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3. 15:4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2555년 11월 20일 미래의 행복을 팔아 현재의 행복을 사지 마라
부처님께서 지금의 좋은 상태를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셨죠. 지금의 좋은 상태를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부처님이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우리는 지금을 만족하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지금을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지금을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각을 성취해서 살 수 있었다고 그랬어요.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부처님께서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다보면, 아주 당혹스러울 때가 있죠. 우리가 당혹스러운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상식에 반하는 말씀이 많이 있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경전을 잘 읽어야 됩니다. 우리가 경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구요. 왜 부처님께서 그같은 말씀을 하실까? 우리가 경전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에 의문을 던지는 거예요. 왜? 왜 이같이 말씀하실까?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읽으면서도 부처님 말씀에 의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에, 그 경전을 달달달달 외우면서도 그 삶을 바꿔가지 못하죠.
부처님은 지금을 만족하지 않아야 된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떤 의미인가? 부처님이 단순하게,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하실 말씀이 없어서.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과 연결해보면, 분명한 이유가 되죠. 부처님은 욕망을 애착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부처님이 욕망을 경계했던 이유는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동시에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기도 하죠.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이 지구 상에서. 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미래의 행복을 팔아가지구 현재의 행복을 기꺼이 사죠. 그게 인간이예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욕망을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인간은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기 때문에 인간이 덜 행복하고, 항상 행복을 갈망하고, 항상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행복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이유는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샀기 때문이예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로 흐르죠. 시간은 과거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절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해 흐르죠. 우리 또한 미래를 향해 흐릅니다. 생명 존재라고 하는 것, 즉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해 움직이지 과거를 향해서는 움직일 수가 없어요. 적어도 이 삼차원의 세계에서는 절대 과거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오직 미래로만 갈 수가 있죠. 그것이 인간의 슬픔이자 불행이기도 하죠. 인간은 미래로 밖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미래로 밖에 갈 수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현재를 붙들어 둘 수도 없죠. 그런데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샀으니까 미래에 누려야할 행복이 부족할 수 밖에 없죠. 미래에 행복할려면, 미래의 행복을 위한 저축을 해야 되는데, 저축은 고사하고 통장을 탈탈 털어서 현재의 행복에 다 투자를 했죠. 그런데 현재의 행복은 고정되고, 멈추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현재의 행복이 고정되고 멈추지 않냐면,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서 있으나, 우리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진행하는 현재라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현재를 강조하고, 현재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현재는 절대 현재로서 머물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이를 하고 있죠. 한 아이가 외칩니다. "얼음!" 한 아이가 멈추죠.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거는 그 아이는 멈춘다할지라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거예요. 미래를 향해서. 부처님이 우리에게 욕망을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는 것이 욕망이죠. 다른 것이 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욕망은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끊기 어렵고, 그러기 때문에 벗어나기 어렵죠. 애써서 외면할려고 해도 외면할 수가 없어요.
마치 마약과 같죠. 이 지구상의 물질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물질은 마약입니다. 어떤 사람도, 아무리 고통스러운 사람도, 금방 숨을 쉬지 못해 죽을 것 같은 사람도,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고립되어 있는 것 같은 사람도,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나 혼자만 서 있는 것 같은 사람도, 그저 마약을 흡입하면 세상이 행복하죠.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변해 버리죠.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정신과 의사는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마약을 팔 수 있는 마약판매상이라고. 정신과 의사들이 주는 약은 대체적으로 마약 성분을 함유하고 있죠.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합법적으로 마약을 파는 마약상이라는 거예요. 지구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물질은 마약입니다. 그거보다 좋은 것이 없어요.
욕망은 마약과 같죠.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약과 똑 같습니다. 왜 마약과 같냐하면, 끊기 어렵기 때문이죠. 너무 매력적이고, 너무 매혹적이고. 그런데 마약과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공통점이냐면, 미래를 파괴한다는 거죠. 지금 당장에 마약을 섭취하면 참 행복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을 계속 먹으며는 결국은 자신을 파괴하죠. 인간이, 이 삼차원의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면, 그런 일이 없겠죠. 그러나 시간은 반드시 미래로 흐릅니다. 부처님이 지금의 좋은 상태를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 즉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우리 인간은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지금의 행복을 사죠.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삽니다. 근데 우리는 오직 미래로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서 내가 누려야할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내가 누리는 행복을 샀으니까 미래의 행복은 당연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항상 뭔가가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죠. 우리는 언제나 불만족스럽습니다. 뭔가가 불만족스럽죠. 우리가 불만족스러운 것은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샀기 때문입니다.
쌀독에 가득한 쌀도 매일 푸면 없죠. 우리 선친는 1년의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1년 먹을 양식을 정확히 히 계산을 했어요. 그리고는 창고에다 쌓았어요. 물론 나머지는 다 팔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식구들만 계산해서 1년의 쌀을 쌓는다는 거예요. 손님도 오죠. 또 손님만 오는 게 아닙니다. 가끔은 어머니 몰래 쌀을 퍼다가 영화도 보고, 당구도 치는 뭐 그런 우리 형제도 있었죠. 그러니 언제나 쌀이 부족할 수 밖에 없어요. 왜? 일정한 양을 정해서 쌓았지만, 그 양은 처음에는 엄청 많지만, 갈수록 줄죠. 그런데다가 예상치 않은 다른 일이 생기며는 쌀은 더 급격히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는 것은 일정한 양의 쌀을 소비하는 거와 같죠. 엄청나게 많아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수레바퀴가 한 번쯤 돌아올 때가 되면, 쌀은 남아난 것이 없죠.
그러기 때문에 미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과거의 종교들은 긍정적이지 않았어요. 미래는 긍정적일 수가 없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미래는 심판이었어요.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리는. 기독교에서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 있죠. 미래는 행복을 담보해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는 인간에게 불행으로 다가왔던 거예요.
미래를 긍정하는 것은 불교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불교는 미래를 긍정하죠. 불교는, 행복의 완성은 미래에 약속의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을 하죠. 미래세에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화림(花林)에서 이 땅의 중생을 구원하신다고 그러죠. 화림이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꽃이 피어있는 숲이죠. 꽃이 피어 있는 숲, 동산. 꽃이 만발해 있는 거. 꽃이 만발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가요? 꽃이 폈다고 하는 것은, 꽃이 피며는 열매를 맺죠. 지구상의 식물의 90%는 꽃이 피어야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다 못해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길거리의 풀들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죠. 꽃이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풍요롭다는 걸 뜻해요. 왜 미륵의 땅이 꽃이 활짝 피는 꽃동산인 것은, 꽃동산인가 하는 것은 그래서 그렇습니다.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기 때문이지요.
옛분들은 그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그랬죠. 한가위 때 모든 오곡이 익고, 과일이 익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이른 곡식은 이미 거둬들이는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꽃이 만발하며는 열매를 맺고, 열매를 맺으며는 풍요롭죠. 풍요로우면 행복합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풍요로움이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일 수가 없어요. 풍요로움이예요. 몸과 마음이 풍요로운 거. 몸과 마음이 풍요로운 것은 욕망이 충족됬기 때문이죠. 욕망이 충족됬을 때, 인간은 행복합니다. 욕망이 충족되지가 않으며는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물질적이 것이 되었든,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 인간은 욕망이 충족되어야만 행복합니다.
음식이 넘쳐나면, 먹는 거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게 되요. 음식이 부족하게 되며는 늘 음식에서 탐착하게 되죠. 이것은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해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먹을거리가 풍부한 쥐들은 굉장히 여유롭죠. 먹을 게 풍부한 쥐들은 걸을 때도, 뒷짐을 지고 팔자 걸음을 걷습니다. 어깨가 딱 벌어지죠. 그저 사소한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왜? 나 등 따시고 배부르다는 거예요. 근데 먹는 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쥐들은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정을 보입니다. 왜 정서적으로 불안정을 보일까요? 생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죠.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을 뜻하죠.
법정스님이 <무소유>라는 책을 써 가지고, 세상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책을 수없이 파셨지만, 그것은 꿈같은 얘기죠. 인간은 물질의 소유가 없이는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재테크의 달인 이명박 대통령도 무소유를 찬탄했을까? 엄격히 이야기해서, 무소유는 허구입니다. 인간은 무소유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죠. 어떤 인간이 무소유했던 인간이 있었던가요? 무소유하고 싶으면, 한 가지 방법 밖엔 없습니다. 굶어 죽는 수 밖에.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걱정하실 것 없어요. 무소유를 지향하는 분들에게, 내가 위로되는 한 말씀을 드리죠.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무소유하게 된다는 것, 다 성인이 되고 부처가 되죠. 왠줄 아셔요? 인간은 다 굶어 죽걸랑. 인간은 최종 순간에 굶어서 죽습니다. 먹지 못해서 죽죠. 병들어 죽는다고요? 아니요. 암때문에 죽는다고요? 아니요. 굶어서 죽습니다.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는 먹지 못합니다. 먹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루다가 목에 구멍을 뚫어서 튜브에다 음식을 밀어 넣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것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수액을 꽂아 놨다가 비리비리 말라서 죽죠. 내 몸에 모든 영양이 고갈되어서 죽습니다. 얼마나 무소유합니까? 먹지도 않잖아요. 무소유할라고 애쓸 거 없어요. 소유한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풍요라고 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 풍요로운 걸 뜻해요.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욕망을 경계하시는 거예요. 달리 경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마약이 매력적인 물질이라 할지라도, 마약은 사람을 파괴시키죠. 욕망은 파멸의 문이다라고 부처님이 얘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욕망은 파멸의 문이죠. 파멸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얘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죠. 욕망을 탐착하고, 욕망을 애착하게 되면,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기꺼이 현재의 행복을 사기 때문에.
어떤 분이 있는 돈 다 털어서, 로또 복권을 샀다던가요? 있는 돈을 다 털어서 로또복권을 샀다는 것이 한꺼번에 샀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매 번 수 십만원, 수 백만원씩 로또 복권을 샀다는 거죠. 결국은 그 분은 거지가 됐어요.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산 거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는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죠. 지금 이 순간 행복을 즐기라고. 나 또한 거기에 동의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명백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래의 행복은 팔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그것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좋아 보여도, 미래의 내 행복을 파는 일은 하지 말아요.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는 제일 먼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후횝니다. 지난 날을 후회하게 되죠. 우리가 지난 청소년기에, 아니면 청년기에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미래의 행복을 팔았던가요? 그저 친구가 좋아서, 친구랑 노느라고, 공부를 등한시했고, 그저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친구 따라서 강남을 갔고. 물론 그 때는 행복했습니다.
나는 놀기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오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죠. 나는 공부하란 소리는 안 해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공부니까요. 대신 내가 이런 이야기는 해 주죠. 지금은 니 주위에 친구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10년 후에 그 친구들이 네 곁에 있다는 생각은 버려라. 인간은 절대 자기 위치하고 걸맞는 사람하고만 논다. 지금 네 나이에는 누구나 함께 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니가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네 주위에 있는 사람은 달라진다. 니가 10만원 짜리 랍스타 요리를 호텔에서 썰고 있다며는, 그 요리를 같이 썰 수 있는 사람이 네 주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저기 길거리에서 길거리 음식을 사 먹을 수 밖에 없는 처지라며는, 네 주위에는 길거리 음식을 사먹을 수 밖에 없는 친구들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 세계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긍정을 힘을 이야기하죠. 미안한 얘기지만, 긍정의 힘은 인간을 성취시키지 못해요. 긍정의 힘은 남의 노예 노릇은 하게 할 수 있어요.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어떤 종교 단체에 가니까, 그 종교단체의 지도자께서 모든 것은 내 탓이고, 내가 옳다고 하는 그 잘못 때문에 인간이 불행하다고 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내 생각이 옳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나만이 잘한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니까 참 행복하더라. 내 그 분한테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인간은 나만 옳다는 확신 때문에 존재한다. 옛날에 천주교에서 '내 탓이요'라고 하는 것을 써 가지고 붙이고 돌아댕긴 적이 있어요. 내 탓인가요? 내가 길거리에서 얻어맞은 것이 내 탓인가요? 아무 일 없이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칼을 찌른 것이 내 탓인가요? 광주 인화학교에서 일어난 도가니가 그들의 탓인가요?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확신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가장 옳은 것은 나 자신이예요. 내가 가장 옳죠. 내가 옳다는 생각이 없으면, 내 존재는 의미가 없어요. 노예란 것은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저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죠.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고 하는 소설을 보면, 폭압적인 간호사의 그 폭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정신병동의 환자들이 나오죠. 의도적으로 정신병원에 피신해 간 주인공이 폭압적인 그 간호사로부터,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하죠. 모두가 탈출을 꿈꾸죠. 그녀로부터의 탈출. 마지막 순간에 환자들은 아무도 정신병동을 나서지 않습니다. 정신병동에서 나오는 그 두려움보다는, 정신병원 바깥에서의 두려움보다는, 그녀의 품안에서의 안식을 선택하죠. 인간은 자기가 옳다는 확신이 없으면,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만이 옳을 때 인간이 행복할 수 있어요. 나만이 옳기 때문에 그들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나만이 옳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확신이 있어야 되요.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지 않는 이유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예요. 어떠한 확신이 있을까요?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면, 불행해진다고 하는 확신이요. 미래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거예요. 불교에서 미래의 땅, 화림을 이야기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어요. 비록 우리가 지금은 인내하고, 감내하고, 허덕이고 있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그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거예요. 나만이 옳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하는 것이 잘못이예요. 나만이 옳습니다. 동시에 그는 그만이 옳죠.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이나라는 얘기예요. 우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접근하죠. '나는 옳고 너는 글러'라고 하는 문제로 접근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옳지, 오직 나만이. 동시에 너만이 옳지, 그것을 인정하는 거죠.
약속의 땅은 풍요의 땅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되죠. 충족되기 때문에 행복한 겁니다. 나만의 확신은 정신적인 풍요입니다. 나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풍요죠. 노예의 행복은 노예의 행복일 뿐이예요. 정신병동에서 폭압적인 그녀의 품안에서의 행복은 굴종의 행복이예요. 복종의 행복이예요. 복종하고, 굴종하면, 물론 행복합니다. 그렇지만는 모든 생명은 갇혀있는 행복보다는 놓여진 행복을 희구하죠.
<올드 보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죠. 15년간 갇혀있던 최민식이 나와서 왜 자기가 갇혔는가에 대한, 왜 자기를 가뒀는가에 대한 그 진실을 알아가는 영화입니다. 그 한 꺼풀, 한 꺼플이 벗어지죠. 왜 최민식이를 가뒀는가요? 그리고 그 진실은 밝혀지죠. 마지막 순간에. 이 영화의 반전은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이 한 마디의 대사죠. 유지태가 최민식에게 말하죠. "왜 가뒀는가를 묻지 말고, 왜 풀어줬는가를 물어야 할 시점이라고, 지금." 최민식이에게 왜 가뒀는가를 묻지 말라는 거예요. 왜 15년 후에 풀어줬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거예요. <올드 보이>라고 하는 영화는 이 마지막 대사가 없으면, 그건 그저 영화라 할 것도 없지요. 왜 가뒀는가를 묻지 말고, 왜 풀어 줬는가를 물어야 한다. 새들에게 새장 속에 갇혀 있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새장 밖에 있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대다수의 새들은 새장 밖에 있는 행복을 선택할 겁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하는 단어를 참 좋아하죠. 그렇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만큼, 우리가 무분별하게 쓰는 단어도 없죠. 진정한 행복은 풍요로움과 함께, 자유로움이죠. 풍요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으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풍년가를 부를 수 있겠어요? 그것은 강요된 풍년가일 뿐이죠.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죠.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라면,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근데 우리는 미래의 행복을 자꾸 팔고 있죠. 근데 미래의 행복을 팔면서도, 미래의 행복을 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고 있죠. 마 청소년 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죠.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고 있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얼마만큼 축적시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이 행복을 사지 않으려면, 나를 언제나 중정(中正)의 상태에 두어야 됩니다. 중정, 가운데 중자, 바로 정자, 중정. 우리가 중정의 상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죠.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지 마라, 이런 얘기를 하니까, 아니 그럼 미래에 행복할려면 현재에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야 되겠네, 마 이런 뜻 아닙니다. 현재를 불행하게 살고, 지지리 궁상으로 살으라는 얘기, 절대 아닙니다.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중정이라고 하는 것을 , 중정이라고 하는 상태에 나를 두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중정이라고 하는 것은 수학으로 설명하면, 사칙연산과 같죠. 우리 삶은 수학의 사칙연산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 읺은가요? 우리의 일상의 삶이 사칙연산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같습니다. 때로는 빼고, 때로는 더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나누고, 때로는 주식을 한 주 사서 과감하게 곱하죠. 우리 실생활에서 한 번 보자구요. 계란을 하나 샀습니다. 부화를 시켰더니 닭이 한 마리 됐죠. 닭이 알을 20개 낳습니다. 그래서 부화를 시켰더니 병아리가 20마리가 됐죠. 어리석으며는 닭이 어느 날 병아리를 열 댓 마릴 거느리고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병아리가 열 다섯마리야. 우리 일상의 삶이라 하는 것도 수학의 사칙연산과 다르지 않습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도 수학의 사칙연산과 다르지 않죠.
우리는 깨달음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특히 수행을 한다고 하는 분은 특히 더 그렇죠. 근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도 없다는 거예요. 내가 깨달았다고 그러면, 그만이야. 내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면, 어느 누구도 그 깨달음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다는 거죠.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는지? 도대체 깨달았다는데, 왜 허구헌 날 술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지? 깨달았다는데, 왜 그렇게 성질은 더러분지? 알 수가 없어요. 왜 깨달았다는데, 재색기갈(?) 네 가지는 벗어나지 못하는지?
깨닫는다고 것은, 부처님은 '진리의 눈뜸'이라고 표현하셨죠.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눈을 뜨는 거예요. 진리에 눈을 떴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존재감이 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그의 삶이 전환이 된 것을 말하죠. 그의 삶이 전환됐기 때문에, 그의 일상의 삶에서 그가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죠.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의 행복입니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행복,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놀 수 있어서 행복하고, 잠잘 수 있어서 행복하고,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순간에 행복을 원하죠. 깨달음을 원하는 분들은 뭔가가 터지면, 폭죽이 터지듯이 터지며는, 그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슬롯 머신 기계에서 코인이 우르르 떨어지듯이 뭔가 떨어지는 것 처럼 생각하죠. 근데 깨달음이란 그런 것 아니거든! 뭐가 터지고 그런 것 아니예요. 생각이 바뀌죠. 절대적으로 생각이 바뀝니다. 절대적으로 생각이 바뀌기 때문에,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행복을 파는 짓은 안하죠.
인간은 가장 지혜롭습니다. 이 지혜로운 인간이 행복을 사기 위해서 행복을 판다는 것. 참, 이것을 모순이라고 해야 되는 건가요? 아니며는 탁월한 결정이라고 해야 되는 가요? 행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중정입니다. 중정에 있어야 매 순간의 선택을, 미래를 향해서 선택하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르지 과거로 향해서는 흐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과거로 흐른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떤 할아버지가 젊어지는 샘물에 가서, 물을 퍼 먹었죠. 우리 옛날 설화에 그런 것 있잖습니까? 젊어지는 샘물에 가서 샘물을 먹었는데, 한 바가지를 먹으면 조금 젊어지고, 두 바가지를 먹으면, 좀 더 젊어지는데... 아무리 할머니가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길래 올라가보니, 너무너무 많이 퍼먹어서 갓난아이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적당히 먹고 내려와야 하는데, 너무 먹었어. 그래서 애기가 됐어. 우리가 과거로 시간이 흐른다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과거로 시간이 흐른다며는 내 지난 날의 지우고 싶은 발자국을 지울 수 있겠죠. 아! 내 그 때, 수학 50점 맞았을 때, 수학책을 팽개치고 수학이여 굿 바이!하지 않고, 정말 잠안자고 수학을 팠더라면, 이런 생각 때문에 후회할 때 과거로 돌아가서, 과감히 수학책을 꺼내 들고, 오직 수학만 파서 수학도사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생각은 짊어질 수 있지만, 과거의 발자국은 지울 수가 없어요. 인간은 과거의 생각을 지고 미래를 향해 가는 짐꾼에 불과하죠. 과거의 생각을 짊어지고 미래를 가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행복을 담보해내지 못해요. 시간은 과거로 흐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직 미래로 흐를 뿐이지. 부처님께서 약속의 땅, 화림을 이야기하듯이, 우리 또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돼요, 사실. 우리가 고민해야 될 것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 우리가 얼마만큼 저축해 나갈 수 있느냐는 거예요. 미래의 행복은 현재에 저축하는 거예요. 미래에 행복은 현재에 투자하지 않으면, 미래에 행복을 얻지 못하죠. 오직 봄에 씨앗을 뿌린 사람만이 가을에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 봄에 씨앗을 못 뿌리셨다고요? 그래서 거둘 것이 없다구요? 그러면 헐 수 없죠. 말을 타고 칼을 들고 나갈 수 밖에. 봄에 씨앗을 못 뿌렸으면, 말을 타고 칼을 들든지, 아니면 탱크를 몰고 나가서 가지고 오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거예요. 왜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냐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봄에 씨앗을 뿌려서 가을에 거둘게 없다고, 탱크를 몰고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거예요. 말을 타고, 칼을 들고 나갈 수 있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는 천고마비는 불안과 공포를 뜻하는 사자성어라고. 몽고 초원에 유목민들이 가을이 되며는 초목은 시들고 먹을게 없죠. 저 중국 평원에는 그저 곡식이 영글었습니다. 그 영글은 곡식을 한족들이 쌓아서 창고에 담아 놨죠. 몽고초원의 추장이 말하죠. "그들이 우리를 위해서 양식을 장만했단다. 자! 간다. 가지러.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줄 것이 없다. 그들에 줄 것은 오직 칼 뿐이지." 그들은 목숨을 걸고 가족을 위해서, 초원을 넘어서 약탈을 하러 왔죠. 그래서 천고마비의 계절이예요. 몽고 평원에 말이 살찌고, 하늘은 높아졌으니, 유목민들이 칼을 들고 약탈을 하러 오는 계절이라는 거죠.
부처님의 조상도 그런 출신들입니다. 부처님이 속한 종족, 크샤트리아는 본래 약탈을 전문으로 했던 집단이었어요. 부처님이, 크샤트리아 전사가 칼을 놓은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원래 크샤트리아는 오직 다른 민족과 타 부족을 약탈하기 위한 부족이었어요. 본래 그게 크샤트리아예요. 약탈하러간 크샤트리아들이 많이 많이 약탈해 오라고 집에서 향불 피우고, 신에게 기도하던 것이 인도의 브라흐민들이죠. 알고 보면, 인도 종교의 기원은 약탈물을 많이 해온다는 걸 보호해달라는 기도하는 거였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어요. 약탈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봄에 씨뿌리고, 가을에 곡식을 거둬야 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죠. 다행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거기에도 편법은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씨앗을 안 뿌렸어도 다 가져오는 방법이 있어. 그 편법이 있다고. 그건 내가 안 가르켜 줘요.
우리는 오직 봄에 씨뿌려야만 됩니다. 그래야 가을에 거둘 수 있어요. 미래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도, 지금 뿌리지 않으면 거두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2,500년 동안, 부처님께서 그렇게 간곡하게 이야기를 하셨는데도, 내가 보니 물고기띠는 없어. 전부 다 쥐띠, 소띠, 양띠, 뭐 이런 수없는 띠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물고기 띠처럼. 아시죠? 물고기는 한 떼가 모여 있을 때, 거기서 몇 마리 잡아 올리면 놀래서 다 도망가죠. 그런데 쫌 있으면, 다시 또 몰려 옵니다. 마치 물고기떼처럼 조금 전의 일은 깡그리 잊죠. 마 부처님께서 그렇게 간곡하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욕망을 경계하시고,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지 말라! 알겠는냐? 예, 대답이 끝나자마자 옆에 비구한테 말하죠. '얼마 줄껀데?'
우리가 정말 부처님의 말씀을 간곡하게 머릿 속에다가 담아 둬야 돼요. 물고기들처럼 금방 '예'하고 그자리에서 바로 돌아서자 마자 "내꺼 얼마줄래?" 이런 흥정을 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지금의 좋은 상태를 만족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즉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는 뜻이죠. 조금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고 하는 뜻은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현재의 행복을 사지 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근데 우리는 오직 지금의 행복을 말하죠. 지금의 행복을 말하고 지금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그릇됐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예요. 중정에 있으라는 얘기예요. 지금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행복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왜 미래의 행복이 더 중요한지 아세요?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윤회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윤회? 어렵게 생각하실 것이 없어요. 윤회라고 하는 말은 '미래가 있다'라고 하는 말이죠. 미래가 존재한다는 말이예요. 윤회라고 하는 것은 미래라고 하는 뜻이예요.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해요. 윤회를 인정하죠. 그것도 여러 번의 미래를. 그런데 아직 갈 길은 먼 데, 아직 가야할 길은 먼 데, 양식이 떨어졌다며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그전에 경북 봉화 각하사 동암이라고 하는 절에 갔어요. 거기 내가 우리 문중에 속하는 어른이 계서서 갔었죠. 거기서 나는 자고 태백쪽으로다가 넘어올라고 생각했었어요. 거기서 태백산 쪽으로 나오는 길이 있다는거예요. 그래서 그 길을 물어서 택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어요. 하아, 배는 고프지요, 그 날 열 몇 시간을 걸었어요. 내가 3개도를 지난 사람이예요, 그 날. 경북에서 지났는데, 어느 지점에 가니 완전 길을 잘못 들었어요. 마을이 나와요. 아니 마을이랄 것도 없어요.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까 강원도라는 거예요. 또 다음을 향해서 갔어요. 내가 이야길 하니까, 절루 쭈욱 가라는 거예요. 가서 물으니까 경북이래. 경북-강원도, 강원도-경북, 내 그렇게 간 사람이예요. 내가 전에도 한 번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때는 마을에 음식 얻어 먹으면, 죽는 줄 알았어. 만경대까지 갈라 그랬는데, 쫄 쫄 굶고, 껌껌해서야 도착한 것이 영월 상동이었어요. 마치 이와 같습니다. 갈 길은 먼데, 날은 어두워지고 있는데, 먹을 거는 떨어졌고. 체력은 떨어져서 더 이상, 두 다리는 외치죠. '이젠 니혼자 가라'고, '나는 몬가겠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윤회는 미래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른 거 아니예요. 우리가 윤회라고 하는 말을 괴엥장히 어렵게 설명하는데, 어렵게 설명할 거 없어요. 윤회는 미래다. 단순해요. 꼭 시원찮은 선생이 어렵게 공부를 가르치는 거예요. 또 공부 못하는 친구가 꼭 어렵게 생각하죠. 윤회라고 하는 것은 미래라고 하는 뜻이예요. 즉 미래를 향해서 진행한다고 하는 뜻이지요. 시간은 미래를 향해서 흐르죠.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미래는 존재합니다. 내가 그 미래에서 어떤 경험을 할지는 알수가 없죠. 중요한 거는 지금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가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러기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지금 팔아버리면, 우리는 미래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미래에 눈물을 흘리기 싫으면, 미래에 눈물 흘릴 일을 만들지 말아야죠. 부처님이 욕망을 경계하는 이유도 그거고, 지금을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거예요. 지금 불행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굶고 앉아 계시지 마십시요.
오늘 강론은 여기까집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미래의 행복을 팔아서, 미래의 행복을 팔아 현재의 행복을 사지 마라.' 그게 오늘 강론의 주젭니다.
오늘 어떤 분이 좀 기도를 이끌어 주실라는가요? 아이 뭐 날씨도 춥고, 법당 안도 춥고, 뭐 좀 따끈따끈한 기도를 어떤 분이 이끌어 주실라는가요? (일동 눈길 피하며 침묵) 자, 다함께 합장하시지요.
자비하신 부처님! 저희들은 미래의 행복을 팔아, 현재의 행복을 사는 삶을 살았다고, 긍정할 수는 없지만, 또한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중정의 자리에 나를 두고, 미래의 행복을 담보해내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노력하는 저희들의 미래에 따뜻한 봄날의 햇살을 비춰 주시고, 저희 가는 미래에 연꽃향 가득한 세계가 되도록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는 저와 저희 가족과 이 민족에게도 부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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