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 선사가 만난 할머니들2 / 릴라님

2019. 4. 21. 12: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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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선사가 만난 할머니들2 / 릴라님



밭에 모종을 심던 할머니(插田婆)

조주가 절밖에 나왔을 때 노파가 모종을 심는 것을 보고 말했다.
“갑자기 사나운 호랑이를 만나면 어찌하겠는가?”
노파가 말했다.
“정에 해당할만한 한 법도 없습니다(無一法可當情).”
조주 선사가 “퉤퉤” 하니 노파도 "퉤퉤" 했다.
조주가 말했다.
“아직도 이런 게 남아 있구나(猶有這箇在).”

-우바이지, 조주어록

이 일화는 공부인들이 빠지게 되는 대표적인 장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조주 선사가 절 밖으로 나갔다가 밭에서 홀로 모종을 심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여인 혼자 들에 나가 일을 하면 사나운 짐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주 선사가

만약 혼자 일을 하다가 사나운 짐승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마음에 감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꺼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조주 선사는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물었는데, 할머니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모든 것이 허공과 같이 텅 비어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 내게는 그런 공포와 두려움마저

남아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할 정도면 할머니의 공부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조주 선사는 ‘퉤퉤’하고 침을 뱉습니다. 침을 뱉는 것은 어떤 물건을 내뱉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더럽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편으로 진실로 할머니의

 법이 그러한지 시험해본 것입니다. 그러자 할머니도 조주 선사를 따라 ‘퉤퉤’하고

침을 뱉습니다. ‘이런 것이 법이다’라는 생각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조주가 일침을 가합니다. ‘아직도 이런 게 남아 있구나.’

이 공부는 참으로 묘합니다. 마음에 담아둘 한 법이 없어지는 것(無一物)이 이 공부라고

말로 표현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러한 것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이 공부는 모든 분별을 떠난 곳의 본성을 스스로 확인하여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러하다면 분별을 떠난 자리가 따로 없고, 법이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일상생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그대로 진실하며, 삶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조차

진실한 것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고, 삶에서 느끼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정에 해당할만한 한 법도 없다(無一法可當情)’는 말은 분별할만한 법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앙산혜적과 쌍봉 사이의 대화에서 등장했습니다.

대사(앙산)가 쌍봉에게 물었다.
“아우의 요즘 견처는 어떠하오?”
“저의 견처에 의하건대, 실로 한 법도 정에 해당할만한 것이 없습니다(實無一法可當情).”
“그대의 견해는 아직 경계에 있구나.”
“제가 보는 바는 그렇지만, 사형께서는 어떠하십니까?”
“그대는 어찌하여 정에 해당할 만한 것이 한 법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위산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혜적의 이 한마디가 천하 사람을 의혹으로 몰아넣는구나.”

〔현각이 말하기를 “<금강경>에 말하기를 ‘진실로 연등불이 한 법도 나에게 수기를

주신 것이 없다’고 하였고, 그는 한 법도 정에 해당할만한 법이 없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경계에 있다 하는가.‘라고 하였다.〕

-경덕전등록

정에 해당할만한 법, 즉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 마음에 담아둘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정에 해당할만한 법이 없다’는 물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뜻으로 앙산은 진정 ‘정에 해당할만한 법이 없다’는 그것마저 놓아버리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 모든 말과 모습이 바로 지금 이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마음에서 일어난 환상과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그러고 나서야 앙산이 한 말의 참뜻을 몸소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앙산의 말은 그의 사형인 향엄 선사 사이의 대화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향엄이 노래했다.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지난해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었는데, 올해는 송곳조차 없구나.”
이것을 듣고 앙산이 말했다.
“여래선(如來禪)이라면 사형이 알았다고 하겠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향엄이 다시 게송을 보였다.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박거려 그것을 보이노라. 만일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특별히 사미를 불러보리라.”
앙산이 말했다.
“기쁘다! 사형이 조사선을 알았군요.”

-선문염송 고칙 598

향엄이 깨닫고 나서 보니 마음에 담아둘 한 물건도 없어서 마치 아주 자그마한 송곳으로

땅에 꽂는데, 예전에는 송곳 꽂을 자그마한 땅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 송곳조차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앙산은 아직 여래선의 경지이고 조사선의 경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래선과 조사선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앙산을 떠보기 위한 방편의 말입니다.

진정 도를 깨친 앙산이라면 여래선과 조사선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한 이유는 향엄이 ‘한 물건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향엄이 스스로 체화한 법을 보입니다.

만약 이런 말에도 그대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사미를 부르리라.

‘누구야’ 부르는 이 일이 한 물건도 없는 일입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걸어가고

생각하고 무서우면 무섭고, 기쁘면 기쁜 일 이 자체가 한 물건도 없는 일입니다.

수많은 선지식들이 ‘한 물건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 한 물건도 없다는 말의

참뜻을 깨쳐 자기의 살림살이가 된 경우는 드뭅니다. 만약 이런 안목이 열린다면 한 물건도

없다고 하든, 온갖 것이 다 있다고 하든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온갖 말을 하면서도 말에 머물지 않고, 온갖 행위를 하면서도 행위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맛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조주가 ‘이런 게 남아있구나’ 한 말은 바로 법이라고 할 어떤 관념, 법이 아니라고 할

어떤 관념, 아무것도 없다는 관념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관음원에 묵으려 했던 할머니(寄宿婆)

한 노파가 날이 저문 뒤 관음원에 찾아왔다.
조주가 말했다.
“무엇 하러 왔는가?”
노파가 말했다.
“여기서 좀 묵으려 합니다.”
조주가 말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者裡是什麼所在)?”
노파가 깔깔대고 크게 웃으며 가버렸다(婆呵呵大咲而去).

-우바이지, 조주어록

조주 선사가 살았던 당시 마음공부가 많이 대중화되었던 모양입니다.

선사가 오래 살아서 사람을 만나는 인연이 많아 이런 사례가 많은 수도 있지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여성들과도 자연스럽게 법담을 나눌 정도면 당시 선이 대중의

삶 속으로 많이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해 질 무렵 관음원으로 왔습니다. 선사가 늦은 시간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당당하게 이 절에서 하룻밤 묵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사는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조주 선사의 문답은 중의적입니다.

앞에 조주의 죽순을 훔치려는 할머니에게는 ‘죽순의 주인인 조주를 만나면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물었고, 들에서 홀로 일을 하는 할머니에게는 ‘사나운 호랑이를 만나면 어찌하려느냐’고

물었고, 저녁에 비구들이 기거하는 절에 여인 홀로 와서 묵으려 한다는 할머니를 보고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들으면 열 중 아홉은 생각 따라, 감정 따라, 습관 따라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주 선사는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함정일 수밖에 없는 이런 일상적인

언어로 선문답을 합니다.

그의 방편어가 일상적이고 소박하면서도 분별을 잘 따라가게 하는 교묘함이 있습니다.

분별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감정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기 일쑤입니다.

 ‘늦은 시간에 아녀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잠을 자려고 하느냐?’ 조주와 할머니의

대화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리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그의 반응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크게 깔깔대며 웃고는 가버립니다.

조주를 한 방 먹인 것인가요? 아니면 조주의 말에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것을 보아서

그런 것인가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조주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닙니다. 이 모든 광경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당나라 말기 조주의 관음원을 들락거리고 있고,

조주와 할머니들의 대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오직 이 한 사람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조주 선사가 쉽고 편안한 언어로 줄곧 말하는 것은 어떤 법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람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름 모를 눈밝은 할머니들이 길에서, 밭에서, 아니면 문 앞에서 본 것은 바로 이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시대를 초월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몸통도 없지만 모든 일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단 1mm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사람, 이 눈으로 세상을 그렸고, 이 눈이 세상의 소리를 모두 보았고,

이 눈이 이 세계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이 눈이 조주의 눈이고, 할머니의 눈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조주와 할머니가 한 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애절한 노래 2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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