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라! |…… 혜천스님설교

2019. 3. 10. 17: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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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 2556년 1월 8일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라!  

 

 

지난 주 부터 이번 주, 다음 주까지 부처님 성도재일 주간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가 임박했음을 마라들이 느끼고,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마라들이 무리를 지어 부처님을 공격했다고 그래요. 부처님께서 그 마라들의 공격을 방어하시고, 새벽에 태백성을 보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죠.

 

우리가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부처님의 성도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배우려고 노력하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님의 근강부동심입니다. 금강처럼 흔들림이 없는 마음, 그 마음을 배워야 되요. 부처님이 금강부동심으로 보리수 아래에서, 팔방에서 밀려오는 마군들을 금강 부동심으로 물리치셨다는 거예요. 금강부동심이라고 하는 것은 불퇴전의 의지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간결하게 정리하면, 딱 세 가지로 정리되죠. 첫째, 노력하라! 둘째, 노력하라! 셋째, 노력하라! 부처님의 말씀은 딱 세 가지로 정리돼요.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라. 다른 것이 없어요.

 

부처님이 지금을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각을 이룰 수 있다고 그랬어요. 우리는 지금을 만족하라고 그러잖아요. 또 우리가 그렇게 배우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지금을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각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지금을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거를 말하죠. 지금을 만족한다는 것은 사실 지금에 멈춰 있는 것을 뜻해요. 노력하고, 노력하는 것은 지금에 멈추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죠.

 

부처님은 출가해서 세 분의 스승을 모셨어요. 첫 번째 스승을 만났지만, 그에게 만족하지 못했고, 두 번째 스승을 만났지만 그에게도 만족하지 못했죠. 세 번째 스승을 만났지만 그에게도 역시 만족하지 못했어요. 세 스승에 의해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고행을 정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고행도 그만두고, 보리수와에 앉죠. 우리가 여기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를 읽어야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예요. 노력하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세 스승을 섬겼다가 세 스승과 결별한 것은 바로 이거를 말하죠. 우리는 한 번 도전해서 안 되면, 그저 마음이 산란하고 동요돼서 그만 두고 싶죠. 그저 한번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마음이 산란해서 그만둬요. 그래도 좀 나은 사람은 두 번 도전하죠. 그래 한 번은 더 도전해 봐야지 하고, 두 번째 도전을 하죠.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하는가요? 대체적으로 포기하죠. 세 번째 도전하는 사람은 사실 드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마음이 급해요. 그래서 한 번째 뭔가를 이루어보고 싶죠. 한 번째 뭔가를 끝내고 싶어요. 부처님도 한 번에 무엇을 이룬 것이 아니에요.

 

부처님이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는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점을 향해서 나아가야죠. 재빠른 사람은 뛰어갈 것이고, 재빠르지 못한 사람은 걸어서 기겠죠. 재빠르지도 못하고, 그렇지도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뛰지도 못하고 걸어가지도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여기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거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뛰어지기 못하고, 걸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포기하죠. 부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예요. 목표가 정했으면, 그 목표점을 향해서 기어서라도 가라는 거예요. 네 발로 기어서라도 그 목표점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뛰어서 가고, 걸어서 가는 것은 훌륭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말이 있습니다. ‘천재를 이기는 것은 노력하는 바보다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천재는 노력하는 바보에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재주가 넘쳐나는 사람은 깨알처럼 흔해 빠졌죠.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하는 거예요. 천재는 노력하는 바보를 이기지 못합니다. 뛰어가고, 걸어가는 것은 훌륭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네 발로라도 기어서 가는 것, 그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죠.

 

왜 우리가 네 발로 기어가지 못하는지 아세요. 너무 많이 남을 의식하기 때문이죠. 저 사람은 뛰어가고, 저 사람은 걸어가는데, 내가 기어서 가며는 남들의 비웃음을 살까봐 그게 두려워서 기지 못하는 거예요.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어요, 사실은.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거죠.

 

나폴레옹이 죽으면서 이 말을 했다던가요? “평생 내가 행복했던 시간은 일곱 시간에 불과했다한 때 유럽을 정복했던 나폴레옹이 죽으면서 한 말이에요. 7시간만 그의 생애에서 행복했다는 거예요. 누가 나를 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거죠. 어느 누구도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준은 내 자신이 기준이에요. 도대체 어떤 것이 기준인가요? 행복에는 기준이 없죠. 뛰어 간다는 것도 그 사람 기준이고, 걸어서 가야 한다는 것도 그 사람 기준이에요. 내가 기어 가며는, 그 목표점에 가는 방법은 기어가는 것이 기준이죠.

 

만약에 부처님께서 그 목표점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며는 뛰어오는 사람을 더 반기실까요, 아니면 걸어오는 사람을 반기실까요, 아니면 기어서라도 오는 사람을 반기실까요? 아마 부처님께서는 뛰어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축복은 주시겠지마는, 기어오는 사람처럼 그렇게 반가와 하시진 않으실 거예요. 그 목표점을 향해서 오는 사람은 불굴의 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금강의 부동심이죠.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이 인간 세계에 살면서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죠, 사실. 이솝우화에서 보며는 두 부자가 당나귀를 타고 가죠. 두 부자가 당나귀를 타고 가는 걸 보고, 처음에는 아이가 타죠. 그런데 주위에서 늙은 아버지는 걷고, 아이가 탔냐니까, 그 다음에는 아이가 타고 아버지가 걷죠. 그래 뭐라고 그러는가요? 아이를 걷키고 지가 탔네. 그러니까 또 뭐라 그래요? 세상에! 저 불쌍한 당나귀 보게. 둘이 같이 탔구만. 결국은 두 부자가 당나귀를 메고 가죠.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우리는 남을 너무 많이 의식한다는 거예요. 남을 너무 의식해서 자기의 의지를 유지하기가 어렵죠.

 

우리가 네 발로 기어서 목표점에 가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이에요. 왜 마음이 끊임없이 흔들릴까요? 우리는 힘들고 어려우며는, 힘들고 어려운 거는 피하고 싶죠. 피할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피하지 말아야죠.

 

삼국지에, 삼국지연의라고 하는 소설을 보면, 승상 조조가 한중을 공략하러 가죠. 군사 20만을 이끌고 말입니다. 한중이라고 하는 지역은 작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조조가 가서 엄청나게 고전을 하고, 애를 먹죠. 애를 먹는 이유는 한중의 군사지휘관이 전면적으로 붙는 게 아니라 게릴라전을 하죠. 한중은 산악지역입니다. 숨어서 밤에만 공격을 하죠. 적이 보이지 않으니까 적과 싸울 수 없어요. 속수무책으로 당하죠. 보이는 적과는 싸울 수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적과는 싸울 수가 없어요. 눈앞에 적은 두려울 게 없죠.

 

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세요? 적을 눈앞에 두는 거죠. 적을 눈앞에 두고 감시하며는 아주 안전해지죠. 우리는 적을 멀리 둘려고 해요. 무서워서요. 무서워서 멀리 둘려고 하니까 적이 더 무서워지죠. 적의 움직임을 알 수가 없으니까요. 적을 눈앞에 두면 무서워지지 않죠. 위험하지가 않아요. 적을 멀리 두고 우리가 무서워하죠. 적을 멀리 두니까, 적의 움직임을 알 수가 없껄랑요. 적일수록 가까이 눈앞에 둬야죠. 눈앞에 두며는 아주 안전해 집니다.

 

우리가 일전에 김정일가 죽었는데, 사십 몇 시간 동안 몰랐죠. 김정일가 죽었는지도 몰르는데, 우리가 북한에 대해 뭘 할 수 있겠어요? 정부가 이렇게 변명했죠. 미국도 몰랐다고. 미국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 미국은 김정일이가 죽든 안 죽든 관계가 없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김정일이가 죽은 걸 모르며는 안되죠.

 

우리는 무섭고, 두려워서 끊임없이 장벽만 올려쌓죠. 아무리 장벽을 올려쌓는다 그래서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해결되려면, 장벽을 걷어낼 때만 두려움이 해결되죠. 우리가 집안에 있는 것은 안전합니다. 벽과 문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지마는 집밖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모르기 때문에 굉장히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적은 두려울 것이 없어요.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두렵죠. 담벽을 높이 쌓으면 쌓을수록 더 위험해지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 담벽을 쌓아요.

 

우리가 마치 어떤 기준을 만드는 거도 똑같습니다. 기준은 내가 기준이지 어는 누구도 기준이 될 수 없어요. 옛날에는 우리나라는 공자가 기준이었죠. 어떻게 공자만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하다못해 제사를 지내도 주자의 기준을 따라야 되었죠. 어디 주자만이 기준이 될 수가 있는가요? 어는 한 사람만이 기준일 수는 없죠. 각자가 다 기준이죠. 왜 스스로가 기준이 못되느냐? 스스로가 기준이 못되는 이유는 끊임없이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죠. 혹시 내가 이로 인해서 난에게 비난받으면 어떨까? 혹시 이로 인해서 나만 왕따 당하는 것 아니여? 이래서 혹시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니여? 라고 하는 그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우리가 기준이 못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보리수와에서 무엇을 새롭게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새롭게 얻었다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부처님은 단지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을 뿐이죠.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성도할 수 있었던 겁니다. 불퇴전의 의지로 말입니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해라! 그 이상이 없어요.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처음에 하셨죠. “성가시다는 마음으로 나는 설법할 생각이 없었다.” 인도의 브라흐마 신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했을 때, 부처님께서 한신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돼요.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노력하라는 거였어요. 성가신 마음 때문에 설법을 하려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단순히 그 이야기를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퇴전의 의지로서 노력하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부처님의 처음 말씀과 마지막 말씀은 노력하라는 겁니다. 금강부동심으로. 흔들리지 말고. 목표점이 정해지면, 네 발로 기어서래도 그 목표점을 향해서 가라!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에게 배워야 할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노력이죠. 노력하고 노력하는 것, 지금을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부처님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예요.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흔들리죠.

 

부처님께서는 미망을 버리라고 하셨죠. 미망은 두려움입니다. 왜 두려운가요?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보이면 두렵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알면 두렵지가 않아요. 모르면요, 시내버스 타는 것도 두렵습니다. 시내버스 타는 것이 왜 두렵냐고요. 번호를 읽지 못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몇 번 버스인지 읽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느 행인지 읽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두려울 수밖에 없죠.

 

우리가 두렵기 때문에 적군을 격리시키고 장벽을 높이 높이 쌓죠. 즉 나와 너의 사이에 장벽을 쌓는 거예요. 우리가 두려움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두 번이 안 되면 세 번, 세 번이 안 되면 네 번 도전하는 금강부동신의 불굴의 의지가 필요하죠. 우리가 부처님의 성도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금강 같은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것,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그럴려며는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두려움을 제거해야죠. 사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세 명의 스승과 결별했는데, 우리가 과거와 결별하지 못하는 것도 두려움 때문이죠. 과거와 결별하지 않으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과거를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빨아야 돼요. 과거야 결별해야 만이 미래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은 미래로 흐르지 과거로 흐르지 않걸랑요. 우리는 싫든 좋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직 미래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과거로 갈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과거가 지금을 지배한다고 본다면, 뭔가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부처님이 보리수와에서 한 생각을 바꿨을 뿐인데. 한 생각을 바꾸니까, 고타마 싯타르타 왕자가 붓다가 된 거죠. 우리는 한 생각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맨 날 그 식이 장 식으로 살죠. 똑같은 일을 똑같이 고민하고, 똑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생각을 바꾸는 기도가 되어야 되고, 생각을 바꾸는 수행이 되어야죠. 생각을 바꾸는 기도, 생각을 바꾸는 수행이 되어야만이, 제대로 된 기도라 할 수 있고, 제대로 된 수행이라 할 수 있어요.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어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나는 하나라고 봅니다. 오직 노력하고 노력하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지금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그 노력말이예요. 네 발로라도 기어서라도 그 목표점을 향해서 나아가는 노력 말입니다. 뛰어가느냐, 걸어가느냐, 그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어서라도 목표점에 가면 됩니다. 기어서라도 목표점에 간 사람만이 진실한 수행자라고 할 수가 있죠. 그 사람이 바로 승리자입니다.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그 목표점에 통과한 사람은. 뛰어왔는지, 걸어왔는지, 기어왔는지.

 

항상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는 그러한 삶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며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 번에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다못해 부엌의 식칼도 끊임없이 담금질과 두드림을 통해서 만들어지죠. 담금질과 두드림이 없으면, 식칼조차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물며 우리 삶의 행복이야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오직 나 자신을 기준을 삼아서 금강 부동심으로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공자도 어느 누구도 기준이 될 수 없어요. ? 내가 공자가 아닌데 공자를 기준 삼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공자는 공자고, 나는 나지.

 

항상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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