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2019. 4. 7. 10: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행복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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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누군가와 다투다 돌아선 후
‘그때 이렇게 되받아쳤어야 했는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적절한 말을 하려면
그 상황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순간의 화나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받아칠 말을 찾는 것은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기는 방법을 찾다 보면
남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내 가슴에 못이 박히면
내가 깨닫고 뉘우치면 되는데,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면
참회하고 뉘우친다고
소멸하지 않습니다.  
 
말로 이기는 걸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또 말로 지는 것을 패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기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패배도 있습니다.
이기려는 생각이 없으면
패배할 일도 없습니다. 

대화의 기술

대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듣는 게 좋다지만,
건성건성 듣는 것은 듣는 게 아닙니다.
끝까지 듣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들어야 합니다.  
 
잠시 듣더라도 이해가 필요합니다.
상대를 이해한다고 해서
상대가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남편이 술 먹고 오는 게 뭐가 옳아요.  
 
하지만 틀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습관이 되어 그렇구나,
헤아리는 마음이 이해입니다.
이해하고 시작하면 소통이 됩니다. 
인생의 의미
<사는 게 별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미도 없는 삶을 왜 살아야 할까요?”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존재가 우선이죠.
이미 존재하고 이미 살고 있다는 말이에요.  
 
왜 사느냐고 묻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요.
살 이유를 찾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결국 ‘죽는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해요.  
 
존재가 우선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접근을 달리 해야 합니다.
아침에 눈 뜨니 살아 있다면 살아지는 거예요.
이왕 눈 떴고, 이왕 살아있는데 어떻게 살고 싶어요? 
 
괴롭게 살까, 즐겁게 살까?
의미 있게 살까, 그럭저럭 살까?
누워서 살까, 걸으며 살까, 직장 나가며 살까? 
 
그렇게 물으면 스스로 방법을 찾게 돼요. 

왜 극단적인 사람들이 주도할까요

<방관자> 
 
우리 주변을 보면,
정치든 종교든 자기만 옳다고 외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는 그런 극단적인 소수에 의해 좌우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시위하고, 정치가를 향해 고함을 지르니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쏠림 현상이 생깁니다.  
 
반대로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은
인격적으로는 참 좋은데
사회 변화에는 큰 기여를 못 합니다.
내 옷에 흙탕물 튈까 봐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얼토당토않은 광고 내느라
돈을 내고, 시간 내서 시위에 나오니까
소수라도 여론을 주도합니다.  
 
그걸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중도적인 사람들도 평화적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어요.  
 
더럽다고 피하지 말고
악쓴다고 악쓸 필요는 없지만
방관자에서 좀 더 참여형으로
삶의 태도를 바꿀 때,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승환 발라드 명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