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마의 보편성|…… 혜천스님설교

2019. 3. 24. 10: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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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불기 2556129

다르마의 보편성

 

 

 

오늘은 지난 번 것에 이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는 다르마에서 출발한다고 제가 이야기했었죠. 그래서 다르마에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오늘은 다르마의 보편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고타마 싯타르타 왕자는 출가를 결심하면서, 그의 아내인 야소다라에게 이런 말을 하죠. “내가 출가하려고 하는 것은 세속을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비의 길을 찾기 위한 것이다. ”라고 하죠. 자신이 출가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비의 길을 찾고자 함이다.

 

불교의 출발점은 사실 잠부나무 아래에서 시작이 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잠부나무 아래에서 고타마 싯타르타 왕자는 이런 마음을 내죠. 왜 모든 사람들은, 왜 모든 생명은 행복하지 못한가? 왜 죽이고,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죠. 그리고 죽임을 당하는 많은 생명에게 무한한 아픔을 느끼죠.

 

고타마 싯타르타 스스로가 자비의 길을 찾기 위해서 출가를 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듯이, 다르마의 보편성은 사실 자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자비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모든 것의 근본은 자비라는 거예요. 수행의 근본도 자비고 기도의 근본도 자비입니다. 자비가 없는 수행은 좀비의 선(禪)일 뿐이죠. 자비가 없는 기도는 사악한 기도일 뿐이에요. 죽은 기도죠. 자비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비가요.

 

사실 우리가 자비(慈悲)라는 말을 붙여서 쓰지마는 본래 자()와 비()는 의미가 다르죠. 자는 사랑한다는 뜻이고, 비는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아파하는 것. 어떻게 보며는, 불교에서 자라하는 것보다는 비를 더 중요하게 여기죠. 아니, 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됩니다. 과거에는 자가 더 중요했을지 모르지마는, 현재와 미래에는 비가 더 중요하죠.

 

아파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왜 우리가 아파해야 할까요? 인간은 쉽게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쉽게 상처받죠. 그러기 때문에 아파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파함이 없는 둔감함은 인간의 죄악이죠. 우리는 사랑으로 소통하죠.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파함이 없으면 공감할 수가 없죠. 사랑이 소통이라면, 아파함은 공감하는 것입니다. 공감하지 않으며는 아파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한정되어져 있죠.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만이 나의 사랑에 동의하죠. 내 가족, 내 친족.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혈연 집단의 한계에 있죠. 원래 예수님께서 말한 사랑도 유대인에 한정된 것이였으니까요.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혈연적인 것입니다. 가까운 사랑과의 사랑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소통하죠.

 

아파하다고 하는 것은 공감한다는 뜻이죠. 공감하는 것은 혈연적인 것을 뛰어 넘습니다. 그것은 혈연의 문제가 아니죠. 우리가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파하지 않죠. 공감하면 아파합니다. 부처님은 잠부나무 아래에서 아파했죠. 내 여러 번 얘기했지만, 부처님은 크샤트리아 전사입니다. 크샤트리아 전사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죠. 크샤트리아 전사의 존재감은 오직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전장에서 보여지죠. 그러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파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우리는 아파할 줄 모르는 아주 둔감한 시대에 살고 있죠.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이라고 하는 것들, 아파할 줄 모르는 데서 오죠. 1%의 탐욕스러운 자들이 99%의 힘없는 자들을 약탈하는 것도 아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오죠. 아파할 줄 모르며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누겠어요? 자비가 다르마의 보편성이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다르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르마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살아서 숨 쉬지 않으면 안 되죠. 현실에서 살아 숨쉴려며는 자와 비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수레바퀴로다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로써 사랑하고, 사랑함으로써 소통하고. 비로써 공감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아파하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 해줘도, 내가 그거에 공감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죠. 공감할 수 있을 때.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은 쉽게 상처받는다고. 인간은 아주 작은 것에 상처받죠. 큰거루다 상처받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거로 상처 받죠. 인간은 그마만큼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그 상처받은 것을 위로 받고 치유 받지 않으면 안 되죠. 상처받은 것을 치유 받지 못하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할려면, 상처가 아물어야죠. 부처님께서 자와 비가 근본이 된다라고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우리 삶의 근본은 자와 비입니다. 그 중에서도 비죠. 아파할 수 있을 때, 사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파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해요누군가를 동정하고, 누군가를 연민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파한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죠. 우리는 누군가를 동정할 수도 연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파한다고 하는 것은 행동을 전제하니까요.

 

미국 유학을 가서, 30대에 미국 명문대학의 교수가 된 여성이 있었죠. 중국명문대의 교수가 된 여성이 있었어요, 30대에.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쓰러졌죠. 너무 가슴이 아파!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병원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너무 늦게 왔다고. 말기 암이라고. 얼마 못 산다는 거죠. 이제 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이제 남편의 사랑을 느끼고, 이제 부모에게 내가 뭔가를 해줄 수 있고, 내가 그 동안 차~암 공부 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걸 이제 좀 겨우 내 공부한 것을 펼쳐 보이려고 하는데, 말기 암으로 내가 죽어야 하다니! 어느 날 병원에서 남편과 간호사 의사의 도움으로다가 새 침대 위에 누웠는데, 침대가 따뜻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물었다는 거예요. 당신이 여기 누워 있었냐고. 그러니까 남편은 웃고 그냥 있었다는 거지요. 그랬더니 간호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보호자가 침대위에 누워 있길래, 여기는 보호자가 누워 있으면 안 됩니다. 환자가 눕는 곳이지 보호자가 눕는 곳이 아닙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거예요. 아내는 추위를 많이 탑니다. 그래서 내가 덥혀 놓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서 내가 누워 있는 거랍니다. 아내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알았다는 거예요. 늘 남편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누워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그게 너무 싫었다는 거예요. 왜 당신은 자기 자리 놔두고, 항상 내 자리에 먼저 와서 눕느냐? 그래서 그것 때문에 다투기도 했다는 거죠. 그런데 비로소 알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추위를 많이 타니까 자리를 덥혀줄라고 했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남편과 공감과 소통을 하게 된 거죠.

 

사랑만으로는 공감할 수가 없습니다. 아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공감할 수 있죠. 어쩌면 우리가, 덜 행복한 거는 사랑만을 갈구하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사랑만을 갈구하기 때문에 아파할 줄 모르기 때문이죠. 아파할 줄 모르고 아주 둔감해졌기 때문이죠. 둔감해진다고 하는 것 보다 더 큰 죄악은 없습니다. 우리가 둔감하기 때문에 남에게 해를 입히는 거죠. 둔감하기 때문에 자기의 힘을 행사를 하는 거죠. 누군가가 아파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힘을 행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상처받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상처받는 말을 던질 수가 있겠는가?

 

부처님은 출가하려고 하는 것은 자비의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자비를 일으키기 위해서죠. 자비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것은 죽은 거죠. 우리는 목표를 너무 높은 곳에 설정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높은 곳에 말이에요.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사다리가 있어야죠. 자비는 높은 곳에 오르는 사다리와 같죠. 사다리가 없이는 높은 곳에 오를 수가 없어요. 우리는 높은 곳에 오르려면, 사다리가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반드시 무언가를 마련하지 않으면 그 곳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헬기를 타든, 무슨 방법을 써야죠. 자비는 높은 곳에 오르는 수단이죠. 노은 곳에 오르려면, 자비라는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돼요.

 

부처님께서, 자비를 왜 그토록 강조하셨는지를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부처님이 자비를 아파마나라고 했는지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자와 비를 아파마나라고. 사랑하는 마음과 아파하는 마음을 가득가득 채워서 넘쳐흐르게 해야 돼요. 웅덩이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떠오르게 하려면, 굳이 웅덩이 속에 내랴가지 않아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죠. 물로 채우면 웅덩이에 있는 물체는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웅덩이 밑에까지 기어 내려갈 필요가 없죠. 굳이 밧줄을 타고 내려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웅덩이 속에 물건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밧줄을 타고 내려가고 있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 안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그 물건 주위에는 독사가 우글거리는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웅덩이 속에 물건은 웅덩이를 채우면 떠오르게 되어 있죠.

 

충남 논산에 가면 관촉사라는 절이 있죠. 거기에는 관세음보살 석불이 있죠. 그 석불에 대한 전설이 있죠. 몸체하고 머리가 합체된 상태인데, 몸은 만들어서 몸은 세웠는데 머리를 들어 올리려고 하니까 그게 쉽지 않더라는 거예요. 요새처럼 크레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중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스님과 함께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데, 동네 꼬마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그러죠. 아이 동네 꼬마들이 참 놀았다고 그러죠. 동네 꼬마들이 노는 걸 보니까 어떻게 노느냐? 몸체를 세우더니 몸체 주위를 흙을 쌓더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서 얹더라는 거예요. 바로 저거구나! 간단하더라는 거죠. 그걸 힘들여 낑낑거리고 들어 올릴 필요가 없죠. 석불 몸체를 흙으로다가 쌓아 올리면, 간단하죠.

 

이슬람이 인도를 침략할 때, 지금 있는 보드가야의 대탑을 흙으로 덮었죠. 그래서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 거예요. 나중에 발견된 거예요. 보드가야의 대탑을 다 흙으로 덮어서 산이 된 거예요. 우연히 동산에 올라가 보니 불쑥 올라와 있더라는 거예요. 파내려 가보니까 탑이었던 거예요. 그래 보드가야 대탑이 발견되었어요. 채우면 되죠. 우리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을 쓰죠.

 

아파할 줄 모르면,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미안하지만.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공감할 수 없으면 사랑할 수 없죠. 자와 비는 한 쌍입니다. 사랑만으로다는 세상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소통할 순 있지만, 사랑으로 공감을 얻어낼 수는 없습니다. 아파한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그 사람의 단점까지도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는 그의 장점만 사려고 하죠. 하늘 아래에 장점만 있는 인간이 어디에 있던가요?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죠. 단점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우리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아파함이 필요한 이유는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사회의 문제는, 또 개인의 문제는 아파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아주 우리는 둔감해졌죠. 우리가 얼마나 둔감해졌으면, 경찰이 나서서 학교마다 일일이 경찰이 학생들과 문자를 주고받겠다고 하겠어요.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마 만큼 둔감해졌다는 거예요. 그저 곪을 대로 곪아서 터졌다는 것을 뜻하죠. 그저 암이 진행될 대로 진행되어서, 이제 관 속에 들어갈 때가 됐다는 걸 뜻하기도 하고요. 어떤 분이 이렇게 얘기했다든가요? 아이들을 부모들이 너무 감싸 안았기 때문에 학교폭력이 생겼다고 했다던가요? 부모들이 아이들을 감싸 안기만 해서 학교폭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둔감해졌기 때문이죠. 남의 아픔에 대해서.

 

이제 우리가 아파함의 마음을, 아파함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는 늘 아름다움만 이야기할려고 하죠.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죠. 아름다운 꽃은 그 밑에 아름다움을 만드는 거름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거예요. 거름이 없는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름은 아파하는 거죠. 아파함이 거름입니다. 다른 것이 거름이 아니에요.

 

지난번에 다르마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면서, 다르마의 특수성은 깨달음이라고 그랬습니다. 깨달음은 새로운 방식으로 볼 때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자와 비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자와 비는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자와 비는 모든 것의 근본이고 토대입니다. 그거를 떠나서는 깨달음도 그 어떤 것조차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 깊이에서, 자심과 비심이 충만해서 일어나야 돼요. 그리고 채워져야 돼요. 1365일 기도를 한다한들, 아파하는 마음이 없는데,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기도가 성취 되겠어요. 1365일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한들, 자심과 비심이 일어나지 않는데, 무슨 깨달음이 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좀비의 禪일 뿐이죠. 그것은 좀비들이 하는 것과 같아요. 좀비가 좌선을 하고 좀비가 기도하는 것과 같죠. 우리 인간의 육신에는 피가 흐르죠. 피는 따뜻합니다. 피가 따뜻한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죠.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알고, 아파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죽은 시신은 사랑할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죠. 사랑할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살아 있으되, 그것은 죽었다는 것을 뜻하죠. 살아있으되 그건 죽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굉장히 우려스럽죠. 사실 우리 사회는 지금 굉장히 우려스럽습니다. 747비행기를 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우려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토대가 전체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거죠. 이 사회의 토대가 흔들리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아파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어느 누구도 이 본질적인 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죠.

 

요새 재벌들이 빵집을 그만둔다고 참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죠. 재벌들이 빵집을 그만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벌들이 중소기업들을 약탈적으로 잡아먹는 것이 문제죠.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 재벌이 순대 팔고, 재벌이 빵 팔고 그런다그래서 그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본질적인 문제는 재벌이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중소기업들을 탐관오리처럼 수탈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거죠.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겠어요? 남의 아픔에 둔감해지기 때문입니다. 남의 고통에 둔감하기 때문이죠.

 

인면수심이라고 하는 말이 있죠. 사람의 얼굴을 했지만, 마음은 짐승과 같다. 우리 사회의 1%가 지금 인면수심이죠. 모든 것은 힘없는 사람에게 미루죠. 대한민국 정치는 보좌관이 다 하죠. 모든 건 보좌관이 다 해요. 모든 건 보좌관이 다 한 거죠. 밑에 사람들이 탐관오리처럼 긁어 먹었어도, 어떤 사람들은 가장 깨끗한 정부고,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말하죠. 왜 이럴까요?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둔감하면 죄악입니다. 둔감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둔감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둔감하다고 하는 것은 아파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을 말하죠. 물론 그런 말도 있습니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가장 아프다고. 나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가장 아프죠. 동시에 모든 사람은 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아프다는 겁니다.

 

중국 만력제가 조선 출병으로 인해서 재정이 고갈이 되죠. 명나라가. 우리 임진왜란에 참전해서 명나라 재정이 완전 고갈이 됩니다. 7년의 전쟁에서 명나라 군사 수십만이 전사하죠. 수 백 만석의 곡식이 소비되고, 명나라는 재정 파탄이 나죠. 그러자 만력제는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죠. 아주 가혹할 정도로. 그러지 신하 하나가 만력제에게 이렇게 상소를 올리죠. “폐하께서는 그렇게 부귀영달을 사랑하시면서 왜 백성에게는 한 풀의 곡식조차 허락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만 부귀영달을 좋아하는 것 아닙니다. 백성들도 부귀영달을 원합니다. 왜 폐하께서만 긁어모으려 하십니까? 왜 백성들에게는 쌀 한 톨 남겨두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럴까요? 비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파하는 마음이 있으면 절대 이러지 못하죠. 5백년 전의 중국의 만력제만 이러는 것 아니죠. 다행히 중국은 만력제 한 사람만이 그랬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런 만력제가 수 백명, 수 천명이라는 데가 문제죠.

 

나는 사회를 비판하려고 이야기하는 거 아입니다. 본질적으로 이 사회가 너무 둔감해져 있다는 거예요. 적어도 군주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군주의 면전에서 황제만 부귀영달을 좋아하는 것 아니다, 백성들도 부귀영달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강직한 신하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대는 그런 사람은 눈에 씻고도 없어요. 씻고 봐도 없어. 오직 관청에는 좀비들만 가득해져 있는가? 좀비들만 그 자리에 있어?. 국회에는 좀비들만 있는가? 좀비가 되지 않으면 국회의원이 될 수 없는가? 좀비가 아니면, 대통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인가?

 

나는 요새사 겨우 부처님께서 잠부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생각했는가가 쪼끔 이해가 가요. 왜 그가, 크샤트리아 전사가 칼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아내와 젖 먹는 자식을 두고 자비의 길을 찾겠다고 숲으로 걸어 들어갔는가를 조금은 이해가 돼요.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 시대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고 봤던 거예요.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비상식인가요? 상식이라는 것이 뭐예요?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상식이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상식이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 상식이 뭐예요? 우리는 세끼를 먹는다는 것이 상식이에요. 우리는 밤이 되면, 잔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내가 일한만큼 번다는 것이 상식이에요. 내가 두끼 밖에 먹을 수 없고, 내가 밤에 잘 수 없고, 내가 여~~씨미 일했는데, 내게 주어진 것이 없다면, 그거는 비상식이죠.

 

오죽하면 중국의 관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백성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백성에게 먼저 줘야 된다는 거예요. 백성에게 먼저 줘야 만이 백성은 국가에 충성한다 그랬어요. 그 얘기는 뭔가요? 그것이 상식이라는 얘기예요.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이,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그런 사회를 원했어요. 부처님은 그걸 화()라 그랬죠. 조화를 이루는 사회.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면, 이것은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죠. 오늘날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죠. 우리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될려면, 사랑하는 마음과 아파하는 마음이 그로 인해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돼요.

 

옛날에, 80년대에 해인사의 성철 스님이 자신만이 깨끗하다고 이야기한 게 있죠. 근데 나는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왜 대통령이 되고 그렇고, 스님이 대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 왜 가장 깨끗해질까? 가장 깨끗해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 올라가며는 자신이 가장 깨끗해 보이는 걸까? 그 때에 휴암이라고 하는 젊은 스님이 이렇게 불교 신문에 기고했죠. 세상에 더러운 놈이 가득한데, 어찌 한 사람만 깨끗하겠는가? 세상에 모든 사람이 깨끗한데, 어떻게 한 사람만이 더럽겠는가?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귀한데, 어떻게 한 사람만이 천할 것인가? 세상 사람이 모든 천한데, 어찌 한사람만이 귀할 수 있느냐? 휴암이라고 하는 젊은 스님이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는 성철스님을 향해서 그렇게 이야기했죠. 모두가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는 소외된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소통하고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외된 자자 나오는 거예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천국>을 보면(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과 헷갈리는 모양인데,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말하는 것인 듯?) 학교는 이 사회의 축소판이죠. 언론과 정부에서 학교의 왕따와 폭력을 해결하겠다고 나서지만, 해결 못할 겝니다. 아니 해결 안 됩니다, 절대. 해결이 안 되는 이유는 학교 밖은 학교 안보다 더 심하기 때문이죠. 적어도 학교 안에서는 죽이지는 않죠. 학교 밖에서는 죽임을 당하잖아요.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월한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 옆에, 우월한 무엇을 만들면 그건 죽이는 거죠. 10평짜리 구멍가게가 수 천 평짜리 마트와 어떻게 경쟁이 되겠어요?

 

적어도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양심이 있었어요. 무슨 얘기냐 하며는 누가 빚을 안 갚는다고 해서, 그 집 가서 솥단지는 빼오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요새는 솥단지를 빼오죠. 아예 가산을 적몰해버리니까요. 숟갈조차 남겨두지 않죠. 옛날에는 적어도 그 짓은 안 했어요. ? 아파할 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이에요.

 

자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뭐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거창하고 큰 것만을 생각했죠. 아파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소통할 줄 알고, 공감할 줄 알면 그게 자비입니다. 다른 게 자비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다른 마음이겠어요? 그 마음이지. 부처님께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그랬어요.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이 뭐겠어요? 등 따시고, 배부르고. 그저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면 행복이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천근의 무게를 갖는 것 아입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동해바다처럼 큰 것 아입니다. 그저 작은 것이죠. 작은 것에 행복이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주고, 누군가가 나를 공감해 주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내가 누군가를 공감할 수 있으면, 그게 행복이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뭔가 범우주적이고, 뭐 지구적이고 그렇지를 못해요. 단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공감하고. 누군가와 공감하고 누군가와 사랑할 수 있으면 나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분은 깨달음은 범우주적인 거라 그래요. 나는 그분들과는 생각이 달라요. 깨달음이 범우주적일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아니, 설사 그래, 깨달음이 범우주적인 거라고 하더라도, 나와 함께 사람들이 소통하고 공감하고, 소통과 공감을 통해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범우주적인 깨달음이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데?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죠. 지금 바깥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내가 바깥에 나갈려고 하고 있어요. 내가 지금 우산이 없습니다. 내가 바깥에 나갔을 때,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 그 우산이 나에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나는 큰 거 안 바래요. 쏟아지는 하늘을 전체를 다 막아달라고 나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서도 안돼요. 그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를, 그 장대비를 다 막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쏟아지는 장대비? 쏟아지게 냅 둬유. 그냥 냅두고 우산 하나 쓰고 가면 돼요.

 

내가 오늘 아침에 참,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강론을 간단하게 하기로. 그런데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 삼시간도 못됐네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 전체를 덮는 천막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한 벌의 우의면 되고, 우산 하나면 우리는 행복하다는 거예요. 범우주적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예요. 그저 사랑으로 소통하고, 아파함으로 공감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거로 행복하다는 거예요.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가 이병철이처럼, 삼성 이건희처럼 되게 해달라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이 전부다 국회의원하자는 거 아니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이 전부 다 이명박이처럼 되자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단지 나와 내 가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죠. 우리에게 큰 것은 필요가 없어요. 작은 것이면 됩니다. 그 작은 것은 소통하고 공감하는 거예요. 우리가 아파할 줄 아는 그 마음을 회복해야 돼요. 지금 우리 사회는 아파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어요. 우리 사회 전체가요. 너무 둔감해졌걸랑요.

 

아마, 나는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을 하죠.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도통을 했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전체가 도통을 해서, 경허스님이 무사성무사無事成無事, 일없는 것이 일이라고 했는데, ! 그 단계에 갔는 모양이다. 그래서 더 이상 금강부동심이 돼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인가? 라고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모두 가 다 깨달음을 얻어서 그저 무정물처럼 변해버렸는지도 모르죠. 깨달음의 경계라는 것이 무정물이 되는 것이 아닌데 말이요.

 

제가 왜 다르마의 보편성을 자와 비라고 이야기하는 하느냐 하며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은 이 두 가지를 빼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과 아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아파하는 마음은 타인과 공감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나와 공감하는 마음이기도 하죠. 아파하는 마음이 없으면, 타인과 공감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나와 소통할 수가 없죠.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죠. 사랑으로 소통하고, 아파함으로 공감합니다. 나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얘길해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거를 떠나서 있다고 나는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깨달음은 원하지도 않고. 그런 깨달음은 필요치도 않지요. 내가 아파함으로써 공감할 수 있고,  사랑함으로써 소통할 수 있으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우리가 수행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죠. 다른 것 때문일 수는 없어요.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인 거죠. 본질적인 것은 바로 이거예요. 인간이 생명에 대해서 둔감함은 죄악이라는 거예요. 다른 것이 죄악이 아닙니다. 자와 비를 회복해서 둔감함을 씻어 내려야 돼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외국가수가 부르는 한국 가요 모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