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마의 특수성|…… 혜천스님설교

2019. 3. 17. 11: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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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스님 일요강론 불기 2556년 1월 15일

다르마의 특수성

 

 

 

추사의 불이선란도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다르마의 특수성(1월 3주)불기 2556년 1월 15일

 

오늘이 올 들어서 일요법회를 처음으로 하는 날입니다. 오늘 들어서 오늘 일요법회 처음인데, 시작하자마자, 마 다음 주에는 법회를 쉬겠습니다. 아? 다음 주 일요일이 설 전날입니다. 다들 고향에들도 가셔야 될 게고, 나야 뭐 오시라고 하고 싶지만, 마 달력이 내 뜻을 받아주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죠.  

 

불교는 다르마에서부터 출발하죠. 불교의 출발점은 다르마입니다. 다르마에는 특수성이 있고, 보편성이 있습니다. 우선 다르마의 특수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다르마의 특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깨달음을 이야기 하죠. 그것이 다르마의 특수성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동시에 불교의 출발점은 붓다의 깨달음이기도 하죠. 붓다의 깨달음이 없었다고 하면, 불교는 출발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기 때문에 다르마와 붓다는 동일시 되죠. 붓다 자체가 다르마입니다. 다르마 자체가 붓다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붓다의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붓다의 깨달음은 이야기하지만, 붓다의 깨달음이 어떻게 왔는가에 대한 의문에 질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붓다의 깨달음만을 이야기할 뿐이지 '붓다의 깨달음이 어떻게 왔을까?'라는 것에 질문하지 않죠. 붓다의 깨달음이 어떻게 왔는가요? 어디서 왔는가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새로와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새로와진 것.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려면, 자각을 해야 되는데, 그 자각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할때만이 자각이 올 수 있죠.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면 자각할 수 없고. 자각할 수 없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죠. 사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온 것이예요.

 

깨달음이 어디에 숨어있다 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거죠. 그래서 새로와 진거예요. 그렇기 때문이 우리는 부처님 깨달음 이전에 그를 고타마 싯타르타라고 부르지만, 깨달음의 이후에는 그 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죠. 경전에서 부처님을 부르는 용어가 108가지 정도가 되지마는.  어디, 우리가 대체적으로 예불문에도 '그 분'이라고 칭하죠. 어떤 특정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죠.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보고, 듣고, 이해하고, 느끼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새로와진 삶을 만들지 못하고 있죠. 맨날 똑같은 걸로 고민하고, 맨날 똑같은 거루다가 상처받고, 맨날 똑같은 걸로 아파하죠. 새로운 것으로 아파하고, 새로운 것으로 고통받고, 새로운 것으로 상처받는 것 같지마는, 맨날 똑같은 겁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낡은 방식을 깨뜨리는 것을 뜻하기도 하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낡은 것을 버리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죠.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인간이 고치기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습(習)이라고 했어요. 사람은 습을 고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습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과거에 내개 살아 온 방식이예요. 즉 과거의 낡은 방식이죠. 그 방식을 깨뜨리지 못하는 거예요.  

 

지난 주 목요일날 한겨레신문 1면에, 1면이라고 그러면 안되겠네, 전면이라 그래야지. 전면에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에 24가지 질문을 했다는 거예요. 신은 존재하는가?, 왜 인간은 고통받는가? 이런 24가지를 질문했는데,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신지 한참 됐는데, 얼마 전에 천주교의 차동엽 신부, 불교의 허정이라고 하는 스님, 그리고 기독교의 김홍도 목사가 거기에 대해서 답을 내놨어요. 그 답을 내 놓은 걸 발췌해서 한겨레신문에서 실었어요. 내 그거를 읽어보면서 내 혼자서 실소했죠. 차동엽이, 허정이, 김홍도가 내놓은 답은 이미 과거에 내놨던 답을 재탕하고, 삼탕하는데  불과했어요. 거기에 어떤 새로운 답은 없었어요.  

 

우리가 허정이라고 하는 스님이 답을 내놓은 걸 한 번 보십시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허정이라고 하는 스님은 조계종 불전연구소 소장인데, 뭐라고 답을 했느냐며는, 부처님께서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셨나며는, 신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가는 지금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가장, 지금해야 할 일은 두카를 벗어나는 거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답을 하죠.

 

그러면서 허정스님이 거기다 뭐를 붙였냐며는 '불교는 신에 대해서 관심있는게 아니라 인간에 대해 관심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미안하지만, 이거 답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두카를 극복하는 것이 지금 당면의 문제라고 하셨지만, 이것은 질문했던 것에 대한 답 아닙니다. 답이 없어요. 부처님은 거기에 답하지 않았어요.

 

설사 그것을 답이라고 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일반화시키면 안 됩니다. 왜 일반화시키면 안되냐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법입니다. 그 상황에 따라서 그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지, 그 말씀을 일반화시키면 안되요.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정확히 말하며는 부처님은 거기에서 답하시지 않으셨어요. 부처님은 질문의 논점이 벗어나면, 답하지 않죠. 허정스님은 그건 부처님이 답한 거라고 이끌어왔지만, 부처님이 답하신 거 아니라는 거예요.

 

김홍도 목사, 차동엽신부? 모두 답이 없어요. 왜 답이 없느냐며는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다가 그거 옛날에 수 백년 전부터 그들이 답해왔던 것들이예요. 정확히 말하면, 답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일 뿐이죠. 김홍도 목사는 이렇게 답했어요.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느냐? 공기는 물리적인 현상이예요. 존재하죠. 우리가 그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낡은 방식을 가지고 지금의 답을 내 놓을려고 하죠. 그러다보니 재탕, 삼탕이 되는거예요.  

 

차동엽이나, 허정이나, 김홍도나 이병철 회장이 답한 거에 대해서 견강부회하면서 답이라고 내 놨죠. 부끄러운 거예요. 만약에 내가 논술을 보러 갔습니다. 차동엽이나, 허정이나, 김홍도 식으로 논술을 기술하몬요?  빵점처리 됩니다. 왠줄 아셔요? 그 세 사람은 어떤 답도 내놓지 않고 있걸랑요. 그저 자기들 말을 견강부회해서 끼워 맞췄죠.  

 

왜 이럴까요? 낡은 방식으로 보고, 낡은 방식으로 듣고, 낡은 방식으로 느끼고, 낡은 방식으로 이해하니까 어떤 현상이 오는가요? 낡은 의식으로다가 되돌아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때 새로운 의식이 생기고. 새로운 의식이 생겼을 때 새로운 자각이라고 하는 각성이 생긴단 말이예요. 그럴때 깨달음이 오죠. 그래서 새로와진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얼마 전에 춘천박물관에 갔습니다. 선비의 사랑방이라고 하는 전시회를 시작했는데, 거기에 추사 김정희의 작품 중에 명품 중에 명품이라고 평가하는 불이선란도 진품이 걸렸기 때문이에요.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라고 하는 난초 그림과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작품의 쌍벽을 이루죠. 그의 글씨가 어떤 것이 더 좋냐고하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이야기고, 왜 그러냐면 추사 글씨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 좋다, 어떤 것이 나쁘다 할 수 없기 때문에. 글씨는 논외로 치고, 그가 그렸다고 하는 그림중에는 세한도와 불이선란도를 최고의 명품으로 꼽죠.

 

나도 명품 좀 보러 갔습니다.  그 명품, 의자에 앉아 한참 보고 있으니까 점잖은 분들이 몇 분 오시더만요. 박물관 관계자였고, 다른 분들은 아마 초청받았던 분들 같애요. 그 날 그 전시회를 시작하는 날이었거든요. 내 요기서 점심먹고 걸어갔으니까 한 시쯤 되었을 거예요. 벽에다가 불이선란도에 대해서 잔뜩 설명을 해서 붙여 놨더만요. 그 반대 편 벽에 불이선란도를 걸어놨는데, 그 난초를 한 30분쯤 감상하고 있었죠. 근데 그 박물관 관계자가 그 작품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만요. 근데 나도 그 분들 처럼 초청받은 사람은 아니지만, 의자에 앉아 있으니까 나도 귓구멍이 열려있는지라 나도 들리더구만. 한참 듣고 있으니까 뒤에서 웃음이 절로 나와요. 추사 김정희라고 하는 권위에 짓눌려 가지고 허우적대는 그 모습이 보여. 

 

불이선란도 보셨죠. 솔직히 말해서, 사진으론 수없이 봤지마는, 추사에 대해서 글쓴 걸로 수없이 읽어봤지마는 불이선란도가 좋은 그림인가에 대해서는 나는 뭐 그렇게 찬사를 늘어 놓고 싶지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추사의 불이선란도 보다는 석파 이하응의 난이 훨씬 미학적으로 뛰어나죠. 좋은 그림입니다. 추사의 불이선란도와 고빈 김옥빈이 발제를 한 작품하고 같이 놓고 보세요. 정말 누구 그림이 더 좋은 그림인가?  우리는 고정관념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넘어갈 수 없다. 또 하나, 석파 이하응은 실패자라는 거죠. 제자는 스승을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 석파 이하응 난이 추사의 난만 못하다고 여기죠. 정확히 말하면, 추사의 권위에 감히 숨이 막혀서 말을 못꺼내는 거죠. 꺼냈다가 무식한 놈 소리 들을까봐.

 

불이선란도를 보며는, 불이선란도 화제에 추사 김정희는 20년간을 난을 그리지 않는데, 우연히 자기가 추구하는 그런 그림이 됐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거기 화제 중 다른 거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죠. 달준을 위해서 되는대로 그렸다. 불이선란도는 추사가 되는대로 그린 거예요. 누구를 위해서, 감상자를 위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먹을 갈아주는 달준이를 위해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아무 의식도 없이 그냥 그린 거예요. 추사는 만년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나는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 추사는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불이선란도는 그가 이야기 하듯이 되는대로 아무렇게 그렸죠. 되는대로 아무렇게 그렸는데, 우연히도 추사가 추구하는 예술철학에 딱 맞아 떨어진 거예요.

 

그 작품이 좋으냐, 훌륭한 작품이냐라고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한 거 아닙니다. 우리가 추사의 불이선란도를 이해할라며는 추사의 예술철학에 대해 우리가 먼저 알아야죠. 추사는 박제가의 제잡니다. 정조 때 사검사?(검서관)였던 초정 박제가의 제자죠. 박제가가 누굽니까? 연암 박지원의 집전 제자죠. 추사 김정희는 연암 박지원의 재전 제자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연암 박지원이 주장하던 문체론인 성령론性靈論의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화제에서 성중천(性中天)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죠.  우리가 연암 박지원의 문체로, 문학이론을 이해할라며는 누구로부터 연암 박지원의 문학이론이 왔는가를 알아아죠.  

 

연암 박지원의 문학이론은 명나라 말기의 공안파에게서 온 겁니다. 명나라 말기에 사천성 공안라고 하는 지역에 천재적인 삼형제가 태어났죠. 큰형이었던 원종도, 둘째이던 원굉도, 세째는 원중도. 세 사람은 그 힘들다는 과거에 다 급제한 사람들입니다. 그 삼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둘째 원굉도였죠. 그 사람은 22살에 과거에 급제했어요. 원굉도가 20대, 21살 땐가 같은 성에, 호북성 항안 마성이라고 하는 곳에 기인이 산다고 하는 소식을 듣죠. 그는 15살 때 이미 천재로서 중국에 소문이 이름이 퍼진 사람이예요. 1,300리를 달려가서 그 사람을 만나죠. 그 사람이 탁오 이지였어요.  

 

그는 탁오 이지를 만나서 동심설이라고 하는 것을 듣죠. 동심설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지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연 지성. 천연 지성. 원굉도는 탁오 이지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어떤 격식과 상투적인 문체를 거부하죠. 오직 스스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정확히 이야기하며는 과거의 누구와 같은 문장을 구사해서는 글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중국이나 조선이나 중국의 하은주 3대, 아니며는 전한 후한, 당송 이시대를 문장으로 모범으로 삼아서 모든 선비들이 문체를 구사했는데, 그런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했던 사람이 원굉도예요. 원굉도는 자기 마음 속에서 우러난 것을 상투적인 격식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구사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예요. 바로 정조가 문체반정을 주장하는데, 바로 이 원굉도를 겨냥한 거였어요.

 

바로 그 성령을 이어받은 것이 연암 박지원이예요. 바로 그 성령론을, 요새 말하면 문예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사람이 추사 김정희입니다. 그러니깐 불이선란도라고 하는 거는 바로 추사 김정희가 추구하는 성령론에 딱 맞았던 거예요. 자연스럽게. 솔직히 불이선란도에 그려진 그게 난입니까? 난 아닙니다, 그거. 난꽃이 있으니까 그게 난이죠. 실질적으로 잎사귀를 보며는 그건 난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아까두 이야기했지만, 난초그림만 두고 보고 보면, 석파 이하응 것이 훨씬 뛰어나죠.   

 

우리가 추사 김정희라고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작품도 있지마는 그의 새로운 방식의 시도, 그리고 새로운 방식의 예술론이었을 거예요. 그거를 반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대에 모든 사람들은이 추사의 글씨를 높게 평가했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 시대 사람들은 추사의 글씨를 괴이(怪異)하다고 그랬죠. 그래서 추사 김정희도 자기 친구인 이재 권돈에게 편지를 했을 때, 이렇게 이야기 했었죠. 쓰며는 괴해지는데, 어쩌는가? 그가 추구했던 것은 괴였어요. 괴는 요새로 말하면, 개성이죠. 원굉도가 이야기했듯이, 남과 같은 문장을 지어서 뭐 하겠냐고 하던, 원굉도의 그 성령론을 이어받은, 누구를 흉내내지 않는 개성이죠. 그것이 두드러진 작품이 불이선란도죠.

 

우리가 추사라고 하는 권위에 눌려서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보니까, 똑같은 소리를, 똑같이 하는 거예요. 그의 제자들은 적어도,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후예들이 문인화계와 서단을 장악하고 있죠. 아직 우리는 추사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정확히 이야기하면, 추사를 흉내내기에 급급하죠. 추사가 주장했던 것은 개성이었어요. 개성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새로운 것입니다. 과거의 낡은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추사 김정희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굉장히 치밀한 사람입니다. 그의 제자 윤정현이 그의 호를 써달라고 했을  때, 부탁받은 지 30년만에 침계(梣溪)라고 하는 두 글자를 써 줬죠. 침계라고 하는 두 글자를 쓰는데, 어떻게 쓸 것인가라고 하는 법식에 고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30년간을 고민하다, 고민하다 썼어요. 침계라고 하는 두 글자를 쓰는데, 30년간을 고민해서 쓴 사람이예요.  

 

탁오 이지의 동심설이나, 탁오 이지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성령론을 주장했던 원굉도나, 공안파 영향을 받았던 연암 박지원이나 연암 박지원의 재전제자인 추사 김정희나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서의 문체이고, 글씨와 그림. 과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낡은 방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의 본래 가지고 있는 그 본성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자연 지성이고 천연 지성이죠.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펼쳐 보이는 것. 그래서 원굉도는 성령을 펼치고, 격식과 상투적인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던 거예요.

 

근데 내가 그 날 가서 보니까 상투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고 있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지 못하면, 새로와짐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저 과거의 낡은 방식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거에 불과하죠. 

 

부처님은 무상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뭐예요? 멈춰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멈춰있지 않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은 새로와지는 것을 말하죠. 변화는 움직이는 겁니다. 움직이면 새로와지죠. 움직이지 않으면, 새로와 질 수가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새로와질 수가 없죠. 우리가 새로와지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보기 때문이예요.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듣고,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느끼고,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죠.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머물러 있는 한, 자각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맨날 똑같죠. 맨날 똑같은 길을 걸어 보셔요. 맨날 똑같은 풍경을 만나게 되죠. 새로운 길을 걸어야 새로운 길을 만나지 않겠어요? 맨날 똑같은 길을 걸으면 편안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편할 뿐, 거기는 어떤 기쁨과 희열은 만날 수가 없어요.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답을 내놓은 차동엽 신부나, 허정 스님이나, 김홍도 목사나,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불이선란도를 설명하는 거나,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나 다를 것이 없죠. 

 

불교의 출발점은 부처님의 깨달음이죠.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와진, 새로운 세계를 연 거를 를 말하죠.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을 그렇게 배우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부처님의 그건 배우려고 하지 않죠. 엄격히 얘기해서, 차동엽신부나 허정 스님이나 김홍도 목사나 춘천박물관의 그 분이나 공통적인 것이 뭐냐면, 직해주의라는 거예요. 직해(直解), 직해주의는 새로운 것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허정스님이 부처님 답이라는 것을 이끌어 왔지만, 우리가 명백히 알아야 돼요. 부처님은 거기에 대해서 답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부처님은 답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며는, 답이 없었다는 거예요. 답이 없는 것을 끌고와서 답을 인용하니까 당연히 답이 없죠. 이것을 우리는 직해주의라 그러죠. 우리는 직해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거예요. 본래 불교는 출발점이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새로와지는 거죠. 근데 언제부턴가 직해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서 과거의 낡은 방식을 되풀이 하고 있죠. 부처님이 처음 일성에서 낡은 것을 버리라고 했는데도 말이예요.                       

 

마치 추사 김정희의 권위에 눌려서, 그저 추사가 그렸다니까 추사 스스로가 득의작이라고 생각해서, 기쁨을 표현했을 뿐인데.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추사 자기야 그 작품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내가 그것이 추사의 최고 작품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는 거예요. 그거는 추사의 기준이죠.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추사가 추구하는 미학에 맞았기 때문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화제에서도 성性중中천天이라고 하는 말을 썼어요. 성품성자, 가운데 중자, 하늘 천자. 본성이 천연지성이 드러났다는 이 말입니다. 본성이 천연지성으로 드러났다. 아주 자연스럽게 잘되고, 못되를 상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붓가는 대로 그냥, 그저 긋다 보니까 얼레? 내 맘에 쏙 드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늘 아래 나처럼 된장국 잘 끓이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봤을 때 그래요. 내가 하늘 아래서 가장 된장국 잘 끓이는 사람이야! 지난 해 오랜 친구 스님이 왔었는데, 그 스님한테 옛날에 같이 살면서 다시는 반찬하지 말라고 면박을 당했었는데, 어찌 이 따우로 맛없이 한다구. 지난 해에도 또 욕먹었어요. 아직도 된장을 이 따우로 끓여? 그 때 몇 분 스님과 같이 살았는데, 그 스님이 연세도 많고 그러니까, 그 스님이 그 때 이렇게 말씀하셨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주는대로 먹어" 하늘 아래서 된장국 가장 잘 끓이는 사람이 나요. 왜? 나는 잘 먹으니까요. 내가 기준이걸랑요. 오직 내가 기준이지, 누가 기준이 될 수는 없어요. 나는 내가 기준이예요. 물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기준이겠죠. 나는 내가 내가 기준이라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내 기준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도 않아요. 왜? 모든 사람이 다 자기 기준이 있을 테니까.

 

우리가 늘 갈등을 겪고,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은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과거의 낡은 의식이 있으니까 상처받고 고통받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볼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들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느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좀더 깊은 생각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우리는 이런 생각은 안 해요. 어떤 권위에 눌려서, 직해주의에 입각해서, 형식주의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식이 장 식'인 삶을 살죠.  그 식이 장식이야!  

 

중국의 황벽선사는 이렇게 말했죠.  술 석잔을 마시고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못했다는 말이더냐?. 참 이 말씀 재미있지 않습니까? 술을 석 잔 마셨는데, 입술을 축이지를 못했어. 중국 당나라 때 황벽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하신 말씀이예요. 너는 아직 술을 석잔이나 마시고도 입술을 축이지 못했구나. 그 이야기는 내 밑에서 수 십년간 공부를 했다면서도, 아직도 그렇게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고 있느냐는 뜻이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하고 상통되는 말이죠. 나의 가삿자락을 잡고 나의 그림자를 밟는다 할지라도,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며는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 나와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과 황벽스님의 말씀의 게가 같은 거죠. 내 밑에서 수 십년 간 도를 닦았으면서도 도대체 내한테서 뭘 배운거냐 이 말이예요. 도대체 너 뭘 배웠냐? 이런 말씀이예요.

 

만약 그 때 나였으면, 이렇게 대답했을 텐데. "30년간 스님의 밥은 먹었지만, 스님의 가르침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마, 이렇게 답했더라면, 뭐 황벽스님이 향기나는 밥을 지어서 이 수자를 따로 주라고 했을텐데. 그 스님은 그저 몽둥이만 맞고 쫓겨났죠.  술 석잔을 마시고도, 입술을 축이지 못했구나! 꺼져라, 어디서 그렇게 횡설수설하느냐?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듣지 못하면,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조금 전에 말한 스님처럼 되죠. 

 

새로운 방식으로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돼요. 새로운 방식으로 들으려는 노력이 있야 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죠.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어떻게 새로와 질것인가? 차라리 새로와지지 못할거며는 ?라도  잘해야죠. 새로와지지도 못했으면서도 새로와진 것처럼 답을 내놓는 차동엽, 허정, 김홍도 보담이야 안하는 것이 낫겠죠, 차라리. 내가 뭐 그 분들하고, 돈거래하다, 돈 못받아서 그러는 거 아입니다. 뭐 억한 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구요. 그거는 종교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예요. 그들의 허물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의 허물이기도 하죠.   

 

우리는 낡은 방식으로 문제에 부딪치면, 어떻게 모면할라고 생각만하기 때문에 그런 답이 나오는 거예요. 질문은 던져졌으니까 답은 해야 되겠는데, 그래야 체면은 서겠는데 막상 좋은 답은 나오지 않고, 그저 과거의 답을 이끌고 온 거죠. 그림으로 말하면, 요거는 모사본이죠. 그저 남의 그림을 흉내낸 것도 아니고, 모사본. 그저 핸드빽으로 말하면, 짝퉁 가방. 이렇게 되는 거죠. 추사의 불이선란도가 추사 스스로가 득의得意作이라고 했던 것은 한 번 그릴 수 있지, 두 번은 그렇게 그릴 수 없다고 하는 뜻이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추사처럼 그런 난을, 다른 사람이 그리기 어렵죠. 추사 스스로도 한 번만 가능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가능했겠어요? 

 

새로와짐을 이야기 하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라고 그러니까, 또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 경직되게 생각하지 않을 수 밖에 없어요. 그저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싶으면, 새로운 안경을 맞춰 쓰면 되는 거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싶으며는 새로운 좋은 이어폰을 사서 끼면 될 것이고, 그것도 새로운 방식입니다. 새로운 방식이라고 하는 것을 고정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어떠한 문제를 던지며는 딱 얼음이 돼서 경직되죠. 유치원생이 유치원에 갔다가 돌아오다가 돌이 있어서 찾죠. 그런데 그 돌이 연못에 풍하고 떨어졌어요. 요고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치원생이 심심했는가 보네. 그런데 부처님께서 길을 가다가 돌이 있어서 푹 찼죠. 그런데 돌이 연못에 툭 떨어졌어요. 이걸 보면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나요? 유치원생은 심심해서 찼죠. 부처님이 돌을 찼네. 아! 저기에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저기에 부처님이 우리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려는 걸까? 어떤 스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겠죠. 멍청아, 딱 보면 모르냐? 개구리들한테 법문하신 거잖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죠. 하이, 바보야, 그거 발야구 아니여? 유치원생이 돌을 발로 차서, 연못에 떨어트린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죠. 그러나 부처님이 차서 떨어지면, 이야기가 또 달라져요. 우리는 이렇게 살죠. 추사 김정희라고 하는 이름 앞에서 어깨도 못펴고, 허리도 못 피고, 그 권위에 눌려가지고  그 무거운 짐에 허우적거리듯 말입니다.  

 

서유기에 보면, 서유기 다 읽어 보셨죠. 서유기에 보면 손오공이 천계를 시끄럽게 굴다가 부처님과 내기에 져서, 부처님 손가락에다 오줌싸고, 손가락에 잡혀서 튕겨켜 가지고, 떨어지죠.  지상에 떨어져요. 참 중국사람들은 부적을 좋아해요. 원래 중국에서 부적이 나왔으니까. 부처님이 부적을 써서 던지니까 그것이 산이 돼서, 손오공을 짓누르죠. 손오공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겁니다. 손오공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체예요. 그 무거운 산을 눌러 놨는데도, 손오공이 삐져 나오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죠. 손오공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구리 녹인 물을 먹이고, 그런데도 손오공은 안 죽어요. 왜 그러냐며는 손오공은 불사의 존재여서. 죽지 않는 존재죠. 우리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만약 손오공처럼 구리죽이나 얻어먹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가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사고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치 무거운 산에 짓눌려서 빠져 나가지도 못하고, 거기서 가끔 주는 그 뜨거운 구리죽을 마시면서 연명하는 손오공이나 과거의 낡은 의식 속에 깔려서 살악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나는 그 이야기를 할려고 지금 손오공을 끌고 온 거예요. 나는 아까 처음에 전제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새로와짐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의미를 가질 수도 없죠. 부처님의 깨달음이 새로와지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불교는 다르마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제가 얘기했어요. 그래서 다르마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있다고 했죠. 우리가 부처님을 붓다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새로워짐을 특수성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깨달음을 특수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안 그러면, 그를 붓다라고 부를 이유가 없죠. 그의 깨달음이 보편적이라면, 우리는 그를 붓다라고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깨달음을 특수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이라고 부르고, 붓다라고 부르는 거예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자각이 없으면, 깨달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거는 명백히 알아야 돼요.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부처님이 좌선해서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은 그건 잘못된 생각이예요. 부처님이 좌선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빙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새로운 의식이 형성됐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했고,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어진 거죠.            

 

우리가 어떻게 새로와 질 것인가? 올해는 그 하나의 의문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야 됩니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의문에 질문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 붓다의 출가라고 하는 것이 의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예요. 부처님께서 잠부나무 아래에서 소년시절에 이러한 의문을 가졌죠. 왜 모든 생명은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가? 붓다의 출가는 거기에서 출발한다는 거예요. 잠부나무 아래에서. 왜 모든 생명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가?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만이 살 수 있는가? 그 의문에서 출발하죠. 그 의문에 질문했지만,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출가했고, 그리고 그 스스로가 답을 구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무사자오無師自悟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스승이 없이 스스로가 깨달았다. 

 

우리가 과거의 낡은 방식을 답습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배운 것을 묵수하는 직해주의 때문이죠. 스스로의 방식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방식으로 볼 때, 스스로의 세계가 형성이 되는데 과거의 가르침을 받은 낡은 직해주의루다가 보니까 맨날 똑같죠. 그래서 스승을 못 넘어 서는 거예요.  

 

우리가 조선시대에 율곡이나 퇴계가 얼마나 위대한 성리학자인가를 이야기하지만, 퇴계, 율곡 별 거 없어요. 왜 별 꺼 없는지 아세요? 중국 주희의 아류에 불과하니까요. 그저 중국의 주희가 이야기 한거를 달달달 외워서 그냥 그것을 묵수한거에 불과해요. 뭐 별거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사상가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저 직해주의로 묵수만 하거든. 퇴계, 율곡이 그랬고, 불교가 그랬고. 중국에는 적어도 선종이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의 흐름을 만들어 냈어요, 불교에서. 성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새로운 흐름입니다. 과거의 유학을 새롭게 만들어 낸 거지요. 그게 성리학이예요. 주자 성리학을 밟고 일어선 것이 양명학이고. 양명학을 진일보시킨 사람이 탁오 이지고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불교도 중국에서 그저 가져와서 그대로 답습하는데 불과했고, 유교도 마찬가지였어요. 새로운 어떤 사상의 체계를 발현해 내지 못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지금도, 우리의 현대 학문도 미국에 종속되어 있죠. 일본은요? 미국가서 박사학위 받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아요. 외국 나가서 박사학위 받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아요. 다 일본에서 박사학위 받고해서, 다 일본에서 공부해서 노벨상 받고 다 그래요. 근데 우리는 미국가서 기를 쓰고 배우고 오지만, 어떤 자기 것도 없어요. 그저 흉내내는 직해주의죠. 새로운 것이 없다는 거예요. 새로운 것이 없으니까 새로운 평가를 받을 수가 없죠.

 

오늘 한국 불교의 폐단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저 낡은 방식을 묵수하고, 지키는 거에 불과하죠. 차라리 허정이라고 하는 스님이 입을 닫고 있었더라면, 망신은 모면할 거 아니예요. 답도 아닌 것을 답이라고 내 놓으니까 망신을 당하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눈으로 보는 거예요. 새로운 귀로 듣고, 새로운 온 몸으로 느끼고, 새로운 의식으로 이해하는 거죠.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은, 그 답도 분명하죠. 낡은 방식이예요. 의문에 질문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예요. 근데 지금의 불교에는 의문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요. 질문도 없죠. 오직 직해주의만 있죠.

 

그러다보니 뭐라 그래요? 맨날 시스템과 제도 타령만 하잖아요. 시스템과 제도의 문제가 이니죠. 시스템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본질에 의문을 던지지 못하기 때문에. 본질에 의문을 던져야 새로운 방식이 생기지 않겠어요? 아, 새로운 방식을 보고 싶으면, 안경점에 가서 새로운 안경을 사서 쓰야 되지 않겠어요? 명품 이어폰 사서 음악 들어 보세요.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3D안경 쓰고, 3D영화 봐 보세요? 새로운 세계가 보여요. 우리가 그와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어떠한 권위에 짓눌려서 숨을 못쉬는 거죠.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옛날에 군대에서 참, 호랑이같은 조교들은 훈련병들에게 이렇게 외치죠. "지금 눈동자 굴린 놈 나와!" 자기가 말하는데 눈동자 굴렸다는 거예요. 감히 눈동자도 굴려서는 안된다는 거죠. 내가 왜 이이야기를 하냐하면, 우리는 지레 조교의 그 위압적인 모습에 겁을 먹고, 눈동자를 안 굴리려고 하죠. 그러기 때문에 눈동자가 구르는 거예요. 생각을 하며는 눈동자는 구르게 되어 있어요. 움직이죠. 생각을 안하면요, 눈동자가 움직이질 않습니다. 조교가 거의 성인의 경지여. 눈동자 굴린 놈 나와, 그건 생각했다는 거예요.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지시 사항을 듣고 그 지시 사항대로 움직이라는 거죠. 생각하면 눈동자가 구른다는 거예요. 생각하지 않으면, 눈동자는 구르지 않습니다. 지레 겁을 먹으며는 생각이 많아져요. 그래서 눈동자는 더 많이 구르죠.  

 

새로와짐이라고 하는 것은 경직된 의식에서 벗어나는데서부터 출발하죠. 아까 내가 추사의 불이선란도를 이야기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원굉도를 얘기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고. 자연지성과 천연지성. 자연지성이나 천연지성, 사실 같은 말이죠. 자연스럽게 본래 마음에서 일어난 그대로, 그대로 표현하는 것. 어떤 격식과 어떤 형식도 고집하지 않는 것. 바로 추사의 불이선란도라고 하는 것은 추사가 추구했던 성령의 이론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추사가 스스로가 그것을 기뻐했고, 득의작이라고 했죠.

 

그림만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도 마찬가지죠.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 되는 것이 또 마땅하겠죠. 모든 사람이 추사의 불이선란도를 그린다고 그래서 그 그림이 추사의 불이선란도가 되는 것이 아니죠. 그건 그저 짝퉁 그림일 뿐이예요. 스스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때. 청출어람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백장선사는 그런 말씀을 하셨죠. 부모와 같아서는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그랬어요. 부모의 은혜를 갚을라면, 부모보다 나아야 된다는 거예요. 부모보다 나아야 부모의 은혜를 갚고, 스승과 같아서는 스승의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부모의 은혜를 갚을라면, 부모를 넘어서야 되요. 스승의 은혜를 갚을라면, 스승의 은혜를 넘어 서야죠. 우리는 그것을 청출어람이라고 하죠. 비록 쪽물이 쪽 풀에서 나왔지만, 쪽 풀보다 더 푸르르다고 하는 것이 청출어람이죠.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갈려고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말해주거나 대신해 줄 수가 없어요. 스스로가 노력할때. 스스로가 새롭게 보고, 스스로가 새로운 빙식으로 듣고, 스스로가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스스로가 새로운 빙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그와 같이 되죠.  

 

오늘은 불교는 다르마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다르마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있다고 이야기 했는데... 오늘은 특수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다음에는 다르마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다르마의 발현이 뭐냐?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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