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4. 15:5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선종(禪宗)의 돈오무수(頓悟無修)
육조혜능의 법을 계승하여 중국 선종(禪宗)의 황금시대를 펼친 마조도일(馬祖道一)과 석두희천(石頭希遷) 문하의 법은 다만 분별에서 벗어난 불이중도(不二中道)를 말할 뿐, 어떤 수행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중국 선종은 돈오무수(頓悟無修)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선 마조 문하인 홍주종(洪州宗)을 대표하는 마조․백장․황벽․임제의 말을 통하여 그들이 깨달음과 수행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1) 마조도일
①돈오(頓悟)
“만약 재질이 뛰어난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아,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53)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아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불이법(不二法)인 본성을 본다. 깨달음은 말을 듣고서 곧장 통하는 돈오(頓悟)이다.
②무수(無修)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를 닦는 것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아서 이룬다고 하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聲聞)54)과 같을 것이다.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하면, 곧 범부(凡夫)55)와 같을 것이다.”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견해(見解)를 내어야 도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자성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에 머물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선에 머물고 악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등은 곧 조작(造作)에 속한다. 만약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삼계(三界)를 헤아리는 마음56)이 없도록만 하여라.”57)
도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법에 통할 뿐이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면 이것은 분별하여 조작하는 것이니 중생의 망상이다. 분별망상에 오염되지 않으면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다.
(2) 백장회해
①돈오(頓悟)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大乘)에서 도(道)에 들어가 문득 깨닫는 법[돈오법(頓悟法)]입니까?”
백장이 답했다.
“그대는 먼저 모든 인연을 버리고 온갖 일을 쉬어라.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세간의 온갖 것들을 전부 내려놓아라.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58) 말고, 몸과 마음을 내버리고 자재(自在)하게 되어라. 마음이 나무나 돌과 같으면, 입은 말이 없고 마음은 행하는 것이 없다. 마음이 허공과 같으면 지혜의 태양이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구름이 열리고 해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모든 얽매임59)을 모두 쉬어서 탐냄․성냄․좋아함․집착함․더러움․깨끗함 등의 분별심60)이 사라지고, 오욕(五欲)61)과 팔풍(八風)62)을 만나도 보고․듣고․느끼고․알고에 묶이지 않고, 온갖 경계에 정신을 빼앗기지63) 않는 신통묘용(神通妙用)64)이 저절로 갖추어지니, 곧 해탈한 사람이다.”65)
대승불교에서 도(道)에 들어가는 돈오법(頓悟法)이란,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법(不二法)에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돈오법은 곧 모든 분별에서 벗어난 불이법이고 공(空)임을 밝히고 있다.
②무수(無修)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다.” “닦음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지금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불료의교(不了義敎)의 말씀이고, 차어(遮語)가 아니고, 총어(總語)이고, 한 되를 짊어지는 말이고, 더러운 법 쪽을 선택한 말이고, 순유(順喩)이고, 죽은 말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닦아서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요의교(了義敎)의 말이고, 차어(遮語)이고, 별어(別語)이고, 백 섬을 짊어지는 말이고, 삼승(三乘)66)의 가르침 밖의 말이고, 역유(逆喩)의 말이고, 깨끗한 법 쪽을 선택한 말이고, 살아 있는 말이고, 공부의 지위(地位)67)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68)
“수행하여 깨닫는다.”거나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는 말은 분별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부에게 알맞은 죽은 말이고, “수행하여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거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말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하는 살아 있는 참된 말이다. “수행하여 깨닫는다.”거나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는 말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는 말이고, “수행하여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거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말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이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지 않는 말일 뿐만 아니라, 어떤 분별도 절차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이것이 견성(見性)이고 불이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수행이다.
다만 모든 소리와 색깔을 벗어나고 또 벗어남에도 머물지 않고 또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것이 수행이다.69)
이렇게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한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 것은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깨달음이다. 결국 참된 수행이란 다만 불이중도의 깨달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니, 깨달음 밖에 따로 수행은 없다.
(3) 황벽희운
①돈오(頓悟)
“다만 곧장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문득 깨달아, 얻을 법이 하나도 없고 닦을 수행이 하나도 없으면, 이것이 위없는 깨달음이고 참되고 변함 없는 부처이다.”70)
“즉각 마음이 없으면 곧장 본래의 법이다. 마치 힘센 역사(力士)가 이마에 박힌 구슬을 잃어버리고 밖에서 찾아다니며 온 세계를 두루 다녔으나 마침내 찾지 못했는데, 지혜로운 사람이 가리켜 주니 그 순간 본래의 구슬이 그대로 있음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71) 따라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자기의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고 구하며 애써 노력하여 순차적으로 깨달으려 한다면, 무한한 세월을 애써 구하더라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당장 마음이 없음만 못하다.”72)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데, 마음은 본래부터 언제나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즉각 깨달을 수 있고 단계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자기 머리를 찾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마음 스스로를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은 언제나 돈오(頓悟)이다. 언제나 분별이 망상이므로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찾을 마음이 따로 없다면 즉각 깨달음이다.
②무수(無修)
“견해의 장애에 가로막히기 때문에 조사께선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부처로서 닦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밝음도 어둠도 아님을 곧장 가리키셨다.”73)
“오직 이 한 개 마음 뿐, 얻을 수 있는 법은 티끌만큼도 없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이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본바탕을 깨닫지는 못하고 곧장 마음 위에서 마음을 내니,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이고 모습을 붙잡고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두가 악법(惡法)이고 깨달음이 아니다.”74)
“이 마음은 곧 마음 없는 마음이니, 모든 모습을 벗어나 중생과 부처가 전혀 차별이 없다. 다만 마음이 없기만 하면 곧장 마지막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당장 마음이 없지 못하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修行)하더라도 마침내 깨달을 수 없으니, 삼승(三乘)75)의 수행76)에 매여서 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77)
“설사 무한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하고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순간 깨달을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 깨달았을 때에 오랫동안 행해 온 노력을 돌이켜 보면 모두가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78)
수행은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므로 깨달음이 아니다. 수행하면 깨달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당장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는 분별조차도 없으면 깨달음이니, 마음조차 없어진 깨달음에서 다시 수행할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4) 임제의현
①돈오
“그대가 한순간 마음에서 의심하는 곳이 곧 부처와 마귀이다. 그대가 만약 온갖 법은 생겨나지 않으며 마음이 환상처럼 조화를 부린다는 것을 밝게 깨달으면, 다시는 하나의 경계도 없고 하나의 법도 없어서 곳곳이 모두 깨끗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귀는 더럽거나 깨끗한 두 가지 경계이다.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깨닫는 자는 곧장 깨달을 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언제든 또 다른 법이 없다. 설사 이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말한다.”79)
곧장 깨달으면 모든 분별경계는 사라지니, 깨달음도 없고 수행도 없고, 부처도 없고 마귀도 없다.
②무수
“그대들은 곳곳에서 ‘도(道)에는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삶과 죽음을 떠돌아다닐 업(業)이다. 그대들은 또 ‘육바라밀을 고루 닦는다.’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 없는 사람이다.”80)
“어떤 부류의 눈먼 중들81)은 배불리 밥을 먹고는 곧 좌선관행(坐禪觀行)82)을 하며, 흘러나오는 생각을 꽉 붙잡고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나83), 이것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조사(祖師)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살펴보고,
마음을 들어 밖으로 비추어보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깨끗이 하며,
마음을 모아서 정(定)에 든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조작하는 짓이다.’84)
그대는 지금 이렇게 법을 듣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어떻게85) 닦겠으며, 이 사람을 어떻게 깨닫겠으며, 이 사람을 어떻게 꾸미겠는가? 이 사람86)은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다.”87)
“스님들이여! 여러 곳에서는, ‘닦아야 할 도(道)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法)이 있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엇이 부족하길래,88) 어느 곳을 닦아서 보충하겠다는 것인가? … 그러므로 말한다.
‘만약 사람이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만가지 삿된 경계가 다투어 나타난다.
지혜의 칼을 빼면 한 물건도 없으니,
밝음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어둠이 밝아진다.’89)
그러므로 옛 사람은, ‘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90)라고 말했던 것이다.”91)
수행이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닦는 것이니 헛된 망상이고 엉터리 조작일 뿐이다. 오직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달하여 한 물건도 없고 아무 일도 없을 뿐이다.
53) 若是上根衆生, 忽爾遇善知識指示, 言下領會, 更不歷於階級地位, 頓悟本性.(<사가어록> <마조록>)
54) 성문(聲聞) : 소승의 수행자. 성문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데, 이러한 수행은 의도적으로 노력하여 이룬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사라진다.
55) 범부(凡夫) : 범부는 애초에 깨달음과 공부에 대하여 아무 관심 없이 습관적으로 분별의 세계를 살아간다.
56) 심량(心量) : 중생이 마음에 미혹을 일으켜 갖가지 외계의 대상을 생각하는 것.
57) 僧問: “如何是脩道?” 曰: “道不屬脩. 若言脩得, 脩成還壞, 卽同聲聞. 若言不脩, 卽同凡夫.” 又問: “作何見解, 卽得達道?” 祖曰: “自性本來具足. 但於善惡事中不滯, 喚作脩道人. 居善捨惡, 觀空入定, 卽屬造作. 更若向外馳求, 轉疏轉遠. 但盡三界心量.(<사가어록> <마조록>)
58) 연념(緣念) : 대상을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 대상을 인식하는 것.
59) 반연(攀緣) : ①(물건을) 타고 기어오르다. 붙잡고 기어오르다. ②얽매이다. 집착하다. 관계하다. 매달리다.
60) 정(情) : 식정(識情). 정식(情識). 분별의식. 분별심.
61) 오욕(五欲) : 색욕(色欲)․성욕(聲欲)․향욕(香欲)․미욕(味欲)․촉욕(觸欲) 등 다섯 가지 욕망을 가리키거나, 재욕(財欲)․색욕(色欲)․음식욕(飮食欲)․명예욕(名譽欲)․수면욕(睡眠欲) 등의 다섯을 가리킨다.
62) 팔풍(八風) : 수행자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8가지 장애. 이(利)․쇠(衰)․훼(毁)․예(譽)․칭(稱)․기(譏)․고(苦)․낙(樂)을 합쳐 8풍이라 한다. 이(利)는 뜻에 맞는 것, 쇠(衰)는 뜻에 거스르는 것, 훼(毁)는 뒤에서 비방하는 것, 예(譽)는 뒤에서 칭찬하는 것, 칭(稱)은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 기(譏)는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 고(苦)는 신심(身心)을 괴롭히는 것, 낙(樂)은 신심(身心)을 즐겁게 하는 것.
63) 혹(惑) : 현혹(眩惑)시키다. 정신을 빼앗기다. 갈팡질팡하다.
64) 신통묘용(神通妙用) : 신령스러이 통하고 묘하게 작용한다. 걸림없이 자재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말.
65) 問: “如何是大乘入道頓悟法?” 師荅曰: “汝先歇諸緣, 休息万事. 善与不善, 世間一切諸法, 並皆放却. 莫記憶, 莫緣念, 放捨身心, 令其自在. 心如木石, 口無所辯, 心無所行. 心地若空, 慧日自現, 猶如雲開日出相似. 俱歇一切攀緣, 貪嗔愛取垢淨情盡, 對五欲八風, 不被見聞覺知所縛, 不被諸境惑, 自然具足神通妙用, 是解脫人.(<조당집(祖堂集)> 제14권 ‘백장화상(百丈和尙)’)
66) 삼승(三乘) : 세 가지 탈것, 세 가지 입장, 3가지 길을 걷는 자 또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세 가지 실천법을 일컫는다. 승(乘)은 사람을 태워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에 각각 상응하는 가르침 또는 입장으로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라는 3가지 실천 방법을 말한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小乘), 불승(佛乘)으로도 불리는 보살승은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불도를 닦는 모든 사람 또는 입장을 총괄하는 말이기도 하다.
67) 지위(地位) : ①삼현(三賢)과 십성(十聖) 등의 계급. ②보살의 52위 가운데, 제41위에서 50위까지의 십지(十地)를 말함.
68) 說道: “修行得佛.” “有修有證.” “是心是佛.” “卽心卽佛.” 是佛說, 是不了義敎語, 是不遮語, 是總語, 是升合擔語, 是揀穢法邊語, 是順喩語, 是死語, 是凡夫前語. “不許修行得佛.” “無修無證.” “非心非佛.” 亦是佛說, 是了義敎語, 是遮語, 是別語, 是百石擔語, 是三乘敎外語, 是逆喩語, 是揀淨法邊語, 是生語, 是地位人前語.(<천성광등록> 제9권 <백장록>)
69) 但離一切聲色, 亦不住於離, 亦不住於知解, 是修行.(<천성광등록> 제9권 <백장록>)
70) 唯直下頓了自心本來是佛, 無一法可得, 無一行可修, 此是無上道, 此是眞如佛.(<전심법요(傳心法要)>)
71) 역사액주유(力士額珠喩) : 40권 <대반열반경> 제7권에 나오는 비유. 본심이 비록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나 여전히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내용. 경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왕가(王家)에 힘센 장사가 있었는데, 그의 미간에는 금강주(金剛珠)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장사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서로 치고받다가 그 장사가 머리로 이 장사의 이마를 받았다. 그 바람에 이 장사의 이마에 있던 구슬이 살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부스럼이 생겼기 때문에 의사를 불러 치료하고자 했다. 그때 처방과 약을 잘 아는 뛰어난 의사는 곧 이 부스럼이 구슬이 몸에 들어간 때문인 줄을 알았다. 이 구슬이 피부를 파고 들어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의사가 장사에게 물었다. ‘당신 이마 위의 구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사가 놀라서 답했다. ‘의사 선생님, 제 이마 위에 구슬이 없습니까? 구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장사는 이것이 꿈이 아니었으므로 근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의사가 장사를 위로하며 일러 주었다. ‘당신은 지금 크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싸울 때에 구슬이 몸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지금은 피부 속에서 그림자만 밖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당신들이 싸울 때에 화가 가득 나 있었기 때문에 구슬이 몸에 박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장사는 의사를 믿지 않고서 말했다. ‘피부 속에 있다면, 더러운 고름이 생겼을 터인데 왜 밖으로 고름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근육 속에 있다면, 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찌하여 나를 속이십니까?’ 그때 의사는 거울을 가져와 장사의 얼굴을 비추었다. 구슬이 거울 속에 분명히 나타났다. 장사는 그것을 보고서야 마음에 놀랍고 이상함을 품고서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선남자여, 모든 중생들 역시 이와 같다. 선지식을 직접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불성을 가지고 있으나 전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72) 當下無心, 便是本法. 如力士, 迷額內珠, 向外求覓, 周行十方, 終不能得, 智者指之, 當時自見本珠如故. 故學道人迷自本心, 不認爲佛, 遂向外求覓, 起功用行, 依次第證, 歷劫勤求, 永不成道, 不如當下無心.(<전심법요>)
73) 被見障故, 祖師直指一切衆生本心本體本來是佛, 不假修成, 不屬漸次, 不是明暗.(<완릉록(宛陵錄)>)
74) 唯此一心, 更無微塵許法可得. 卽心是佛. 如今學道人, 不悟此心體, 便於心上生心, 向外求佛, 着相修行, 皆是惡法, 非菩提道.(<전심법요>)
75) 삼승(三乘) : 세 가지 탈 것. 깨달음을 성취하는 세 가지 길. 수레[승(乘)]은 사람을 태워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라는 3가지 실천 방법을 말한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小乘), 불승(佛乘)으로도 불리는 보살승은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76) 공행(功行) : 공(功)은 수행으로 나타나는 효과. 공행(功行)은 공을 동반하는 행위이니 곧 수행(修行)과 같다.
77) 此心卽無心之心, 離一切相, 衆生諸佛, 更無差別. 但能無心, 便是究竟. 學道人, 若不直下無心, 累劫修行, 終不成道, 被三乘功行拘繫, 不得解脫.(<전심법요>)
78) 縱使三祇精進修行, 歷諸地位, 及一念證時, 祇證元來自佛, 向上更不添得一物. 卻觀歷劫功用, 總是夢中妄爲.(<전심법요>)
79) 汝一念心疑處是佛魔. 汝若達得萬法無生, 心如幻化, 更無一塵一法, 處處淸淨是佛. 然佛與魔是染淨二境. 約山僧見處, 無佛無衆生, 無古無今. 得者便得, 不歷時節. 無修無證, 無得無失, 一切時中, 更無別法. 設有一法過此者, 我說如夢如化.(<천성광등록> 제11권 <임제록>)
80) 汝諸方言: ‘道有修有證.’ 莫錯. 設有修得者, 皆是生死業. 汝言: ‘六度萬行齊修.’ 我見皆是造業. 求佛求法卽是造地獄業, 求菩薩亦是造業, 看經看敎亦是造業. 佛與祖師是無事人.(<천성광등록> 제11권 <임제록>)
81) 할독자(瞎禿子) : 할자(瞎子)는 장님, 소경. 독자(禿子)는 대머리인 사람, 까까머리 사람. 할독자(瞎禿子)는 눈먼 대머리라는 뜻으로서, 법에 대한 안목이 없는 어리석은 승려를 가리킴.
82) 좌선관행(坐禪觀行) :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아서 정신을 한 곳에 모아 관법(觀法)을 행하는 것.
83) 보지공(寶誌公) 화상(和尙)의 <십사과송(十四科頌)>의 「정란불이(靜亂不二)」에서는 “성문(聲聞)은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만을 구하니 마치 밀가루를 버리고 떡을 찾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84) 이 구절은 <신회화상유집(神會和尙遺集)>, <남양화상단어(南陽和尙壇語)> 등에 나오는 구절로서,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가 북종선(北宗禪)의 특징을 요약하여 비판한 유명한 말이다.
85) 작마생(作麽生) : 어째서? 왜? 어떻게? 어떠하냐? 무엇하러? =작마(作麽), 즉마(則麽), 자심마(子甚麽), 자마(子麽).
86) 거(渠) : (3인칭 대명사) 그. 그이. 그 사람. =타(他).
87) 有一般瞎禿子, 飽喫飯了, 便坐禪觀行, 把捉念漏, 不令放起, 厭喧求靜, 是外道法. 祖師云: ‘汝若住心看靜, 擧心外照, 攝心內澄, 凝心入定, 如是之流, 皆是造作.’ 是汝如今與麽聽法底人,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 渠且不是修底物, 不具莊嚴得底物.(<천성광등록> 제11권 <임제록>)
88) 흠소(欠少) : 모자라다. 부족하다. 결핍하다.
89) 누구의 게송인지, 임제 자신의 게송인지 알 수 없다.
90) 마조도일(馬祖道一)도 이 말을 하였고(<전등록>제28권, <마조어록>), 마조의 제자인 남전보원(南泉普願)도 조주(趙州)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전등록>제10권).
91) 道流! 諸方說: ‘有道可修, 有法可證.’ 汝說證何法修何道? 汝令用處, 欠少什麽物, 修補何處? … 所以言: ‘若人修道道不行, 萬般邪境競頭生. 智劍出來無一物, 明頭未顯暗頭明.’ 所以古人云: ‘平常心是道.’(<천성광등록> 제11권 <임제록>)
-출처 - 무심선원
90년대~2004년 리믹스 (가요-댄스-나이트음악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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