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명상|…… 혜천스님설교

2019. 1. 27. 11: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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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5년 11월 13일

거울 명상

 

 

(오늘은 녹음된 걸 유에쓰비로 다운 받아 저번과 같이 받아쓰기를 하려 쉬엄 법회에 참석했더랬는데, 녹음이 되지 않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들을 수 없을 것임을 밝혀 둡니다. 결과적으로 지각으로 인해 앞 부분 소실. 난 지각이나마 참석했지만, 청안 선우를 비롯해 법화, 석두는 완전 불참. 걘적으로 이 중 누구 하나라도 참석했을 시는 언제나 엠피쓰리 녹음된 원본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글로 복기할 수 있었기에, 뒷구녕에서 소심하게 이들을 원망해 보아요. 그들의 부재 속에 연당께서 컴퓨터를 작동하고 녹음했으나 결과적으로 허당. 나로서는 회복 불가. 청연님께서 기억을 살려 앞 부분을 살려주세요.라고 부탁했더니 바로 살려 복원되어 선우님들께 완성품을 올립니다. )

 

이명기, <채제공 초상 시복본>, 1792년경

축, 비단에 채색, 120.0x79.8cm, 수원시, 보물 제1477호.

 

자찬시

원문

爾形爾精。父母之恩。爾頂爾踵。聖主之恩。扇是君恩。

香亦君恩。賁飾一身。何物非恩。

所愧歇後。無計報恩。

樊翁自贊自書。

 

해석

네 몸과 네 정신은 부모님의 은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임금님의 은혜.

부채도 향낭도 임금님의 은혜, 온 몸 꾸민 장식품이 뭔들 은혜가 아니리오.

부끄럽네. 무능한 몸 은혜 갚을 길이 없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거울을 봅니다.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지만 거울을 볼뿐 제대로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울을 통한 생활속 수행에 대해서입니다.

 

현재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즉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는가의 나를 보라는 뜻입니다. 거울속의 나 자신을 보면서 거울속에 비추어지고 있는 너의 존재는 누구냐? 어떤 존재인가?의 의문을 갖는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은 뇌속의 전자신호를 조작하는것입니다. 명상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있지만 진정한 행복을 느끼진 못합니다. 예를들어 웃음치료라는 것도 뇌의 전자신호를 바꾸는 것이지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명상은 뇌의 전자신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명상도 실제에 나아가야 합니다. 관념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거울 명상은 말 그대로 거울 보는 명상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거울을 얼마나 보세요? 지난 번에 수행에 대해서 말했는데, 수행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라고 해서 하루 종일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1분만이라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던 또 다른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울을 통해 그의 모습을 보고, 거울에 보이는 그를 통해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작은 빽 속에 거울을 넣고 다니면서, 자신이 화가 치밀어 오를 때나 한 없이 좌절할 때, 그때그때 마다 거울을 꺼내 나를 한 번 바라 보세요. 거울 속의 그는 그 사람이 아닌 타인을 통해 비춰 줍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다른 하나의 방식은 수행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누워서, 또는 서서하는 방식입니다. 중국의 등운봉 스님은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면서 여동생에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누워서 죽는다. 도력이 높은 이들은 앉아서 죽기도하는데, 나는 특별하게 죽고 싶다. " 그러더니 물구나무를 섰습니다. 물구나무를 선채 한참 동안 있자, 여동생이 장난 좀 그만 치라고 말했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있어, 다다가보니 물구나무 선 채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앉아서, 누워서, 서서 수행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등운봉 선사처럼 물구나무를 서서 수행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할 수만 있다면, 물 속에 들어서서 수행하는 것도 관계 없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거울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관상명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으로 그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하지만 내가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내가 부처님께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생각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삼천배를 하는 분, 만배를 하는 분도, 자신이 부처님께 어떻게 비춰질까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명상할 때,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나의 삶과 지금의 모습이 부처님의 거울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과 부처님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다를 수 있습니다. 나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성인일 수 있지만, 부처님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소인배도 그런 소인배일 수 없죠. 나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남루한 루저의 삶이지만, 부처님의 거울 속에 비춰진 나의 모습은 멋진 킹카의 모습일 수도 있죠. 나의 거울 속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부처님의 거울 속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부처님의 거울 속에 비춰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평가하는 나와 부처님이 평가하는 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름이 있는 이유는 보는 안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로 드러나 있는 것을 평가합니다. 중국,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기준은 덕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덕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덕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뿜어나오는 꽃의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덕이 있다 또는 덕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우리의 뇌를 영상으로 찍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뇌의 전자신호는 영상으로 잡히지만, 뇌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영상으로 잡히지 않습니다. 만약 생각이 잡히는 기계가 나온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있는 것을 사무실에 영상카메라를 설치해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셔요. 그런 세상이 오면, 정말 꼼짝마라일 것입니다.

 

나는 전에도 말했지만, '그 사람과 친하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안한다고 했습니다. 친하다면, 역적 모의도 같이할 정도로 스스럼 없는 사이여야 하는데, 내가 그가 그런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입이니다. 어쩌면 역적 모의를 같이 할 수 있는 사이가 가장 좋은 사이일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적어도 생각을 읽어낸 기계는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영상에 비춰지는 내 자신이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 생각해 보야야 합니다. 이것은 거울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보단 훨씬 쉽습니다. 쉬운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근사하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처님께 비춰지는 내 모습을 근사하게 그려낸다고 어느 누구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처럼, 왕비는 거울에 대고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이쁜가?'라고 묻습니다. 적어도 거울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은 비출 때마다 99%동일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거울이 왕비를 위해 한 번쯤 거짓말로 고백할 수도 있으련만, 사실만을 말합니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지만, 사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기계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울에 비춰진 내 자신의 모습은 어떻게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거울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조절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영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근사한 영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전생 체험을 다녀온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 근사한 얘기를 합니다. 전생체험에서는 나는 공주 아니면, 왕비죠. 그렇지 않아도 현실이 팍팍한데, 전생에서 조차 똥구더기, 쇠똥구리라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세상에! 전생에 양귀비께서 다시 오셨네!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그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란 생각이 세상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따라, 나의 미래도 그 생각같이 가까와지게 되죠. 이왕이면, 좋은 생각을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이왕이면, 부처님의 거울에 비춰지는 내 자신의 모습을 아주 근사하게 그려야 합니다.

 

정조 때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정승 벼슬에 20년간 머룰러 있었죠. 이 채제공에 대해 정조는 화원 이명기에 명해 초상화를 완성시켜, 임금 이 초상화를 하사했죠. 신하로서의 최고의 영광 중의 하나는 초상화를 임금이 그린 초상화를 하사받는 것이죠. 물론 임금이 직접 붓을 잡고 초상화를 그리지는 않죠. 그러나 그건 임금이 그린 것과 같습니다. 80화염경을 보면, 제일 먼저 '어제(御製)'라는 글이 나옵니다. 그건 중국 유일의 여성 황제, 측천 무후가 글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붓을 들어 그 글을 지은 것은 아닙니다. 임금의 명을 받아, 문장이 뛰어난 신하가 그 글을 짓습니다. 그게 '어제'입니다. 정조가 채제공에게 초상화를 하사하자, 그가 화제를 붙이죠. "너의 모습과 정신은 부모의 은혜부터 나왔고, 너의 머리와 다리는 임금의 은혜로부터 나왔구나!"라는 화제의 찬을 붙이죠. 그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진 자신의 모습에 직접 지은 찬을 이렇게 붙입니다. 부처님의 거울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과 실제 거울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채제공의 초상화와 같습니다.

 

우리는 무슨 찬을 붙일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부처님의 거울에 비춰진 근사한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한 번 찬을 써 보세요. 일체유심조라. 멋들어진 찬을 한 번 써 보세요. 부처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한 번 찬을 붙여 보세요. "거울 속 그대의 모습이여! 거울의 주인과 다르지 않구나!" 괜찮습니다. 여기서 거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부처님입니다. 그렇다고 무소불위의 대한민국 검찰이 와서 뭐라하지 않습니다. 찬을 써 보셨어요? 아직 못 써셨어요?

 

거울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춰진 나 자신은 사물의 경계를 뛰어 넘습니다. 사물의 경계를 뛰어 넘은 한 인간이 거울에 비춰지고 있습니다. 옛날은 그 동네의 정보를 수집하고 싶으면, 그 동네의 우물가에 갔죠. 요새는 도청하면 됩니다. 이메일이나 휴대폰 등을 도청하면 됩니다. 나한테도 무슨 도청할 일이 있어, 우리 전화기 수화기를 들면 윙하고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내가 그럽니다. '도청하고 있냐?'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온 동네가 다 아는 소문, 나 자신만 모르더라. 그 말은 우물가에 가서 듣고 보니, 그게 다 내 얘기더라는 것입니다. 거울 속에 비춰지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내가 가장 잘 알아야죠.

 

우리가 학동이라면, 거울 속에 내 자신의 모습을 모른다고 해도 크게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혹, 지천명을 지나 이순을 향해 달려가고, 종심을 향해 질주한다면, 거울 속에 비춰진 모습을 내가 모른다면, 좀 근지럽지 않을까요? 우리가 거울을 보는 이유는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이런 것은 공자의 얘깁니다. 그 얘기가 지금 맞습니까? 그 시대는 한 인간이 채 40도 못 살았습니다. 아마 평균 수명이 35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40이 불혹인 이유는 인생의 끝자락에 섰기 때문입니다.

 

요새 40은 어떻습니까? 애 키우고, 집 장만할 나이죠. 아니면 직장에서 해고를 걱정할 나이죠.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가족 중 돌연사하거나 자살한 사람이 20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요새 40은 불혹이 아닙니다. 쫒겨날까 전전긍긍하는 세대입니다. 요새는 오래 삽니다. 그래서 불혹의 나이가 되려면, 적어도 환갑잔치상 정도는 받아아죠. 이것조차 빠를지도 모르죠. 우리 할아버지 환갑잔치에서는 '참 장수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요새는 환갑잔치를 하면 욕 먹습니다. 그만큼 오래 살아서입니다. 누가 이러더군요. 40이 불혹인 이유는 아무도 나를 이제 더 이상 유혹하지 않는 나이라구요. 유혹에 동요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유혹하려 하지 않는 나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을 얘기하지만, 부처님, 공자님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울에 비춰진 내 자신의 모습을 항상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조건으로 거울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그 때 다르죠. 그런데 우리는 항상 같은 사람이 거울에 선다고 생각하죠. 거울 속에 비춰진 것은 '그 사람'입니다. 거울 속에 비춰진 것을 '나'라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나 거울 속에 비춰진 '그 사람'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는 아니예요. 오늘 저녁 문을 닫고, 혼자 한번 거울 앞에 서 보세요. 왜 문을 닫고 혼자 서보라고 하느냐구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거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보세요. 그리고 부처님의 거울 속에 비춰진 나 자신을 한번 상상해 보셔요. 거울 속에 비춰진 모습은 완벽한 나 자신의 초상화입니다.

 

중국 북송 때 정이(또는 정이천)[(程頤 :자 정숙(正叔). 호 이천(伊川). 시호 정공(正公)]는 제사 지낼 때, 초상화를 쓰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근거가 일호불사론(一毫不似論)인데, 그래서 신주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터럭 하나라도 빠지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화가가 머리카락, 눈썹의 숫자까지 정확히 그릴 수 있겠습니까? 머리카락이나 눈썹의 수를 센다 치더라도, 그 수 많은 솜털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거울은 권능하신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권능은 원래 부처님의 능력을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울이야말로 권능해서, 솜털 하나 빠트리지 않습니다. 거울 속에 비춰진 그 사람의 모습은 초상화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울 앞에 서서 그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찬을 한 번 써 보세요. 이 방법은 간단합니다. 집에 거울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만약 거울이 없다면, 저에게 말하면, 방의 벽에 한지로 붙여 놓은 거울의 종이를 떼서라도 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집에 돌아가서 한 번 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거울에 서 본 적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서면, 평상시 거울 앞에 서는 것과는 다른, 색다른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전에 수행이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울 앞에 서는 것도 그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은 '거울 명상'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오랫만에 눈을 감고, 부처님의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그려보시지요. 자 눈을 감으세요. -거울 명상 시작(한 10~20분간 이어짐)- 자 눈을 뜨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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