해 무언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6년간 수행하신 곳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오신 주민 여러분과 학생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우리가 잘 사는 마을을 함께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부유한 건 아니더라도 누구나 와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을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대중 박수)


아이들은 재능이 많습니다. 조금 전에 보셨듯이 태권도를 배웠는데 캘커타 국제대회에 나가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나 땄습니다. 춤, 음악 등 많은 부분에 나가서도 수상을 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 아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도와야겠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함께 수자타 아카데미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대중 박수)

오늘 점심식사를 준비했으니 잘 드시고 조심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참여해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공연에서는 아이들이 법륜스님과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무대 위로 올라와서 꽃목걸이를 걸고 “세상을 함께 치유하자”는 노래를 부르며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


학교를 세우신 스님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스님이 없었다면 지금도 굶주림에 허덕이며 구걸을 하고 있었을 아이들인데...’ 순례객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힙니다.


성지순례객들도 오늘은 인도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접시 위에 뿌리, 사부지, 미타이 그리고 오렌지를 담아서 야외 잔디밭에 조별로 올망졸망 모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늘은 숟가락도 사용하지 않고 인도인들처럼 손으로 식사를 해봅니다.

점심식사 후에는 학교 옆 마을인 자그디스푸르와 두르가푸르 마을 주민 300여 가구에 쌀을 배분했습니다. 쌀을 한 자루씩 받은 주민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이어서 오후에는 직접 마을 방문을 하였습니다. 약 400명의 순례객들이 각각의 마을로 나뉘어져 실제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방문한 마을의 아이들은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때로 몰려와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네는데 사탕이나 초콜렛을 원하는 듯 했습니다. 안내해주는 법사님이 “아이들에게 자꾸 무엇을 주지 마세요.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지 마시고 의젓한 청년으로 자라게 해주세요.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희 JTS에서 균등히 잘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얘기해주시는데 JTS가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왔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접 들여다 본 방 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깜깜한지 놀라웠고 염소나 닭과 함께 생활해서 염소 똥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사는가 싶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사진 촬영에도 응하고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였습니다.


순례객이 직접 방문한 집은 모두 마을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래도 JTS의 염소은행에서 분양받은 염소 한 마리를 열 마리까지 늘리기도 하고, 아이들 모두가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집 방문 후에는 인도JTS에서 제공하는 구호물품을 함께 나눠주었습니다.

방문 후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기준에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지만 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보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비위생적이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겠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녁 식사로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저녁 예불 후 강당에서 차량별로 한 명씩 대표로 소감 발표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과 더불어 둥게스와리의 발전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스님께서는 각 조별로 나온 의견들에 대해 정리말씀을 해주시고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중 한 가지 질문과 대답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JTS 구호활동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그런 활동에 참여하면 주변에서 ‘그런 활동을 해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스님께 배운 대로 그 과정에서 이미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다만 할 뿐이다’ 이렇게 답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려오는 뉴스들에서 대기업 분식회계처럼 굉장히 이슈가 될 줄 알았던 문제가 그냥 묻혀가고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는 상황을 접할 때마다 2600년 전 부처님 당시랑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운이 좀 빠집니다. 혹시 스님은 25년 동안 활동을 하시면서 기운이 빠지신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제가 어떤 관점을 놓치고 있는 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빈부격차는 현대 사회에서 문명의 발달 시스템 상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은 갈수록 더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겁니다. 벌어진다 해도 벌어지는 속도를 늦추고, 그 다음에 멈추게 하고, 나아가서 개선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그것은 우리들의 사회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가 있겠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노력을 하면 벌어지는 속도를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노력하면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속도가 연 3퍼센트인데 노력을 안 하면 연 5퍼센트가 된다면 비록 벌어지더라도 노력을 해야 하겠죠.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니까요.


기후변화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환경운동을 해도 기후변화는 일어나고, 환경운동을 안 해도 일어나요. 우리가 그나마 환경운동을 하게 되면 예를 들어 100년에 1도 오를 게 100년에 0.5도 오르게 한다고 합시다. 이럴 때 ‘그래봤자 못 고치지 않았냐? 그래도 어차피 온도는 오르지 않았냐!’ 이렇게 말하는 게 극단적 주장이에요. 그러니 내버려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 인간이 할 일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기후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제일 좋겠지만, 기후변화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방치하는 것보다는 그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면 그만큼 사람들의 고통이 덜어집니다. 수행자는 ‘결과가 된다, 안 된다’ 하는 관점에서만 보면 안 되고, 조금이라도 될 수 있으면 해야 하는 겁니다.

인도 전체 인구가 얼만데 학생 1600명 되는 수자타 아카데미 하나 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한다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저 팽개치는 것보다는 다만 10명이라도, 혹은 다만 100명이라도 우리가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딱 이 100명만 가지고 성과를 내서 잘 살도록 해주겠다는 목표도 아니에요. 가능하면 다수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원래는 8대 성지마다 학교를 지어서 점을 찍고, 그 점과 점을 이어서 마을마다 학교를 짓고, 거기서 또 면을 넓히는 이런 계획을 이미 20년 전에 세웠어요. 그런데 여태껏 한 점에 머물러서 다른 점도 미처 못 찍었어요. (모두 웃음)

다만 여기서 이런 변화가 일어남으로 해서, 첫째, 앞으로 점을 찍을 때 굉장히 유리해졌어요. 여기서 우리가 훈련시킨 노동자며 기술자 서너 명에 여기서 훈련받은 선생님 두 명을 다른 지역에 보내면 바로 건물도 지을 수 있고 학교 운영도 할 수가 있겠죠.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하려니 자리 잡는 데만 20년이 걸렸거든요. 모델은 이제 만들어졌고, 다음 단계는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모델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어요.

둘째, 인도 사회가 변하면서 문맹 퇴치가 우리 일이 아니라 정부에서 이미 주관하는 일이 됐어요. ‘그러면 그 다음 단계의 일이 뭐겠느냐?’ 이런 식으로 고민을 거듭해서 변화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던 20년 전이나 30년 전에는 문맹 퇴치가 중요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인도 사회며 정부가 투자를 해서 상당부분 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 단계에서 아직 인도 정부가 못 하거나 인도 사회가 못 하는 건 뭘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봐야 해요.

우리가 이 아이들을 아무리 훈련시켜도 어릴 때 이미 까르마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제가 볼 때 이 심성을 단박에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여기서 공부한 아이들이 결혼해서 낳은 아이, 그 아이가 결혼해서 그 다음에 낳은 아이 때까지 가야 건강한 의식이 형성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목표를 세웠어요. 그래서 제가 인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다섯 생은 해야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다섯 생을 해야 하겠다는 것은 150년 정도 되는 계획을 세운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저는 기다리고 있죠. 이 아이들이 자라서 동네 청년이 되면 그 청년들이 중심이 돼서 마을 개발을 그 다음 단계에 어떻게 할지 의논해가도록 기다리는 거예요. 사람이 있어야 일을 할 거 아니겠어요.

그 사이에 스님은 죽을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정토회도 후예들이 계속 올라올 거잖아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제가 여기에 다섯 번 태어난다는 얘기고, 종교적인 게 아니라면 30년을 주기로 다섯 번쯤 세대가 변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 정도면 이 사회가 다시 건강한 사회로 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중국이 40년 동안 경제 개발을 해온 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들 하지만 전체적인 문화로 볼 때는 아직 민주주의라든지 인권이라든지 한참 멀었잖아요. 인도도 경제 개발은 어쩌면 20~30년 만에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외의 많은 문제들을 부처님 법에 맞춰서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시간을 좀 더 길게 잡아야 해요.

그리고 사람이 나서 죽는 게 풀 한포기와 같다고 주장하는 스님이 뭘 어떤 계획을 세워서 하루아침에 성공하려고 하겠어요?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죠. 그러나 이것이 토대가 돼서 다음 사람이 이어갈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당대에 무슨 성과를 내려고 하는 건 오히려 올바르지 않아요. 그러면 그 지도자가 죽거나 그 단체가 해체됐을 때 원래대로 돌아가 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주민들에게 ‘당신들 뭐 할래요?’라고 물어봅니다. 예컨대 탈곡기를 사 달라고 해도 ‘당신들이 타작하는데 왜 우리가 사줍니까? 당신들은 얼마 낼래요?’ 라고 해요. (모두 웃음)


‘우린 가난하니까 내기 힘들어요.’
‘가난해도 당신들이 할 일이 있을 거잖아요. 탈곡기가 얼마예요?’
‘1만 루피입니다.’
‘그럼 당신들 10명이 500루피씩 해서 5000루피를 내세요. 그렇게 10명을 모아오면 우리가 5천 루피 낼게요.’

이래야 자기 게 되지, 우리가 그냥 사주면 금방 고장을 내버려요. 그렇게 고장 나면 그냥 갖다 버려 버립니다. 정부가 파준 핸드펌프는 거의 다 고장 나서 못씁니다. 그것까지 우리가 맡아서 다 수리해주고 있어요. 수리하는 것이 지금 핸드펌프를 새로 파서 설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어떤 사업이든 지속가능하도록 해야지, 이렇게 건물 하나 지어서 사진 찍고 말아버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도록 우리가 어떻게 할 거냐’ 이런 관점을 가지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여러분들이 모금해서 모아봐야 사실 얼마 모으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대기업에서 후원받는 게 제일 빠른 길이죠. 제가 제일 잘 하는 일이 강연이잖아요. 대기업에 강연해주고 버는 돈 갖고 이런 학교 하나 짓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렇게 돈으로 계산하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해져요? (모두 웃음)

그런데 이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가 없어요. 여기에 우리가 25년 동안 투여한 정성과 원이라는 것, 그 축적된 역량은 이 빌딩으로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시설 자체는 돈으로 계산해봐야 사실 얼마 안 돼요. 그런 것들이 여기 축적이 돼서 그걸 보고 들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거든요. 방금 인도인 스탭들 보셨죠? 물론 자기 생활도 해야 하지만 그렇게 어릴 때부터 사탕 먹으러 왔다가 지금까지 경험한 게 있는 거예요. 나이는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 살밖에 안 되지만 여기서 스님과 실무자들이 같이 살고 일하는 모습을 20년 이상 보고 살았잖아요. 먹고 살기 위해서 이 일을 하긴 하지만, 일하는 방식이 단순한 노동자나 선생님하고는 질이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자산이라면 자산이지, 딴 건 그렇게 큰 자산은 아니에요.


방금 인사한 수바스지 같은 사람이 자산입니다. 저런 사람들이 이제 은퇴를 하면 영향력이 큽니다. 원래 청년 때 한 생을 바치기로 약속했는데, 약속을 어기고 결혼을 해버려서 제가 부인을 찾아가서 물었어요.

‘이 사람은 원래 내 건데 당신이 가져가서 이래 됐잖아요. 남편을 내놓을래요, 아들이 둘이니까 그 중 하나를 내놓을래요?’

그러면 예전에는 남편이 필요하다더니 요새는 남편 데려가라 그래요. (모두 웃음) 여자들은 진짜 못 믿겠어요. 젊은 남자를 그렇게 좋아하잖아요. (모두 웃음) 늙어도 내 남자가 낫지, 왜 남의 남자 될 애들한테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 부인은 남편을 데려가래요. 아니면 아들이 둘이니까 하나를 내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계속 제가 주입을 시키는 거예요. 갈 때마다 ‘이건 제 겁니다, 당신 거 아닙니다. 빌려간 거예요’ 이렇게 20년 내내 주입을 시키니까 이제 긴가민가하는 거예요. 원래 점을 먼저 찍은 게 임자잖아요. 제가 먼저 찍었는데 관리를 제가 잘못한 경우예요. (모두 웃음)

결국 사람이 중요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해요. 상카시아도 지금 이십 몇 년간 사업을 못 하는 이유는 돈이 핵심은 아니에요. 그거 하나 지어준다고 불교가 되겠어요? 자기들이 그걸 어떻게 자립적으로 이어가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자기들도 모금하고 자기들도 노력해서 짓느냐, 그걸 지켜보는 데 30년이 다 되어가는 거예요. 젊은 애가 영감이 될 때까지의 세월이죠. 그런데 이제는 마음을 내서 짓겠다고 해요. 전에는 지으라고 하면 아직 애들 공부시켜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짓겠다고 해요.

불법이라는 것은 무슨 형식 갖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어디 가서 불법을 전할 때 평생 정성을 기울여서 딱 한 명만 발굴하고 죽으면 대성공입니다. 두 명, 세 명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그 현지 사람이라면 확산력이 있잖아요. 스님은 외지 사람이라 확산력이 없지만요. 그런 씨앗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해요. 우리가 여기에 평생 살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자기들 일이잖아요. ‘이게 내 일이다’, ‘이게 내 마을 일이다’, ‘이게 내 자식 일이다’ 이렇게 느끼도록 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그거 해서 뭐가 되나?’ 맞는 얘기예요. 그러나 꼭 뭐가 돼야 하는 거예요? 인생이 꼭 돼야만 하는 거예요? 안 되면 아무것도 못합니까? 안 돼도 해야죠. 이게 옳은 길이라면 실패할 걸 알아도 할 수밖에 없어요.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수행이라는 건 그런 관점을 갖습니다. 영화 ‘안시성’에도 그런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꼭 너는 이겨야만 전쟁 하나? 질 줄 알고도 하지.’ 스님이 안 본 것 같아도 봤어요.(모두 박수) 그런 마음으로 순례를 해봅니다.”

“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지나놓고 보면 크게 기억에 안 남아요. 성지순례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서 일주일쯤 지난 뒤에 돌아보면 어느 날 저녁에 어디서 잤느냐, 뭐 먹었느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중요해요. 지금 이 순간에 쌀밥 먹었는지 보리밥 먹었는지가 중요하지, 내일이 되면 어제 쌀밥 먹었든 보리밥 먹었든 그건 뭐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순간에만 사로잡히지 않으면 지나놓고 볼 때 이건 다 좋게 느껴집니다. 성지순례로 인도를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가서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석 달이든 있으면 좋게 느껴질까요, 안 좋게 느껴질까요?”

“좋게 느껴져요.”

“절반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좋을 거예요. 이건 제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짜예요. 좋게 느껴지게 돼 있지만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좀 불편한 거예요. 오줌 누러 갈 때 불편하고, 밥 먹을 때 불편하고, 시끄러워서 불편하지만, 그 순간만 여러분들이 좀 넘으면 이건 다 좋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저는 잘 될 수밖에 없는 일만 합니다. 자, 그러면 짐 정리 싹 해가지고 내일부터 떠나겠습니다.” (모두 박수)

“네!”

“감사합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개교기념식과 마을 방문을 하면서 열악한 환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JTS의 사업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인도JTS의 사업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기원해 봅니다.


스님께서 2시간 동안의 열강을 해주시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각자 숙소로 돌아가 다시 내일부터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은 부처님께서 1000명의 비구들과 함께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 왕을 교화하고 설법을 하신 영축산, 죽림정사, 열반하신 후 500 아라한이 모여 경전을 결집한 칠엽굴,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나란다 대학 등이 있는 라즈길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저도 세 번째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 것 같아요. 왜냐하면...”

2018.1.8 인도성지순례 4일째(보드가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 보드가야 Bodhgaya

오늘은 부처님께서 고행을 멈추고 깨달음을 얻으셨던 곳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무엇을 깨달으셨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과 함께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마치고 쓰러지셨던 네이란자라강을 건너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되살아난 곳을 지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던 보드가야를 순례하였습니다.

부처님이 걸으셨던 바로 그 길을 따라

어젯밤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하룻밤을 잔 성지순례단은 새벽 4시 20분에 일제히 기상해 새벽예불을 올린 후 수자타 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보드가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이라 랜턴을 하나씩 들고 줄을 지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행을 마치고 보드가야로 걸어가신 바로 그 길입니다.

“자, 부처님을 생각하며 조용히 걸어 가보겠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조용히, 그리고 먼지가 나지 않도록 신발을 끌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직 마을 사람들이 자고 있을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최대한 마을을 지나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순례객들은 명상하듯 조용히 앞사람을 비추며 나아갔습니다.

한참 동안 마을 길을 따라서 걷자 지금은 건기여서 모래사장처럼 되어 있는 네이란자라강이 저 멀리 보였습니다.

부처님이 고행 끝에 목욕하셨던 네이란자라강, Niranjana

네이란자라강은 건기라 물이 다 마르고 바닥이 온통 모래로 되어 있어서 발을 내딛기가 조금 힘겹기도 했지만,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 보니 어느새 강을 거의 다 건넜습니다.


순례객들이 강을 건너자 강 건너편에서 마을 아이들이 마구 달려와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네이란자라강을 건너오자 허물어진 탑터가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쓰러진 곳에 세워진 탑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없으면 그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논두렁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많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탑을 바라보며 부처님이 쓰러지셨을 당시와 수자타가 공양을 올린 정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출발했던 전정각산, 즉 수자타 아카데미 앞에 탑이 있던 곳에서 출발해서 오랫동안 못 먹고 허기진 야윈 몸을 끌고 이곳에 오셨어요. 아마 당시에는 거의 옷을 못 걸치고 나체 상태로 수행을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갓 갖다버린 한 여인의 시체덮개, 즉 분소의를 벗겨서 입으셨다고 해요. 경전 기록에 보면 그 여인이 아직 숨이 덜 끊어졌는지 ‘저 수행자가 내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 내가 보시의 공덕을 쌓고 싶다’라고 발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이 숨을 거둔 뒤에 부처님께서 그 분소의를 입으셨고, 그러자 그 여인은 바로 천상에 태어났다고 경전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온 길을 따라 천천히 오셔서 이 강가에 이르러 목욕을 하셨습니다. 고행은 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해요. 첫째, 먹는 것에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먹지 않거나, 야생에서 얻은 거친 음식을 먹거나, 버린 음식을 먹어요. 둘째, 사람이 쓸 수 있을 만한 옷은 안 입고,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쓸 수 없는 옷을 입어요. 그게 분소의예요. 셋째, 자리에 앉을 때 주변을 치우고 앉지 않아요. 소 같은 짐승들이 자리에 앉을 때 돌 같은 걸 다 치우고 앉는 모습을 본 적 없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먼저 땅을 고른 뒤에 깔개를 깔고 앉아요. 그게 몸에 집착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에 앉거나 할 때 장소를 고르면 안 돼요. 뭘 깔아도 안 돼요. 씻는 것도 안 돼요. 짐승들이 어디 가서 씻지 않잖아요.

이렇게 자연 상태로 생활하는 것이 고행주의의 표상인데,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리셨기 때문에 첫 번째로 하신 게 목욕입니다. 시체를 쌌던 옷이니까 고름도 묻어있었겠죠. 그걸 가져와서 빨고 목욕을 하셨어요. 다섯 비구가 볼 때는 이렇게 목욕한 게 고행을 포기한 하나의 증거가 됐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 와서 궁금한 게 있었어요. 산에서 내려왔으면 저쪽 강변이 가까우니까 거기서 목욕을 해야 할 텐데 왜 여기로 왔을까요? 목욕한 자리가 강 이쪽인 여기란 말이에요. 왜 여기까지 강을 건너와서 목욕을 했는지가 늘 궁금했어요.

그런데 제가 전정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같은 강바닥이지만 강바닥이 산 쪽으로 이렇게 기울어져 있어요. 그래서 건기 때는 지금도 이쪽으로만 물이 흐릅니다. 저쪽은 사막처럼 돼 있다가 우기가 되면 다 넘쳐흘러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이쪽에 와서 목욕했다는 것은 그때가 우기가 아니고 건기였다는 것을 뜻해요. 지금은 바짝 말라 버렸지만 항상 여기 오면 물이 있어서 이쪽으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여기까지 와서 목욕을 하셨다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스님의 설명을 듣고 경전 독송을 하니 그때의 모습이 다시 그림 그리듯이 머릿속에 펼쳐졌습니다. 수자타가 공양을 올린 부분까지 독송을 마치고 다시 한두 사람이 걸을만한 좁은 길을 400여 대중이 줄지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보름달같이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어느덧 동이 트고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마을 사이로 난 논두렁 길을 따라 걷다가 정토회가 명상 센터를 짓기 위해 구입해 놓은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수자타 아카데미를 방문한 많은 여행객들로부터 명상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 수요를 해결해주고자 이곳에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공터에 들어서니 풀이 말끔히 베어져 있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순례객들이 방문하기에 앞서 세 차례나 풀 베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명상센터 부지에서 다 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어제 싸놓은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명상센터 부지를 나오자 대문 앞에는 스님으로부터 사탕을 받고자 많은 아이들이 긴 줄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미리 준비한 사탕을 한 명 한 명에게 주며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 곳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곤 하는데, 사탕을 주며 다음 생엔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불법을 널리 전하는 수행자가 되어라고 발원하신다고 합니다.

수자타가 공양을 올린 곳

다음은 부처님이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에 세워진 탑을 향해 걸었습니다. 조금 더 걸으니 무덤 같이 생긴 작은 탑터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셨던 곳이라고 알려주면서 먼저 탑을 향해 삼배를 했습니다.

“오른쪽 앞에 무덤같이 생긴 작은 탑이 보이지요? 여기가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신 곳이에요. 여기는 부처님이 앉았던 자리, 여기는 수자타가 앉았던 자리입니다. 공양 올렸던 자리에 이렇게 탑을 쌓았어요.

뒤쪽을 보면 동네에 큰 탑이 있는데 저곳이 수자타의 집터예요. 그리고 왼쪽에 있는 절이 수자타템플이에요. 수자타의 공양터 주위에 수행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수행하니까 훗날 절이 지어졌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가 없어지고 지금은 힌두 절이 되었습니다. 수자타템플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있지만 지금은 힌두 사원이에요.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했다는 증거가 목욕을 한 것, 수자타가 공양 올린 유미죽을 먹은 것, 길상초를 깔고 앉은 것입니다.

한자로 길상초(吉祥草)라고 표기하는 풀의 인도 이름은 ‘쿠스’입니다. 이 풀은 우리나라의 볏짚과 비슷해요. 우리는 자리에 앉을 때 볏짚 깔고 앉잖아요? 새끼 꼬는 데도 쓰고, 말려서 돗자리 엮는 데도 쓰고요. 지금 옆에 보이는 갈대와 좀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보다 키가 작고 훨씬 더 부드러운 풀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수자타의 공양이 유명한 이유가 있어요. 다른 공양은 다 부처님이 위대하게 되신 뒤에 올린 공양이에요. 유명해지셨기 때문에 공양을 올렸거나, 설법을 듣고 감동해서 올린 경우인데, 수자타가 올린 공양만큼은 달랐어요. 이 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바짝 마른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잖아요. 길가다가 보면 쓰러져 있는 거지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이 소녀가 공양을 올려서 건강을 회복시켰기 때문에 이건 부처님이 위대한 게 아니라 수자타가 위대한 거예요.

저희가 학교 이름을 ‘수자타 아카데미’라고 지은 것은,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수자타의 후예이고, 우리는 부처님의 후예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은혜를 갚는다는 뜻입니다. 불쌍하니까 도와준다는 게 아니라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에요. 수자타가 쓰러져 있던 가난한 사람을 도운 공덕으로 붓다가 출현했듯이 우리가 이 아이들에게 수자타와 같은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면 이 아이들 중에도 붓다와 같은 성인이 나올 수도 있는 거예요. 불쌍하니까 도와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공양을 올린다는 마음에서 학교를 세웠습니다.”

어제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본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어서 우루벨라 가섭이 수행했다고 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부처님이 보드가야를 향해 가신 길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얻고 사르나트에서 전법선언을 한 후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한 곳입니다.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곳에 숲이 있었는데 그 숲 속에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숲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 도량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그 동생인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의 수행 도량이 있었습니다. 우루벨라 가섭을 따르는 수행자가 당시 500명이나 되었어요.


부처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하룻밤을 자고 가려고 청하자 자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어디라도 좋다고 하셨어요. 인도에서는 어디라도 좋다고 하면 거절하기가 어려운가 봐요.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은 화룡이 있는 굴에서 자라고 한 겁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아침이 되어서 죽은 줄 알았던 부처님이 잘 쉬었다고 하면서 나와서 깜짝 놀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제압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좀 더 사실적인 이야기로는 부처님이 굴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으니까 뱀이 나와서 몸을 칭칭 감고 지나갔는데 부처님은 무념무상의 상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뱀이 나무 위로 올라갈 때 나뭇가지를 꽉꽉 물면서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지요.

이 외에도 우루벨라 가섭은 부처님과 360가지 신통력 경쟁을 했다고 해요. 그 말은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이죠.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교화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360가지 신통력 경쟁 중에 마지막 버전이 뭘까요? 큰 뿌자, 다시 말해 큰 제사가 있는 날에 우루벨라 가섭의 제자들이 막 제단을 쌓고 불을 피울 준비를 하다가 부처님과 우루벨라 가섭이 있는 곳으로 제자가 와서 우루벨라 가섭에게 이러는 거예요.

‘스승님, 큰일났습니다.’
‘왜?’
‘아무리 불을 켜도 불이 안 켜집니다.’

옛날에는 나무를 문질려서 불을 붙이잖아요. 그런데 불붙일 시간이 다 됐는데도 불이 안 붙은 겁니다. 그럼 제사가 엉망이 되니까 다급하게 얘기하는데, 부처님께서 ‘이미 불이 붙었다’ 이러는 거예요. 지금까지 애써도 안 붙었던 게 붙었다고 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싶었어요. 그런데 가보니까 진짜 불이 붙은 거예요.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이 마음속으로 조금 꺼리는 마음이 생겼어요. 오늘 엄청난 사람이 모여서 제사 의식을 치르는데 ‘고타마’라는 이 수행자가 혹시 또 무슨 일이라도 벌이면 망신이잖아요. 그래서 말은 안 했지만 마음속에서 약간 꺼려지는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부처님이 그 마음을 아시고 그날 하루 종일 모습을 안 보였어요. 제사가 모두 끝난 뒤에 부처님이 오셨어요. 그러니까 우루벨라 가섭이 부처님께 자랑을 했어요.

‘오늘 제사가 너무너무 여법하게 잘 됐습니다. 어디 갔었습니까? 당신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러셨어요.

‘우루벨라여, 내가 여기 있기를 원치 않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루벨라는 마음을 들켜 버렸어요. 겉으로는 ‘내가 언제!’ 이랬지만 속으로는 들켜서 뜨끔했는데 부처님이 또 이러셨어요.

‘우루벨라여, 마음속에 질투가 있고는 해탈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지금까지 질투할 일이 없었어요. 자기가 제일 훌륭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고타마를 만나고 나서는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마음에 늘 거리낌이 있었는데, 자기가 자기 마음을 모르다가 그 거리낌의 뿌리가 질투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 자기가 자기 마음을 탁 본 거예요. 그걸 보자 뭔가 마음속에 꺼림칙하고 답답하던 게 갑자기 안개 걷히듯이 확 걷혔어요. 그래서 이 80세 노인이 부처님 앞에 무릎을 딱 꿇고 이렇게 요청한 거예요.

‘당신은 나의 스승입니다. 제자로 받아들여 주소서.’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했어요.

‘우루벨라여, 그렇게 경솔하게 결정을 하면 안 됩니다. 당신에게는 오백 제자가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우루벨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두 번째로 또 청했는데 부처님이 또 거절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루벨라가 제자들 500명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까지 나는 여러분과 잘 지냈는데 나는 오늘 위대한 스승을 만났다. 그래서 나는 이 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다 너희 갈 길을 가라.’

이렇게 해산 명령을 내리니까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금까지 아무런 불만 없이 만족하게 지냈습니다. 당신이 위대한 스승을 만났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우리의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500명이 다 동의를 한 거예요. 그래서 우루벨라 가섭이 다시 부처님께 ‘저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라고 세 번째로 청하니까 부처님께서 비로소 승낙을 하셨어요.”

흰색 벽으로 둘러쳐진 건물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자 우물처럼 생긴 작은 화룡굴이 보였습니다.


정말로 이곳에는 화룡이 있었던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현장에 오니 경전에 기록된 내용이 거짓이 아니고 모두 사실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공양

보드가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아주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한 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탑을 한 바퀴 돌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했습니다. 탑의 규모가 워낙 커서 한 참을 돌아야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얼마나 이 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탑을 도는데 울타리 밖에서 어눌한 말투로 ‘아미타부, 아미타부’하는 어린 목소리가 들립니다. 탑을 순례하는 불자들이 아미타불하는 소리를 듣고 따라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울타리 사이로 작은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성지마다 구걸하는 아이나 노인을 만나고 있습니다. 30년 전, 스님이 처음 인도성지순례를 했을 때는 더했겠지요. 스님의 고뇌가 절절히 다가오기도 하고, 여전히 구걸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 수자타 아카데미가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순례단은 보드가야로 향하는 긴 다리를 만났습니다. 강 건너 편에는 높이 우뚝 솟은 대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부처님은 대탑이 세워진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49일 동안의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보드가야 대탑

4시간을 걸어 발바닥과 종아리와 어깨가 아플 무렵 보드가야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보드가야대탑에는 각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습니다. 특히 1월에는 달라이라마의 법회가 있어 티벳 사람들과 스님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단은 보드가야 대탑 관리 측에 요청하여 Meditation park(명상공원)에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순례객은 부처님의 성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마왕의 세 가지 유혹을 실감나게 설명했습니다. 그 중 세 번째 유혹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세 번째로 유혹을 할 때는 아예 마왕이 직접 나타났어요. 이번에는 ‘네가 수행을 포기하면 자재천왕의 자리를 너한테 주겠다’ 라고 했습니다.


저는 앞에 두 번의 유혹도 견디기 어렵지만 그건 그래도 어떻게 해보겠는데, 세 번째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 것 같아요. 만약 자재천왕의 자리를 저한테 주면 일단 한반도가 통일이 되잖아요. (모두 웃음) 자재천왕이 된다는 것은 원하는 바는 뭐든지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에요. 사실 우리의 욕구 중에 이것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겠죠.

그런데 붓다는 이런 유혹에 대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나는 바라는 게 없노라’ 그랬습니다. 뭐라도 바라는 게 있어야 유혹이 될 텐데,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는데, 저는 지금 바라는 게 있어서 해탈하기는 좀 어려워요. (모두 웃음)

하지만 붓다는 ‘바라는 게 없노라!’ 라고 대답했어요. 이렇게 되니까 마왕이 더 이상 방법이 없잖아요. 바라는 게 없는 사람한테는 자기가 가진 그 수많은 능력이 무용지물이니까요. 그런데 마왕이 이렇게 말했어요.

‘좋다, 그렇지만 네가 아무리 그렇게 해도 열반에 이르지는 못한다. 열반이라는 말은 있지만 실제로 열반이라는 경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재천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뭐든지 원하는 건 다 마음대로 되는 나조차도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데, 네가 어떻게 열반에 이르겠느냐는 말이에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어요.

‘너는 과거에 한 번 큰 공덕을 지은 인연으로 자재천왕이 됐다. 그런데 나는 과거 생에 한량없는 공덕을 지었기 때문에 너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네가 안 된다고 내가 안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자 자재천왕이 비웃었어요.

‘내가 과거에 공덕을 지어서 지금 자재천왕이 됐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신도 알고 사람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네가 과거에 한량없는 공덕을 지었다는 건 누가 알 수 있느냐?’

바짝 말라 뼈만 남아서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네가 과거에 한량없는 공덕을 지었다고 해도 그걸 누가 아느냐는 겁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두 손을 모으고 명상하던 자세에서 오른손을 들어 정수리를 한 번 쓰다듬고, 손을 내려서 오른쪽 무릎을 한 번 쓰다듬고, 무릎 위에 있던 손을 다시 아래로 내려서 땅을 가리켰어요. 이 모습이 성도상입니다. 여기 근처에 불상이 있으면 한번 잘 살펴보세요. 이렇게 손을 밑으로 향하면서 ‘지신이여, 나의 과거 공덕을 증명하소서’ 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땅에서 지신이 일어나서 부처님이 과거에 한량없이 세웠던 공덕을 쫙 증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재천왕, 즉 마왕이 부끄러워서 물러가고 부처님은 성도를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이런 자세를 한 불상을 항마성도상이라고 해요. 마왕을 항복받고 성도를 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도 비슷한 유혹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설파하니까 악마가 나타나서 ‘저 배고픈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냐? 네가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로 빵을 한 번 만들어봐라. 그러면 여기의 배고픈 사람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지 않느냐?’ 라고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라고 답해서 악마를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네가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성벽에서 한번 뛰어내려봐라. 기적을 한번 행해 봐라’ 이러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다 신통에 대한 유혹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스님이 훌륭하다고 하면 신통을 보여줘야 훌륭한 스님이라고 생각해요. 주가가 오르는지 안 오르는지를 맞춰준다든지, 땅값이 오르는지 안 오르는지를 맞춰준다든지 우리 아들이 대학 시험에 붙나 안 붙나를 알려준다든지, 아니면 공중에 붕 뜬다든지 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니까 해탈은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해탈은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능력은 바로 욕구에 따라 일어나요. 욕구가 있으니까 능력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신통을 금지하신 거예요.”

이어서 스님은 어떻게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6년간 극심한 고행을 행하셨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수행을 되돌아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점검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출가하기 전에는 욕망을 따라갔다는 걸 알았어요. 즉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만족이라는 기쁨을 추구했는데, 그것이 끝이 나지 않았어요. 욕망이 충족되면 다시 욕망이 커지고 충족되면 또 커져서 마치 장작불을 피울 때 장작이 들어가면 불꽃이 커지고 불꽃이 커지면 더 많은 장작을 필요로 하듯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아셨어요.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는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가 없다는 걸 아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욕망을 억제하고 억압하는 쪽으로 정진을 해나갔습니다. 심지어는 생존에 대한 욕구까지도 억제했어요. 먹는 걸 멈추고 때로는 숨 쉬는 것까지도 멈춰보는 그런 극심한 고행을 행했지만 완전한 해탈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니 열세 살 때 농경제에 참여해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할까?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라는 큰 의문을 가지고 명상할 때보다 지금 하는 명상은 깊이나 편안함이 더 부족한 거예요. 우리가 감정을 억제하고 있으면 바깥에 표출은 안 되지만 몸과 마음이 긴장되니까 깊은 선정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고행 역시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아시고 고행도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분소의를 걸치고 네이란지라 강변으로 와서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았어요.

그 때 그 여윈 몸으로 성도를 하면 세상 사람들이 ‘아, 굶으면 깨달음을 얻는구나’ 이렇게 오해를 하리라는 걸 아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신이 그런 극심한 굶주림 상태 하에서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신통력을 주겠다 하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을 오히려 미혹하게 만든다’ 라고 거절하셨던 거예요. 몸이 여윈 건 깨달음하고 관계가 없다는 거죠. 몸이라는 것은 음식을 먹이로 삼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해서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겁니다. 또 빨래를 해주겠다 하니까 ‘수행자는 자기 몸에 해당되는 것은 자기가 해결한다’라고 거절하셨고 스스로 빨래를 하셨다는 얘기가 경전에 나옵니다. 이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욕을 하시고 쓰러지셨다가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건강을 회복하셨어요. 그런 뒤 어느 쪽으로 가서 마지막 성도를 할지 고민하셨어요. 둥게스와리로 다시 돌아갈까? 아니면 강 이쪽 편 건너,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으로 와서 정진을 할까? 수자타의 집터에서 동편으로 건너가도 당시는 시타림이니까 사람이 살지 않았고, 이쪽인 서편으로 강을 건너와도 시타림은 아니지만 여기 역시 숲이라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건너오셨어요. 여기 와서 풀을 베던 목동에게 그 풀을 한아름 얻어서 나무 밑에 깔고,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죽을 각오를 하고 임하는 것을 대결정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대결정심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 49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셨습니다.”

이어서 당시의 부처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많이 고단했는지 따스한 햇살아래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경전을 끊어서 독송하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부처님이 깨달으신 곳인데 졸면 안 되지요.”

경전을 모두 독송하고 난 후 대탑을 바라보며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과 향을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스님을 따라 대탑으로 향했습니다.


예불 공양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순례단 전체를 위해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개인의 안녕과 행복과 더불어 고통 받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축원, 한반도의 평화도 발원했습니다.


많은 인파 속에서 노란 가사를 수한 정토회 순례단은 한 줄로 서서 입으로는 석가모니불을 외고 마음으로 부처님을 떠올리며 대탑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인도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방문객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은 부처님이 성도하신 자리에 아쇼카 왕이 세운 불탑으로 ‘Maha Bodhi Stupa 마하보디 수투파’라고도 합니다. 불교가 쇠퇴하자 힌두절이 되었는데 미얀마 왕이 거금을 주고 관리 권한을 얻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다 같이 대탑을 돌고나서 자유롭게 정진을 하거나 대탑 주위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장소들을 둘러보기도 하고, 부처님의 수행과 성도, 교화활동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108배하거나 명상을 했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는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불교도인들이 많았고 사람들마다 기도하는 방식도 다양해서 전 세계의 불교도인들이 모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보드가야대탑에서 수자타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에 어제 가지 못한 가야산을 들렀습니다. 천명의 제자들에게 ‘불의 설법’을 한 곳이자, 부처님께서 이 산위에 서서 전정각산에서 고행을 하리라 마음먹은 곳입니다. 가야산 아래 마을 입구에서부터 아이들이 달려 나와 순례객들의 손을 잡고 구걸을 시작했습니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걸어서인지 가야산을 오르는데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찼습니다. 대중이 산에 다 오르자 스님은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날이 맑아 건너편 전정각산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서서 정말 전정각산을 바라보았다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여기가 천 명의 비구를 모아놓고 ‘불의 설법’을 했다는 자리예요. 뒤를 돌아보면 산꼭대기가 보이죠? 부처님이 라즈길에서 처음으로 이 가야로 와서 저 산꼭대기에서 주위를 둘러보셨다고 해요. 네이란지라강 동편, 지금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곳이 수행하기 좋겠다 해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가 경전에 나옵니다. 부처님은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멀리까지 둘러본 후 ‘저기 가서 수행해야 하겠다’ 하고 결심을 하셨던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여기는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을 비롯한 1000명의 대중을 모아서 설법하신 자리예요.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저 밑에서 설법을 했지 굳이 여기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을 것 같아요. (모두 웃음) 저도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거든요. 어쨌든 그래야 이야기가 되는지, 저기에 부처님이 앉으시고 우리는 여기 앉아서 법문을 들었나 봐요.”


순례단은 보드가야 대탑과 가야산의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수자타 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순례객을 위해 따뜻하게 물도 데워주고 따뜻한 밥과 된장국을 준비해주어 저녁식사도 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 예불을 드리고, 지바카 병원 2층 홀에 모여 JTS 활동에 대한 소개를 들었습니다.

인도 JTS와 수자타 아카데미의 오늘

인도 JTS 사무국장 보광법사님의 사회로 인도 JTS 각 사업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온다고 11월부터 학교의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많이 준비했습니다.” (모두 박수)

순례객을 맞이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걸린 예쁜 장식들도 손수 만들고 학교 곳곳을 청소하고 기숙사 앞마당은 소똥칠을 두 번 했다고 합니다. 아이들, 선생님들, 활동가들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큰 박수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각 사업별로 책임자와 사업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빠레와 마을에 유치원이 생길 때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이름이 없다가 유치원에서 이름을 가지게 된 ‘아짓(Ajeet)’은 이제 천여 명이 넘는 유치원의 담당자가 되었습니다.


학교, 병원, 마을개발의 각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인도인 스텝들은 작년 스님과 함께한 깨달음의 장 이후 개인과제도 받아서 수행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교장 ‘인드라짓’은 매일 108배도 하고 있다고 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각 사업의 보고가 끝난 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질문자 중에는 둥게스와리 마을의 물 문제를 도와주고 싶다는 분도 있었고, 어떻게 인도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 물어보신 분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정리말씀을 하며, 해외 봉사에 대한 기준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사업 보고 잘 들으셨죠?”

“네!”


“방금 발표를 들으신 대로 열심히 한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아주 많습니다. 방금 봉사자에 대해 질문하신 내용에 답을 드리자면, 정토회는 일반 자선 단체와 다릅니다. 수행자로서 봉사한다는 게 기본 원칙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먼저 돼야 합니다. 수행자라는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봉사 신청을 받고, 그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봉사 신청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18일 왔다 가고 어떤 분은 한 달 왔다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셨는데, 그 사람은 정토회의 서원행자입니다. 수행자로 자리가 잡힌 사람 중에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분은 그 기술이 필요할 때 본인이 오겠다고 하면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단기 봉사를 받아요. 예컨대 컴퓨터 관련해서 필요한 걸 가르쳐주겠다고 할 수도 있겠죠. 정토회에서 서원행자 이상인 사람은 언제든지 가능한 시간만큼 어떤 기술을 가져와서 봉사하겠다고 하면 ‘오케이’입니다.


정토회와 아무 관계없는 일반인이 와서 봉사하고 싶다고 할 때는 먼저 수행자가 돼야 해요. 그래서 ‘깨달음의 장’을 먼저 다녀와야 합니다. 그런 후 문경정토수련원에 가서 백일출가를 하거나, 그에 준하는 49일 이상 공동체 생활을 한 경험을 먼저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생활해 보면서 ‘아, 이 정도면 인도 가서 살 만하겠다’, ‘필리핀 가서 살 만하겠다’ 하면 봉사하도록 허락을 해줍니다. 살아보니까 ‘공동체 생활은 잘 안 된다’ 라고 하면 이곳에서 봉사를 할 수 없어요. 기술 이전에 여기 와서 공동체 생활을 먼저 해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수행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새벽 4시 반에 안 일어나겠다든지, 아침에 발우공양을 안 하겠다든지, 나가서 특별히 맛있는 걸 혼자서 사먹고 들어오겠다든지 하면 여기서 같이 살 수가 없어요. (모두 웃음)

우리가 아무리 검소하게 살아도 이 동네 사람들이 볼 때는 호화판이에요. 이게 지금 저희들의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현지인처럼 살려고 노력해요. 저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 동네 집에 가서 방을 얻고 그냥 현지인처럼 살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 이후에는 이렇게 건물을 따로 짓고 사니까 서로 위화감이 생겼습니다. 담장 밖과 안의 구분뿐만 아니라 생활 차이가 또 생기잖아요. 그러면 도둑이 생기는 문제가 자꾸 발생합니다. 그리고 또 여기는 인도인 자원봉사자들이 늘 똑같이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입는 반면 자신들은 그러지 못하면 말로만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되어서 말이 안 먹히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현지인들과 똑같이 생활합니다.


점심 급식도 마찬가지에요. 점심에 애들 급식을 할 때 따로 못 먹고 그 급식을 같이 먹어야 해요. 그런데 한국에서 봉사하러 온 사람이 ‘나는 그거 먹고는 못 살겠다’, ‘나는 이렇게 전깃불도 없는 데서 못 살겠다’ 이러면 함께 지낼 수가 없어요. 여기는 교육하는 곳이기 때문에 특히 그렇습니다. 애들은 따라 배우기를 하기 때문에 무엇을 가르치면 ‘그러면 너는 왜 그러는데!’ 이러거든요. (모두 웃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봉사 신청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기술이라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저희들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부족해도 수행자로서 봉사할 수 있는 만큼 하지, 사업의 성과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 원칙이 먼저 지켜져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수행자가 먼저 되고, JTS에서 자원봉사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내일은 오전에 전정각산을 올라갔다 내려와 수자타 아카데미 25주년 개교기념식을 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둘러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매일 매일이 꽉 찬 순례 일정입니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화를 알아차리니 더 화가 나요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았다고
바로 탈 사람이 있을까요?
연습하면서 몇 번씩 넘어지다
한 번이라도 넘어지지 않으면
방법을 알게 되고 자신감도 생겨요. 
 
알아차리는 것은 화가 나면
‘화가 나구나’ 하고 화를 보는 것이지
화를 낼 거냐 참을 거냐의 의지가 아니에요. 
 
그래도 화가 일어나 터지면
후회하는 게 아니고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거예요.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는 서툴지만
꾸준히 연습하면 언젠가는 잘 탈 수 있듯이
알아차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100번 연습해서 되는 사람이 있고
1000번 연습해서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연습하는 일만 남았어요.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시간 지나면 자연 치유된다는 얘기인데
꼭 세월에 의지할 게 뭐 있나요.
지금 단박에 좋아져야지요. 
 
회복할 수 없는 병이 생긴 남편을
통증으로 고생하지 말라고
하느님이 바로 데리고 가셨으니
남편에게는 좋은 일이에요. 
 
남편을 못 잊어 생긴 괴로움은
매일 참석하는 미사에서
‘주의 뜻대로 하십시오’  
기도하세요. 
 
남편을 빨리 데리고 가시든지
늦게 데리고 가시든지
주님의 뜻이에요.
고통 없이 데려가 주신
고마움의 표시로 헌금도 내시구요. 
 
살아있을 때 즐겁게 지내다
먼저 떠나면
‘안녕히 가세요’ 하고 보내고
행복하게 사는 게
먼저 간 분도 바라는 일입니다. 

괴로움에 빠지지 마세요

시험에 떨어졌다고
술 먹고 괴로워하는 건
공부에도 도움이 안 되고,
건강에도 도움이 안 돼요.  
 
‘떨어졌구나! 그럼, 다시 더 공부하자!’
이렇게 마음먹고
떨어진 이유를 분석해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만약 친구가 어려움을 겪을 때
불쌍하다고 같이 운다면
친구에게 도움이 될까요? 
 
상대의 어려움을 생각해보고
손을 잡아주거나 경제적 지원을 해 주거나
구체적 행동으로 도와주면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습관처럼 괴로움에 빠지지 말고
극복할 방법을 찾아
지금 당장 행동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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